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小說)]/<벚꽃 필 무렵(完)>

벚꽃 필 무렵

Bawoo 2016. 9. 12. 08:38


벚꽃 필 무렵



1.

'휴우~이제 정리가 거의 다 된 것 같으니 잠시 숨 좀 돌릴까?'

마지막 탁자에 행주질을 끝낸 순간, 나는 혼자 중얼거리며 허리를 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9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아침. 커피 생각이 났다. 고등학교 다닐 때 사동 일 하면서 야금야금 마시다가 인이 박혀버린 커피. 바로 지금이 그 커피가 생각나는 시간이었다.

"큰언니, 커피 드실래요?"

"아니, 난 됐다. 홀 정리 끝났으면 너나 마시면서 한 숨 돌리렴."

주방에서 오늘 장사할 식재료를 챙기고 있던 큰언니는 내 물음에 대답만하고는 이내 손길이 빨라졌다. 커피 포트에 물을 한 잔 분량만 넣고  on 스위치를 눌렀다. 물은 순식간에 끓으리라. 세상이 살기 좋아져서인지 커피 끓이는 물 정도는 1분 이내로 끓는 제품이 나와 있는 시대였다. 그렇다고 해서 개개인의 삶이 다 살기 좋아져 있는 것은 아닐 터이지만 많이 좋아진 느낌이 막연하게 들기는 했다. 아직 군인 출신이 대통령을 하고는 있지만 이번이 마지막일 듯 싶은 느낌이 드는 시대. 온 국민이 열광하며 즐기던 올림픽은 2년 전에 끝나 있었다. 나 개인적으로는 즐길 마음이 전혀 안 들어 TV로나 보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끝나버린 올림픽. 세월의 흐름을 알려주는 시계는 어느덧 90년대에 접어들어 있었다. 나 개인의 삶과는 전혀 관계없이 무심하게 기계적으로 흘러가는 시간. 지금까지 살아온 지난 시절도 그렇지만 앞으로 남아있는 시간도 그러리라.

 

커피를 타든 나는 밖이 잘 보이는 창가로 가서 앉았다. 두 손으로 커피 잔을 감싸쥐고 창밖을 바라보는 자세로. 잠시 상념에 빠져들 참이었다. 내가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댐과 동시에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큰언니가 시집갈 때 가지고 갔던 일제 카세트 녹음기에서였다. 20여년 전.

가게 차릴 때 언니 준비물에 이게 들어있어서 나를 기함하게 만들었었다.

"언니 그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럼 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애지중지하는 물건인데. 내 소중한 동생들이 저금통까지 털어 결혼 축하 선물로 사준 거 아니냐. " 

큰언니는 가게에 오는 학생들에게 음악을 틀어준다고 미니 컴포넌트를 구입해 놓고도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는 꼭 이 카세트 녹음기를 이용했다. 주방 안 언니 손이 언제든지 닿을 수 있는 곳에 놔두고서. 흘러나오는 곡은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엘비스프레슬리의 Wooden

Heart이란 곡이었다.

큰언니가 워낙 즐겨 들어서 내 귀에도 익숙하던 곡. 큰아버지네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던 일석 오빠도 좋아했던 곡이었다.   캔튜씨 아이러브유 프리즈 돈 브레이크 마이헛 투(Can't you see I love you, Please dont break my heart two)로 시작되는 가사는 제목인 "목석같은 마음"과는 달리 사랑을 갈구하는 노래였다. 큰언니가 가사 내용을 이해하고 들었는지 아니면 멜로디가 좋아서 들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일석 오빠도 마찬가지였고. 아마 엘비스 프레슬리의 감미로운 목소리와 곡의 멜로디가 좋아서 아니었을까.  나도 가사 내용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된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였다.  본격적으로 팝송을 좋아하게 되면서 좋아하는 곡이 든 테입을 사러 음반 가게에 들렀다가 이 노래가 실린 음반을 우연히 보게 된 것이다.  훤하게 잘생긴 엘비스 프레슬리의 웃고 있는 모습이 음반 표지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유혹하듯 쳐다보고 있어서였다. 저절로 손길이 가 잡아든 음반 표지 뒷면에는 엘비스의 많은 히트곡들 틈에 이 노래도 들어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가사 원문과 함께 우리말 번역도 실려서.

"언니는 아직도 그 곡을 그리 좋아하나봐요?"

"그럼, 가장 좋았던 시절에 좋아했던 것들은 잘 안 잊히는 법이거든. 이 노래 좋아했을 때가 내 인생의 황금기 아니었겠니? 꽃다운 20초반 아가씨 시절. 연숙이 너도 이 곡에 얽힌 추억이 있다면서?"

큰언니는 이리 말하면서 일하던 손을 멈추고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무슨 의미인지까지는 알 수 없는 눈길. 아마 연민을 담은 눈길이리라. 30도 안 된 나이에 남편을 잃고 홀로 되어 있는 불쌍한 막내 여동생이란 생각에서 비롯된.

"추억이랄 것까지는 없고 일석 오빠가 좋아한 곡이라는 걸 알고 있는거죠. 나야 큰언니 때문에 집에서 늘 들었잖아요."

음악을 들으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가게 앞으로 나 있는 통학로 맞은 편 학교 안에 있는 나무였다. 그동안 전혀 못 봤던 나무. 크기로 봐서 몇십 년은 되어 보임 직했다.

"어머 저기에 저리 큰 나무가 있었네. 그런데 그동안 내 눈에 전혀 안 들어왔었구나."

나는 커피잔을 입에 대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새삼스레 그 나무를 바라보았다. 아마 그동안 겨울인 탓이었을 것이다.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모습인 나무가 눈에 들어올 리는 없으니까. 남편 죽고 난 뒤 메말라버린 내 마음과도 관계가 있을 터이고.

이른 봄인 탓에 통학로에 심어져 있는 나무들은 아직도 겨울 모습 그대로였다. 볼 게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나무만은 꽃봉오리가 맺혀있는 모습이었다. 자세히 보니 벚나무였다. 봄이 본격적으로 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전령사. 그 모습을 본 나는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어머! 언니. 저기 길 건너 학교 안에 커다란 벚나무가 있네요. 며칠내로 꽃이 필 것 같아요."

"으응, 거기 커다란 벚나무가 한 그루 있지. 그게 이제서야 눈에 들어온 모양이구나."

큰언니는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다는 듯 대답이 시큰둥 했다. 하긴 결혼한 뒤로  20년이 넘는 기간을 이 동네에서만 쭈욱 살아오고 있으니 그럴만도 했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기는하지만 가게  반대 쪽 큰길 너머 동네에 살고 있는 나나 모르고 있었던 일일 것이다.

"그나저나 저 벚나무를 보니 봄이 또 오고 있구나. 때만 되면 어김없이 잘도. 지난 세월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가는 관심도 없이. 참 무심한 세월이구나."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잠시 상념에 빠져들었다.

"이번 봄은 나 태어나서 몇 번째인가? 서른두 번째인가, 세 번째인가 ? 정확히 기억도 안 난다. 국민학교 4학년일 때가 11살이었으니 서른세 번째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에이, 지금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남편 죽고 난 뒤로는 한동안 다 잊고 살았는데."


3년. 남편이 죽고 난 뒤 어느덧 3년이란 세월이 흘러 있었다. 남편이 해외현장으로 떠날 때 5살이던 아들은 국민학교 3학년이 되어 있었다. 11살. 이제 그만 다 잊고 살아가기 위한 방편을 마련해야되지 않겠느냐는 엄마와 큰언니의 권유를 받이들이기로 한 것이 불과 몇 달 전이었다. 중고등학생들 방학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아직은 한겨울이던 때. 큰언니가 친정 엄마와 함께 내가 살고 있는 집으로 찾아와서였다. 

"연숙이 너 계속 이리 넋 놓고 지낼 수만은 없지 않겠니? 언니가 애들도 다 크고해서 소일삼아 부업을 하려고하니 너도 같이 하자. 마음도 추스를 겸해서 말이야. 형식이야 엄마가 챙겨주면 되지 않겠니?"

"그래라. 형식이는 엄마가 챙겨주마. 이젠 쌍둥이도 엄마 손길이 필요없는 나이가 되어 있으니 형식이 하나 돌보는거야 뭐 그리 어렵겠느냐. 더구나 갓난 아이도 아니고 국민학생인데."

형식이는 하나 뿐인 내 아들이었다. 죽은 남편과의 사이에서 난. 쌍둥이는 나보다 6살 어린 남동생들이고. 둘 다 군에서 장기 복무 중이었다. 고등학교를 국비장학생으로 다닌 탓이었다. 3년간 등록금을 나라에서 내주는 대신 하사관으로 일정기간 의무복무하는 제도. 친정 형편으로는 도저히 고등학교를 보내줄 수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택한 방법이었다. 나보다 열한 살이나 나이가 많은 큰언니는 아이 둘이 다 20대 초반이었다. 내게는 조카들. 큰조카는 군에, 작은조카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이제는 엄마인 큰언니 손길이 필요없는 나이가 되어 있는 것이다. 시간이 남아돌기 시작한 큰언니는 이를 때울 방법을 돈도 벌고 시간도 보낼 수 있는 있는 쪽으로 궁리했고 생각해 낸 것이 부업이었다. 거기에 남편 죽고 난 뒤 넋 놓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를 합류시킬 생각을 한 것이고.

"무슨 가게를 하려고요?"

큰언니와 나는 나이 차이가 워낙 많이 나는 탓에 늘 존대를 해왔다. 반말보다는 오히려 그게 편해서였다.

"집 근처에 중고등학교가 몇 군데 있으니 분식집이 어떨까 한다."

나는  30을 겨우 넘어선 아직은 젊다고 할 수 있는 나이. 아들이 하나 딸려 있지만 이대로 계속 넋놓고 살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생활은 큰 문제가 없었다. 회사에서 나온 보상금과 남편이 해외에서 송금해 준 돈 저축해 놓은 게 제법 되는 덕분에. 그 돈을 은행에 넣어놓고 이자로 생활하고 있는 중이었다. 친정 엄마와 시골에 계신 시어머니에게 다달이 용돈도 드리면서. 은행 이자가 크게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아들인 형식이를 대학 공부시켜 결혼비용까지 댈 수 있는 정도 금액이었다. 문제는 아직은 살아갈 날이 더 많이 남아있을 내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였다. 아들하고 둘이서만 이렇게 계속 살아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아무 남자하고나 재혼할 수는 더더구나 없는 일이었다.

"알았어요. 같이 할께요."

큰언니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방학을 이용하여 개업 준비를 해서 문을 연 게 최근이었다. 

가게는 언니나 나나 큰 돈을 벌려고 한 것이라기보다는 소일이 주목적이었다. 많이 벌리면야 좋겠지만 그런 기대를 할 수 있는 장사는 애초부터 아니었다. 중고등학생 호주머니에서 돈이 나오면 얼마나 나올 것인가. 우리 자매 반찬값 정도 건지면 그럭저럭 수지 맞는 장사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장사는 그럭저럭 잘 되고 있었다. 애초에 기대했던 만큼만. 무엇보다 이런저런 잡념을 떨쳐버릴 수가 있어서 좋았다.

많지도 않지만 적지도 않게 살아온 지난 날들. 우여곡절도 참 많았지만 어찌됐건 살아냈으니 앞으로 살아갈 날을 걱정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앞으로 얼마만큼의 기간을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어떤 삶이 펼쳐지게 될 것인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지난 세월 내 뜻대로 살아진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별로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중학교 3학년 말 이후로 남편을 만나 결혼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그저 운명이 이끄는대로 살아왔다. 남편과 결혼하여 잠시나마 행복했던 세월도 남편이 사고로 죽고 난 뒤로는 제자리로 돌아와 버렸다. 3년 전. 아들 하나와 집 한 채 그리고 얼마간의 유산이 내 앞에 남겨진 게 전부인 채로 결혼 전 상태로 되돌아 와 있는 것이다.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야 되는 삶을 아들과 함께 해야 하는 것이 결혼 전과 달라진 모습인 채로.

"연숙아, 커피 다 마셨니? 그럼 J은행에 좀 갔다올래?"

상념에 젖어있던 나를 화들짝 놀라게 만들어 제 정신으로 돌아오게 한 건 큰언니가 부르는 소리였다.

"언니, 뭐라고 그랬어요?"

내가 앉은 자세 그대로 고개만 돌려 주방에 있는 큰언니를 보니 한 손에 뭔가를 들고 흔들며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은 진지한 표정을 하고서. 

"J은행에 좀 갔다오라고."

큰언니의 말을 확인하는 순간 내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는 볼멘 소리가 저절로 입 밖으로 뛰쳐 나왔다.

 "J은행에는 왜요? 가까운데  W은행이 있는데."

"으응~ 주택부금 붇는 날이야. 그동안은 집에서 살림만 했으니까 시간이 많았는데 장사를 시작해 노니 은행 갈 시간 내기가 만만치 않네. 난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으니 다녀오거라."

큰언니 손에 들려있는 건 부금통장이었다.

"근데 너 J은행 가는게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인데 혹시 그 일석 청년 때문에 그러니?"

"아아냐, 언니. 그게 언제적 얘기인데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그리고 그 오빠가 여기까지 왜 내려와요. 있어도 서울에 있겠지..."

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언니에게서 통장을 받아 들었다.

"혹 모르잖니? 이제는 최소 차장급 간부는 되어 있을 정도의 세월이 흘렀는데  여기 와 있을 지. 직급이 높아지면 자리가 줄어들어 원치 않는 곳에도 발령이 나더라. 그나저나 그 일석 청년도 이제 40줄에 접어 들었겠구나. 나보다 서너 살  어린 것으로 알고 있으니까 이제 마흔이나 마흔하나겠다."

큰언니는 그리 말하며 내 눈치를 흘깃 살폈다. 지난 날 일석 오빠와 나 사이의 일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큰언니가 일석 오빠 얘기를 10년도 넘은 지금 꺼내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엘비스 프레슬리 음악도 그렇고 뭔가 낌새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알았어요. 언니, 다녀올께요."

가게문을 막 나서려는데 큰언니의 말소리가 다시 뒤통수를 때렸다.

"기왕 가는 김에 잔돈도 바꿔오고 차장석도 한 번 둘러봐라. 이제 차장은 되어 있을 나이 아니냐. 혹 차장석에 안 보이면 대리 자리도 둘러보고."

"큰언니가 오늘은 좀 이상하네. 내가 J은행 가기 꺼려한다는 걸 엄마한테 못 들은 것인가?"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통학로와는 반대편에 있는 큰길로 나섰다. 이 도시의 구도심. 거리는 한산했다. 학생, 직장인들의 등교, 출근 시간이 지난 시간이라서 일 것이다. 분주하게 오가는 차들만이 눈에 들어왔다. 나하고는 아무 관계없이 자기들 필요한 곳을 향하여 가고 있는 차들. 그런 차들도 역시 많지는 않았다. 길가에 있는 가게들은 아직 문을 안 열었거나 이제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큰길을 따라 사방으로 심어져 있는 수령이 오래 된 벚나무 가로수들만이 봄이 오고 있음을 알리듯 꽃봉오리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날씨만 계속 좋으면 수일내로 활짝 핀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을 하고서.  시간은 아침 9시 반이 거의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은행 출입문이 올라가는 시간. 지금 내 발걸음으로로 계산하면 은행 출입문이 열리고 나서 10여분 정도 뒤인 시간이리라. 아직은 손님이 적어 창구가 한가할 시간. 여유있게 은행일도 보고, 둘러볼 수도 있는 시간이리라. 

J은행은 길 건너편, 우리가 하고 있는 가게에서는 안 보이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 도시에서 서울을 차로 가려고 할 때 가장 큰 길이 있는 곳. 건널목을 하나 건너 재래시장이 있는 쪽으로 꺾어져 조금 더 가야 되는 곳이다. 아마 이곳 벚나무 가로수에도 꽃봉오리들이 잔뜩 맺혀 있을 것이다.

그동안 J은행은 가급적 피해 다녔다. 큰언니와 가게 자리를 보러 다닐 때도 혹시 J은행 근처면 어떡하나 싶었었다. 큰언니가 살고 있는 집 근처에서 좀 떨어진 곳인데도 그랬다. 일석 오빠 때문이었다. 나를 처음 본 순간 색시 삼을 마음을 먹었다는 사람. 그때 나는 고작 열한 살짜리 꼬마 계집애였었는데. 이런 일석 오빠에게 배신 아닌 배신을 하고 죽은 남편과 결혼을 한 것이 11년 전 일이었다.  일석 오빠를 처음 본 때부터 계산하면 11년이 지났을 때.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배신이라고 할 것 까지는 없는 일이었다. 둘이 서로 사랑하는 단계까지 간 것도 아니고 어찌보면 일석 오빠의 일방적인 마음이랄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하긴 나도 그 마음을 받아들이려고 노력은 했었다. 그게 마음대로 안 되고 있는 중에 죽은 남편이 나타나서 내 마음을 사로잡아버려 결혼을 하게 되었었다.  그럼에도 가슴 한편에는 늘 일석 오빠에 대한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누구나 다 지난 날의 추억을 가슴 한편에 묻어두고 살아가듯이 나도 그랬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워낙 어린 시절의 나를 색시 삼을 생각을 했다는 일석 오빠이기에 좀 더 마음깊이 간직하고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런 일석 오빠가 다니고 있을 J은행을 가는 것은 결혼한 이후로 가급적 삼갔다. 그 많은 지점 중에 일석 오빠가 근무하고 있는 곳은 단 한 지점 뿐일 텐데도 그랬다. 더군다나 일석 오빠가 살고 있을 서울도 아닌 다른 도시인데도. 한 달에 한 번 부금을 내는 일도 친정 엄마와 둘째 난숙 언니에게 부탁했다.  친정 엄마나 난숙 언니 모두 이런 나의 이 마음을 이해해줬다. 특히 친정엄마는 일석 오빠와 나 사이를 결사 반대한 입장이라 이런 마음이 더 했을 것이다. 친정엄마는 사위인 내 남편이 사고로 죽어 내가 30도 안 된 젊은 나이에 아이 딸린 미망인이 되자 땅을 치며 후회하는 말을 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일석 오빠와의 사이를 반대하지 말았을 걸 하면서. 그러나 이미 때 늦은 일이었다. 설사 친정엄마가 반대 안 했어도 일석 오빠와 내가 맺어지기에는 난관이 많은 상황이었다. 모든 것이 다 내 운명이었던 것이다. 태어나 한 세상 살아가노라면 수도 없이 겪게 되는 나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운명. 이제 또 그 길로 들어서고 있는 것 같은 예감이 얼핏 들었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큰언니의 부탁에 의해서 일석 오빠가 다니고 있는 J은행에 가고 있는 지금 저절로. 뭔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가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2.

내가 일석오빠를 처음 본 것은 국민학교  4학년이 된 그해 봄이었다. 지금부터 계산하면 20여년 전이던 열한 살 때. 정확히 계산하면 22년 전인가? 새학기 초인 4월 중순 쯤, 막 벚꽃이 필 무렵이던 이른 봄일 때였다. 시계를 그 시절로 되돌리면 아마 지금과 거의 같은 때였을 것이다.  그즈음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가 세운 절에서 살고 있었다. 엄마, 아빠 그리고 세 언니와 내 밑으로 쌍둥이 남동생까지 모두 8식구가.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큰아버지네 식구들과 같이였다. 할아버지네는 절 입구에서 제일 가까운 건물 3층에, 큰 아버지네는 같은 건물

1층에 그리고 우리 가족은 따로 지은 3층 건물에. 

 

할아버지가 지은 절은 서울 북쪽과 맞닿은 경기도 지역에 있었다. 서울을 오가는 시내 버스의 종점이 있는 곳. 절은 이 종점에서 보면 제일 먼저 눈에 뜨였다. 아직 개발되기 전이어서 변변한 높은 건물이 없는 동네인 때문이기도 했지만 건물 자체가 절 모습을 하고 있어서였다.  일석 오빠와 내가 길고 긴 인연을 맺게 되는 연결 고리가 되게 된 것도 같은 이유였다. 만약에 절 모습이 아니었다면, 버스 종점에서 눈에 뜨이게 잘 보이지 않았다면 생길 수 없었을 일이었다. 십중팔구 다른 곳을 찿을 가능성이 많았을 테니까.


