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본사(일본어: 大日本史, だいにほんし 다이니혼시[*])는 일본의 역사서 중 하나이다. 에도시대에 고산케(御三家) 중 하나인 미토 도쿠가와 가(水戸徳川家) 당주 도쿠가와 미쓰쿠니(徳川光圀)에 의해 편찬이 개시되었고, 미쓰쿠니 사후에도 미토 번(水戸藩)의 사업으로 계속되어 메이지 시대에 완성되었다.
진무 천황(神武天皇)부터 고코마쓰 천황(後小松天皇)까지(엄밀히는 남북조가 통일된 1392년(겐추(元中) 9년/메이토쿠(明徳) 3년)까지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의 100대 천황의 치세를 다루었다. 기전체의 사서로서, 본기(제왕) 73권, 열전(후비・황자・황녀를 가장 처음에 두고, 군신은 대략 연대순으로 배열하였으며, 역신(逆臣)전・효자전이라는 분류도 볼 수 있다) 170권, 지(志)・표(表) 154권으로 전 397권 226책(목록 5권)이다.
「대일본사」라는 이름은 미쓰쿠니가 죽은 뒤 쇼토쿠(正徳) 5년(1715년)에 번주 도쿠가와 쓰나에다(徳川綱條)가 지었고, 그 이전에는 「본조사기(本朝史記)」나「국사(國史(왜사, 倭史))」라 불리었다. 질 높은 한문체로 쓰여졌고, 기사에는 출전을 명시하였으며 고증에도 주의를 기울인 흔적이 보인다.
개요
『의공행실』(義公行實) 등 각종 전기사료에 의하면 미토 도쿠가와 가문의 세자(世子)로서 교육을 받은 청년기의 미쓰쿠니는 비행도 많이 저질렀지만, 쇼호(正保) 2년(1645년)에 『사기』, 「백이(伯夷)전」을 읽고 백이・숙제의 고사에 감명을 받아서 이후 자신의 비행을 반성하고 학문에 정진하여 사서 편찬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 세자 시대인 메이와(明和) 3년(1656년)에는 메이레키 대화재(明曆の大火)로 고이시카와(小石川) 번저(藩邸)가 소실되자 고마고메(駒込)의 별저(別邸)로 옮겨, 여기에 사국(史局)을 설치하고 편찬사업을 개시하였다. 사국 건물은 처음에 다옥(茶屋)을 이용하였고, 후에 다른 곳으로 옮겨 문고를 설치하였다.
일본에서는 『일본서기』를 위시한 육국사 등의 사서는 편년체로 편찬된 것이 일반적이었고, 『사기』와 같은 기전체의 사서가 편찬된 선례가 없었으므로, 사관원(史館員)의 반대 의견도 있었다고 한다. 편수 사업의 동기로는, 막부의 사서 편찬이 행해지고 있었으나 메이레키 대화재로 그 자료가 망실된 것이나, 하야시 라잔(林羅山)의 죽음 등이 계기가 되었다고 추정된다.
그 후 미쓰쿠니는 아버지 요리후사(頼房)의 죽음으로 인해 가업을 상속하였고, 공무 수행으로 인해 바빠지는 바람에 편수 사업으로부터는 멀어지게 되었지만, 한편으로 막부에서는 간분(寛文) 2년(1662년)에 하야시 가호(林鵞峰)에게 명해 편년체의 사서 『본조통감(本朝通鑑)』의 편찬을 개시하였고, 미쓰쿠니는 하야시 가보를 번저에 초대하여 면담하며, 편찬 방침이나 정통성 문제에 대해 질의하였다. 간분 12년에는 편찬 사업을 본격화하였고, 고마고메 별저(駒込別邸)의 사관(史館)을 고이시카와 본저(小石川 本邸)로 이전하여「쇼코칸(창고관, 彰考館)」이라 개칭했다. 사관원의 수도 늘리고, 멀리 떨어진 지방까지 파견하여 사료수집을 행하였으며 특히 일본 남북조 시대의 남조에 관련된 사료를 폭넓게 수집하였다.
