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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공국 극작가]카를로 골도니

Bawoo 2016. 2. 27. 00:58

카를로 골도니

카를로 골도니

 

카를로 골도니(Carlo Osvaldo Goldoni , 1707년 2월 25일 ~ 1793년 2월 6일)는 이탈리아극작가이다.

생애편집

베네치아에서 출생하였다. 법학부를 졸업했지만 결국 극작 활동에 투신하여 이탈리아어베네치아 방언으로 수다한 희극(喜劇)을 썼다. 그간에 이탈리아 희극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코메디아 델라르테'(극의 큰 줄거리만 써 있을 뿐, 나머지는 배우가 즉흥적으로 대사나 동작을 꾸미는 것)에 대신하여 배우들이 연출할 대사·동작을 자기 자신이 쓰는 형식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동시에 종래의 가면 희극 대신에 현실 세계에 입각한 성격희극(性格喜劇)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 후 극작상의 적대자들의 공격을 받는 바 되어 1762년 파리로 옮겨가 그곳에서 프랑스어희극을 쓰기도 하고 왕실의 이탈리아어 교사를 하기도 하면서 일생을 마치었다.

Monument to Goldoni in Florence (sculpted by Ulisse Cambi)

 

150편에 달하는 극 가운데 대표작으로서는 《골동품상 일가(骨董品商一家)》(1749)와 《거짓말쟁이》(1750), 《커피숍》(1750), 《여관집여주인》(1751), 《부채》(1763) 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 프랑스어로 쓰인 《회상록》(1787)은 그의 일생을 아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이다

Monument to Goldoni in Venice (sculpted by Antonio Dal Zotto)

 

 

Carlo Goldoni - 1750.jpg

 

이탈리아의 기존 극형식인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를 새롭게 바꾸었다. 가면을 쓴 판에 박힌 인물들을 사실적인 인물로 대체시켰고, 느슨한 구성과 반복적인 줄거리를 빈틈없이 짜인 구성으로 바꿨으며, 진부한 내용의 소극을 유쾌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로 새로이 재창조했다. 이러한 혁신 때문에 그는 이탈리아 사실주의 희극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Palazzo Centani birthplace of Goldoni in Venice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골도니는 조숙하여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서재에서 희극을 읽었으며, 1721년에는 리미니에 있는 학교에서 도망쳐 순회공연단에 들어가기도 했다. 파비아에 있는 가톨릭대학에서 다시 공부를 시작한 골도니는 플라우투스·테렌스·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들을 읽었으며, 나중에는 몰리에르의 작품을 읽기 위해 불어를 공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을 귀부인들에 관한 풍자문을 써서 파비아의 기슬리에리대학에서 쫓겨나게 되자 할 수 없이 파비아대학에 들어가 법학을 공부했다. 베네치아(1731~33)와 피사(1744~48)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외교관으로도 일했지만, 그가 진정으로 관심을 쏟은 것은 베네치아의 산 사무엘 극장(Teatro San Samuele)의 연극대본을 쓰는 것이었다.

 

1748년 베네치아 사람으로 배우이자 감독인 지롤라모 메데박이 이끄는 산 안젤로 극장에 희곡을 써주기로 했다. 초기 작품에는 기존 형식과 새 형식이 함께 쓰였지만, 새뮤얼 리처드슨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진지한 희곡 〈파멜라 La Pamela〉(1750 공연)와 같은 작품들에 모두 가면을 쓰지 않은 인물들을 등장시켰다. 1750~51년 극단을 버리려던 후원자들에게 새로 희곡 16편을 써주겠다고 약속하여, 이때 그의 걸작 중 몇 편을 발표하였다. 그중 유명한 작품으로는 베네치아 방언으로 쓴 〈여자들의 잡담 I pettegolezzi delle donne〉, 코메디아 델라르테 형식으로 쓴 〈거짓말쟁이 Il bugiardo〉, 이탈리아의 풍속희극인 〈진정한 친구 Il vero amico〉 등이 있다.

 

1753~62년에는 산 루카 극장(지금의 골도니 극장)의 희곡을 썼고 이때부터 점차 코메디아 델라르테 형식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쓴 주요작품으로는 이탈리아의 풍속희극인 〈주막집의 안주인 La locandiera〉(1753 공연)과 베네치아 방언으로 쓴 훌륭한 두 작품인 〈폭군들 Irusteghi〉(1760 공연)·〈치오가에서의 싸움 Le baruffe Chiozzote〉(1762 공연) 등이 있다. 골도니는 경쟁자였던 극작가 피에트로 키아리를 〈불평분자 Il malcontenti〉(1755 공연)를 써서 풍자했다. 그러자 코메디아 델라르테를 지지하던 카를로 고치는 풍자시를 써서(1757) 골도니를 비난했을 뿐만 아니라,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고전 〈오렌지 3개의 사랑 L’amore delle tre melarance〉(1761 공연)에서 골도니와 키아리 모두를 조롱하였다.

 

Bust of Goldoni, near Notre Dame in Paris

 

1762년 골도니는 이탈리아 극단을 감독하기 위해 베네치아를 떠나 파리로 갔다. 그뒤 불어로 쓴 자신의 모든 작품을 베네치아 관객을 위해 다시 썼다. 불어로 쓴 작품인 〈부채 L’Éventail〉(1763 공연)는 이탈리아어로 다시 씌어져 그의 대표 걸작 중 하나인 〈부채 Il ventaglio〉(1764 공연)가 되었다. 1764년 은퇴하여 베르사유에서 프랑스 공주들에게 이탈리아어를 가르쳤다. 1783년에는 유명한 〈회고록 Mémoires〉(1787)을 프랑스어로 쓰기 시작했다. 프랑스 혁명 뒤에는 연금 지급이 중단되어, 가난 속에서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다.[다음백과]

 

[정보 출처] 책 클래식 시대를 듣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