할아버지가 이 절을 세우게 된 것은 할아버지가 살아온 삶과 연관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대처승이었다. 어떻게 스님이 된 건지는 알지 못하지만  젊은 시절에는 꽤 영험한 무속인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고 한다. 내가 절로 이사올 때에는 70이 넘은 연세에 눈까지 안 보여서 거의 은퇴한 거나 다름없었지만 한창 인기 있던 젊은 시절에는 큰 굿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때 벌어들인 돈으로 이 절을 세운 것이라고 들었다. 세울 곳을 나름대로 열심히 물색하러 다니신 끝에 결정한 이곳에다가. 풍수에도 밝은 탓에 나름대로 명당으로 판단하고서라고 했다. 그게 맞는 건지는 지금 생각해도 아닌 쪽이라는 생각이 더 강하다. 큰아버지네나 우리집이나 크게 잘 된 자손이 없으니까. 큰아버지네는 할아버지 장손인 내 사촌오빠가 물려받은 절을 잘 관리하고 있으니 그런대로 잘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지만 우리집은 아니었다. 아빠가 할아버지 살아계실 때 스스로 먼저 세상을 뜨고 말아 그 결과로 내 인생이 엉망이 되어버리고 말았었으니까.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가 절을 지을 당시에는 서울에서 살고 있었다.  엄마가 서대문 근처 시장에서 포목점을 하고 있어서였다. 그런데도 할아버지가 지은 절로 예정을 앞당겨 이사를 한 것은 아빠의 건강과 관계가 있었다. 방송국에서 전기기사로 일하고 있는 아빠는 그즈음 페결핵을 앓고 있었다. 몸을 쉬어야 낫는 병인데 쉬지를 못한 탓에 점점 나빠지고 있었던 것 같았다. 직장에서는 휴직을 하고 요양할 것을 권고했고 아빠는 이에 따랐다.  아빠가 휴직을 함과 동시에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가 세운 절로 이사한 것이다. 폐결핵을 치료하는데는 공기 좋은데서 지내는 것이 최고라고 의사가 권고해서였다.  이사는  당초 예정보다 3년을 앞당긴 거였다.  원래 계획은 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에나 하기로 되어 있었다. 내가 워낙 공부를 잘 해서 선생님들 한테 귀여움을 받으며 계속 부반장을 하고 있어서였다. 만약에 사내로 태어났다면 반장을 도맡아 했을 것이다. 아직 여자 반장은 없는 시절이었다. 그런데 아빠의 병이 이사를 앞당기게 한 것이었다. 대신 전학을 안 하고 버스통학을 해서 다니던 학교를 게속 다니는 걸로 결정이 났다. 조금 어리기는 하지만 별 문제없다고 엄마, 아빠가 판단을 해서였다. 그러나 엄마가 하던 포목점은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거리가 너무 먼 탓이었다. 사실 쌍둥이 동생 문제만 아니면 가게를 정리할 필요까지는 없는 일이었다. 나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쌍둥이를 건강이 안 좋은 난숙 언니에게 전적으로 맡겨놓을 수는 없는 때문이었다. 장사가 생각만큼 잘 안 되는 것과도 관계가 있을 터였다. 아주 잘 됐다면 아이보는 사람을 두면 됐을 테니까.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건물은 3층은 아버지가, 2층은 큰언니와 셋째 하숙 언니 그리고 내가, 1층은 둘째 난숙 언니와 쌍둥이 동생 그리고 엄마가 썼다. 엄마는 잘 때는 이따금 아빠가 있는 3층으로 올라가기도 했으나 거의 쌍둥이와 함께 1층에서 지냈다. 쌍둥이가 아직 학교도 들어가기 전인 6살뿐이 안 되어서였다. 둘째 난숙 언니는 1층에서 쌍둥이와 지내면서 집안 일, 쌍둥이 돌보는 일을 엄마를 도와 거들었다. 큰언니는 방송국에 성우로 나가고 있었고 셋째 하숙 언니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난숙 언니는 건강이 안 좋아 고등학교를 다니다 말고 집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몸져 누워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하루종일 교실에 앉아 공부하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워서였다. 아빠가 앓고 있는 폐결핵은 아니었다. 병원에서도 병명을 알아내지 못한 희귀한 병이었다. 서서히 몸이 약해지면서 오래 살 수는 없는 병. 의사 말로는 50을 넘기기는 어려운 병이라고 했다.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건물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곳에는 법당으로 쓰이는 단층 건물이 한 채 있었다. 할아버지가 세운 절 모양을 하고 있는 건물 3채가 절임을 실질적으로 증명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법당은 할아버지가 잘 아는 후배 대처승이 운영 책임을 지고 있었다. 부인, 아들 한 명과 함께 할아버지 산소 가는 길 한쪽에 자그마한 집을 한 채 짓고 살면서.  그 외에 절 입구에서부터 법당 쪽으로 담과 산을 따라 ㄱ자형으로 지어진 행랑채가 한 채 있었다. 방은 3개였다. 절 입구 쪽에 하나, 법당 있는 쪽에 둘. 이 중 절 입구 쪽에 있는 방은 절 안의 허드렛 일을 하면서 절에 딸린 밭에 농사를 지어 생활하는 아저씨가 아내와 아들 한 명과 함께 살고 있었다. 나하고 사촌 성오와 동갑내기. 법당 두 방은 방 사이에 마루가 놓여 있었다. 두 방 모두 평상시에는 비어 있었다. 절에 특별한 일이 있으면 손님들이 잠시 쉬어가는 방으로 쓰이는 것 같았는데 아직까지 본적은 없었다. 이 별채와 법당 사이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물이 깊지 않아서 아이들이 빠져도 사고 날 염려는 없었다.

 

절 앞쪽으로는 작은 개울이 하나 흐르고 있었다. 서울 쪽에서부터 흘러내려와 할아버지 절이 세워져 있는 산을 끼고 돌아 서쪽 내가 모르는 이디론가로 흘러갔다. 할아버지는 이 개울에다가 작은 다리를 놓았다. 나무로 된 가운데가 볼록 나오게 한 다리였다. 개울이 아무리 작아도 그냥 건널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가운데를 볼록 나오게 만든 것은 여름철 물이 많을 때를 대비한 장치였다. 개울물이 아무리 많아져도 넘쳐 흐르지만 않는다면 건너 다닐 수 있게 고안된 것이었다.  이 다리 한가운데 볼록 나온 곳에 서면 절 입구까지는 아래로 내려다 보였다. 반대로 절 입구 쪽에서 보면 올려다 보였고. 다리와 절 입구 사이는 절을 오가는 길 겸 우리들, 할아버지 어린 손주들의 놀이터였다. 나와 쌍둥이 남동생 그리고 사촌인 성오와 성순이에다가 행랑채에 사는 동갑내기 용이까지. 한 20여미터 정도 될까?  아마 그 정도 길이일 것이다. 길 양 옆은 밭이었다. 우리 세 가구와 절 식구들이 먹을 채소를 심는 곳.


할아버지는 이 개울가를 따라 벚나무를 심었다. 당연히 할아버지 소유 땅이 있는 곳까지만이었다. 벚꽃을 유난히 좋아하신 때문이라고 들었는데 다리를 기준으로 양 옆으로 각 20여 그루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산쪽으로도 다른 사람 소유 땅과 경계를 만들 겸 해서 10여 그루 정도 있었으니까 모두 40여 그루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이 벚나무들은 벚꽃이 활짝 피는 이른 봄에는 장관을 연출했다. 절로 이사와서는 아직 못 봤지만 서울에서 살던 작년까지만 해도 아빠를 졸라 일부러 왔을 정도였다. 절에서 살게 된 올해부터는 그럴 필요도 없이 보고 싶을 때 언제든지 보게 될 터이지만.


 그날, 나는 절 입구와 다리를  이어주는 길 위에서 놀고 있었다. 사촌인 큰아버지네 동갑내기 성오, 3살 아래 성순이와 내 밑의 6살 어린 쌍둥이 동생이 함께. 아마 고무줄 놀이였을 것이다. 쌍둥이 둘이 고무줄 양끝을 잡고, 나와 성순이는 고무줄을 이리저리 뛰어넘고, 성오는 구경을 하고.  행랑채에 사는 용이는 빠져 있었다. 우리 5명은 놀때 거의 같이였지만 용이는 빠질 때가 많았다. 용이는 내가 같이 놀자도 해도 스스로 빠질 때가 더 많았다.

우리들이 한창 고무줄 놀이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청년 두 명이 다리를 건너 절 쪽으로 오고 있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다리 쪽을 바라보는 자세로 고무줄을 넘고 있어서였는데 옷차림으로 보아 학생은 아닌 듯 했다. 고등학교는 졸업한 것 같은 모습. 얼핏 보아 둘째 언니 또래 정도일 것 같아 보였다. 대학생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외모만 봐서는 확인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체구는 둘 다 별로 커보이지 않았다. 좀 작은 편에 속할 것 같은 느낌. 그렇다고 볼품없이 작은 것은 아니었다. 훤칠하지만 않을 뿐이지 보기에 그럭저럭 괜찮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 외모가 너무 달랐다. 한 명은 아주 건강하고 씩씩한 모습이고 다른 한 명은 어딘가 모르게 병약해 보였다. 건강해 보이는 청년은 생긴 것도 남자답게 우락부락한 모습이었다. 그래봤자 큰 체구가 아니어서 험상궂은 모습은 아니었다. 어찌보면 개구장이스러운 모습이었다. 반면에 병약해 보이는 청년은 깡마른 체구에 여성스러운 느낌이 났다. 혹 가발을 쓰고 여장이라도 하면 여자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안경을 쓰고 있었다. 눈이 나빠 보이게 함과 동시에 지적으로 보이게도 하는 물건.

나는 그 둘을 보면서 한창 젊은 청년들이 절에는 무슨 일일까 궁금했다. 이사온 지 얼마되지 않은 때문인지는 몰라도 절에 젊은 사람들이 오는 것을 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이 부녀자 그것도 엄마처럼 40이 넘은 사람들이었다.  두 청년은 우리들 앞에 오더니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둘 중의 한 명이 우리들에게 물었다. 예의 씩씩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애들아, 잠깐 말 좀 물어보자?"

나는 하던 고무줄 놀이를 멈추고 두 청년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가는 묻지 않았다. 그냥 쳐다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멀리서 본 모습과 가까이서 본 모습에 혹 차이가 있나 싶어서. 거의 같았다. 안경 쓴 병약해 보이는 청년은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더 아파 보인다는 것만 달랐다.

"너희들 혹시 이 절에 사니?"

"네, 저희 할아버지 절인데요."

사내인 성오보다 내가 먼저 대답했다. 성오의 성격상 쉽게 대답을 못할 것 같아서였다. 성오는 원래  활달했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뒤바뀌어버린 집안 환경 때문에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해 있었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 말을 잘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집안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실감하게 해주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인데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나도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되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안스럽다는 생각을 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래? 그럼 안에 어른들한테 안내 좀 해주련?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그건 어른들 만나뵙고 말씀드릴께."

"네에~, 성오야, 얼른 너네 새엄마한테 가서 알려드려."

성오는 내 말에 대답은 않은 채 절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그 뒤를 두 청년이 천천히 뒤따랐다. 그런 두 청년 뒤를 나와 성순이 그리고 쌍둥이 동생이 고무줄 놀이 할 생각은 잊은 채 뒤따랐다. 젊은 청년들이 도대체 절에는 무슨 일일까 궁금해서였다.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상대는 어른이고 나는 기껏해야 국민학교 4학년 짜리 어린애가 아닌가. 그냥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절 안으로 들어간 성오는 금방 자기 새엄마를 데리고 나왔다. 그때는 우리도 절 안으로 들어서 있었다.


성오의 친엄마인, 나의 큰어머니였던 여인은 도박에 빠져 큰아버지에게 이혼을 당했다고 들었다. 도박하는 것을 안 할아버지가 큰아버지보다 더 난리를 쳐서 거의 내쫓다 싶이 했다는 것이다. 그 자리를 지금의 새엄마가 대신하고 있었다. 성오 새엄마는 친엄마가 쫓겨나기 전까지는 집안 일을 돌봐주던 여인이었다. 그러던 것이 성오 친엄마가 쫒겨나다싶이 이혼을  당한 뒤에 그 자리에 대신 들어앉게 된 것이었다. 어른들 일이라서 어찌 된 것인지 자초지종은 잘 모른다. 분명한 것은 우리 가족이 절로 이사오기 전에 이미 새 큰어머니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성오, 성순이를 비롯 그 위에 큰언니 또래 오빠와 둘째 언니 또래 언니에게까지.

"무슨 일로 오셨어요?"

할아버지의 큰아들인 덕분에 절을 실질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큰아버지의 부인이 된 새 큰어머니는 아직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집안 일을 맡아 해주던 모습이 남아있었다. 당연히 그때보다는 많이 사라져 있었다. 과도기. 지금 뱃속에 있는 또 다른 내 사촌이 태어날 때 쯤이면 아마 거의 없어지게 될 것이다.

"혹시 하숙을 할 수 있나 해서요."

"무슨 일로 하숙을 하려고요?"

"저는 대학입시 공부를 할 거고 옆에 있는 친구는 몸이 좀 안 좋아서 요양 생활을 할 겁니다."

"어디가 안 좋은데요?"

" 가슴이 좀 안 좋은데 균이 나오는 정도는 아니니 전염될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 기간은 얼마나 있을실 건가요?"

" 이 친구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대학입학 시험이 끝날 때까지는 있을 겁니다."

'아하, 그런거였구나. 병약해 보이는 청년은 역시 요양생활을 하려는 거였구나. 더군다나 아버지와 같은 병인 폐결핵. 그런데 건강하게 생긴 청년은 입시공부를 한다? 그럼 재수생인 거구나.'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새삼 두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다. 병색인 청년의 나를 쳐다보는 눈길이 예사롭지가 않았던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아닌 다 큰 소녀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뭔가 좀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어린아이는 그냥 어린아이로 봐줘야 되는데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은 것이다. 반면 건장하게 생긴 청년은 마치 귀여운 어린아이를 보는 듯 싶은 그런 눈길이었다. 말도 그렇게 했다. "너 참 귀엽게 생겼구나"라고.

"방 구경을 시켜 드릴테니 이리로 오세요."

큰어머니는 이리 말하고 행랑채의 법당 있는 쪽 방으로 두 청년을 안내했다. 우리집에서 빤히 내려다 보이는 곳. 우리들은 무슨 구경꺼리라도 난 듯 큰어머니와 두 청년 뒤를 졸졸 따라갔다. 성오는 빠졌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해도 밥하고 빨래해주던 식모 아줌마가 새엄마로 되어 있는 현실이 아직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모습을 하고서. 새엄마의 손길을 많이 받고 자란, 나보다 세 살 어린 성순이만 큰 거부 반응없이 뒤따랐다.


방을 본 두 청년은 마음에 들어 하는 거 같았다. 둘이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더니 예의 씩씩한 모습을 한 청년이 "하숙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저기 보이는 법당을 따라 나 있는 길로 쭈욱 올라가면 산소가 하나 있어요. 거기까지는 포장된 길이 나 있으니 구경갔다 오세요. 그동안 방을 치워 놓을 테니."

새 큰어머니는 갑자기 하숙생이 두 명이나 생겨 기분이 좋은 듯 들뜬 목소리로 이리 말하고는 부랴부랴 방청소 할 준비를 하러 갔다. 두 청년은 새 큰어머니 말대로 할아버지가 당신 돌아가시면 묻히려고 미리 만들어 논 산소 구경을 하러 갔고.

두 청년이 절의 새식구가 되는 날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큰집의 하숙생인 거였지만 절 한울타리 안에서 지내게 된거라 같은 식구나 마찬가지였다. 나에게는 그 중의 병약해 보이는 청년과 길고 긴 인연이 시작되는 첫날이기도 했다. 그날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철부지 국민학생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런 나를 미래의 색시감으로 점찍어 둔 청년, 바로 일석 오빠 때문이었다. 이 오빠는 나를 처음 본 순간부터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뭔가를 보고 놀라, 그 자리에 굳어져 있는 듯 싶은 그런 자세였다. 그 눈빛의 의미가 그렇게 깊은 것일지는 꿈에도 생각 못했던 일이었다. 그동안 나를 바라봤던 사람들의 눈길들과 뭔가 좀 다르다는 느낌을 받기는 했다.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귀엽고 예쁘게 생겼다고 그러는 정도였다. 그저 예쁜 어린아이를 보는 느낌. 그런데 이 오빠의 눈빛은 그게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말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부담스러웠다. "꼬마 예쁘게 생겼네"라든가 "귀엽게 생겼네"라는 말이라도 한 마디 하면서 쳐다봤다면 여늬 다른 사람들과 같은 생각으로 나를 보는가보구나 그리 생각했을 터인데. 나를 귀엽게 바라보는 눈길을 늘 있어 왔다. 대부분 학교 선생님들이었지만 학교가 파하고 엄마가 일하던 포목점에 들르면 손님들 중에는  "아이구, 예쁘게도 생겼네. 크면 며느리 삼고 싶네" 그러는 아주머니도 꽤 많았었다.


"엄마, 엄마, 큰댁에 하숙생이 두 명 들어왔어. 한 명은 대학 입시공부를 하고 다른 한 명은 몸이 안 좋아 요양차 온 거래."

내가 집안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호들갑을 떨면서 마구 떠들어대자 엄마보다 두 언니들이 더 큰 관심을 보이며 질문 공세를 벌였다.

"어떻게들 생겼든. 아픈 사람은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거래?

두 언니는 거의 동시에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만큼 빅뉴스인 모양이었다. 하긴 그럴만도 했다.  막내 하숙 언니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사춘기가 시작되어 있을 나이. 둘째 언니는 두 청년과 나이가 비슷할 터였다. 몸이 안 좋아 고등학교를 다니다 말았지만, 다녔다면 올해에 졸업했을 것이니.

"재수한다는 청년은 씩식하고 건강하게 생겼고 투병 생활한다는 청년은 얌전해 보이는 게 꼭여자같아 보여. 생긴 것도 그렇고. 아픈 데는 아빠처럼 가슴이래."

"행여 나중에라도 몸이 안 좋은 청년 근처에는 될 수 있는 한 가까이 가지 말거라. 그 병은 쉽게 낫지도 않고 자칫하면 전염될 수도 있는 질이 안 좋은 병이다. 아빠도 고생이 심하시지 않니."

내 말을 들은 엄마는 딸부자답게 두 청년을 경계하는 말부터 했다. 특히 투병생활을 하러 왔다는 청년에 대해서. 뭐 엄마의 이런 당부가 없어도 내 마음은 얼굴은 좀 빠지지만 씩씩해보이는 청년에게 더 끌려 있었다. 당연히 이성으로서의 감정은 아니었다. 아직 그럴 나이는 아니었으니까. 그저 호감이 더 간다는 그런 정도의 마음이었다. 몸이 안 좋다는 청년은 너무 말이 없는 듯 했다. 뭔가 자신감도 없어 보였다. 좋은 느낌이라면 외모가 곱상하고 마음씨가 착해 보인다는 정도였다. 그 외에는 끌리는 점이 거의 없었다. 곱상하게 생긴 외모가 나쁠 것은 없지만 남자가 뭐 꼭 잘 생길 필요는 없는 일 아닌가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너무 못생기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니냐라는 생각. 더군다나 몸까지 아프다지 않는가. 이래저래 이 청년은 나에게는 낙제점이었다. 이런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바뀌게 만든 건 3년이란 세월이 지난 뒤 명문대학생이 되어 나타난 것을 보고서였을 것이다. 아무튼 두 청년과 친해져서 이름까지 알게되고 오빠라고 부르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활달한 성격인 재수하는 청년과 밝고 명랑한 성격인 내가 죽이 잘 맞았기 때문이었다.

"입시공부하는 사람 이름은 주영이고 투병생활 하는 사람은 일석이래. 김주영, 우일석."

두 청년의 이름을 가족들에게 알려준 것도 나였다. 절에 머무르기 시작한지 채 일주일도  안 되어서.


두 청년은 절에 2년 정도 머물렀다. 나와 친해진 뒤로는 오빠라는 호칭을 들으면서. 주영 오빠는 입시에 실패해서 1년 더 머무른 것이고 일석 오빠는 1년만 머무른 뒤에는 집과 절을 왔다갔다 했다. 몇 달을 지내다가는 집으로 훌쩍 가버리고 그러다간 다시 절로 오고. 뭔가 마음이 안정이 안 되어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남들은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데 자기는 아무 것도 못하고 투병생활이나 하고 있는 것이 무척 힘들어 그랬던 것인가보구나라는 생각은 나중에야 하게 되었다. 어차피 일석 오빠보다는 주영 오빠를 더 따른 편이었으니까.

그렇게 둘째 해가 지나자 두 오빠 모두 절을 떠났다. 절 안은 갑자기 쓸쓸해졌다. 두 오빠의 빈자리가 제법 큰 탓이었다. 두 오빠가 머물렀던 방에는 이따금씩  다른 사람들이 머무르기도 했지만 나나 언니들의 관심 대상은 아닌 사람들었다.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거나 요양을 하러 오는 사람이거나 다 마찬가지였다. 그 누구도 두 오빠들 만큼 우리 우리 자매들 관심을 끌지 못했다. 나도 이제는 6학년이 된 탓에 아무하고나 친하게 지내기는 조심스러운 면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엄마가 극구 말렸다.