미쓰쿠니는 일본에 망명한, 명왕조의 유신(遺臣)이었던 주순수(朱舜水)를 초빙하여 역사의 정통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남북조 시대의 남조 측 무장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의 충성심을 다루는 데에 주순수에게 영향을 받았다. 또한, 기타바타케 지카후사(北畠親房)의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의 영향을 받아, 하야시 라잔 부자가 집필하였던 역사서 『본조통감』의 초고에, 야마토 민족(大和民族, 일본인)이 "오(呉)의 태백(太伯)의 후예이다"라는 기술을 발견하고 분개하였다고 한다.
엔포(延宝) 4년(1676년) 6월에는 진무천황에서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까지의 본기가 정서(清書)되었고, 덴나(天和) 연간에는 『신찬기전(新撰紀伝)』 104권으로 완성하였지만, 미쓰쿠니는 남북조가 통일된
고카메야마 천황(後亀山天皇) 시대까지를 다룰 필요성과 내용상의 부족함을 느껴, 동년에는 쇼코칸(彰孝館)에 총재(総裁)를 두어 기구를 개혁했고, 신관(新館)을 축조하고 사관원을 증원시켰으며, 국사 이외에도 시문집 등의 편찬 사업이 확대되었다. 미쓰쿠니는 겐로쿠(元禄) 3년(1690년)에 세이잔소(西山荘)에 은거하였고, 국사 이외의 각종 사업을 정지하고 본 역사서의 완성을 촉진시켰다. 겐로쿠 10년에는 「백왕본기(百王本紀)」로서 완성시켰다.
쇼토쿠 5년(1715년)에는 책 이름을 둘러싸고 미토 측이 주장하는 『황조신사(皇朝新史)』와 에도 측의 『대일본사』 사이에 논쟁이 발생하였으나 후자로 결정되었고, 동년의 미쓰쿠니 제삿날에는 정서본(清書本, 또는 쇼토쿠본)이 미쓰쿠니 사당에 바쳐졌다. 또, 교호(享保) 5년에는 수정이 첨가된 교호본(享保本)이 막부에 바쳐졌다. 겐분(元文) 2년(1737년)에 미쓰쿠니 사후의 사업을 주도해왔던 아사카 단파쿠(安積澹泊)가 사망하여 사업은 중지되었다.
에도 후기에는 쇼코칸 총재 다치하라 스이켄(立原翠軒)에 의해, 간세이(寛政) 11년(1799년)의 미쓰쿠니 100년 기일에 간행할 것을 목표로 한 교정 작업이 진척되었다. 또, 책 제목으로 일본이라는 국호를 붙이는 것과 논찬(論賛)을 제시하는 것에 대해 다치하라와 사관원 후지타 유코쿠(藤田幽谷)의 사이에 대립이 발생하여, 막부 측과 미토 측의 당파적 대립으로 발전하였다. (사관동요, 史館動揺) 메이지 39년(1906년)에 10대 번주 요시아쓰(慶篤)의 손자였던 도쿠가와 구니유키(徳川圀順)가 완성하기까지, 실로 250년 간의 세월을 필요로 하였다(다만, 본기・열전은 미쓰쿠니 생존 시에 거의 완성되었고, 막말(幕末) 이후, 몇 차례 간행되기도 하였다).
초고 등은 쇼코칸 도쿠가와 박물관(彰考館徳川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특색
다음의 점을 3대 특색이라 한다.
- 진구황후(神功皇后)를 제위에서 삭제.
- 오토모 황자(大友皇子)를 제위에 포함.
- 남조(南朝) 정통론을 주장함.
전체적으로 주자학에 근거를 둔 미토학(水戸学)의 역사관이 배어 있고, 존왕론이라는 일본적 형태의 대의명분론이 관철되고 있다.
막말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역대 천황의 계보가 현재의 형태로 개편된 것도 『대일본사』의 영향이라 한다.
역사학자 구메 구니타케(久米邦武)는 『일본외사(日本外史)』와 함께 '극본(劇本)의 일종'라 혹평하고 있다.
