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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위):사마소에게 모반하려 했다가 실패한 인물]종회(鍾會)

Bawoo 2016. 6. 28. 22:05

 

 

 

 

 

 

        

 

 

 

 

종회(鍾會, 225년 ~ 264년 1월 18일)는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장수로, 사계(士季)이며 예주(豫州)영천군(潁川郡) 장사현(長社縣) 사람이다.

생애

전반

종회는 종요의 아들로서 열심히 학문을 익혀 아는 것이 많았기에 명성을 얻었다. 촉나라에 항복했던 하후패(夏侯霸)는 강유(姜維)에게 종회가 나중에 정권을 잡을 경우 두 나라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관직에 나아간 후 조모(曹髦)에 의해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으며, 학문에 능한 여러 신하들과 함께 조모와 학문을 논의하기도 했다.

 

255년에는 중서시랑(中書侍郞)의 자리에 있었는데, 관구검(毌丘儉)이 사마씨에 대항하여 봉기하자 사마사(司馬師)는 병이 심해졌기 때문에 직접 토벌에 나서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이때 종회는 부하(傅嘏)와 함께 사마사가 직접 나서서 진압할 것을 권고하였다.

관구 검의 봉기가 진압된 지 얼마 안되어 사마사는 죽고 사마소(司馬昭)가 대장군이 되고 종회는 황문시랑(黃門侍郞)에 임명되었는데, 사마소는 종회를 거느리고 다닐 때가 많았다. 이 때문에 종회가 교만해져 이를 경계하는 부하(傅嘏)의 충고를 받았다.

 

257년 제갈탄(諸葛誕)이 사마 소의 야심에 반발해 봉기하자, 종회는 사마소를 따라 제갈 탄과의 전면전에 나섰다. 이때 오나라에서 제갈탄을 도우러 온 전역(全懌)에게 위나라에 항복했던 전역의 조카 전휘(全輝)와 전의(全儀)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내 오나라에서 전역을 죽이려 한다고 전하자 전역은 위나라에 항복했다. 이것은 사마소가 종회의 제안을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제갈탄의 봉기가 진압된 후 사마소는 더욱 종회를 아꼈으며 사례교위(司隸校尉)로 승진시켰다. 주위 사람들은 종회를 유방(劉邦)의 참모 장량(張良)에 비유하였다.

종회는 죽림칠현 중 하나인 혜강(嵆康)을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혜강이 종회를 거만한 태도로 대하자 앙심을 품고 돌아갔다가 262년혜강관구검을 도우려 했다고 모함하여 죽게 만들었다. 그해 사마소가 촉나라를 정벌할 계획을 세우자 조정 신하들은 대부분 성공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으나 종회는 사마소의 의견에 찬동했다. 촉나라 정벌이 확정된 후 진서장군(鎭西將軍)이 되었다.

촉나라 정벌

263년 종회는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촉나라를 공격했는데, 호군 순개(荀愷)에게 한성을, 전장군 이보(李輔)에게 낙성을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양안구로 나아가, 제갈량(諸葛亮)의 묘에 제사지낸 후 양평관(陽平關)을 함락시키고 부첨(傅僉)을 죽였다. 그리고 강유검각(劍閣)으로 이동하는 것을 막지 못한 일을 트집잡아 제갈서의 병사들을 손에 넣을 목적으로 제갈서가 적을 두려워하여 나아가지 않았다고 모함하였다. 결국 제갈서는 벼슬에서 쫓겨나 죄인이 되었고, 종회는 제갈서가 지휘하던 3만 군사까지 거느리게 되었다.

 

종회는 촉나라 정벌 과정에서 허저의 아들인 허의를 부하로 두고 있었는데 종회는 허의에게 도로공사의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허의가 길을 닦는 과정에서 실수하는 바람에 종회의 말이 넘어졌고 분노한 종회는 허의가 위나라 개국공신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참수해 버린다. 이로 인하여 종회에 대한 부하들의 평판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이후 검각으로 진군하여 강유를 공격했으나, 강유가 결사적으로 저항했기 때문에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등애(鄧艾)가 험준한 곳을 거쳐 성도(成都)로 진군하여 유선의 항복을 받았기 때문에, 강유는 종회를 찾아와 항복했다. 종회는 강유를 후하게 대접했으며, 강유를 얻은 것을 매우 기뻐하였다. 종회는 당시 자신의 부하였던 두예(杜預)에게 하후현(夏候玄)과 제갈탄강유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12월,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종회를 사도에 임명하고, 식읍 1만 호를 증가시켰으며 두 아들을 정후로 봉하고 각각 1천 호를 주었다.

반 사마소 봉기

종회는 은밀히 사마소에게 대항할 마음을 품고 있었고, 강유도 촉나라를 부흥시키려고 하였기에 종회를 부추겼다. 이 때문에 종회와 강유는 매우 가까워졌다.