"주영, 일석 청년같은 사람들은 그리 흔하지 않아. 너도 그때보다는 많이 컸고. 그러니 쓸데없이 붙임성있게 굴지말고 모른 척 얌전하게 지내."

두 오빠에게서는 1년 내내 소식이 없었다. 주영 오빠가 입시에 또 실패한 것은 느낌으로 알았다. 합격했다면 틀림없이 찾아왔을 터인데 종무소식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인연이 끝나는 것이구나, 뜨내기들과의 인연이란 그때뿐인 것이로구나라는 생각이 어린 나에게도 얼핏 들었다.  두 오빠가 남긴 빈자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메워졌다. 망각이라는 아주 좋은 수단으로.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명문이라고 알려져 있는 K여중생이 된 것이다. 지금 상태로 계속 간다면 동일계 K여고를 가서 3대 명문 대학이나 E여대는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것이었다. 실제로 그런 꿈에 부풀어 있었다. 나의 장래 꿈은 아나운서가 되는 것이었다.  TV뉴스 시간에 나와서 멋있는 모습으로 뉴스를 진행하는 것. 엄마, 아버지는 이런 나에 대한 기대가 컸다.

"열심히 공부해서 큰언니가 포기한 꿈을 너는 꼭 이루거라."

큰언니는 민간 방송국의 성우였다. 아직은 신인인 탓에 가정부같은 단역만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결혼하게 되면 그만두겠다고 그러고 있었다. 엄마는 이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다. 그 어렵사리 된 성우를 왜 그만 두려고 그러는 것이냐는 생각에서였다. 신인인 탓에 지금은 단역만 하고 있지만 경력이 쌓이면 비중이 큰 역할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게 엄마의 생각이었다.

"너는 외모도 되니 연기력을 키우면 탈렌트도 될 수 있는 것 아니냐? 지금 드라마에 나오는 탈렌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성우로 방송 생활을 시작했다고 그러더구만."

아버지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는 분야는 다르지만 방송국에 근무를 했기 때문에 방송계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이래저래 힘은 좀 들겠지만 참고 견디다 보면 빛을 볼 수도 있을텐데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아버지의 이 말에는 방송계에서 살아남아 빛을 본다는 것이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듯한 뉘앙스가 풍겼다. 그런 내용에 대해서는 당사자인 큰언니가 더 잘 알고 있을 터이지만.

"남자 친구가 극력 반대해요. 가까운 친척이 방송국에 중견 간부로 있는데 성우든 탈렌트든 연기자로 빛을 보게되는 과정이 너무 험난하다고 그러더래요. 그걸 다 참아낼 수 있다면 몰라도 아니면 포기하고 집에 들어앉으라고 그런대요. 남자 친구도 그게 좋겠다는 생각이고요." 

큰언니는 결국 이 해 봄에 가정주부가 되는 길을 택했다. 벚꽃이 만발한 5월 초에. 스포츠 신문에 엽서 추첨하는 사진 하나를 남기고서. 돈을 받고 한 게 아니라 오히려 돈을 주고 했다고 그러면서, 참 추한 꼴 많이 봤다고 그러면서.  동생들인 우리 세 자매가 저금통까지 탈탈 털어 사 준 일제 카세트 녹음기를 결혼 축하 선물로 지참하고서. 

 

두 오빠가 절에 들른 것은 이 해였다. 새학기초인 4월 초순경. 절을 떠난 지 1년만이었다. 벚꽂이 피기는 아직 이른 때. 봄은 오고 있었지만 이를 시샘하듯 꽃샘 추위가 가끔씩 들이닥치기도 해서 몸을 움츠리게도 만드는 바로 그 무렵이었다. 그래도 절 입구 개울가에 심어져 있는 벚나무들은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었다. 불과 20여일이 채 지나지 않아서 새하얀  꽃들이 장관을 이루며 피어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하여.

두 오빠는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아마 자랑 겸 해서 온 것 같았다. 지난 3년간 보냈던 인고의 세월 중 2년을 보낸 곳일 터여서. 지난 1년 동안 아무 소식이 없었던 이유는 이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일석 오빠의 병이 거의 다 낫자 둘이 방 하나를 얻어 본격적인 입시공부를 했던 것이다. 방은 일석 오빠가 얻고 주영 오빠는 연탄값, 전기세등 각종 공과금을 내는 조건으로. 드디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나 싶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주영 오빠는 전혀 엉뚱한 대학의 학생이 되어 있었다. 치과대학이 아닌 공과대학 그것도 3차로 들어간 거였다. 1, 2차 치과대학 시험에 다 떨어지고 나서 어쩔 수 없이 그리 한 것 같았다. 더 이상 재수를 하기는 곤란했는지 아니면 다른 사연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놀라운 일은 일석 오빠에게 일어나 있었다. 명문대학이라는 Y대학 학생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들어가기 어렵다는 대학을 2년간이나 투병생활을 하고 난 뒤에 1년을 공부해서. Y대학은 내가 목표로 하고 있는 대학 중 하나이기도 했다. 지금부터 차근차근 실력을 쌓아서 가려고 생각한 대학 중의 하나. 이런 대학을 일석 오빠가 들어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이날 일석 오빠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동안 보아왔던 나약하게만 보이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그 무엇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일석오빠의 변화된 모습은 비단 나만 놀래킨게 아니었다. 엄마를 비롯하여 언니들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 특히 큰언니가 제일 심했다. 혼수 준비하느라고 바쁘게 돌아다니다 집에 돌아와 내말을 듣더니 감탄사를 연발했다.

"어머, 어머, 놀라워라. 참 대단한 사람이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고 실업계 고등학교를 나온 데다가 투병생활까지 한 사람이. 역시 내가 사람보는 눈은 있단 말이지."


큰언니는 명문여대를 다니다가 중간에 그만 둔 전력이 있었다. 우연히 방송국 성우시험을 봐서 합격하자 그리 한 것인데, 때문에 명문대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잘 알고 있었다.

큰 언니는 나와는 달리 원래부터 일석오빠에게 관심이 많았다. 반면 주영오빠는 안중에도 없었다. 나하고는 딴판이었던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건 큰 언니의 취향이 그런 것인가보다라고 생각한 정도였다. 큰언니는 나보다 더 예쁘고 똑똑했다. 똑똑하다는 면에서는 그리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되었지만 나는 아직 미완성인 진행형 상태인 것이고 큰언니는 이미 검증이 끝나 있는 상태인 것이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외모에서는 이게 더 두드러졌다. 큰언니는 나처럼 턱이 나와있지 않았던 것이다. 턱이 나와있는 엄마의 같은 뱃속에서 나왔는데 네 자매 중 제일 큰언니만 턱이 안 나온 것이 좀 의아했지만 큰언니의 복이라고 생각되었다. 돌연변이도 있을 수 있는 법이니까. 그런데 이런 큰언니가 일석 오빠에게만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일석오빠가 큰댁에서 하숙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일이었다. 한 달쯤 지났을까 그런 무렵. 하루는 큰언니가 둘째 언니에게 무슨 심부름을 시키고 있었다.

"난숙아, 저기 큰집에서 하숙하며 투병생활하는 청년있지? 그 청년한테 가서 내가 분유 사줄 수 있는데 살테냐고 물어봐라."

"언니, 그건 왜?"

큰언니와 둘째 언니의 나이 차이는 3살이었다. 6.25전쟁이 나던 해에 큰언니는 네살배기였던 셈이다. 둘째 언니는 갓 태어난 갓난아기였고.

"아버지 드시는 미제 분유 있잖아. 방송국에 미제물건 팔러 들어오는 아줌마한테 사는 거. 그거 사다줄까 싶어서. 잘 먹어야 되는 병이니 도움이 되지 않겠어?"

"언니는 별걸 다 신경쓰고 그래. 혹시 일석이한테 관심 있우?"

나는 둘째 언니의 이 말을 듣는 순간 큰언니 얼굴에 당황하는 빛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어린 나이지만 언니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이도 나보다 어린데. 그냥 딱해보여서 그러는거야. 자기 친구는 공부하고 있는데 아무 것도 못하고 저러고 있는게 얼마나 안 돼 보이니."

"피이, 언니는 별걱정을 다 하고 그래."

난숙 언니는 이리 투덜거리면서도 두 오빠가 지내고 있는 방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난숙 언니는 두 오빠와 동갑이었다. 전쟁이 나던 해에 태어나서 이름도 난자를 집어 넣어 지은 것이라고 했다. 호적에야 난초 난자를 집어넣었지만 엄마, 아빠의 실제  생각은 난리가 난 해에 태어났다는 뜻으로 그리 지은 것이라고 했다. 그래야 장수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런 엄마, 아빠의 바램과는 달리 난숙 언니는 건강이 별로 안 좋았지만. 


큰 언니가 일석오빠에게 관심을 보인 것은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와 비슷한 외모를 하고 있는 것과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많았다. 내게는 큰형부가 될 남자.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라 집에 인사하러 왔을 때 본, 언니의 남자친구는 일석 오빠와 비슷한 분위기가 많이 났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 조건은 비교가 안 되었다. 그때 일석 오빠는 고등학교만 나와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처지였고 언니 애인은 국립 S대를 다니고 있었다. 농대라고 듣기는 했는데 졸업하고 취직을 하면 바로 결혼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일석 오빠에게 관심을 보인 것을 보면 내가 아무리 어린 나이지만 사람 마음은 참 알고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 일석 오빠 외모가 좀 나아서는 아니었을까?  외모만큼은 분명 일석 오빠가 나아 보였으니까. 그런데 남자한테 외모가 뭐 그리 중요하담. 나로선 참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큰언니였으니 일석오빠가 명문대에 들어간 것을 자랑삼아 왔다 갔을 때 대단하다는 생각이 안 들었을 리가 없었다. 입시공부를 해 본 터여서 공부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테니까 말이다.


그 뒤로 일석 오빠에게서는 소식이 없었다. 주영 오빠도 마찬가지였다. 워낙 내성적인 성격인 일석 오빠는 그렇다 치고 주영 오빠에게서 전혀 소식이 없는 것은 뜻밖이었다. 주영 오빠는, 나는 물론 난숙 언니, 하숙 언니 모두가 좋아했었다. 엄마는 말할 것도 없었다. 큰언니만 예외였다. 엄마는 늘 말하곤 했었다.

"사위감은 저 주영이 청년처럼 건강하고 씩씩해야 돼. 일석 청년은 틀렸어. 몸이 너무 약해. 거기다가 마음까지 여리고 착하니 사회생활이나 제대로 해낼라나 모르겠다."

근데 대학에 들어가더니 콧배기도 안 보이는 것이었다. 섭섭한 마음이 많이 들었지만 뭐 어쩌는 수 없었다. 2년 정도 한 울타리 안에서 지낸 추억이 있는 것으로 인연이 다 한 것으로 생각했다. 자기가 가고자 원했던 대학에 못 간 것이 자존심 상해 그런 것일꺼라는 생각은 미처 못했다. 2년이나 투병생활을 하고도 원하는 대학을 간 일석 오빠와 3년을 공부하고도 원하는 대학을 못간 자신을 비교해서 그런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건 내가 사회인이 되고 난 뒤의 일이었다. 활달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깊은 정이 없는 성격인 것은 일석 오빠를 통해서 알았다. 이것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일석 오빠를 만나러 다니기 시작했을 때 일석 오빠가 먼저 주영 오빠 얘기를 꺼내서 알게 된 거였지만.

 

일석 오빠에 대한 생각은 말할 것도 없었다. 처음 1년 동안만 제대로 절에 머물렀지 다음 해에는 머물다 말다해서 얼굴을 본 기간도 짧았다. 그런 일석 오빠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날아 든 것은 2학년이 된 해 이른 봄이었다. 벚꽃이 필 무렵. 학교를 오가면서 아침, 저녁으로 보는 개울가 벚나무들이 막 꽃봉오리를 머금고 있을 무렵이었다. 4년 전 두 오빠가 절로 하숙을 하러 왔던 바로 그 무렵과 같은 때. 우리집에 끔찍한 비극이 들이닥치리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

집에는 특별한 일이 없었다. 휴직 1년 뒤 퇴직한 아빠의 병세는 좋아지지 않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악화되지도 않았다. 생활은 엄마가 도맡아 했다. 일수놀이. 전에 장사를 했던 시장의 아는 사람들 대상이었다. 아버지 퇴직금과 엄마가 포목점을 정리한 돈 중 일부를 떼어내서 하는 것 같았다. 위험천만인 일이라고 아버지는 반대했지만 달리 뾰족한 생활수단이 없는 엄마로서는 최선의 선택인 것 같았다.  가지고 있는 목돈을 은행에 넣고 이자로만 생활하기에는 모자라는 금액이었고 엄마 성에도 안 찬 같았다. 원래가 활동적인 성격인 탓에 집에만 있는 것을 지루해 한 것도 한 몫 작용했을 것이다. 쌍둥이 때문에 포기한 장사를 일수놀이로 대신하는 것 같았다. 시간도 많이 안 뺏기면서 돈도 벌고 쌍둥이도 돌볼 수 있는 일거삼득의 수단으로 생각하고서. 돈놀이라는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직접 겪게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풀려나갔던 것이다. 이로부터 1년 뒤 엄마가 욕심을 내어 한 곳에 많은 돈을 빌려주어 떼이기 전까지는.

난 동일계 K여고를 가서 명문대를 갈 꿈에 부풀어 있을 때였다. 학교에서 저녁 무렵까지 공부하고 돌아오니 난숙이 언니가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연숙아 너한테 편지왔다. 일석이 한테서다. 군대에 가 있는지 주소가 군부대 같다. 근데 이 애 웃긴다. 어떻게 동갑내기인 나한테는 안 하고 어린 너한테만 하니."

나도 뜻밖이었다. 일석오빠가 나한테 편지 같은 걸 보내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편지 내용은 별다른 게 없었다. 한창 훈련받고 있는 중이라면서 다들 잘 지내고 있는가 궁금하다는 그냥 안부 편지였다.  군에 있으면 바깥 사회 있을 때 맺었던 자그마한 인연도 다 좋은 추억꺼리가 된다고 하면서. 큰집 안부, 가족들 안부 그리고 내 안부를 물은게 전부였다. 편지 내용이 뭘까 궁금해 한 가족들도 군대에 가 있으니 바깥 세상이 그리워서 보냈는가보구나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어떻게 자랐는지 궁금하니 사진 한 장 보내달라는 내용이 있었던 것이다. 엄마와 두 언니들에게 의논을 했다.    

"아마 애인이 없는 상태로 군대를 갔나보구나. 하긴 그 성격에 애인을 만들 수나 있었겠어."

두 언니는 갈깔대며 웃기까지 했다. 엄마만 조금 심각한 표정이었으나 별 말은 없었다. 딸 가진 엄마로서 느끼는 그 무엇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좀 더 두고보겠다는 그런 생각인 것 같았다. 내가 사진을 넣어 보낸 답장을 받고 온 두 번째 온 편지에서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반가운 마음에 위문편지 쓴다는 마음으로 답장을 보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온 일석오빠의 편지.


편지에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있었다. 일석 오빠가 나를 이성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나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다는 것이었다. 고작 국민학교 4학년짜리 어린 소녀를,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이인 청년이. 이때서야 비로소 일석 오빠가 나를 처음 봤을 때 보냈던 눈길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 두 오빠가 절에서 하숙을 하겠다고 처음 찾아왔을 때 일이 생각난 것이다. 그때 일석 오빠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뭔가에 놀라 그 자리에 굳어 있는 듯 보였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좀 섬뜩한 느낌이 들었었다. 나를 어린아이로 보는 게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뒤로도 이상한 일은 늘 있었다. 학교를 가고 올 때마다 꼭 나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늘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투병생활을 하고 있으니 무료해서 그랬을 수 있겠다고 생각해봤지만 그게 아니었다. 성순이가 학교를 오갈 때는 그런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짚히는 일이 한 가지 더 있었다. 할아버지 댁에서 TV를 보던 때 일이었다. 할머니는 TV가 나오는 저녁 시간이 되면  우리 손주들 보라고 TV를 켜줬다. 두 오빠가 우리 손주들 대열에 합류해서 TV를 보기 시작한 건 할머니의 권유가 있어서였다. 일석 오빠를 잘 본 할머니가 심심할테니 3층에 올라와서 TV를 보라고 그랬던 것이다. 당연히 두 오빠가 하숙하기 시작한 뒤 얼마 지나서였다. 두 오빠에 대한 충분한 관찰 기간이 지난 뒤. 밝고 명랑한 성격인 나는 물론 우리 가족들까지도 어느 정도 친숙해진 뒤였다. 나는 그때 저녁 먹은 뒤에 9시까지 꼭 TV를 보곤 했다. 다음 날 학교 갈 것을 생각해서 9시는 절대 넘기지 않았다. 엄마의 지시가 없었는데도 내가 스스로 알아서 그리 한 것이다. 놀라운 것은 나의 이런 행동조차도 일석 오빠에게는 경이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된 뒤에 일석 오빠한테서 직접 들은 이야기였다.

나는 두 오빠가 TV보는데 합류한 뒤로는 꼭 주영 오빠 무릎에 앉아서 봤다.  내가 그러는 것을 워낙 좋아해서였는데 이따금 TV보는데 합류한 난숙 언니는 이런 나를 보고 처음에는 질색을 했다. 아무리 어린애지만 그래도 여자라는 생각에서인 것 같았다. 그러나 워낙 붙임성이 좋은 내 성격을 알고 있는 데다가 두 오빠에 대한 신뢰가 있어서 그런지 모르는 척했다. 주영 오빠는 내가 무릎에 앉아 TV를 볼 때면 꼭 내 턱을 만졌다. 앞으로 살짝 나온 턱이 너무 귀엽다고 그러면서. 나도 주영 오빠가 내 턱 만지는 것을 좋아했다. 친오빠가 없는 탓에 성격이 나하고 비슷한 주영 오빠를 좋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일석 오빠가 이런 나를 보며 주영 오빠를 질투하고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물론 겉으로 들어내지 않고 혼자 마음 속으로만 한 질투였다. 내성적이고 마음 여린 일석 오빠가 주영 오빠를 상대로 질투하는 마음을 겉으로 들어낼 리는 결코 없는 일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짝꿍이었던 때문에 같이 하숙을 할 정도로 친해져 있는 건데 자칫하면 사이가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리 지내던 중 일석 오빠 무릎에 앉아서 TV를 본 적이 한 번 있었다. 그날은 주영 오빠가 자기 집에 가고 없었다. 하숙을 하며 지내던 2년 동안 한 달에 한 번 정도 집에 갔는데 이 날이 바로 그런 첫 번째 날이었던 것이다. 마음이 허전했다. 주영 오빠 무릎에 앉아 TV를 볼 때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뭔가 쓸쓸한 기분으로 TV를 보고 있는데 자꾸만 일석 오빠가 신경이 쓰였다. 나를 쳐다보는 눈길이 왜 자기 무릎에는 안 앉는거냐고 힐문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남자답게 "연숙아 오늘은 주영이 없으니까 내 무릎에 앉아서 봐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눈길로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슬그머니 일석 오빠 무릎에 가서 앉아 봤다. 그러나 도저히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주영오빠 무릎에 앉았을 때처럼 마음이 편치가 않았던 것이다. 무릎에 앉아 있으면 자연스럽게 두 팔로 나를 안게 되는데 이게 뭐랄까 남자에게 안겨 있는 기분이 들게 하는 것이었다.  일석 오빠는 나를 무릎에 앉혀놓고 그냥 가만히 있었다. 주영 오빠처럼 장난도 치고 턱도 만지고 그래야 되는데 전혀 그러지를 않았다.  들리는 것은 숨소리뿐이었다. 그렇다고 숨소리가 거칠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조용한 숨소리. 마치 일부러 죽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도저히 오래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슬그머니 내려와 쌍둥이와 성순이 옆으로 가서 앉았다. 그러고는 일석 오빠의 표정이 어떤가 곁눈질로 슬쩍 쳐다봤다. 한없이 서운해하는 표정. 그때 내 눈에는 그리 보였다.

그 뒤로는 절대로 일석 오빠 무릎에 앉지 않았다. 주영 오빠가 집에 가고 없을 때도 그랬다. 이듬 해 봄에 할아버지 산소에 같이 갔을 때 빼고는 단 한 번도.