참고문헌
관련항목
- 존왕양이/양이론
- 미토학(水戸学)
- 대일본야사(大日本野史)
- 남북조 시대 (일본)
바깥 고리
- 大日本史(그림 데이터)
- 大日本史(텍스트 데이터・번체중국어)[이상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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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 전기의 학자이자 미토(水戶) 번의 영주인 도쿠가와 미쓰쿠니(1628~1701)가 편저한 『남조(南朝) 정통론』에 기초를 둔 역사서이다. 1657년부터 1906년까지 약 250년이라는 오랜 세월에 걸쳐 완성되었으며, 본문 397권에 목록 5권을 합쳐 모두 402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저서이다. 또한 본기(本紀) · 열전(列傳) · 지(志) · 표(表) 등 네 부분으로 구성된 일본 최초의 기전체 역사서이기도 하다.
일본 최초의 기전체 역사서
미토 번의 제2대 영주인 도쿠가와 미쓰쿠니가 편찬한 『대일본사』는 에도 시대 초기에 막부의 명으로 하야시(林) 집안에서 편찬한 『본조통감(本朝通鑑)』과 나란히 근세에 이루어진 2대 역사 편찬 사업으로 손꼽힌다. 『본조통감』이 편년체로 서술된 역사서인 점에 비추어 『대일본사』는 기전체로 서술된 일본 최초의 역사서이다. 그만큼 내용의 구상과 집필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먼저 『대일본사』가 어떠한 방침 아래 서술되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 서문을 살펴보는 것이 좋다. 아래의 문장은 서문의 한 구절이다.
역사는 일어난 일을 기록하는 것이다. 일에 따라 바르게 적으면 일의 권선징악이 절로 드러나고, 먼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는 풍속의 순요(醇澆)와 정권의 융성 및 쇠망을 마치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 수 있다. 선을 법으로 삼아야 하며, 악은 삼가야 할 가르침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난신적자(亂臣賊子, 나라를 어지럽게 하는 신하와 어버이를 해치는 자식)의 무리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하고, 또 그로 인해 세상의 가르침을 돕고 올바른 도리를 유지하고자 한다.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대일본사』는 사실의 기록을 가장 중시했다. 이를 위해 이 책의 편찬을 시작한 도쿠가와 미쓰쿠니는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 가신들이기도 한 편찬자를 전국에 파견해 사료를 조사하고 수집하게 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는 본문에 그 출전을 명기한, 이른바 일본 최초의 체계적인 역사서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한편, 일어난 일을 명백히 밝히면 선은 번영하고 악은 절멸한다는 이치가 자연히 드러나므로 난신적자의 무리에게 두려움을 갖게 하고 또 반성케 하니 사서를 편찬하는 일은 세상을 바르게 만드는 일이며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는 일이라고도 했다.
곧 『대일본사』는 윤리와 도덕을 직접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지만 과거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바르게 적음으로써 미래에 교훈을 남기고자 한 것이다. 그러한 의도는 미쓰쿠니가 편찬 작업을 담당한 곳을 ‘옛일을 현창(顯彰)한다’는 의미에서 쇼코칸(彰考館)이라고 이름 지은 의도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창고’는 중국의 고전에 나오는 말인 ‘창왕고래(彰往考來)’, 다시 말해 과거를 분명히 밝혀 미래를 생각한다는 말에서 따온 것으로, 역사 편찬의 목적을 잘 드러낸 이름이다.
기존의 역사관을 뒤엎는 접근과 구성
미쓰쿠니의 이와 같은 취지가 『대일본사』에 어떻게 구체화되었는지를 살펴보려면 책의 구성을 알아야 한다.
