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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튤립

Bawoo 2016. 1. 26. 00:25

1637년 1월까지 네덜란드에서 튤립은 황금보다 비싼 '신의 꽃'이었다. 튤립 한 뿌리만 있으면 살찐 소 4마리, 밀 27톤을 살 수 있었다.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착각에 투자자들은 열광했다. 집과 토지를 파는 것도 모자라 은행에서 대출까지 받아 튤립을 사들였다. 그런데 그해 2월 갑자기 가격이 폭락하기 시작했다. 환상에서 깨어난 투자자들은 패닉에 빠졌다. 넉 달 만에 가격이 95%나 떨어졌고 파산자가 넘쳐났다. 네덜란드 정부는 매매가격의 3.5%만 지급하면 모든 채권과 채무를 정리할 수 있도록 하는 비상수단을 동원해 겨우 사태를 진정시켰지만 이미 국민과 국가는 거덜 난 뒤였다. 

역사상 최악의 투기로 기록된 '튤립 버블'. 이 광기를 키운 것은 품종개량이었다. 더 화려하고 더 귀한 것을 만들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갖가지 시도가 등장했다. '셈페르 아우구스투스(Semper Augustus)'라는 최고급 개량품종은 지금 우리 돈으로 약 6억원에 거래되기도 했다. 품종개량 시도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불가능의 영역인 '검은 튤립'으로까지 넘어갔다. 검은색을 가지려면 가시광선의 모든 파장을 흡수해야 하지만 그런 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검은색처럼 보이는 갈색이 있을 뿐이다. 검은 튤립을 만들기만 한다면 거액을 벌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튤립 버블을 다룬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에서 검은 튤립에 거액의 상금이 걸린 것도, 오늘까지 현실에는 없는 완벽한 꽃에 대한 시도가 끊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홍콩달러를 둘러싸고 중국 및 홍콩 당국과 국제 핫머니의 전쟁이 치열하다. 홍콩의 달러 페그제는 핫머니의 입장에서는 현실과 괴리된 '검은 튤립'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의 사태는 홍콩 시장을 놓고 벌이는 정치권력과 시장 권력의 한 치의 양보 없는 대결이다. 홍콩 당국이 '검은 튤립'을 지켜낼지 핫머니의 공세에 굴복할지 아직 속단할 수 없다. 단지 불똥이 우리에게 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서울경제/송영규 논설위원] 

[관련 자료 보기 -blog.naver.com/nscome/10174618759   뫼르소의 블로그]

 

검은 튤립삼총사』,『몬테크리스토 백작』으로 유명한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의 또 하나의 대표작 『검은 튤립』. 아름다운 튤립을 선발하는 대회와 가장 완벽한 '검은 튤립'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탐욕과 음모, 그리고 고난과 사랑을 그려냈다. 활기찬 대화, 생동감 넘치는 인물들, 험난한 사랑, 음모와 배신과 계략 등 뒤마적 주제가 집약되어 있다. 유복한 집안의 청년인 판 바에를르는 당시 네덜란드에서 크게 유행하던 튤립을 지배하는 일에 매달린다. '검은 튤립'을 만들어내는 자에게 상금 10만 플로린이 걸리고, 판 바에를르는 완벽하고 아름다운 튤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질투에 사로잡힌 라이벌 복스텔이 그를 고발하는데….

 

알렉상드르 뒤마

저서(총 52권)
알렉상드르 뒤마삼총사』, 『몽테크리스토 백작』으로 잘 알려진 19세기 프랑스 극작가이자 소설가다. 뒤마는 1802년 7월 24일, 빌레르코트레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1806년 나폴레옹 군의 장군이었던 뒤마의 아버지가 죽자, 뒤마의 가족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어린 뒤마는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로빈슨 크루소』나『아라비안 나이트』와 같은 작품을 읽으며 읽고 쓰는 능력을 길러나갔다. 성인이 된 뒤마는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파리로 간다. 파리에서 그는 1823년 오를레앙 공작(후에 루이 필리프 왕) 가문에서 서류 작성하는 일을 얻게 되지만 곧 연극계로 뛰어들었다.1820년대 말에서 1830년대 초는 패기 넘치는 젊은 뒤마에게 작가로서의 장래를 보장해 준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그는 1828년에 화려한 문체로 프랑스 문예 부흥을 묘사한『앙리 3세와 그의 조정Henri Ⅲ et sa cour』을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시간, 장소, 행동의 3일치라는 고전주의 규칙을 무시하고 운문이 아닌 산문으로 씌어진 전형적인 낭만주의 작품이었다. 1929년 이 작품의 공연은 첫날부터 대성황을 이루었다. 뒤마를 후원한 루이 필립은 매우 흡족해했으며 한때는 극단적인 왕당파였던 빅토르 위고도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작가로서의 뒤마의 출발은 성공적이었다. 이후 20여 년 동안 뒤마는 위고, 비니Vigny와 더불어 가장 인기 있는 극작가로 활약했다.한편 1820년대에는 많은 잡지가 창간되면서 문예란에 연재소설이 등장하였다. 뒤마는 연재소설에 매력을 느껴 차츰 극작품보다는 소설, 특히 역사소설을 더 많이 쓰기 시작했다. 그는 일만큼이나 삶의 자극에 탐닉했다. 평범한 일상생활의 권태를 모면하기 위해 그는 연애, 음식, 잠, 쾌락, 여가, 운동 등 여러 방면의 자극을 원했다.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