토요일 오후였을 것이다. 학교에서 일찍 돌아와 집에서 쉬고 있을 때. 마침 일석 오빠가 할아버지 산소 쪽으로 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 손에 라디오가 들려있는 모습인 것으로 보아 산소에 가서 음악을 들으려고 그러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당신이 묻힐 묘자리를 미리 만들어 놓았는데 여기에 가면 전망이 아주 좋아 나도 좋아하는 곳이었다. 아무리 어려도 여자 혼자 산에 가는 건 위험하다고 엄마가 말려 갈 수 없는 탓에 더욱 그랬다. 하고 싶은 거 말리면 더 하고 싶은 마음 뭐 그런 거였을 것이다. 나를 본 일석 오빠는 내려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산소에 같이 가자는 뜻이었다. 잠시 주춤했지만 같이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엄마, 나 일석 오빠 따라 할아버지 산소 있는 곳에 갔다와도 돼?"

내 물음에 엄마는 선선히 그러라고 대답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때 쯤에는 두 오빠에 대한 경계심보다는 신뢰하는 쪽으로 마음이 바뀌어 있어서였을 것이다. 엄마는 사실 1년 전 두 오빠가 처음 절에 와서 하숙을 한다고 그랬을 때는 걱정을 많이 했었다.  딸을 넷이나 두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거기에 아직 어린 나는 포함되지 않았을 터이지만 그래도 경계의 눈을 늦추지 않았었다. 두 오빠에 대한 신뢰가 생기게 되기 전까지는. 아마 3개월 정도는 걸리지 않았을까?  살아보니 그 정도 기간이면 사람 됨됨이를 알아볼 수 있는 기간으로는 충분했다.


내가 계단을 따라 깡충깡충 뛰어 내려, 자기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일석 오빠는 환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태까지 전혀 볼 수 없었던 그런 모습이었다. 그동안은 늘 우울하고 자신감 없어 보이는 모습만 보여줬었다. 몸이 아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이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뭔가 생각을 많이 하는 듯한 모습이긴 했다. 그런 오빠가 나를 바라보며 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었다. 그 표정의 의미가 그토록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인지는 당시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일이었다. 꿈에서 조차도.

산으로 접어드는 곳에 들어서 있는 법당을 관리하는 스님이 살고 있는 작은 집을 지나자 일석 오빠는 내 손을 잡았다. 본격적으로 경사가 진 길이 나오기 시작하는 탓에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 된 것이다. 나도 당연하게 생각했다. 경사가 아주 심한 것은 아니었으나 혼자 걸어 올라가기보다는 손을 잡히고 가는 게 편해서였다.

"오빠, 노래 하나 불러 줘."

손만 잡고 아무 말없이 올라가는 게 뭔가 불편한 느낌이 든 나는 노래를 불러달라고 졸랐다. 그런데 이런 내 말에 일석 오빠는 무척 당황해했다.

"노래? 난 노래 할 줄 몰라. 음치인 걸."

"피이~, 주영 오빠는 하모니카도 잘 불던데."

순간 일석 오빠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드리우는 것이 보였다. 아차 뭔가 실수했나보다 싶었다. 재빨리 말을 돌렸다.

"오빠, 그럼 옛날 이야기 하나 해줘."

"옛날 이야기? 그런 것도 딱히 아는 게 없는데..."

일석 오빠는 말끝을 흐리며 손만 꼭 잡고 걸어올라 갔다. 부담스러웠다.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손만 잡고 가는 게 이리 부담스러운 일인 줄 처음 알았다. 어쩌는 수 없었다. 일석 오빠가 해결책을 전혀 못 갖고 있었으니. 좀 답답한 오빠라는 생각만 들었다. 아이들을 기쁘게 해 줄 그 무슨 재주도 없는 것 같아 보여서였다. 주영 오빠 같으면 멋지게 하모니카를 불어 줬을텐데라고 생각하며 자꾸 비교가 되었다. 10여분 정도 걸려 도착한 산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무릎에 앉히고는 두 손으로 깍지를 껴서 꼬옥 끌어 안고 있기만 했다.  눈은 산 아래로 보이는 서울과 경기도 북쪽 지역을 이어주는 길위로 이따금씩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면서. 때마침 라디오에서는 엘비스프레슬리의 Wooden Heart이란 곡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큰언니가 즐겨 들어서 나도 잘 알고 있는 곡. 순간 일석 오빠는 노래를 따라 입으로 흥얼거리며 장단을 맞췄다. 동시에 나를 안고 있는 두 손의 손가락들도 까딱까딱했다. 처음으로 본 흥이 난 모습. 잠깐동안 내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나 그때뿐이었다.  노래가 끝나자 손가락은 다시 멈췄고 눈빛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그 눈빛의 의미가 뭔지는 당시에는 몰랐다. 그 뒤로 계속 인연을 이어오면서 생각해 보니 자신의 앞날에 대한 생각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거기에는 나에 대한 생각도 당연히 들어 있었던 것이고.

"오빠, 나 먼저 내려갈래."

몇 분 쯤 지났을까,  거북스러워 더는 앉아있을 수가 도저히 없었다. 일석오빠는 나를 안은 그 자세로만 그냥 있었기에 그게 더 부담스러웠다. 주영 오빠라면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하면서 나를 즐겁게 해줬을텐데라는 아쉬운 생각도 들었다. 내가 허리에 둘려있는 일석 오빠 팔을 풀며 무릎에서 벗어나려 하자 일석 오빠의 얼굴에는 서운해 하는 빛이 역력히 드러났다. 일석 오빠 무릎에 앉아 TV를 보다가 불편함을 느껴 빠져나왔던 때와 똑같은 표정. 그런 일석 오빠를 남겨두고 나는 깡총강총 뛰어 산을 내려왔다. 뭔가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그 뒤로 산소에 다시 갈 기회는 없었다. 일석 오빠는 계속 산소를 오르내렸지만 어쩌다 나를 봐도 같이 가자는 손짓을 하지 않았다. 설사 했다고 해도 안 갈 생각으로 있기도 했다. 말 한 마디 안 하고 그냥 안고만 있는 것이 너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

"답장하지 말거라."

일석 오빠의 두 번째 편지를 본 엄마는 정색을 하며 엄명을 내렸다.

"무서운 청년일세. 편지 내용을 보니 겨우 국민학교 4학년 짜리 어린 것을 처음 봤을 때 한 눈에 반해 색시 삼을 생각을 했다는 거 아니냐? 하긴 좋은 일이긴 하다. 그토록 착실한 청년이 너를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니. 근데 왜 하필 어린 너래냐? 자그마치 8살이나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느냐? 난숙 언니야 동갑내기고 건강이 좀 안 좋아서 그렇다 쳐도 하숙 언니가 나이로도 딱인데. 하숙이 너한테는 아무 느낌도 없었어?" 

"아니, 그 오빠하고는 말도 몇 번 안 해봤어. 워낙 내성적인 사람이잖아. 거기다다 여자 보기를 무슨  하늘에 별같이 멀고 신비스러운 존재로만 보는 것 같았어."

끼가 좀 많은 하숙 언니는 낄낄대며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공부보다는 남학생들하고 편지질 하고, 만나는 게 취미인 언니였다. 사귀고 있는 남학생도 있는 것 같았다. 진지하게가 아니고 그냥 즐기는 정도. 하숙 언니는 그런 성격이었다. 난숙 언니는 좀 화가 난  표정이었다. 동갑내기인 자기한테는 편지 한 장 안 해준 때문인 것 같았다.

"나에게 아무리 관심이 없어도 그렇지. 무슨 애가 동갑내기인 나는 쏙 빼놓고 이런 편지질이라냐? 연숙이 너는 좋겠다. 명문대생인 데다가 잘 생기기까지 한 일석이가 너를 좋아하고 있다니."

난숙 언니는 나를 시샘하는 듯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이리 말했다. 내 감정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일석 오빠가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니. 무서운 사람이란 생각도 들었다. 내가 아무리 어려도 그렇지, 어떻게 2년이란 기간 동안 내색 한 번 안 하고 마음 속으로만 좋아하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다가 내가 조금 크니까 이렇게 편지로 마음을 알려오다니.

"어쨌든 안 된다. 좋은 청년이긴 하지만 집안 형편도 그리 좋은 것 같지를 않고. 특히 건강하게 사회생활을 할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잖니. 네 아빠를 봐라. 퇴직을 하고 요양을 하고 있는데도 좋아지는 기미가 안 보이지 않니. 가슴병이란 것이 그리 무서운 병이다.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거든. 다 제쳐두고라도 사회생활을 끝까지 잘 할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는 것 때문에 안 된다."

엄마의 결론은 결국 건강 문제 때문에 안 된다는 거였다. 아버지 때문에 마음 고생이 너무 심해서인 거 같았다. 

그즈음 집안은 분위기가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아버지의 건강 문제 때문은 아니었다. 쉽게 좋아지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빠지지도 않는 그런 상태였다. 문제는 경제적인 쪽인 것 같았다. 아직 본격적인 문제가 생기기 이전이었지만 엄마의 일수놀이가 생각처럼 잘 안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엄마가 시장에 갔다 온 뒤의 얼굴 표정이 밝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1년반 뒤에는 더 끔찍한 일이 생기게 되지만, 그래서 내 삶이 나락으로 굴러 떨어질 수밖에 없게 되는 일이 생기게 되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었다. 앞날을 미리 알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니 겪고 난 뒤에야 알게 되는 일이었다.  일석 오빠의 편지에 대한 답장을 하지 않기로 결정이 난 그때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


일석 오빠에 대한 내 마음도 그랬다. 그저 투병생활하러 온 나이 많은 오빠라는 감정 외에 특별한 건 없었다. 착한 사람인 것 같기는 했다. 의지력도 대단한 것 같았다. 2년간 투병 생활을 하고, 명문 고등학교도 아닌 실업계 고등학교 출신인데도 명문대학을 간 것으로 보아. 직접 공부를 해 본 큰언니는 혀를 내둘렀었다.

"참 대단한 사람이다. 얌전하기가 여자같아만 보이던 사람이 어디서 그런 의지력이 생긴거지? 그걸 보면 엄마, 내가 사람보는 눈으 있는 것 같아."

큰언니는 엄마에게 이리 말하며 스스로를 대견해 하는 듯 했다. 일석오빠가 그 정도일 줄까지는 미처 생각 못 했겠지만 자기가 잘 본 청년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에서 남한테 인정 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는 것이 흐뭇한 것 같았다. 큰언니의 이런 마음은 내 마음과는 관계가 없었다. 일석오빠가 명문 대학을 간 것이 대단한 것인 줄 큰언니 덕분에 알게는 되었지만 나라고 못할 것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국민학교 때부터 성적이 늘 상위권인 나였다. 노력하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내 생각은 실천으로 옮겨보지도 못하고 끝나버리고 말게 되지만,  꿈에서 조차 생각 못 한 끔찍한 일이 불과 1년반 뒤에 일어나 모든 꿈을 그야말로 꿈으로만 끝나게 만들어 버리지만 그때는 잔뜩 꿈에 부풀어 있었다. 내 앞에 황금빛 앞날이 펼쳐지는 꿈.  


그 얘기를 하기에 앞서 일석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해야겠다. 그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일석 오빠가 먼저 집에 나타났으니까. 3학년이 된 해 봄이었다. 벚꽃 필 무렵. 이제는 고무줄 놀이를 안 할 정도로 커버려 추억 속으로 들어가 버린 절 입구 공터 앞 개울가에 심어져 있는 벚나무들에 꽃이 피려 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바로 일석 오빠가 병색인 얼굴을 하고서 절에 처음 나타났던 그 시절 무렵. 일석 오빠로부터는 몇 번 더 편지가 왔지만 답장을 안 해서 그런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대신 본인이 직접 나타난 것이다. 씩씩한 군인 모습을 하고서. 휴가인 것 같았다. 일석오빠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내성적인 분위기는 여전했지만 뭔가 당당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2년 전 명문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왔을 때 하고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아마 군대가 그리 만들었을 것이다. 병치료 하겠다고 절에 처음 왔을 때와 비교하면 너무나 달라진 모습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하나씩 보여주고 있는 셈이었다.

엄마, 언니들은 조금 당황한 모습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큰집에서 하숙을 하며 지낸 인연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 불쑥 찾아온 것이 너무나 뜻밖이어서 일 터였다. 모두가 나 때문일 것이었다. 처음 본 순간 색시삼겠다는 생각을 한, 나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일석 오빠도 투병생활하던 기억만 있는 곳에 뭐 그리 큰 애착이 있어 찾아올 것인가?

엄마는 일석 오빠를 집에 들이지 않았다. 나를 좋아하는 일석 오빠의 마음을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오해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서 그런 것 같았다. 사실 엄마도 일석오빠에게 관심이 많았었다. 뭐 그렇다고 사위감으로까지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가 건강이 안 좋아 아무 것도 못 하고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게 안 돼 보여서였을 것이다.

두 오빠가 하숙을 하고 있던 첫 해 겨울이었다. 엄마는 두 오빠가 지내는 방이 추울 것을 걱정했다. 특히 몸이 안 좋은 일석 오빠를. 하숙을 치고 있는 큰집에서 걱정할 일을 엄마가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걸 보면 엄마도 일석 오빠가 싫은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몸이 너무 약하니 가족 관계로 엮이는 것을 꺼린 것이었을 것이다.

두 오빠가 묵고 있는 방은 사방이 다 문이어서 바람 들어갈 곳이 많았다. 특히 법당 옆 연못 있는 쪽 문이 심했다. 향도 북쪽인데다가 벽 전체가 문이라서 바람이 숭숭 들어갔다. 그런데도 하숙을 치는 큰어머니는 아무런 조치를 안 취했다. 두 오빠도 한창 왕성한 젊음을 자랑하는 나이라 그런지 그런 상태로 그냥 지내고 있었다. 문을 봉인한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를 보다 못한 엄마는 부랴부랴 밀가루로 풀을 쑤더니 창호지를 함께 가지고 가서 문틈을 다 발라버렸다. 겨울동안은 그쪽 문을 못쓰게 아예 못쓰게 봉인을 해버린 것이다. 바람도 못 들어가게. 그러고서는 "총각들, 겨울동안은 마루 쪽으로 나 있는 문으로 바깥 출입을 하도록 해"라고 말했다. 엄마는 또, 일석 오빠를 우리집에서 하숙시키고 싶어 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리 말하기도 한 것 같았다.

"좋다고 그럴 줄 알았는데 몹시 당황한 표정이더라. 내 짐작엔 큰집 생각을 하는 것 같았어. 같은 울타리 안에서 하숙을 옮겨버리는 게 잘하는 처신인가 그런 것을 생각하는 눈치였어. 자기도 우리 집에서 지내는 게 훨씬 좋은 걸 알고 있을텐데 말이야. 사람이 너무 착해서 그런 것 같아. 자기한테 이익이 될 줄 알면 그쪽으로 움직여야 되는데 명분 때문에 그리 못하는 것 같았어. 좀 답답한 청년이란 생각이 들더구나. 저리 영악하지 못해서 앞날을 어떻게 살아 갈 것인지 걱정스럽다."

엄마가 난숙 언니에게 하는 말을 들으니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엄마는 원래 그정도로 일석 오빠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이 변한 것이었다. 엄마가 들어내 놓고 말은 안 했지만 나하고는 안 맞는다는 생각을 했을 가능성이 많았다. 동갑내기 난숙 언니는 체쳐 놓고라도 몇 살뿐이 차이가 안 나는 하숙 언니라면 어땠을까. 그래도 반대했을까? 엄마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보지 않았으니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마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명문대생이 되어 있다는 것 외에는 탐탁한 게 별로 없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더 많았다. 특히 건강 문제. 이런 엄마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굳어지게 한 것이 바로

1년반 뒤 무렵인 겨울방학 전에 일어난 그 끔찍한 사건일 테고.

아무튼 일석오빠는 나를 봤으니 되었다는 표정을 하고서 돌아갔다. 내가 답장을 안 하는 것을 보고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는 걸 각오했었는지 서운해 하는 표정도 별로 없었다. 그냥 예전에 투병생활 했던 추억이 있는 곳에 들렸다는 그런 태도였다. 그게 일석 오빠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중이어서 그랬다는 건 상상도 못 했다. 흔들리고는 있지만 그래도 가장 큰 비중으로 일석 오빠의 마음에 남아 있다는 것도 역시. 그저, 어린 나를 보고 색시삼을 마음을 가진 사람이 내가 얼마나 자랐는가 보기 위해 엄마한테 박대당할 것을 각오하고 왔다 가는 모습으로만 보였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나를 다시 보러 나타날 것인지 아니면 이게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모습인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나를 이성으로 처음 좋아한 사람으로 죽을 때까지 내 가슴 속에 남아 있으리란 점만 분명했다. 

 

*

그렇게 일석 오빠가 돌아가고 난 뒤 우리집에는 끔찍스러운 비극이 들이닥쳤다. 초겨울 무렵이었다. 아직은 방학하기엔 이른 12월 초순 경. 내 삶을 송두리째 나락속으로 떨어지게 하는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일석 오빠와 관계된 일은 아니었다. 집안에 잠재되어 있던 일이 터진 것일 뿐. 조짐은 진작부터 있었다. 그러나 이런 비극으로 결말지어 지리라곤 식구들 그 누구도 생각 못 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만 것이다. 이유는 두 가지였을 것이다.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몸 그렇다고 나아질 가능성도 안 보이는 몸. 때문에 직장을 그만 둘 수밖에 없어서 가장 역할을 할 수가 없게 된데 대한 자책감과 무기력감. 가장 큰 이유는 엄마가 큰 돈을 남에게 떼인 일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매일매일 일수찍으러 다니는 일에 싫증을 내던 중 몫돈을 빌려주어도 안심이 될만한 집을 발견했었나보다. 엄마가 포목점을 할 때 거래하던 도매상. 재력있다고 소문이 나 있어서 큰 돈을 빌려줘도 절대로 떼일 염려가 없다고 판단 된 곳이었던 곳 같았다. 그러나 결과는 돈을 떼이는 것으로 끝이 나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 도매상 주인은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남의 돈을 빌렸고 어느날 소리소문도 없이 잠적해버렸다. 소식을 듣고 가게로 달려간 엄마의 눈 앞에는 돈을 떼인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님을 알게 된 것 외에는 건질 아무 것도 없었다. 너른 가게에 잔뜩 쌓여있던 그 많던 포목 원단들은 단 한 필도 남아있지 않았다. 부동산은 은행에 최대한으로 저당 잡혀 있었다고 한다. 담보 설정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한 푼도 건질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엄마가 부동산을 담보로 잡고 돈을 빌려줄 생각을 할 정도의 법률지식이 있었다면 등기부 등본을 확인했으면 될 일이었다. 엄마는 그런 법률지식도 없었을 뿐더러 설사 있었다고 해도  10여년 이상을 거래했던 곳인데 무슨 일이 있겠느냐 싶어 확인을 안 했을 것이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속담과 같은 경우를 제대로 겪은 것이다. 이 결과가 우리집에 미친 파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 났다. 너무 많은 돈을 떼인 탓에 생활 자체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뭐 먹고사는데 문제가 생긴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와 씽둥이의 앞날에는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상급학교에 다니는 게 쉽지 않은 상황이 되어린 것이다.  이런 와중에 그나마 다행인 일이 있었다.  하숙이 언니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큰언니는 이미 다른 집 식구가 되어 있는 점이었다. 


엄마가 큰 돈을 떼인 문제는 결국 엄마, 아빠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는 단초가 되었다. 부부싸움이 잦아진 것이다. 주 이유는 나와 쌍둥이의 교육문제였다. 나를 대학까지 보내려던 계획이 어긋났음은 물론이거니와 고등학교 진학도 불투명할 정도로 형편이 나빠져버린 때문이었다. 엄마는 이렇게 된 화풀이를 아버지에게 했다. 돈을 떼인 건 엄마지만 엄마를 이런 상황으로 내몬 게 아버지라는 이유에서였다. 가장이 수입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으니 엄마가 생활전선에 나설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갖고 있던 재산을 남에게 떼이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 아빠가 건강관리를 잘해서 직장을 조기에 그만두는 일만 없었으면 이런 상황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 아니냐는게 엄마의 논리였다. 아빠는 엄마의 이 말에 크게 반박을 못했다. 아빠의 퇴직금과 엄마가 하던 포목가게를 정리한 돈을 합쳐 은행에 넣고 그 이자만으로 생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큰언니 시집가는데 얼마간의 돈을 떼어내야 했을 것이다. 자식이 결혼하는데 금전적인 지원을 외면할 부모는 세상에 없을 것이고 이는 우리 엄마, 아빠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아빠는 이 모든 원인을 아빠 당신의 책임으로 돌렸다. 최종적인 책임은 엄마에게 있지만 엄마를 그런 상황으로 내몬 게 바로 아빠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못다 한 죄책감. 아빠는 이걸  스스로 세상을 버리는 것으로 풀겠다고 생각한 것이 틀림없었다. 아빠가 세상을 버린 그날, 그 일이 있기전에 엄마와 아빠는 대판 싸움을 벌였다. 아빠가 쓰고 있는 3층 방에서 두 분이 싸우는 소리가 1층까지 다 들릴 정도로 크게.  2층에 있는 하숙 언니와 내가 같이 쓰고 있는 방에서 싸우는 소리가 다 들려 난숙 언니와 쌍둥이가 쓰고 있는 1층 방으로 내려 온 것인데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장레식이 끝나고 며칠 뒤 엄마는 할아버지에게 불려갔다. 오래지 걸리지 않아 집으로 돌아 온 엄마 손에는 무슨 서류봉투 같은 게 하나 들려 있었다. 얼굴도 좀 밝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를 보자마자 이내 어두워졌다.