이 책이 일본 최초의 기전체 사서라는 점은 앞서 밝혔다. 기전체란 본기 · 열전 · 지 · 표의 4가지 부문으로 구성되는 체재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책의 중심은 본기와 열전이다. 본기는 진무(神武) 천황(재위 BC 660~BC 585)부터 시작해 100대째인 고코마쓰(後小松) 천황(재위 1392~1412)에 이르는 천황의 세기(世紀)에 관한 역사이다. 그 가운데 ‘3대 특필’이라고 불리는 대목이 있는데, 이 부분의 역사 서술에 『대일본사』의 특징이 집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대 특필이란, 첫째는 그때까지 여제로 여겨져 온 진구(神功) 황후를 천황의 역사를 다룬 본기에 넣지 않고 열전 속의 후비전(后妃傳)에 넣은 것이다. 두 번째는 제38대 덴치(天智) 천황(626~672)의 황자인 오토모(大友, 재위 672년 1월~672년 8월)가 덴치 천황의 동생인 덴무(天武) 천황(재위 673~686)보다 앞서 즉위한 사실을 분명히 밝히며 제39대 오토모 천황[훗날 고분(弘文) 천황으로 즉위]을 본기 속에 넣은 점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남북조 시대의 정통을 남조라고 주장하면서 고다이고 천황 이래 4대에 걸쳐 요시노(吉野)에 있었던 천황들을 본기에서 거론하고, 당시 교토에 있었던 북조의 천자는 북조 출신의 고코마쓰 천황을 다룬 기사의 첫머리에 천황이라 칭하지 않고 고겐인(光嚴院)이라고 칭해 5대의 역사를 서술한 점이다.
『대일본사』를 편찬한 미쓰쿠니는 자신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는 『바이리(梅里) 선생 비문』에서 “왕가의 정통을 가리고 신하 된 자로서의 시시비비를 헤아려 한데 모아 일가의 책으로 꾸몄다”라고 밝혔는데, 여기서 왕가의 정통을 가렸다는 것은 특히 세 번째로 거론한 남조 정통론을 가리킨 것이다. 이를 통해 미쓰쿠니 자신도 3대 특필 가운데 남조 정통론을 가장 중요한 사항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당시는 북조가 정통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그러한 시대에 남조 정통론을 주장한 것은 이 같은 통설에 대한 반박이자 세속에 대한 반역이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역사 인식이었다. 그 결과 그때까지 역신으로 여겨져 온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는 충신이 되었다. 그리고 사서 편찬 담당자인 사사스케 사부로(佐佐介三郞)를 멀리 마사시게가 자결한 미나토(湊) 강으로 보내 ‘오호 충신 구스노코의 묘(嗚呼楠子之墓)’라고 새긴 비를 세우게 한 것 역시 ‘사실’에 기초해 역사를 바로잡자는 미쓰쿠니의 발상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북조 출신 천황의 시대였으므로 미쓰쿠니의 새로운 견해는 쉽게 공인되지 않았다. 대체로 남조 정통론과 구스노키 마사시게 충신론은 막부 시대 말기에 접어들어서야 반(反)막부적 입장을 취한 개혁파와 존왕양이파(尊王攘夷派)의 활동가들 사이에서 지지를 얻는 정도였다.
미쓰쿠니의 견해가 일반화된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 1901년 국정 일본 역사 교과서가 ‘남북조’ 장을 ‘요시노(吉野) 조정’이라고 고친 뒤의 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메이지 시대로 되돌아가 남북 양조를 나란히 놓는 사고방식이 팽배해졌다.
본기와 함께 『대일본사』의 중심을 이루는 열전에는 시대별로 후비(后妃)와 황자, 황녀, 제신(諸臣), 쇼군, 쇼군 가족, 쇼군의 가신, 문학인, 가인, 효자, 의열, 열녀, 은자, 의술, 반신(叛臣), 역신(逆臣), 제번(諸蕃, 여러 외국 또는 고대 시대에 일본으로 건너온 사람들의 자손의 성씨)이라는 분류에 따라 각각의 전이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분류 방법과 순서에도 이 책의 특징이 드러난다. 『대일본사』의 특징인 “신하 된 자로서의 시시비비를 헤아렸다”라는 대목은 바로 이 열전을 두고 한 말이다.
이에 따라 구스노키 일족과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 등을 비롯해 남조를 위해 헌신한 인물들 그리고 조큐(承久)의 변(變) 때 활약한 충신과 와케노기요마로(和氣淸麻呂) 등은 「제신전」에 넣었고, 기요마로에 의해 흉악무도함이 드러난 승려 도경(道鏡)과 조정에 반기를 든 다이라노 마사카도(平將門), 후지와라노 스미토모(藤原純友) 등 19명은 「반신전」에서 다루었다. 또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각주[1] 일족은 「역신전」에서 다룸으로써 그 의도를 분명히 밝혔다. 인신, 곧 신하 되는 자가 행한 행동의 시비를 정확히 평가해 그에 따라 각 전으로 분류한 것이다.
