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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화가]가와나베 교사이[Kawanabe Gyosai , 河鍋曉齋]

Bawoo 2016. 2. 7. 15:42

가와나베 교사이[Kawanabe Gyosai , 河鍋曉齋]
[1831~1889]

쇼조 교사이[惺惺曉齋]라고도 함. 우키요에[浮世繪]의 마지막 거장인 우타가와 구니요시[歌川國芳]로부터 잠시 그림을 배운 뒤, 가노 도하쿠[狩野洞白] 문하에서 예술가로서의 수련을 쌓았다. 그러나 곧 가노파[狩野派]의 형식적인 전통에서 벗어나 통속적인 화파(畵派)의 훨씬 자유로운 화풍을 받아들였다.

그는 대상을 묘사할 때 몇 개의 절묘한 선으로 순간적인 움직임이나 생기를 능란하게 전달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러한 화풍은 거장 가쓰시카호쿠사이[葛飾北齋]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1868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로는 풍자화가로 명성을 얻었고 몇 번 투옥되기도 했지만 계속해서 자신의 견해를 담은 풍자화를 그려 대중적으로 크게 인기를 얻었다. 〈교사이가단 曉齋畵談〉·〈교사이만가 曉齋漫畵〉 등의 화집과, 매를 그린 5권의 작품집을 출판하였다.

 

추악한 마귀나 새·물고기·파충류 등 동물을 그린 그림에는 그의 독창성과 유머가 잘 나타나 있다. 술을 무척 좋아해서 그의 걸작들은 취한 채로 그린 것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그림에는 쇼조 교사이(惺惺은 '술고래'라는 뜻)라고 서명하고 있다.[다음백과]

Renjishi (連獅子), or "Dance of a Pair of Lions", by Kyōsai.

Renjishi is a famous dance in the Kabuki theatre.

 

 

 

Bake-Bake Gakkō (化々學校), or "School for Spooks", by Kyōsai. In August 1872,

the Meiji government decided to implement a system of compulsory education.

In this caricature, both demons (above) and kappa (center) are learning vocabulary

concerning their daily life. The former are taught by Shōki the demon queller,

dressed in western-style uniform. Some goblins try to enter the school (below),

but are blown away by the Wind God 

 

일본의 19세기 목판화에 다양한 인물이 묘사돼 있다. 오른편 위로 털북숭이 인물의 머리털을 자르고 있고, 왼편에는 저울 아래로 문서가 불타고 있다. 조금 더 내려오면 초록색과 빨간색 괴물들을 사람들이 둘러싸고 뿔을 뽑거나 잘라내기도 하고 옷을 강제로 입히기도 한다. 거울을 보면서 망연자실한 괴물들도 있다. 이 그림은 무엇을 묘사하고 있을까? 화가는 어떤 역사적 현실을 반영해 이 그림을 그렸을까?

그림 1 가와나베 교사이, 39교사이낙화(曉齋樂畵)39, 1874년. 일본이 큰 변화에 휩싸여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림 1은 일본의 전통적 니시키에(錦繪)다. 니시키에는 목판으로 프린팅한 에도 시대의 다색 그림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17세기부터 일본에서 목판화인 우키요에(浮世繪)가 발달했는데, 1760년대부터는 색깔별로 목판을 따로 만들어 순차적으로 찍어내는 방식인 니시키에가 인기를 끌었다. 이런 목판화는 메이지 시대(1868~1913)에 크게 유행했다. 작품들은 풍속화가 많은데, 특히 해외에서 들어온 새로운 물품과 패션, 철도와 같은 교통수단 등이 단골 소재가 되었다.

 


이 작품을 제작한 이는 가와나베 교사이(河鍋曉齋)다. 그는 전통 일본화를 공부했지만 점차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화풍을 지향했다. 격식을 무시하고 과장된 표현을 섞은 캐리커처에서 그는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일본 문화사를 통해 특징적으로 발달한 ‘망가(漫畵)’의 선구자였다고 볼 만하다.
그림 1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림이 묘사하는 것은 지옥이다. 털북숭이 인물은 다름 아닌 염라대왕인데, 난처한 표정을 한 채 머리털이 잘리고 있다. 그 앞으로 염라대왕이 벗어놓은 붉은색 도포를 집어 드는 이가 있고, 반대쪽에는 서양식 옷차림을 한 노파가 염라대왕을 위해 양복과 신사 모자를 들고 이발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서 있다.

 


[흑선, 함포사격으로 무력 시위]
왼편의 저울은 저승에 온 자가 생전에 지은 죄의 무게를 재는 도구이며, 그 아래에서 불타고 있는 문서들은 죄상을 기록한 자료다. 괴물들은 염라대왕을 보좌하는 역할을 했을 텐데, 이제는 뿔을 제거당하고 있고 염라대왕과 마찬가지로 전통 복장 대신에 서양 옷을 강제로 착용당하고 있다. 괴물들 가운데 일부는 거울을 들여다보는데, 뿔 잘린 볼품없는 자신들의 얼굴만 확인할 뿐이다. 죽은 자의 생전 행동을 보여주는 업경(業鏡)으로 몸뚱이조차 양복에 가려져 거울에 비치지 않는다.

 


화가는 지옥도를 희화화함으로써 자신이 살던 시대를 풍자하고 있다. 때는 메이지 유신 이후 국가가 서구화를 빠르게 추진하던 시절이었다. 전통적 풍습을 서구에서 도입한 새 풍습으로 교체하는 제도들이 우후죽순 마련됐다. 예를 들어 1871년에는 앞머리를 밀고 후두부에 상투를 트는 존마게(丁<9AF7>)라는 전통적 머리 모양이 금지됐다. 1876년에는 군인과 경찰을 제외하고는 검을 차고 다니는 것이 불법화됐다. 그림 1은 서구화라는 급류에 휩쓸린 일본 사회를 비유했다. 뿌리 깊은 전통적 가치가 하루아침에 버려지는 상황, 그리하여 본연의 몸체와 기록이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되는 상황을 화가는 조롱하고 있다. 화가가 당시의 변화 자체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반세계화’주의자였는지, 아니면 다만 변화와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본 ‘대안 세계화주의자’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당시 일본이 얼마나 급속한 전환기를 겪고 있었는지를 그림 1이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은 분명하다. [책 -비주얼 경제사에서 발췌]
그림 2 39흑선 두루마리(black ship scroll)39에 수록 된 페리 제독의 초상, 185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