이때 등애익주를 다스리고 오나라를 정벌할 방안을 담은 글을 사마소에게 올렸으나, 사마소는 이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이것을 이용하여 부하 위관(衛瓘)과 함께 등애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모함했다. 종회는 다른 사람의 글씨를 모방하는 것에 뛰어났는데, 등애가 조정과 사마소에게 보내는 글을 가로채고 자신이 등애의 글씨를 모방하여 오만불손한 내용으로 고쳐 보냈다. 그리고 사마소등애에게 보내는 답장을 자신이 만들어서 보내자, 사마소등애를 의심하게 되었다.

 

마침내 264년 1월에 사마소등애를 잡으라는 명령을 내리자, 종회는 위관을 보내어 등애 부자를 잡아들였다. 이로써 유일하게 꺼리던 등애가 제거되자 본격적으로 반 사마소 봉기를 일으키기로 하고 강유를 선봉으로 삼아 야곡(斜谷)으로 가게 했으며, 위수(渭水)와 황하를 거쳐 단시일 내에 낙양을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사마소는 종회 역시 의심했기에 대군을 거느리고 조환(曹奐)과 함께 장안(長安)에 주둔하고 이를 종회에게 알렸다. 종회는 자신의 야심이 간파당한 것을 알았으나 최소한 익주에서 독립할 수 있을 것으로 여기고 부하 관리들을 초청한 다음, 263년 말에 죽은 곽태후(郭太后)가 자신에게 사마소를 제거하라는 밀명을 내렸다고 주장하고 그들을 모두 가두었다. 강유가 위나라에서 온 장수들을 모두 죽이라고 건의했으나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한편 종회에 의해 갇혀 있던 호열(胡烈)이 아들 호연(胡淵)에게 편지를 보내 종회가 자신들을 죽이려 한다고 알리자, 호연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18일 호열의 부하들을 이끌고 종회가 있는 곳으로 공격해 왔다. 결국 종회는 강유와 함께 싸우다 호열의 군사들에게 활에 맞아 죽고 반 사마소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종회의 부하였던 상웅(向雄)이 종회를 장사지냈다.

저술

어머니 장씨의 전을 지었으며, 배송지가 《삼국지》에 주석을 달면서 종회전에 인용한 것이 남아 있다. 《사본론》을 지어 혜강에게 보여주려 했으나, 감히 보여주지 못하고 문 밖 멀리에 던져두고 달아났다.[2]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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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종요

 

* 종회의 난(鍾會之亂): 기원후 264년 음력 1월, 촉한을 멸망시킨 위나라 원정군의 사령관이던 종회가 촉나라 땅을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키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263년 위의 촉 정벌로 촉한가 멸망하자 강유는 아직 민심은 촉한을 떠나지 않은 것을 보고 남은 군사들을 이끌고 264년 촉한을 정벌한 위나라 장수 종회에게 항복한다. 그리고 종회와 친분을 쌓으며 의형제까지 맺는다.

그 사이 촉한을 정벌한 등애는 부하 사찬을 익주 자사로 봉하고 견홍왕기 등에게 각기 주와 군을 다스리게 한다. 하지만 사마소는 이런 등애를 견제하여 종회에게 군사를 일으켜 등애를 잡도록 하고 자신도 직접 군사를 일으킨다.

사마소가 직접 오자 종회는 강유와 상의해 반역을 꾸미고 종회등애와 그의 아들 등충을 붙잡아 압송한다. 사마소가 서신을 보내자 종회는 본격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강유와 함께 장수들을 불러 자신을 따를 장수들을 골라내기로 한다.

그러나 종회의 심복장수 구건이 이 사실을 호군 호열에게 알리면서 일은 발각되고 호열은 아들 호연과 감군 위관을 불러 계획을 세운다. 호열은 군사와 장수들을 선동해 성도로 선제 공격을 하고 종회는 전투 중 활에 맞아 죽고 강유도 끝까지 싸우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결국 자결한다. 하지만 등애가 풀려나면 자신도 반란에 가담했을 것으로 몰릴 것이라고 두려움을 느낀 위관은 부하 전속과 군사 500명을 보내 면죽 땅에서 등애등충, 사찬살해한다.

이 난리로 함께 가담한 장익과 촉나라 황제 유선의 장남 유선(劉璿) 등이 살해당하고 특히 방덕의 아들 방회는 성도로 쳐들어와 한수정후 관이를 비롯한 옛 관우의 혈족들을 모조리 몰살해 관우의 대가 거의 끊길 뻔 했다.

성도의 군사와 백성들이 혼란 속에서 많이 사상당했고 10일 뒤 가충이 와 분위기를 수습하고 황제 유선과 상서령 번건, 시중 장소, 광록대부 초주, 비서랑 극정 등을 낙양으로 올려보냈다. 뒤이어 계속 저항하던 건녕 태수 곽익사마소에게 항복하여 상황은 종료되었다.[출처: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