다음은 신하 가운데 가장 나쁜 것으로 치는 「역신전」 서론의 일부이다.
군주를 참살하고 군주를 배신하는 것은 모든 백성과 신하가 분개하는 바이므로 하늘과 땅에 그 몸을 가릴 곳이 없다. 한번 반역 죄인이 되면 사람들은 그를 죽여서 그 죄를 벌한다. (···) 다른 나라의 역사를 보면 신하가 군주를 시해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 천조(天朝, 일본)는 대업이 크게 빛나고, 풍속(風俗)이 순박하고 우미하며, 2000년간 한 번도 큰 잘못이 없었다. 더욱이 반역을 한 자는 미와(眉輪) 왕과 소가노 우마코 두 사람뿐이었다.
성스러운 신의 자손과 태양이 조석으로 빛을 발하지 않음이 있으랴. 덧붙여 미와 왕은 「황자전」에 실었다. 일에 의거해 바르게 적으면 정실(精實)이 자연히 드러날 것이다.
이 글에서도 신하 된 자의 시시비비를 가리고 있음이 엿보인다.
『대일본사』는 일본 전국에서 사료를 수집해 사실의 정확성을 기하고 본문에 출전을 밝혔다는 점에서 근대 역사학의 선구라고 할 만한 실증적 방법을 택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애초부터 인물에 대한 판단을 선악의 틀 속에서 행함으로써 과학적인 방법과는 정반대인 명분주의에 따르고 있다는 모순도 안고 있다. 이는 봉건 시대의 역사학이 지닌 한계이기도 했다.
그러나 본기와 열전과는 달리 메이지 시대에 완성된 지(志)와 표(表)는 시대를 반영했기 때문인지 오늘날에도 참고할 내용이 많다. 지는 신기(神祇) · 씨족 · 직관(職官) · 국도(國都) · 식화(食貨) · 예악 · 병법 · 형법 · 음양 · 불사(佛事) 등 10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지란 이른바 문화와 종교사, 사회경제사, 제도사(制渡史)이다. 일례로 「식화지(食貨志)」의 서론을 살펴보자.
국가는 백성을 근본으로 하며, 정치는 백성을 양육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식(食)으로써 백성의 삶을 두텁게 하며 재화로써 백성의 쓰임을 이롭게 한다. 그러한 연후에 바른 덕의 가르침을 베풀어 상생상양(相生相養)의 도를 알게 한다.
(···) 엔키(延喜) 때부터 이미 토지 제도[전제(田制)]가 무너지면서 호족과 힘센 자들이 앞을 다투어 국토를 약탈하고, 권세 있는 자와 귀족이 결탁해 그들을 앞세워 장원을 만들었다. 그래서 마침내 천하에 다스려지지 않는 땅이 공전(公田)보다 많아졌으며, 호적이 없는 자들이 공민보다 많아졌다.
(···) 겐무(建武) 때의 중흥은 그저 집과 흙을 뒤집어엎은 것에 불과하다. 곧, 편안함을 일삼아 그 계획이 시행하고자 한 바는 이루지 못하고 소란스럽기만 한 악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그로써 이미 사람들의 마음을 다스릴 수 없게 되었고, 토지에 대한 권한 역시 그와 함께 사라져 이를 회복하고자 한 사업은 끝을 맺지 못했다.
「식화지」에는 호구(戶口)와 토지 제도, 부역, 봉록, 화폐, 도량권형(度量權衡), 장원보명(莊園保名) 등과 같은 여러 항목을 수록하고 있다.
표는 각종 연표를 가리키는 것으로, 『대일본사』에는 신련이조표(臣連二造表), 공경표(公卿表), 국군사표(國郡司表), 장인검비견사표(藏人檢非遣使表), 장군요속표(將軍僚屬表) 등 5가지 표가 있다. 이러한 내용 역시 남북이 하나로 다시 합쳐진 고코마쓰 천황 때까지만을 다루었다.