"연숙아, 엄마가 할 얘기가 있으니 나 좀 보자."

멈칫멈칫 엄마 곁으로 다가가 앉은 나에게 엄마는 청천벽력같은 통보를 했다.

"무악재 고개 근처에 있는 여상의 야간을 가거라. 낮에는 어디 사동일 할 데를 알아보고."

엄마는 딱히 미안한 표정도 없이 담담하게 이리 말했다. 어찌보면 이미 삶의 낙을 포기한 그런 상태로 보였다. 자식의 앞날이 가로막힌 기막힌 현실이 눈 앞에 펼쳐진 것인데도 어찌할 수 없는 부모의 찢어질 듯한 마음을 그리 표현하는 것 같았다. 그 책임이 엄마 당신에게 있기에 넋을 놓은 것 같기도 했다. 나 하나 잘못된 판단으로 자식의 앞길을 가로 막았다는 가슴 찢어지는 고통. 마음 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터였지만 자식 앞에서는 그 모습을 안 보이고 싶다는 오기. 아빠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엄마가 초래한 것이나 진배없다고 생각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비록 중매 결혼이었지만 엄마, 아빠 금실이 너무 좋아 행복하기만 했던 우리집이었다. 내가 밝고 명랑하게 클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너져버린 것이다.  엄마는 아직도 돌봐야 될 자식들이 다섯이나 있었다. 다 큰 난숙이 언니와 하숙이 언니는 부담이 덜 된다고 쳐도 나와 쌍둥이 동생은 아직 어린 나이였다. 특히 쌍둥이 남동생. 엄마는 나보다는 쌍동이의 앞날을 더 걱정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른 자식들이야 어쨌든 다 키운거나 다름없고 여자지만, 쌍둥이는 남자인데다가 아직 국민학생이니 이 뒷바라지를 어찌 해야 할 것인가를. 기댈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큰언니는, 사랑은 있으나 경제력은 없는 형부를 택한 탓에 자기네 살기도 빠듯했다. 그 미모로 자기 좋다는 남자들 중에 재력있는 남자를 하나 골라잡으면 됐을 터인데 그러지 않은 결과였다. 허울은 좋았다. 나라에서 첫째로 알아주는 국립 S대 출신이었으니까. 그러나 속빈 강정이었다. 전공 문제가 아니었다. 사회생활할 의지가 없었다. 회사 몇 군데 다녀보다가는 적응이 안 된다고 때려 치우고는 집안에서 하던 낚시가게에 들어 앉아 있었다. 먹여 살려야 할 처자식이 있는 사람이 자기 생각만 한 것이다. 그래도 처자식 앞가림 할 정도는 되었으니까 큰언니는 큰 불만이 없을 터였다. 문제는 형편이 어려워진 친정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언니가 좀 영악한 성격이었다면 결혼 전에 좋다고 따라다니던  돈 많은 남자들 중에 한 명을 결혼 상대로 택했다면 이럴 때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았겠는가.

"언니를 따라다니던 돈 많은 남자들 중 하나를 택해 결혼했으면 나나 쌍둥이나 이런 어려운 일은 안 겪어도 되잖아."

나 스스로 학비를 벌어 야간고등학교를 가는 것으로 결정된 그날, 나는 큰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울며불며 화풀이를 했다. 큰언니 좋다고 절까지 따라온 남자는 한두 명이 아니었다. 내가 목격한 것만도  두서너 명은 되었다. 그중에는 자가용까지 타고 온 남자도 있었다. 길거리에 자가용은 거의 볼 수 없던 시절이었는데. 그런데도 큰언니는 마다했던 것이다. 조건보다는 사람이 먼저야라는 영악하지 못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그런 성격이니 일석 오빠에게도 호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었을 테다. 큰언니는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연숙아, 진짜 미안하게 됐구나. 집안이 이리 될 줄 내가 어찌 알았겠니. 나야 사랑을 택한 것이니 큰 후회는 없다만 친정 동생들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는데 아무 도움이 못 될 형편이니 정말 면목이 없구나. 아무튼 힘내고 상황에 맞춰 살아보도록 하자. "

다 쓸데 없는 말이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던 것이다. 상황은 이미 벌어져 있는 것이고 이전으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삶에 복습은 없는 법이니까.


도움은 담임 선생님이 주었다. 공부 잘하고 붙임성있는 성격인 나는 늘 선생님들한테 귀여움을 받고 있었다. 그런 성격도 집안이 엉망이 되고 나서는 안으로 가라앉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바뀌게 되지만 그때까지는 아니었다. 아버지 장례를 마치고 등교한 날 담임선생님은 교무실로 나를 불렀다.

"연숙이, 아버지 얘기는 들었다. 안 됐다는 이야기뿐이 해줄 게 없어서 미안하구나. 혹 내가 도울 일은 없겠니?"

담임 선생님은 진심으로 나의 불행을 마음 아파했다. 나는 담임 선생님을 볼 때마다 일석 오빠의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나이는 아빠와 비슷할 50대 초반이어서 차이가 많이 났지만 분위기가 비슷했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 마음씨도 따뜻했다. 반 아이들 중에 집안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있으면 어떻게 하든 도우려고 애썼다. 학과도 같았다. 만약에 일석 오빠가 학교를 졸업하고 선생님이 된다면 담임선생님처럼 국어선생이 될 것이었다. 그리되면 학생들에게 자상하게 잘 해주리란 생각. 담당 과목도 열심히 가르치고 어려운 아이들도 잘 돌보아 주고.

"고등학교는 제가 학비를 벌어서 다녀야 할 것 같아요. 혹 낮에 일 할 수 있는 곳 있으면 소개해 주세요."

"그래? 그거야 쉬운 일이다. 대학교 동기 중에 대입학원에 있는 친구가 있거든. 강의하면서 학원 관리도 하는 친구니까 거기 알아보면 자리가 있을꺼야. 그나저나 안타까워서 어쩌냐? 너는 동일계 K여고로 진학해서 명문 대학을 가야 하는데."

나는 선생님의 그 말에 아무 대답도 안 했다. 할 수가 없어서였다. 내 앞에 들이닥친  가혹한 현실은 내 삶 자체가 고달퍼졌다는 것을 말없이 말해주고 있었다. 대학진학을 꿈꾸기는 커녕 고등학교조차도 내 스스로의 힘으로 다녀야 되는 상황이 되어 있음을.

겨울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담임 선생님이 소개해 준 학원으로 갔다. 어차피 나갈꺼면 하루라도 빨리 나가는 게 엄마나 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고등학교 입시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명문 K여고 진학을 준비하고 공부해 온 실력인데 그깐 실업계 야간 쯤이야 누워서 떡먹기일 것으로 생각되어서였다. 담임 선생님 동기분을 찾아가니 반색을 하고 맞아주었다.

"네가 연숙이로구나. 친구한테 얘기 다 들었다. 당장 내일부터라도 나오도록 하거라."

나를 본 담임 선생님 동기분은 매우 흡족한 표정이었다. 가지고 간 서류는 아예 보지도 않았다.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니 선선히 그리하라고 하셨다. 

"개학 후에 얼마 안 남은 수업은 교장선생님하고 상의해서 알아서 처리하마. 아무 걱정말고 졸업식 날에나 나오도록 하거라. 그것도 마음 안 내키면 나중에 시간 날 때 나한테 와서 앨범이랑 졸업장을 찾아가도록 하고."

교장 선생님도 나를 잘 알고 있었다. 학업 성적이 워낙 뛰어난 탓에 기대를 많이 한 학생 중에 한 명이어서였다. 그런 내가 급변한 집안 환경 탓에 실업계 야간고등학교를 간다는 말을 담임 선생님한테 들었을 때의 놀란 표정은 익히 상상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정년을 얼마 안 남기고 있는 분이니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겼었을 것인가. 그래도 나같이 하루 아침에 불행한 삶을 살게 된 제자는 그리 많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

내가 사동으로 나가기 시작한 학원은 대입 재수 전문학원이었다. 명문 S,Y,K대를 많이 합격시키기로 알려져 있는 꽤 유명한 학원. 학원도 학교처럼 등급이 나뉘어져 있었다. 이 학원은 그중 일류에 속했다. 본격적인 주경야독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삶. 꿈을 접고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 삶. 이리 힘들게 고등학교 3년을 다녀 졸업하고 난 뒤에는 취업을 해서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게 언제까지란 말인가? 문제는 쌍둥이 동생이었다. 몇 년 뒤 국민학교를 졸업하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돈이 들어갈 터였다. 중고등학교 6년, 대학교 4년. 대학은 무리라치고 고등학교까지만 해도  최소 6년은 뒷바라지를 해야만 된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닌 두 명. 내 젊음을 두 동생을 위해 몽땅 바쳐야 되는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내 바로 위 하숙 언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식구들 먹고사는 문제에 보탬이 되는 일이야 어느 정도까지는 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의 희생을 하는 것은 현명치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인 아버지가 안 계셔서 삶이 꼬인 것은 쌍둥이 동생이나 나나 마찬가지였다.  내 꿈은 얼마나 거창했던가? 명문대학을 나와서 아나운서가 되는 것이 내 꿈이었다. 이제는 이루어 질 수 없게 된 사라져 버린 꿈.


학원일은 그리 힘든 편은 아니었다. 아침 일찍 나가 선생님들이 있는 방을 청소하고 차 심부름과 잔심부름을 하면 되었다. 선생님들도 따뜻하게 잘 해줬다. 아직 어린 소녀티를 못 벗은데다가 사동을 일하게 된 집안 사정 이야기를 담임 선생님 친구분에게서 들은 터일 것이었다. 꿈을 접을 수밖에 없는 삶을 살게 된 한 소녀를 보는 안타까움. 학원생들은 나에게 무심한 편이었다. 직접 접촉할 일이 없어서일 터이기도 했지만 그들 모두가 일분일초가 아쉬운 생활을 하고 있는 탓이기도 했을 것이다. 내가 아직은 어린 소녀인 탓도 있었을까? 내가 학년이 높아지는데 비례하여 성숙한 소녀의 모습을 갖춰감에 따라 바라보는 시선들이 달라진 걸 보면 그런 면도 있을 것 같았다. 학원 선생님들 중에 나이 많은 분들은 처음에는 어린 딸을 보듯이 하더니 내가 학년이 높아짐과 비례하여 겉모습에 여인티가 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바라보는 눈길이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우리 연숙이가 이제는 아가씨 티가 나네"라면서 어깨를 툭툭 치는 선생님도 가끔은 있었다. 기분이 나쁠 정도는 아니게. 학원생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도 그건 바라보는 선에서 그치고 마는 일이었다. 무슨 특별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선생님들은 거의 다 가정을 가진 40이 넘은 분들이었고 학원생들은 자기 장래를 위해 지금 이 시간을 온 힘을 다하여 공부에 매진해야 되는 입장이었다. 잠시 한눈을 팔기라도 하는 날에는 바로 옆에서 공부하던 동료들하고 커다란 격차가 벌어질 수도 있는 극한상황이라면 극한상황이랄 수도 있는 환경에 놓여있는 처지. 그래도 꿈을 가지고 있는 모습들이었다. 부모를 잘 만나 마음 편하게 대학을 갈 수 있는 형편이 되거나 무리를 해서라도 가려고 해도 되는 젊은이들. 이들은 확연히 구분이 되었다. 여유가 있어 보이고 안 보이고의 차이. 부모를 잘 만났느냐 못 만났느냐의 차이는 그렇게 갈렸다. 어쨌든 그들이 부러웠다. 나는 이제는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 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들을 부러워하며 학비를 버는 일을 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는 그런 나날들. 스스로 학비를 벌어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 삶. 성격은 점점 내성적으로 변해갔다. 매사에 자신감이 넘쳐나던 지난 날은 언제였던가 싶게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내 성격이 변해가면서 문득 일석오빠 생각이 났다. 이 오빠의 그리 내성적이고 자신감 없어 보이던 성격은 결국 살아온 환경과 관계있을 것 같다는 생각. 내가 집안 환경이 바뀌면서 성격까지 바뀌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든 것이었다.


*

일석 오빠가 내 앞에 다시 모습을 나타낸 건  2학년이 된 해 이른 봄일 때였다. 벚꽃이 필 무렵. 마치, 미리 정해 논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를 보러 오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벚꽃이 필 무렵이라야 된다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교문 쪽을 향해 가고 있는데 교문 앞에 어딘가 낯익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산자락을 깍아 학교를 세운 탓에 교문 쪽은 지대가 낮은 쪽이었다. 교문 앞에 누가 와서 있으면 멀리서도 잘 보이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교문 앞에 남학생들이 와서 여자 친구일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가끔 보기는 했지만 나하고 관계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럴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낯 익은 모습이라니. 문득 일석 오빠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고 가까이서 보니 틀림없었다. 제대를 하고 복학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반갑기도 했다. 1학년 때 안 보인 것은 아마도 군에 있었던 탓일 것으로 짐작되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휴가를 안 나왔거나 나왔어도 일부러 나를 안 찾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느낌. 내가 야간 여상에 진학한 건 어찌 알았을까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듵림없이 큰어머니한테 가서 알아냈을 테니까. 일석 오빠는 나를 보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지금의 내 힘든 처지를 위로해 줄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일 가능성이 많았다. 그냥 나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학교에서 동네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빵집이 있지만 거기를 그냥 지나쳐서였다. 그 이유가 빵을 사줄 형편이 안 되어서인 것은 나중에 알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면서 일석 오빠를 만나러 다닐 때.

집에 가는 것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믿음이 있어서였다. 절에서 2년 동안 봐 온 일석 오빠는 내게 절대로 해를 끼칠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 더군다나 나를 색시감으로 점찍어 놓고 있다는 사람 아닌가? 내가 그 마음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 들이고는 나중의 일이었다. 당장은 무조건 믿을 수 있는 마음, 마치 친오빠를 대하는 것 같은 그런 마음이어서였다.

일석 오빠네 집은 학교 바로 근처 동네에 있었다. 큰길에서 골목을 통해 조금 높은 지대로 올라가는 곳이었다. 양옥집. 그 집이 일석 오빠네 집이 아닌 것도 역시 나중에 알았다. 집안 살림살이는 초라했다. 여유가 없는 집이라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일석 오빠는 아무 말이 없었다. 말이 필요없기도 했다. 마음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아닌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로 보이는 분이 밥상을 차려왔다. 정성은 들였으나 특별한 반찬은 없는 초라한 밥상.

"배 고플텐데 어서 먹어라."

일석 오빠가 한 말은 그게 다였다. 학교 수업이 끝나는 시간이 밤 9시반이니 당연히 배가 고파있으리라는 걸 알고 있다는 말투. 마음만 같으면 매일이라도 밥을 먹여 보냈으면 싶어하는 듯한 눈길. 내가 밥 먹는 걸 보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그런 모습. 제대 후 큰어머니한테 들렀으면 틀림없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알고 있을 터인데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눈으로만 말하고 있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나아가기는 커녕 단지 생존만을 위해 살아가야만 하는 삶이 되어버린 나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담은 눈빛으로. 밥을 다 먹고 나자 다시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 주었다. 가는 동안도 역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는 그런 모습으로 묵묵히 걸었다. 내 마음은 네가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는 듯한 모습이었다. 버스 정류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타야할 버스가 올 때까지 내 곁에 말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가슴 속에는 하고 싶은 수백수천 마디의 말이 쌓여 있음을 느낌으로 알겠는데도 마냥 그러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기다리는 버스가 오자 어서 타고 가라는 듯이 내 등을 가볍게 밀어주고 버스가 떠날 때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준 게 다였다. 나 역시 이런 일석 오빠를 아무 말없이 쳐다본 게 다였다. 우리 둘 사이에는 아무런 약속도 없었다. 언제 또 보러오겠다, 그러라는 등의. 아직은 그런 말을 할 사이도 아니었다. 내게 있어서 일석 오빠는 내 국민학생 시절에 할아버지 절에 투병하러 왔다가 나를 본 순간 색시삼을 생각을 한 사람이라는게 전부였다. 일석 오빠의 그런 마음을 받아들일 준비도, 때도 안 되어 있었다. 나는 아직 학생 신분이었다. 같은 또래끼리 연애하는 것이라면 모르지만 상대는 내 어린 시절에 이미 성인이 되어 있던 사람이었다. 서로 터놓고 말하기에는 아직 이른 그 무엇이 우리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이런 내 마음과 관계없이 이 오빠, 내년 이맘 때 쯤이면 틀림없이 또 나를 보러 올 것이라는 걸. 벚꽃이 필 무렵이면 어김없이 내 앞에 나타나리라는 걸. 그걸 나도 싫어할 이유는 전혀 없다는 걸. 오히려 기다리고 있을 마음이라는 걸.


*

시간은 지루하지만 빠르게 흘러갔다. 나는 다람귀 쳇바퀴 도는 것과 똑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졸업해 취업할 때까지는 똑같이 반복해야 할 나날들. 학원, 학교, 집. 집, 학원, 학교 순으로. 엄마는 일수놀이 대신 하숙을 치기 시작했다. 3층 아빠가 쓰던 방과 2층 하숙 언니와 내가 같이 쓰던 방에다가. 하숙 언니와 나는 1층 방에서 난숙 언니와 같이 지냈다. 엄마는 쌍둥이와 부엌 옆 작은 방으로 옮겨 지냈다. 하숙 언니는 그리 크지 않은 제조회사 경리사원으로 쥐직해 다녔다. 공부하기를 싫어해서 스스로 여상을 간 게 집안 어려울 때 보탬이 되었다. 난숙 언니 건강은 아직은 견딜만 했다. 천천히 조금식 나빠지는 병이라서 그런 것 같았다. 하숙생이 들어오면서 엄마는 이마 주름살이 조금은 펴지는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내 생활이 바뀔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 식구들 먹고사는 문제에 조금 도움이 되는 정도였다. 엄마는 하숙을 치기 시작하면서 1층에서 2, 3층으로 통하는 문을 봉해버렸다. 하숙생 밥은 부엌에서 2, 3층으로 통하는 바깥 출입문을 통해 날랐다. 하숙 언니와 나는 하숙생이 누구인지 모르고 지냈다. 난숙 언니는 엄마를 도와 2, 3층을 드나들었으나 하숙 언니와 나에게는 일체 노코멘트였다. 엄마의 엄명도 있었을 테지만 하숙생들에게 관심을 기울일 정도로 우리 모두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일석 오빠와 주영 오빠 있던 때가 우리 자매들에게도 전성기였던 것이다.


이듬해 봄, 일석 오빠는 다시 교문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나를 보고 간 지난 해로부터 정확히 1년 뒤. 역시 벚꽃이 필 무렵이었다. 계절로만 보면 마음이 한없이 들뜨기 시작할 수도 있는 때. 나하고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내가 계절을 즐길 마음의 여유가 어디 있는가. 그러고 싶어도 현실이 그렇지 못했다.