『대일본사』 편찬 사업은 도쿠가와 미쓰쿠니가 미토 번 제2대 번주가 되기 4년 전인 1657년에 에도의 고마이리(駒込)에 있던 미토 번의 저택 중 하나인 나카야시키(中屋敷, 현재의 도쿄 대학 농학부 부근)에 사서 편찬국[사국(史局)]을 설치한 때부터 시작해 메이지 39년(1906)에 완성하기까지 약 25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사국은 그 후 미토 번의 본가가 있던 고이시카와[小石川, 현재 고라쿠엔(後樂園) 야구장이 있는 부근 일대]로 옮겨져 쇼코칸(彰考館)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미쓰쿠니가 은퇴하고 미토 번 내 후토타(太田)의 세이잔 장(西山莊)에 칩거하게 된 뒤로 사국은 미토 성안과 에도 두 군데로 나뉘어 각각 스이칸(水館), 고칸(江館)으로 불렸다. 미쓰쿠니가 죽은 뒤 『대일본사』 편찬 작업은 미토와 에도의 쇼코칸에 근무하던 총재 이하 관원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그러나 미토 번의 제9대 번주인 도쿠가와 나리아키(齋昭)의 시대가 되자 쇼코칸이 작업의 중심이 되었고, 관원의 학자들 역시 대부분이 미토 번 출신자들로 메워졌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실시된 폐번치현(廢藩置縣, 지방의 번을 폐지하고 현을 두는 행정 체제의 개편)으로 쇼코칸은 메이지 5년부터 11년까지(1872~1878) 폐쇄되었다. 그러나 옛 미토 번 출신 사학자 구리타 히로시(栗田寬)의 혼신의 노력으로 1879년부터 미토의 도쿠가와 가문에 의해 편찬 작업은 재개되었고 표와 지에 대한 교정 출판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1906년에 본문 397권과 목록 5권을 합쳐 모두 합계 402권이나 되는 대규모 사서가 마침내 완성되었고, 목판 인쇄 작업도 계속 이어졌다.
본기와 열전은 제9대 번주인 나리아키 시대에 이르러서야 교정 작업이 진척을 보여 1852년 목판 인쇄가 이루어졌고, 그 일부는 각각 조정과 막부에 헌상되었다.
‘대일본사’라는 제목은 편찬 사업을 시작한 미쓰쿠니가 생전에 정한 것이 아니다. 당시에는 단순히 ‘기전(紀傳)’으로 불렸으며, 그 밖에 ‘본조사기(本朝史記)’, ‘왜사’, ‘국사’, ‘사편’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본조사기’라는 책 이름은 젊은 시절부터 중국의 역사서 『사기』에 심취했던 미쓰쿠니가 그 체제를 따라 일본의 역사서를 편찬하려 했음을 나타내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대일본사’라는 제목이 결정된 것은 미쓰쿠니가 죽은 뒤, 기전(紀傳) 원고가 탈고되기 전인 1715년 4월의 일로, 이때까지만 해도 미토 번의 쇼코칸에서는 ‘황조신사(皇朝新史)’라는 제목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의견 대립이 있었다.
‘미토 번의 만년사(萬年史)’라는 비아냥이 나올 정도로 『대일본사』 편찬 작업이 오래 걸린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젊은 미쓰쿠니의 열정이 이루어낸 기전체로 집필한 일본 역사서라는 전례 없는 작업이었다는 점이다. 다음은 애초에 몇 년 안에 완성한다는 계획 없이 그저 상부의 지시에 따르는 작업 방식이었다는 점이다. 그뿐만 아니라 미쓰쿠니가 죽은 뒤 발생한 재정난과 재능 있는 역사학자의 부족으로 수십 년간 작업이 중단되었고, 막부 말기에는 미토 번의 당쟁이 격화됨에 따라 번 자체가 내란 상태에 빠져 지와 표의 편찬 작업이 전혀 진행되지 못하기도 했다.
『대일본사』 전권이 일반인들이 접하기 쉬운 형태로 출판된 것은 1929년 고단샤 출판사에서 펴낸 전 17권과 1941년에 건국기념사업회가 간행한 『역주 대일본사』 전 12권이 나온 뒤부터이다.
[출처:절대지식 일본 고전 - 대일본사 (도쿠가와 미쓰쿠니) [大日本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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