이제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있었다. 꿈을 향해 나아가기는 커녕 하루하루를 힘들게 견디면서 지내온 생활이 어느새 3년 째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1년만 더 고생하면 취업을 해서 그래도 조금은 나은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거였다. 어릴 적 꿈꾸었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일 터이지만 그래도 조금은 나아질 삶.  당연히 물질적인 거였다. 주간에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학교를 갈 시간에 나는 직장인 학원에 갔다. 강사실을 쓸고 닦고 난 뒤에 커피를 달라는 선생님들에겐 커피를 갖다 드리고 이런저런 잔심부름을 하는 생활. 학원 일이 끝나면 학교에 가서 취업을 위주로 한 과목인 주산과 부기를 열심히 배웠다.  대학 입시에도 필요한 과목들은 교과편성에서 저멀리 뒷전으로 밀려 있었다. 기업체들이 요구하는 과목들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좋은 평을 듣고 있는 큰 업체에 취업을 하려면 학교 성적이 좋아야 되었다. 학교가 야간이란 핸디캡 때문에도 그랬다. 기업체에서는 주간에 다니고 있는 아이들을 먼저 선호할 것이 틀림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성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충격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금씩 잊혀지면서 자연스럽게 생기기는 했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아침 7시면 학원에 출근해 일하고  저녁에 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에 들어가는 시간은  10시 반은 되어야 했다. 학교를 안 나가도 되는 방학때는 그래도 시간 여유가 있기는 했다. 그렇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닐 기분은 아니었다. 잠은 늘 부족했다. 당연히 몸은 늘 지쳐 있었다. 이성에 대한 관심을 갖기 보다는 집에서 쉬면서 지내는게 더 좋았던 것이다. 학원에 외견상으로 봐서 나하고 짝이 될만한 나이대의 청년들을 늘 볼 수 있어서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덜 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일석 오빠에 대한 부담도 있었다. 오빠의 마음을 받아들인 것은 아직 아니었지만 그 마음의 진정성만큼은 알고 있기에 그랬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의지력이 강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더구나 명문대생 아닌가. 이것만 가지고도 이제는 나에게 과분할 수도 있는 상대인것인지도 몰랐다. 명문대생과 야간여상 출신 사이. 그리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었다. 명문대생이면 여고 출신을 거들떠보지도 않을 가능성도 있는 것 아닌가.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닐 터였다. 그래도 주변에 여대생들이 즐비한데 굳이 여고 출신한테 눈길을 줄 일은 없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니 일석 오빠는 나를 안 보고 지내는 1년 365일 중 364일을 다른 이성과 아무런 인연을 맺지않고 지내고 있는 것일까가 궁금해졌다. 직접 물어볼 수는 당연히 없었다. 감으로만 느껴야 되는데 잘 알 수 없었다. 워낙 자기 감정을 겉으로 들어내지 않는 성격인 때문이었다. 뭐 아무려면 어떠랴 싶기도 했다. 나는 아직 마음의 결정을 못한 상태이고 내 마음이 끌리는 상대와 사랑도 못해 본 상황 아닌가?  일석 오빠는 나 아닌 다른 여자와 사랑을 했을 수도 있을 터인데 말이다.


일석 오빠가 교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날은 이번에는 토요일이었다. 학교 수업이 일찍 끝나는 날이라 조금은 시간 여유가 있는 날.  수업이 끝나고 막 교문을 나서려는데 일석 오빠의 모습이 보였다. 1년만에 보는데도 엊그제 본 것 같은 그런 모습을 하고서. 이번에는 집이 아니고 학교 근처에 있는 빵집으로 데리고 갔다. 제과점이 아니고 찐방과 만두를 파는 집. 제과점은 학교 근처에 있지도 않았다. 여상을 다니고 있다는 것은 주간이고 야간이고를 막론하고 집안이 대학을 갈 형편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 집 아이들이 재과점에 드나들 수 있는 돈을 주머니에 넣고 다닐 리가 없었다. 가게를 열어봤자 장사가 될 턱이 없는 것이다.

빵집 안에 들어서니 먼저 와서 빵을 먹고 있던 아이들이 호기심에 찬 눈길로 일석 오빠와 나를 바라봤다. 나이 차가 있어 보이는데 무슨 사이일까 궁금하다는 눈초리였다. 일석 오빠는 그런 아이들을 전혀 의식 않는 듯한 태도로 빈자리를 찾아 내게 앉기를 권했다.  절에서 투병생활하던 때와는 영 다른 모습이었다. 남 앞이라면 여자고 남자이건 간에 쩔쩔매던 모습이 전혀 안 보이는 것이었다. 특히 여자 앞에서 무척 심했었는데.

일석 오빠가 절에 있을 때였다. 큰언니는 일석 오빠에게 미제분유를 사다주기 시작했다. 일석 오빠가 큰언니의 난숙 언니를 통해 한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큰언니가 사온 우유를 내가 갖다 준 다음날 아침, 일석 오빠는 큰언니 출근길에 마당에 나와 있었다. 아마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그러는 것 같았다. 퇴근 시간이 일정치 않은 데다가 대부분 늦은 밤이나 되어야 하는 큰언니 생활을 보고 출근 시간에 인사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을 터였다. 그런데 모습이 이상했다. 큰언니 앞에 서기는 했는데 말을 못하고 쩔쩔매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날따라 학교를 가기 위해 큰언니를 따라나섰던 나는 그 모습을 고스란히 보게 되었다. 어머 어쩌면 남자가 돼가지고 말 한 마디 못하고 저러고 있을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 같으면 씩식하게, 도움을 줘서 고맙습니다라고 그랬을 터인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래도 큰언니는 오히려 그걸 더 좋게 본 것 같았다.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나에게 "저 청년 참 순진하기도 하다. 어쩌면 여자 앞에서 저리 쩔쩔 맬수가 있니" 그러면서 기분좋아 하는 것이었다.  

그랬던 일석 오빠였는데 무엇이 이 오빠를 이리 변하게 만들었을까 궁금했다. 답은 내 나름대로 정리했다. 이제는 별 볼 일 없는 실업계 고등학교 출신이 아닌 명문대생인 데다가 그 힘들다는 군대생활까지 마친 데서 나오는 당당함일 것이라고.

"많이 힘들지?"

자리에 앉아 주문한 빵과 만두가 나오자 일석 오빠가 나에게 한 말이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들어 본 말. 일석 오빠를 처음 본 게 국민학교 4학년 초일 때였으니까 무려 8년이 지나서였다. 사실 그동안 할 말이 없기는 했다. 할 기회도 없었다. 햇수로야 8년이지만 투병생활하느라 절에 머문 2년 동안은 내가 너무 어렸었다. 일석 오빠는 어린 나를 어린애로 보고 상대할 주변머리가 없는 상태였었다.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자체를 자신없어 하는 성격. 더군다나 미래의 색시감으로 점찍고 있었었다니 그 순진한 성격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인가. 아마 나를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뒤로는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편지 몇 번, 군에 있을 때 휴가 나와서 절로 나를 보러 온 거 한 번하고 작년에 학교 앞에 나타났던 게 전부였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빵 한 개를 입에 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힘들다는 걸 굳이 말할 필요가 없어서였다. 일석 오빠도 다 알고 있으면서 의례적으로 그리 묻고 있는 것일테니까.

"오빠도 학교 휴학했다. 지금은 사립 S대학에서 사무직원으로 일하고 있어. 2년 째 되어간다. 너도 알지? 창경궁 옆에 있는 후기대학."

나는 하마터면 입에 물고 있던 있던 빵을 떨어트릴 뻔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마른 하늘에 날벼락같은 소리인가 싶어서였다. 일석 오빠는 지금, 그 힘들게 들어간 대학을 휴학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눈이 휘둥그레져 입에 물었던 빵조각을 접시에 다시 내려 놓으면서 일석 오빠 얼굴을 쳐다봤다. 이때가 아마 일석 오빠 얼굴을 가까이서 제대로 쳐다 본 처음이었을 것이다. 안경 안으로 보이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눈빛이 맑고 선했다. 군대까지 갔다왔으면서도 절에서 투병생활할 때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 그런데 어디가 모르게 많이 우울해보였다. 1년만에 나를 만나고 있다는 기쁨을 넘어선 것 같은 우울해 보이는 모습.  분명 나하고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나에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너도 내 사정을 알고 있어야 된다는 듯이. 너무 놀란 나머지 멍한 표정을 하고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나를 보더니 일석 오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주 담담한 말투로.-------

"아버지한테서 송금이 끊어진지가 꽤 오래 됐어. 월남전이 끝나면서 일자리가 없어지자 이란 쪽으로 넘어가신 모양인데 뭐가 잘못 된 것 같아. 생활비 송금은 커녕 소식조차 알 수 없는 상태야. 그래서 내가 가장 역할을 하고 있어. 어머니하고 두 여동생의. 특히 막내 여동생 고등학교 공부는 내가 책임지고 시켜줘야 돼. 지금 1학년이야."

일석 오빠의 이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리 속을 스쳐간 생각은 두 가지였다. 이 오빠도 내 구세주 역할을 하기는 틀린 것 같다는 것과 나하고 똑같이 꿈을 접은 삶을 살 수밖에 없겠구나라는 생각. 어느 쪽이 더 비중이 클까를 따진다면 전자 쪽이었다. 너무 이기적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지금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의 질곡은 나혼자 힘으로는 결코 벗어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구세주가 나타나야만 되는 일이었다.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면서 평생을 같이 할 사람. 당연히 물질적으로 쪼들리면 안 되었다. 풍족하면야 더 좋겠지만 거기까지 바라는 건 욕심 같았다. 내가 지금 받고 있는 고통이 바로 물질적인 궁핍에서 온 것 아닌가. 일석 오빠도 그렇다는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것이고.

배는 한창 고팠지만 빵을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서였다. 일석 오빠가 빵을 먹으라고 거듭 권유하는 탓에 어쩔 수 없이 먹는 척은 했지만 접시에 있는 빵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머리만 정신없이 어지러웠다. 일석 오빠와의 관계를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 없어서였다.

일석 오빠는 나에게 있어 이성으로 존재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냥 절에 투병생활하러 온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오빠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투병생활이 끝나 자기 일상생활권으로 돌아가면 인연이 아예 끝나버릴 수도 있는 그런 관계였던 것이다. 그런데 몇 년 뒤에 느닷없이 나를 이성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뜻을 편지로 전해왔었다. 기분 나쁠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좀 당황스러웠었다. 어떻게 겨우 국민학교 4학년 짜리 어린아이를 보고 색시 삼을 생각을 하고, 그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가 느닷없이 편지로 알려 올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뭐 마음 먹는 건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 상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일석 오빠는 그런 조건도 채 갖추고 있지 못 한 채 나를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로 달라진 건 명문대생이 되어 있다는 것 외에는 좋은 조건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인 거고. 그런데 그 어렵게 들어간 대학도 집안 형편 때문에 그만 뒀다는 이야기를 지금 나에게 하고 있는 것 아닌가 말이다.

"오빠, 거기는 어떻게 알고 들어갔어요? 더구나 졸업도 못했잖아요."

나도 일석오빠에게 처음으로 제대로 해 본 말이었다. 안 기간이 어느새 8년이란 세월이 흘러있었지만 제대로 말해 볼 기회는 없었다. 내가 어렸던 시절인, 일석오빠가 절에서 투병생활하던 기간에조차 그랬다. 주영오빠에게는 까불거리면서 재잘대기도 잘했지만 일석오빠에게는 그럴 수가 없었다. 어딘가 모르게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가 일석 오빠의 성격이 내성적인 탓에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접근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겨서인 것은 내가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한 뒤에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내성적인 사람들은 다 그렇다. 자기가 남들에게 접근하는 것을 자신없어 하다보니 남들도 접근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일석 오빠가 그렇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변해버린 나도 마찬가지였다. 스승의 날 찾아 뵌, 학원에서 사동일을 하도록 소개해 준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너무나 변해버린 나의 모습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었다. 겉으로 들어내 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집안 환경이 급변했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이리 달라질 수가 있을까 하는 표정이었다. 하긴 나도 내가 이렇게까지 변해버린 것이 신기할 정도였으니 나를 알고있던 다른 사람들이야 뭐 말할 게 있을 것인가.

 "직원 채용 공고가 신문 구인 광고란에 조그맣게 났더라. 서울시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놓고  임용 통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에 구인광고란을 습관적으로 뒤적거리고 있었는데 그때 눈에 뜨인거야. 잘 됐다 싶어 지원을 했지. 졸업을 못 했으니 고졸로 학력을 낮춰 시험을 본 거고. 그런데 서울시보다 발령이 빨리 나서 지금 다니고 있는거야. 행운이다 싶었지. 졸업을 못 한 탓에 대학생활에 대한 아쉬움이 많았는데 이게 저절로 해소된 데다가 근무환경이 너무 좋아. 공대 학장실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방을 혼자 쓰고 있어. 하는 일도 별로 많지 않아. 오전 중에 각 학과에서 요청하는 간단한 일 처리만 끝나면 내 공부 할 수 있는 시간이 나거든. 그래서 이곳에 근무 중에 서울시에서 임용 통지가 왔는데도 안 갔다. 봉급이야 어차피 별 차이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거지. 그렇다면 공부할 시간이 나는 이 직장이 더 좋다는 생각이 든거야. 졸업은 못했지만 그래도 명문대학 출신인데  5급 공무원 생활 한다는 게 마음에 들 리가 없잖아. 서울시 공무원이든 대학교 직원이든 봉급이 작아서 평생직장으로 다니는 것은 어차피 안 되거든. 그렇다면 보다 더 좋은 직장으로 옮기기 위해 필요한 실력을 키우는데 유리한 지금 직장이 낫다고 판단한 거지. 

"근데, 어떻게 대학에서 직원 모집 공고를 신문에 냈대요? 무슨 기업체도 아니면서."

"그러게 말이다. 나도 그게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아무래도 대통령하고 관계가 있는 것 같아. 내가 다닌 대학도 행정직원들 공채하는 건 못 봤거든. 다 알을알음 연줄로 채용했다고 하더라구."

"설마 그럴라구요. 대통령이 뭐 할 일이 없어 대학에서 직원 몇 명 채용하는 것까지 일일이 간섭하겠어요."

"그게 나도 이상하긴 한데 아마 이런 거 같애. 지금 대통령이 정통성은 없잖아. 쿠테타로 집권한 거니까 말야. 그래서 민심을 얻으려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거 아닌가 싶어. 그 방안의 하나로 모든 직원 채용은 공개경쟁으로 하라고 지시를 내린 것 아닐까 싶어. 아무런 사회적 배경은 없으나 능력이 되는 사람들 사회진출 길을 제도적으로 열어놓으면 이런 사람들은 자기를 지지하지 않갰어? 좋은 아이디어인 거지. 당장 나만해도 대통령한테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거든."

나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졸업을 하면 학교장 추천으로 취업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형식적인 필기 시험은 치르겠지만 선배 언니들이 거의 다 그런 과장으로 취업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개채용이라니. 남자라서 그런가? 아무튼 일석오빠처럼 아무런 배경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잘 된 제도인 것 같았다.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나 자기 주변 사람들만이 아닌 국민 모두를 생각하는 정책을 편다는 건 권력을 어떻게 쥐었는가보다 중요한 일 같이 생각되었다. 합법적으로 권력을 쥐었다고 해서 통치를 잘 한다는 보장은 없는 법일 터이니까.  일석 오빠처럼 성실하지만 아무런 배경이 없는 사람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는 제도라면 만든 동기가 어떻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별로 없는 편이지만 잘 하는 정책인 것 같았다.

"연숙이 너는 앞으로 어떻게 할꺼니? 다니고 있는 학교가 알아주는 여상이니 졸업하면 취업은 쉽게 되겠지만 보수는 그리 많지 않을텐데."

그럴 것이다. 취업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비록 야간이지만 나라 최고의 여상인 탓에 성적만 우수하다면 취업 자체에 어려움은 없는 것을 졸업한 선배들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선생님들도 이걸 대단한 긍지로 여기고 있었다. 너희들 스스로 관리만 잘 하면 취업은 얼마든지 가능하니 학교에서 가르치는 수업만 열심히 잘 따라하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얘기하곤 했다.

봉급은 당연히 적을 것이다. 당장 일석 오빠도 고졸자로 들어간 탓에 봉급이 적다고 하지 않는가. 더군다나 나는 여자니까 더 적을 것이 틀림없었다.

"뭐 특별한 계획은 없어요. 어차피 내 뜻과 관계없이 힘든 길로 접어든 삶인데  감수하며 살아갈 수밖에요."

자연스럽게 이런 말이 나왔다. 내가 생각해도 여고 3년생 입에서 나오기에는 너무 어른스러워 보일 말.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생활 전선으로 내몰린 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리 변해 있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살아가는 일이 결코 즐겁지 않다는 것을, 아니 그 반대인 것을 알아버린 게 벌서 3년째 접어들고 있지 않은가. 나를 이 지옥같은 삶에서 벗어나게 해 줄 무슨 특별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고. 

"쌍둥이가 내년에는 중학교 들어가지?"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골치 아픈 문제인데 왜 이런 것까지 묻는가 싶어서였다. 사실 쌍둥이 동생 문제는 지금 집안에 닥친 제일 큰 걱정거리였다. 엄마가 머리를 싸매면서 고민할 정도로 큰 사안인 것이다. 둘은 내년이면 중학교를 가야된다. 그런데 지금 집안 형편으로는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기본 생활비가 급격하게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거기다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었다. 한 명이라면 어떻게 감당이 되겠지만 둘이라 너무 벅찰 것이다. 설사 내가 취직을 해서 돈을 번다고 해도 부족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이 골치 아픈 문제를 일석 오빠가 왜 묻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나에게 하고 있는 얘기를 들어보면 자기 발등에 떨어져 있는 문제도 보통 큰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 힘들게 들어간 대학도 중도에 그만두고 고졸 봉급을 받아가며 지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걸 물은 이유가 자기와 나를 연결시켜 생각한 것임은 나중에 알았다. 이 오빠의 마음이 처음 나를 봤을 때 마음만큼은 아닌 이유 중에 이 문제도 포함되어 있는 것임을.

"이게 오빠 직장 전화번호야. 졸업하고 자리 잡히면 연락해라. 마음 안 내키면 연락 안 해도 되고."

내가 빵 한 접시를 그럭저럭 다 비운 것을 본 일석오빠는 자기 연락처를 내게 내밀었다. 말하는 뜻이 학교로 더는 안 찾아오겠다는 것으로 들렸다. 하긴 그럴 기회도 이젠 없을 것이다. 내년이면 내가 졸업을 하니 일석 오빠가 지금까지 해 온 관행(?)인 1년에 한 번 나를 보러 나타나는 일을 할 곳이 없어지는 탓이었다. 대신 내년이면 사회인이 되는 것이니 원하면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 상황이 되는 것인데 그러기는 커녕 나보고 연락하라고 그러고 있는 것이다. 선택권을 나에게 주겠다는 뜻인 것이다. 나는 이 오빠가 갑자기 왜 그러는가 싶었다. 지금까지는 내가 학생 신분이니 이것저것 마음에 걸려서 그러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누구의 눈도 거리낄 일 없는 사회인이 되는 것인데 오히려 연락을 안 하겠다고 그러고 있는 것 아닌가? 잠깐의 시간이지만 곰곰히 생각해봤다. 이 오빠가 이런 말을 하는 의미가 무엇일까를. 답은 두 가지로 나왔다. 일석 오빠를 대하는 나의 마음과 일석 오빠가 나를 대하는 마음 둘 다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


일석 오빠는 그동안 나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기 마음만을 일방적으로 표현해 왔었다. 군에 있을 때 한 번 거른 것 빼고는 매년 내 앞에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일석 오빠도 자신의 이런 행동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동안은 내가 학생 신분인 탓에 내 감정을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저 일방적으로 자기 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충분했다는 생각. 그런데 이젠 그게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내년이면 성인이 되는 것이니 내 마음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의 선택은 네가 하라고 그러고 있는 것이다. 시시콜콜 자기 집안 이야기까지 한 것은 내가 마음의 결정을 빨리해주기를 바란다는 뜻인 것 같았다. 자기 마음을 받아들여 오빠가 아닌 연인 관계로 갈 것인지 아닌 지를 결정하라는 뜻이 담겨있는 것이다. 적극성을 띄기에는 자신의 여건이 너무 안 좋은 때문인 것 같았다. 이 안 좋은 여건 탓에 자기 꿈을 제대로 펼 수 없는 현실이 너무 싫은 것 일수도 있겠다는 점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만약에 자기 꿈대로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면 일석 오빠가 먼저 내곁에서 멀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 될수도 있을 것이라는 것도. 1년 뒤 일석 오빠를 계속 만나면서 알게 되기 전까지는 몰랐던 일이었다. 이날 일석 오빠는 나에게 그리 숙제를 안겨주고 갔다. 풀 수 있는 기간은 아직 넉넉히 남아있으니 잘 선택해서 연락을 하든지 말든지 하라는 숙제.


많이 고민됐다. 마음의 결정을 하고 연락하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난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결론은 무엇하나 좋은 일은 있을 것 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엄마의 반대도 심할 것이었다.

"사람은 착하고 좋은데 건강이 문제야. 언제 재발할지 알 수 없는게 그 병이야. 웬수같은 놈의 병."

엄마는 폐결핵의 폐자만 들어도 진저리를 쳤다. 지아비가 스스로 세상을 등질 수밖에 없게 만든 무서운 병이었다. 그런데 그런 끔찍한 병을 앓은 전력이 있는 일석 오빠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내가 딸 가진 입장이 되더라도 엄마 마음과 같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일석 오빠의 마음을 일단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금으로선 일석 오빠밖에 의지할 데가 없기도 한 탓이었다.

학원에 다니고 있는 재수생들은 나에게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빼어난 미모까지는 못될지라도 예쁜 편인데도 그랬다. 거울을 볼 때마다 턱이 조금 나오지만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한 외에는 다른 여자애들에게 빠지는 점도 없다고 생각되었다. 어릴 때 주영오빠가 귀엽다고 만지던 턱은 키가 자라면서 같이 자랐다. 흉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썩 보기가 좋은 것도 아닌 그런 모습으로. 턱만 남들처럼 쏙 들어가있다면 그 누구하고 비교해도 뒤질 것 없는 외모였다.

학원생들은 영악했다. 공부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라 이성에게 마음을 쓸 여유가 없는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나의 처지가 그대로 들어나 있는게 더 문제였을 것이다. 집안이 가난해서 스스로 학비를 벌어 야간학교를 다닐 수밖에 없는 아이. 그렇다고 아주빼어난 미모를 가진 것도 아닌 아이. 아마 나를 보며 그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어쩌는 수 없었다. 집안이 기울지만 않았다면, 그래서 나도 너희들처럼 대학 갈 여건이 되어 대학을 갈 준비를 하고 있다면 있다면 네까짓 것들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야라는 생각을 혼자 하면서 속상함을 달래야 했다.



*

일석 오빠의 마음을 일단 받아들이기로 최종적으로 결정한 것은 졸업하기도 전에 취직이 되고 나서도 몇 달이 지난 뒤였다. 공교롭게도 일석 오빠를 처음 보고 만났던 시절과 같은 벚꽃이 필 무렵이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이 계절이 내 마음 속에 들어와 박혀 있던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마음을 정해놓고도 연락하는 것을 밍기적거리고 있었는데 이 계절이 되자 저절로 연락할 마음이 생겨난 것이었다. 이성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결코 싫어할 수 없는 사람인데 이제는 내 앞에 안 나타나리라는 생각에 마음이 초조해져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결과가 어찌되든 우선은 내 주변에 있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고.  꼭 알고 싶은 일도 있었다. 도대체 나의 어느 점을 봤길래 고작 국민학교 4학년짜리 어린 소녀를 보고 색시 삼을 생각을 했었는가를 이제는 물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토요일 오후였다. 한 주간의 스트레스를 날려보낼 수 있는 퇴근이 임박한 시간. 일석 오빠에게 전화를 했다. 그동안 수도 없이 꺼냈다 넣었다 하며 망설이기만 하다가 다시 집어넣곤 했던 일석 오빠 전화번호가 적혀 있는 수첩을 이번에는 단단히 손에 챙겨 잡고서였다. 마음의 결정을 단단히 하고 있음을 나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고서. 그래도 일석 오빠의 전화번호를 돌리는 손가락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 000대학교입니다."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교환양의 목소리가 내가 일석 오빠에게 한 발자국 다가서고 있다는 걸 실감나게 했다. 퇴근 시간이 지났을텐데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았다. 내가 모르고 있는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알고 있는 일보다 더 많을 것이었다. 뭐 그런 일이 이 학교에 있는 것 아닌가 정도로만 생각했다. 지난 세월은 일석 오빠가 찾아오는 것을 그냥 받아들이기만 했던 날들이었다. 햇수로는 8년. 이제 9년 째로 접어들어 있었다.  기간은 이리 오래 되었지만 얼굴을 자주 본 것은 절에서 투병생활 하던 2년 동안 뿐이었다. 투병생활이 끝난 뒤 6년간은 1년에 한 번 정도 본 것이 고작이었던 오빠였다. 그것도 군 복무 중에는 두 번뿐이 못 본 것이고.

"이공대 학장실 좀 부탁합니다."

"연결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교환양의 목소리가 너무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소리에 반해 데이트 신청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 정도였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상상 속에서는 수도 없이 많은 꿈을 꾸게 하는 그런 목소리. 꿈과 현실이 똑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언제나 다른 게 바로 이 꿈과 현실이었다. 창공을 활개짓하며 날아다니고 싶은 내 마음과는 달리 옴짝달싹 할 수 없는 현실에 얽매여 있는 내 몸처럼.

"이공대 학장실입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일석 오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딘가 좀 쉰 듯해 보이는 목소리. 그 목소리가 귀에 거슬리지 않고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은 목소리도 마음 상태를 반영하여 나오는 것이어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을 보면 어느 정도 성격을 알 수 있듯이 목소리도 역시.

"오빠 나예요. 연숙이."

"응, 오랜만이구나. 졸업하고 어디 취직해 다니고 있지?"

"네, 토건회사에 다니고 있어요. K토건이요."

"으응, 그 회사 나도 안다. 워낙 큰 회사라 신문에도 자주 나더라. 근데 어쩐 일이야? 난 졸업하고도 도통 연락이 없길래 이젠 인연이 끝났구나 그리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미안해요 오빠. 그동안 머리가 좀 복잡해서 그랬어요."

"그랬구나. 그럼 이젠 정리가 다 된거야?"

"뭐, 대충은요."

일석 오빠는 반색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싫어하는 것도 아닌 담담한 목소리로 내 전화를 받았다. 늘 그렇듯이 속내는 전부 감추고 최소한의 행동으로 마음을 들어내는 그런 성격. 속으로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을 터인데도 애써 겉으로는 들어내지 않으려는 마음.

"그냥, 퇴근하려다가 오빠 생각이 나서 전화했어요."

벚꽃이 필 무렵이 되어서 그런가보다라고 덧붙여 말할까 하다가 이내 참았다. 너무 속마음을 들어내는 것 아닐까 싶어서였다. 그동안 일석 오빠와의 인연이 계속 이어진 것이 바로 이 계절일 때였으니까.

"그래. 그럼 이리로 올래? 전기 명문대는 아니지만 꽤 유명한 대학이니 학교 구경도 할 겸. 나는 지금 한창 공부 중이거든. 학교 위치는 알지?"

"그럼요. 그럼 지금 바로 갈께요."

"그래라. 이공대학 찾아서 3층에 있는 학장실 바로 옆에 있는 방으로 오면 돼. 교문에 들어서면 산 쪽으로 나 있는 큰 길이 하나 보일거다. 그길로 쭈욱 올라오면 잔디 광장이 보이고, 그 광장에서 왼쪽으로 대각선상에 있는 건물이야. 학교 안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니까 쉽게 눈에 뜨일꺼야. 참, 올 때 하이힐은 신고 오지 말아. 학교가 경사진 곳이 많아서 힘들거야."

일석 오빠와 만날 약속을 하고 회사 문을 나서는 발걸음이 많이 가벼웠다. 그동안 묵은 숙제를 푼 것 같은 마음이 들어서였다. 삶이라는 것이 수학 문제를 풀듯이 정답이 미리 나와있는 것이 아니라는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이로는 좀 이른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엄마의 재산 관리 실패. 이에 따른 아버지의 죽음. 이어따라온 가난으로 스스로 학비를 벌어 학교를 다닐 수밖에 없었던 지난 3년. 그 어느 것 하나도 내 삶속에 일어나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면 앞으로는? 역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쌍둥이 뒷바라지를 할 수 있는데까지 하는 것은 내 몫이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나머지는 그 어느 것도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특히 일석 오빠와 나의 관계는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내 입장에서는 이제 겨우 첫단추를 꿰기 시작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마지막 단추가 어떻게 꿰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 내 마음이 그렇고 일석 오빠 마음도 확실히 알 수 없어서였다. 그래서 거기까지는 생각 안 하기로 했다. 우선은 일석 오빠와 인연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만 했다.

거리에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오가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일터에서 쌓였을 한 주간의 피로를 풀 수 있는 시간인 때문일 것이다. 그런 그들보다 내 발걸음은 좀 더 경쾌했다. 일석 오빠는 하이힐을 신고 오지 말라고 했지만 굳이 하이힐을 신었다. 숙녀가 되어있는 내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하이힐에서는 발걸음을 옮겨 놓을 때마다 경쾌한 소리가 나서 거리로 퍼져나갔다.  또각또각또각. 가로수들은 아직 봄을 알리고 있지 않았지만 봄은 이미 오고 있었다. 일석 오빠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까지 가는 버스가 있는 정류장까지 가는 길에 이따금 눈에 들어오는 벚나무들은 꽃봉오리들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며칠 뒤에는 활짝 펴 봄이 왔다는 것을 온 세상에 알리겠다는 듯이.


학교를 찿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후기 대학교 중에는 꽤 알려진 학교. 일부 단과대학은 국립 S대를 가려다가 실패한 학생들이 지망하는 곳이어서 전기 명문대학 웬만한 학과생들보다도 실력이 낫다는 소문이었다. 학원에서 사동일을 할 때 본 재수생들이 모두가 자기가 가기를 원했던 전기대학을 가는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전기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후기대학을 갔다. 더 이상 재수를 할 수 없어서이든 할 의사가 없어서이든. 그들 중 일부가 이 대학을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국립 S대를 지원했다가 근소한 점수 차이로 실패한 지망생들이. 교문을 들어서니 내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일석 오빠가 알려준대로 산 쪽을 향해 나 있는 제법 경사가 진 언덕길이었다.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다. 교문 바른 쪽에는 옛날식 기와 건물이 하나 보였다. 아마 이 대학 이름과 연관이 있는 건물이리라. 그 건물 뒤로는 담장이 쭉 이어져 있었다. 내가 이 학교를 찾아올 때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걸어올라 온 길도 이 담장을 따라 산쪽으로 쭉 이어져 있었다.  길 맞은 편, 아주오래된 옛날에는 산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곳은 사람이 사는 동네가 형성되어 있었다. 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에서부터 쭈욱 이어져, 길가에는 상가들이, 길 위 쪽으로는 달동네라는 표현이 어울릴 법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들어서 있는 모습을 하고서. 그냥 산이었을 때는 맨 꼭대기였을 곳으로 보이는 곳까지. 교문 왼쪽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와를 얹은 담장이 산 쪽으로 쭈욱 둘러져 있었다. 학교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이 길 하나뿐이 안 보였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야 되는가 보구나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름드리 은행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길 왼편이었는데 얼핏 보아도 몇백 년은 되어 보임직했다. 이리 오래 된 은행나무가 왜 여기 서있지 잠시 궁금했는데 교문 옆에 있는 오래된 건물과 학교 이름은 연결시켜 생각하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마 교문 옆 그 건물이 지어질 때 같이 심어진 것이리라. 웅장한 모습에 감탄하며 바라보면서 걷노라니 문득, 가을이 되면 노란잎으로 뒤덮여 더욱 장관을 이루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나무와 나무 주변뿐일 테지만, 잎이 떨어져 더러워지기 전까지 잠시 뿐일 테지만, 인공으로 포장된 길바닥을 샛노란 잎으로 뒤덮어버려 아름답기 그지 없는 모습을 연출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눈에 보이고 발에 밟히는 건 인공의 콘크리트 구조물 뿐이 없는 이 삭막한 도시에서 한 줄기 청량제와 같은 역할을 해줄 것이라는 느낌. 그때가 되면 굳이 일석 오빠 때문이 아니라도 한번 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른 봄인 탓에 아직은 겨울의 헐벗은 모습 그대로이지만 마음으로 보니 절로 그런 모습이 보인 것이다.


토요일 오후라 그런지 학교 안에는 학생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언덕길을 오르내리는 모습이 활기차 보이지도 않았다. 원하는 전기대학 진학을 실패하고 어쩔 수 없이 택한 후기대학이라 그런 것인가 싶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난 그들이 부러웠다. 난 형편이 안 돼 대학 진학은 꿈도 못 꾸지 않았던가. 아마 평생을 대학은 못 나온 사람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대학 나온 게 삶의 성패를 결정지어 주는 것은 결코 아니란 걸 사회생활 시작하면서부터 느끼고는 있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나오는 게 좋은 거 아닌가. 대학을 다니고 있다는 건, 나왔다는 건 아무래도 성공적인 삶의 길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할 터이니까. 나도 대학을 나왔어야 되든 안 되든 아나운서가 되는 꿈에 도전해 볼 수 있었을 테니까.


내가 찾는 이공대학은 일석 오빠 말대로 쉽게 눈에 뜨였다. 산 쪽으로 난 외길을 건물들이 눈에 들어올 때까지 10여분 정도 걸어 올라가니 넓은 잔디 광장이 먼저 눈 앞에 들어왔다. 그 광장을 기준으로 정면과 좌우로 건물들이 보였다. 그 중에 왼쪽 대각선 방향에 있는 높은 건물이 일석 오빠가 알려준 이공대학일 터였다. 다시 한 단계 더 산 위쪽으로 걸어 올라가 건물 앞에 서니 현관 기둥에 이공대학이라고 쓰여진 간판이 보였다. 제대로 찾았구나 싶은 마음에 잠시 한 숨을 돌리고 나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3층이라고 했었다.

학장실은 복도 맨 끝에 있었다. 일부러 가장 구석진 곳에 배치한 듯 싶게. 바로 옆에 이공대 사무실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이 방이 맞겠다 싶어 노크를 함과 동시에 문을 여니 칸막이가 먼저 시야를 가렸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사무실 전경이 안 보이게 하려는 장치이리라. 칸막이 옆으로 난 통로로 이용해 안으로 들어서니 일석 오빠 모습이 정면으로 보였다. 내게 말한대로 역시 혼자였다. 창을 뒤로 하고 놓인 기다란 책상 위에서 한창 공부하고 있는 모습. 칸막이와 책상 사이에는 응접용 소파가 한 개 놓여 있었다. 3인용. 평직원 혼자 근무하고 있는 사무실에 웬 응접용 소파가 있을까 궁금한 생각이 들었지만 물어보기는 아직 일렀다.  

책상에 앉아 있는 일석 오빠 모습은 1년 전 학교 앞에서 봤을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아 보였다. 하긴 절에 투병생활 하러 왔을 때 이미 성인이었으니 외모가 더 달라질 일이 없을 터이긴 했다.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많이 지쳐보이는 모습이었다. 아파 보이기도 했다. 워낙 몸이 약한 편이었으니 그런가보다 정도로만 생각했다. 더 이상 알려고 해도 알려줄 리도 없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만으로도 엄마에게 거부당하고 있는 상황 아닌가. 일석 오빠는 내가 들어서는 모습을 보더니 "어서 와라"고 말하면서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근 1년만에 보는 건데도 마치 매일 본 듯 싶게 아주 반기는 기색도 그렇다고 싫어하는 기색도 아닌 담담한 표정을 하고서. 자리에서 일어선 걸 보면 반기는 쪽이 맞을 것이겠지만 얼굴 표정은 그랬다.

내성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속내를 잘 안 들어낸다. 외향적인 사람들이라고 해서 마구 속내를 들어내는 것은 아니겠지만 내성적인 사람하고 비교하면 차이가 많이 날 것이다. 굳이 다른 사람 예를 들지 않더라도 나를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가지고 있던 밝고 명랑한 성격일 때는 웬만한 일은 거리낌없이 터놓고 이야기 하고 그랬었다. 아마 자신감의 발로였을 것이다. 무엇이건 거칠 것 없이 다 해낼 수 있으리란 자신감. 그러던 것이 집안 형편이 어려워 진 뒤로는 나 스스로 안으로만 접어드는 성격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자신감이란 게 생길 일이 없으니 자연스레 그리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공부만큼은 남보다 잘 할 수 있고 실제로도 그게 유일하게 남아있는 자신감이었지만 이도 대학진학을 할 수 없는 현실의 벽 때문에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제한적인 것이 되어 있었다. 공부를 게속할 수 있어야 자신감을 들어내든지 말든지 할 기회가 생길 터인데 이제 그럴 기회는 영영 없을 테니 말이다. 어느 무엇하나 내 지난 날의 자신감을 회복해 줄 일은 없어진 상황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지간한 일은 겉으로 들어내지 않고 속에다 담아두는 쪽으로 변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일석 오빠는 이런 성격의 형성이  아주 어릴 적부터 이루어져 있는 것 아닐가 싶었다.  처음부터 환경이 바뀌고 말고 할 일이 없었을 가능성이 많아 보였다. 내 경우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부터 변한 것이니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현실에서 나타난 결과는 같은 것이고.


일석 오빠가 나를 바라보는 눈길은  학생인 나를 볼 때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아마 내가 학생티를 벗은 모습인 때문일 것이리라. 그러나 나를 처음 봤을 때인 10년 전 나 국민학교 4학년일 때  눈길과 같지 않음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그 이유가 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나름대로 짐작이 가기는 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도 변했고 일석 오빠도 변해 있는 것이었다. 일석 오빠야 그때 이미 성인이나 다름없었으니 외모상으로는 별 변화가 없는 것일테고 나는 외모까지도 변해있는 그런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변화는 심경일 것이다. 살아가는 환경이 달라진데 따라 달라져버린 심경의 변화.

"찾아오는 데 힘들지는 않았지? 그나저나 이제는 완연하게 숙녀티가 나네."

일석 오빠는 그리 말하면서 엷은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이 오빠의 웃는 모습을 본 기억이 거의 없는 나는 그 웃음의 의미가 무엇일까 궁금했다. 분명한 것은 나를 보는 눈길이, 말을 그리하지만 여인으로 보는 눈길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하긴 일석 오빠 성격에 그러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린 나를 처음 본 순간 색시 삼겠다고 한 마음이 욕정의 발로가 아니었음은 분명한 일이었다. 짐승이 아닌 담에야 국민학교 4학년짜리 어린애를 보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것인가. 더군다나 그 시절 일석 오빠는 세상 때라곤 단 한 점도 안 묻은 그런 상태였음을 학원 사동생활과 얼마 되지 않은 직장생활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거기 소파에 앉아서 잠시만 기다려.  커피 한 잔 끓여 줄께."

"괜찮아요 오빠. 잠시 쉬었다가 학교 구경이나 시켜 주세요."

"아냐,그래도 귀한 손님인데 커피 한 잔 대접해야지."

"그럼, 알았어요. 커피 한 잔 마시고 나서요."

"그래, 그러자꾸나."

일석 오빠는 그리 말하면서 책상 밑에서 전기곤로를 꺼내, 프러그를 콘센트에 꽂고는 그 위에 물주전자를 얹었다. 그러고는 궁금한게 많았는지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커피물이 끓기를 기다리면서 그 새를 못 참고.

"집에는 별 일 없지? 직장 생활은 어때? 

 일석 오빠는 내 마음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집안이 풍비박산만 나지 않았다면, 그래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회사원이 아닌 명문대 학생이 되어 활개짓하면서 캠퍼스를 오가고 있을 나의 모습을 그리고도 남았을 테니까.

"뭐 그냥 그래요. 회사는 잘 알려진 토건회사이긴 하지만 속사정까지는  알 수 없고요. 아무튼 중동 쪽에 공사도 꽤 많이 하는 것 같더라구요."

"그래도 네가 취직을 했으니 집 형편이 좀 나아지게 돼서 다행이다. 쌍둥이도 중학교에 다니고 있겠네?"

"네,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서울 시내 중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쌍둥이들 중학교 진학하는데는 할아버지가 힘을 보탰다. 아빠 돌아가신 뒤에 엄마가 할아버지한테 불려갔을 때 그런 언질을 준 것 같았다. 그래서 엄마 표정이 밝았다가 나를 보고는 다시 어두워졌던 것이다. 할아버지가 한 얘기에 나는 포함이 안 되어 있었던 때문이었다.

 "쌍둥이 중학교 학비만큼은 내가 어떻게 해보마. 혹시 그전에 내가 죽더라도 쌍둥이 앞으로 통장을 만들어주마. 고등학교는 에미 내가 알아서 해결하도록 하고. 연숙이는 재능이 아깝지만 계집아이니 중학교 마치는 걸로 만족하기로 하자.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절에다가 돈을 덜 들이는 건데 미안하게 됐구나. 종각만 안 만들었어도 도움이 됐을텐데."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그 뒤 엄마가 한 행동으로 봐서는 이리 말했을 것 같았다. 나는 계집애니까 포기하고 사내인 쌍둥이를 살려보자는 생각.

쌍둥이 중학교 들어갈 때가 되자 엄마는 다시 할아버지에게 불려갔다. 갔다 온 뒤에는 우리 세 자매를 불렀다. 

"할아버지가 쌍둥이 중학교 다닐 수 있는 정도 돈이 든 통장을 주시더구나. 더 이상은 힘이 못 돼서 미안하다고 그러면서. 그나마 다행이다. 할아버지도 절에 너무 많은 돈을 쏟아부은 탓에 힘든 형편으로 알고 있거든."

절 안에는 공사가 아직 안 끝난 종각이 우리집과 할아버지 집 사이에 서 있었다. 아직도 한참 돈이 들어가야 될 듯 싶은 모습을 하고서였다. 건물 형태만 세워졌지 가장 중요한 종은 언제 들어올 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할아버지는 그러고 나서 몇 년 뒤 세상을 떴다. 종각이 완공되는 걸 못 보고서였다. 큰아버지한테 뒤를 부탁했겠지만 종은 쉽사리 들어오지 않았다.  덩치 큰 부동산만 잔뜩 있고 현금은 바닥이 나 있는 때문인 것 같았다. 난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할머니도 얼마 뒤 할아버지 뒤를 따랐다.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는 눈물을 흘렸다.


"공부는 잘들 하고? 연숙이 너를 닮았으면 공부를 잘 할텐데."

일석 오빠는 직접 탄 차를 가지고 와 나에게 주고는 자기 의자를 가지고 와서 내 맞은 편에 앉았다. 내 옆에 앉기가 좀 거북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학기 초라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근데 국민학교 때도 썩 잘한 편이 아니었는데 중학교 때라고 뭐 크게 달라지겠어요? 엄마는 일단 중학교는 마치게 해놓고 보자는 생각인 것 같아요. 그때까지만 고생하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럼 고등학교는 어쩌고?"

"거기까지는 생각도 하기 싫으신 것 같아요. 나나 하숙 언니한테 너무 미안한 일이잖아요. 기술을 배우게 하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어요."

"그래? 그럼 좋은 수가 있다."

"네, 그게 뭔데요?"

나는 일석 오빠의 좋은 수가 있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주변에 도와줄 사람 하나 없어 그 힘들게 들어간 명문대학도 중도에 그만둔 사람이 무슨 특별한 방안이 있을까 싶었지만 혹 내가 모르고 있는 묘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내가 공고 나온 건 알고 있지?"

"네."

"그 학교에 국비장학생 제도라는 게 있어."

"그게 뭔데요?"

"학교 수업료를 정부에서 지원해 주는 제도야. 대신 군대를 기술하사관으로 가서 7년간인가 의무복무하는 조건이야. 일반 입대를 하면 3년 이내에 제대하는데 4년을 더 복무하는 조건인 거지."

"어머! 그런 제도가 있었어요? 잘 됐네요. 오늘 집에 들어가는 즉시 엄마한테 말씀드려야 겠네요. 고마워요 오빠."

"고맙긴. 내가 형편이 되었다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이때서야 비로서 이 오빠가 왜 자꾸 쌍둥이에 대해 물었는가에 대한 궁금즘이 풀렸다. 도와주고는 싶은데 도와 줄 형편은 안되고 궁금은 하고 그래서였던 것 같았다. 그것이 나에 대해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한 요인이 된 것이라는 것도.

"커피 맛이 별로지? 내가 커피를 안 마시는 때문에 그러니 이해해라."

"커피를 안 마신다면서 웬 커피가 있어요?"

"이 방이 원래 강사들 대기실이었어. 내가 근무하기 전에는 사동이 한 명 있으면서 강사들 오면 커피도 타주고 잔심부름도 해주고 그랬던 모양이야. 그런데 내가 정식 직원으로 오면서 사동은 학장실 안에서 근무해. 그래서 남아있는 커피야."

"그럼 강사들은요"

"내가 근무하면서는 거의 안 와. 서로 불편하잖아. 커피 타주는 사동도 없고 직원 근무하는 데서 쉬고 있으려니 눈치도 보이고. 지금 네가 앉아있는 소파가 그래서 있는 거야. 굳이 치워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놔두고 있는 셈인 거지."

평직원 혼자서 근무하는 사무실에 소파가 왜 있는 것일까 궁금했던 내 궁금증은 이렇게 풀렸다. 일석 오빠가 타온 커피는 정말 맛이 별로였다. 내가 학원 강사실에서 사동으로 일하면서 학원 선생님들에게 끓여내던 커피와 비교하면 프로와 아마추어 수준의 차이였다. 커피 타면서 맛을 체크한다고 한 숟갈식 야금야금 마신 것이 인이 백힌 상때까지 이른 정도니 말해 무엇하랴. 그래도 그런 내색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까짓 맛이 무슨 대수랴. 일석 오빠의 성의를 맛이라고 생각하고 마셨다. 한 모금씩 천천히. 일석 오빠는 내가 커피 마시는 모습을 보면서 서둘러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가 커피를 다 마시고 나면 바로 사무실을 나갈 생각인 것 같았다. 공부할 수 없게된 사무실에 답답하게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일 터였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곳이기에 의무적으로 나와서 일하는 곳에 굳이 오래 있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인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당장 나만해도 출근하기가 무섭게 퇴근 시간을 기다리는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일석 오빠는 더군다나 내가 와 있지 않은가. 11살 꼬마였을 때 색시 삼을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는 내가. 그때부터 세월이 많이 흘러, 마음이 그 당시와 똑같지는 않을 것이고 나도 그런 낌새를 눈치채고는 있지만 그래도 그 마음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닐 터. 더구나 이제는 어엿한 숙녀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이것만은 꼭 물어보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어린 나를 보자마자 색시 삼으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를."

일석 오빠가 책상 정리를 거의 끝내가는 것을 보고 이제는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막 말을 꺼내려는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출입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똑똑똑.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일석 오빠는 토요일 오후 시간에 누구지라는 표정을 하고 출입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한 예쁘장하게 생긴 여학생이 칸막이 뒤애서 얼굴만 살짝 내민 채 서 있었다. 들어오려다가 내가 있는 것을 보고 멈춰선 모습이었다. 얼핏 봐도 나보다는 약간 더 예쁜 얼굴이었다.  턱이 나와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 시간에 웬 손님이지? 그것도 앳되 보이는 아가씨가" 나를 본  여학생은 눈빛으로 그리 말하고 있었다.

"아니, 인영씨가 토요일 오후에 무슨 일이예요. 학교에는 왜 나왔어요?"

"졸업 논문 준비 때문에 급한 실험이 있어서요. 손님이 계신 것 같은데 저 좀 잠깐 봐요."

여학생은 내가 신경쓰이는 듯 일석 오빠를 손짓으로 불러냈다. 아주 잘 아는 사이인 듯한 느낌이 절로 드는 친숙한 동작이었다. 일석 오빠는 사무실 밖으로 나가 뭔가 이야기를 듣는 것 같더니 이내 들어와 서랍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들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이윽고 옆방 학장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한 10여분 정도 걸렸을까? 일석 오빠는 다시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고 가지고 나갔던 열쇠꾸러미를 다시 서랍에 넣었다. 그러고는 가방을 챙겨들고 "자, 그럼 이제 그만 밖으로 나갈까?"라고 말했다. 나는 그런 일석 오빠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궁금해 도저히 못 참겠어서 물었다.  

"방금 그 여학생 누구예요, 오빠?"

어릴 적 이야기를 물으려고 한 계획이 한 여학생의 등장 때문에 생각지도 않았던, 전혀 엉뚱한 쪽으로 물음이 나가버린 것이다. 나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만큼 그 여학생의 존재가 궁금했던 것이다. 

"누구? 지금 그 여학생?"

"네."

"개인적으로 조금 아는 여학생이야. 섬유과 학생인데 실험하는데 책이 좀 필요했나봐. 학장님이 같은 과 지도교수거든. 그래서 학장실에 책이 있나 보겠다고 한거야."

"예쁘게 생겼던데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내 거듭된 물음에 일석 오빠는 의외라는 표정을 하고 약간 미소를 짓더니 썩 내키지는 않는다는 표정으로 대답을 했다.

"투병 생활 끝내고 주영이하고 같이 1년 동안 입시 공부한 거 알고 있지? 그때 세들어 살았던 집 주인  딸이야.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여기 취직해서 와보니 이 대학에 다니고 있더라구. 사무실 바로 옆이 이 여학생이 다니는 학과 사무실이야. 그래서 우연히 보게 된거야."

"집이 살기가 괜찮았네 보네요. 여자인데 대학에 다니고 있는 걸 보면."

"그런 셈이지. 그 당시에 아버지가 은행 차장이라고 그러더라구. 벌써 오륙 년 전 일이니까 지금은 지점장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런 집에서 왜 세를 줬대요."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어. 학생이 셋이나 되니 은행 차장 월급으로도 벅차서 그랬는지 또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아무튼 방이 네개인 한옥인데 셋만 쓰고 있더라구. 안방은 부모가, 건넌방은 이 여학생이, 사랑방은 두 오빠가. 우리한테 세를 준 방은 건넌방 옆에 붙어 있었는데 집안 일 해주는 여자가 쓰던 방 아니었나 싶어. 그러다가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내 보낸 것 아닌가 싶어." 

"근데 공부는 별로 열심히 안 했나 보네요. 후기 대학 그것도 공대를 온 것을 보면."

"아마 그렇겠지? 공대를 다니는 것이야 뭐 적성에 맞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아무튼 그 당시 집안 분위기가 썩 좋지는 않았어. 엄마가 일을 하러 다니는 때문인 것 같았는데 돈이 목적이 아닌 것인지 아버지 반대가 심했던 것 같아. 엄마 입장에서는 자식들이 다 커노니 집에 있기가 무료해져서 그랬던 것 같았어. 집안 분위기가 그래서인지 이 여학생은 '케세라 세라'라는 노래를 즐겨 부르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나. 연숙이 너는 어릴 때라 모르는 곡일지 모르겠는데 제목이 '될대로 되라'라는 뜻이야. 부모가 싸우는 걸 보고 속상해서 될대로 되라라는 마음으로 그러는 것 같았어. 그러다가 내가 대학 합격한 즈음에 집을 팔고 이사를 가는 바람에 그 뒤 소식은 모르고 지금까지 지낸 거였지. 아무튼 내가 대학에 들어간 것까지는 알고 이사를 갔으니까 여기서 나를 보고는 졸업하고 취직한 것으로 알고 있을꺼야."

"오빠, 이 여학생에게 마음이 있었겠네."

나의 이 물음에 일석 오빠는 쓴 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보면 헛웃음 같기도 했다.

"아니라면 거짓말이지만 그냥 호감 정도인거지 뭐. 이성에 대해 한창 관심이 많을 나이잖니. 괜찮은 이성을 보면 호감을 갖게되는 뭐 그런 정도였어. 더 이상은 그럴 시간도 없었고 그럴 새도 없었어. 같은 집에 살 때는 한참 공부해야 할 때였고 합격해서는 이 여학생네가 집을 팔고 바로 이사를 가버렸으니까. 그리고 설사 마음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집안 환경 차이가 너무 나는 탓에 엄두가 안 났을꺼야. 가난한 시골 출신이 은행 다니는 아버지를 둔 딸하고 격이 맞아야지."

"피이~ 오빠는. 둘이 좋으면 되는 거 아녜요?"

일석 오빠는 내 말에 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듯한 표정. 사실 나도 그냥 해 본 말이었다. 내가 왜 현실을 모를 것인가. 3년이 넘는 기간을 학원 사동일을 하면서 수도 없이 겪은 일이었다. 더구나 난 여자여서 외모만 보고도 남자들이 접근할 수도 있는 조건이었는데도 그랬었잖은가.

"뭐 그럴수도 있었겠지만 내 형편이 어지간했어야지. 당장, 그 힘들게 들어간 대학도 중간에 그만 둔 형편 아니냐? 그 당시에는 좀 나았다고는 하지만 뭐 큰 차이가 있었겠어? 사실 그때도 설사 대학에 들어가게 되더라도 과연 끝까지 다닐 수 있을까 불안불안 했었거든. 모든 게 월남으로 취업해 간 아버지한테 달렸는데 어머니 눈치로 봐서는 뭔가 안 좋게 돌아가는 분위기였어. 그래도 내가 여자 입장이라면 달라질 가능성은 있었을꺼야. 남자야 여자 조건 안 볼 수도 있을테니까. 그렇지만 남자 입장은 달라. 최소한 여자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춰야 돼. 그 당시 내가 갖고 있는 조건은 입시 준비생에 불과했잖아. 명문대생이란 꼬리를 달았을 때는 이사를 가버린 거고. 뭐 이사를 안 갔더라도 내 성격으로는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을 거지만. 생각을 해봐라. 명문대생이 되기는 했지만 그것 빼고는 좋은 조건이 아무 것도 없잖니?"


일석 오빠의 아버지가 월남에 기술자로 가 있다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일석, 주영 오빠가 절에 하숙하러 온 뒤에 엄마를 비롯하여 온 식구들이 당연스레 알고 싶어했던 첫 번째가 신상 관련 일이었으니까. 아버지가 뭘하는 집의 자식이고 학교는 어디를 나왔는지 등등. 이게 월남전이 끝나려는 상황이 되니 뭔가 여의치 않은 일이 일석 오빠네 집에 생겨 있었다는 말로 들렸다. 나중에는 이보다 더 안 좋은 여건이 일석 오빠가 태어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생겨 있었다는 걸 알게 되지만 이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난숙 언니가 주영 오빠한테서 우연히 들은 이야기로는 작은집이 있다는 것이었는데 그건 우리 집안도 마찬가지기 때문이었다.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작은댁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나 큰아버지나 큰댁이 따로 있는 환경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런 문제에 있어서는 관대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문제는 일석 오빠 아버지가 경제적 능력이 충분치 않다는데 있었다. 작은댁이 있건 없건 간에 경제적 능력이 있어서 일석 오빠가 대학을 중간에 그만 둬야되는 일만 안 일어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리 되었다면 일석 오빠가 고등학교 졸업 조건의 월급을 받으며 여기에 이러고 있지는 않을테니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일석 오빠는 말을 이어갔다. 말 한 마디 제대로 안 하고 지내던, 절에서 투병생활 하던 때 모습하고 비교하면 놀라운 발전이었다. 세월이 많이 흐른만큼 일석 오빠도 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제는 내가 성인이 되어 있는 때문에 마음 놓고 이야기 해도 된다고 생각해서인지는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아마 둘 다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근데 대학에 들어가서 보니까 저 여학생 정도 조건은 아무 것도 아니더라. 저 여학생이야 아버지가 은행 다닌다는 것하고 외모가 예쁘장하게 생겼다는 것 외에는 특별히 내세울 게 없잖니? 대학도 후기대학을 다니고 있으니 말야. 그런데 내가 들어간 대학은 그게 아니더라. 마치 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을 보는 것 같았어." 

"그게 무슨 뜻이예요?"

"집안 좋지, 머리 좋지, 거기다가 예쁘기까지 한 여학생들이 수도 없이 많더라구.  당장 내가 다닌 과에도 세 명이나 있었어. 아버지가 국회의원, 의사, 대학교수라고 하더라구. 그중 한 명은 내가 천신만고 끝에 들어간 바로 그 대학의 교수라고 그랬어."

일석 오빠의 이 말을 듣는 순간 그동안 궁금했던 궁금증이 조금은 풀리는 느낌이었다. 일석 오빠의 나를 바라보는 눈이 처음 나를 보던 때와 달라진 느낌을 받았던 이유를. 일석 오빠의 사람 보는 눈높이가 높아진 것이었다. 좀 더 확실히 알려면 직접 물어봐야 되겠지만. 

"근데 이 여학생은 공부는 열심히 안 했는가 보네요. 후기 대학 그것도 공대를 다니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 그렇겠지? 내가 본 그때도 부모 사이가 안 좋은 것을 보고 '케세라세라' 노래나 흥얼거렸으니까. 그러나 연숙이 너나 나와는 출발부터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행운을 타고 난 거야. 부모 사이가 아무리 나빠도 대학을 못 가는 그런 일은 절대로 안 일어날 환경을 타고 났잖아. 부모가 이혼을 할 경우에는 좀 다르겠지만 사이가 그 정도로 악화된 것 같지는 않았어.그저 아버지란 사람이 엄마한테 불만이 있는 그런 정도로 보였거든.  아까 그 여학생 얼굴 봤잖니? 세상에는 근심걱정이라는 건 전혀 존재하지 않는 듯한, 마치 백치같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잖아. 남자라면 군대를 가서 세상 살아내는 것이 얼마나 녹록지 않은가를 알게 되지만 여자라서 그런 일 겪을 일도 없으니 더욱 그럴꺼야. 저렇게 아무 걱정없이 지내다가 자기 좋다는 남자들 중에 괜찮은 조건 가진 남자 만나서 결혼하면 또 순탄한 인생길로 들어서는 거고. 쉽게 말해서 연숙이 너나 나와는 살아가는 길이 다른 행운을 타고 난 인생인 거야. 그건 태생적인 문제인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한 것이지. 인간의 삶은 태어날 때 이미 불공평하도록 결정되어 있잖니? 왕의 자식으로 태어나면 왕손인 거고, 거지 자식으로 태어나면 거지새끼인 거고. 세상에 태어나는 방법은 똑같은데 부모가 누구냐에 따라 삶이 정해지잖아."

일석 오빠는 자기 뜻대로 살아갈 수없는 자신의 삶을, 닮은 꼴로 살고 있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나를 보며 가슴 속에 쌓인 울분을 토해내듯 이리 말했다.

"오빠는 대학 들어갈 때 꿈이 뭐였어요?"

"꿈?"

일석 오빠는 나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러더니 이 참에 자기 속마음을 다 들어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꿈이라는 게 있긴 있었지. 가장 큰 꿈은 대학교수가 되는 거였어. 그것도 내가 들어간 대학의 교수가 되는 꿈이었지. 단지 직업인으로서가 아니라 학자로 인정받으면서 존경도 받는 그런 삶 있잖아.  학자들 중에는 그런 분들이 더러 있더라구. 내가 다닌 대학의 철학과에도 그런 분이 한 분 계셔. 생활도 건실하고 학문적 깊이도 있고.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싶었어. 이제 다 헛된 꿈이 되어버렸지만. 

일석 오빠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지고 있던 꿈과는 달리 단지 먹고사는 문제에 매달려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가 가슴 아파서인 것 같았다.

대학 교수라... 어쩐지 일석 오빠에게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일석 오빠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인데도 그랬다. 절에서 투병생활 할 때의 일석 오빠 모습은 한심 그 자체였다. 낮에는 라디오를 들고 산에 오르고 밤에는 할머니가 틀어주는 TV를 보는 게 전부인 모습. 그밖의 시간에는 아무 것도 안하고 그냥 빈둥거리고 지내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런데 내가 절에서 본 일석 오빠의 이런 모습은 다 허상이었던 것이다.  투병 생활을 해야하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리 지낼 수밖에 없었던 모습. 당시 어린 소녀였던 내 눈에는 참 한심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일석 오빠의 머리 속을 들어가 볼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때 그 모습을, 꿈 이야기를 하고 있는 지금 모습과 매치시켜보니 뭔가 들어맞는 구석이 있었다. 일석 오빠는 그 당시 하루종일 그러고 있어도 전혀 질려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바깥 세상이랄수도 있는 곳으로 나가는 것도, 나가려는 생각도 없는 듯한 모습을 늘 보여줬었다. 공부를 해야하는 데 못하고 있는 데 대한 초조함은 있었는지 몰라도 바깥 세상이 그립다는 모습은 전혀 안 보였던 것이다. 이런 모습이 건강이 회복돼도 똑같이 그러하리라는 생각을 미처 못했을 뿐이었다.

"오빠, 그럼 앞으로 계획은 뭐예요? 이 학교에 계속 있을 생각은 아닌 거잖아요?"

나는 일석 오빠의 장래 계획이 뭘까가 궁금했다. 그동안 보아 온 일석 오빠의 모습은 겉으로는 나약해보이지만 실제로는 나약하지 않은 성격이었다. 강한 의지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내 눈에 보였었다. 2년간의 투병 생활을 하고서도 명문대학에 들어간 일, 그 허약한 몸을 가지고도 군대생활을 견디어 낸 일 등.

일석 오빠는 내가 자꾸 말을 시키니 밖으러 나가기 위해 챙겨들려던 가방 손잡이를 잡고 있는 그 자세로 말을 이어갔다. 귀찮은 표정은 아니었다. 어차피 내가 알아야 할 일이라 생각하고 있어서 일터였다. 내가 11살짜리 어린 소녀일 때 색시삼을 생각을 했다는 일석 오빠 아닌가. 지금 마음이 그 당시 마음과 똑같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아직 유효한 것은 틀림없음을  확신할 수 있지 않은가. 그 증거가 해마다 나를 보러 온 것 아닌가 말이다. 그런 내게 자기 속내를 들어내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여기에 계속 있을 수는 없어. 꿈은 접을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먹고사는 문제를 보다 낫게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은 찾아야겠다는 생각이야.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이라는 생각이거든.  하기사 세상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고사는 문제에 매달려 바등거리며 살다가 떠나게 되어 있는 게 우리네 인간들의 삶 아니겠니. 거기에서 나도 예외는 아닌 거고."

일석 오빠는 이 말을 하면서 또 한숨을 내쉬었다. 꿈을 이루기 위한 삶이 좌절되어 있는 자신의 신세가 한탄스러운 듯한 표정이었다. 만약에 담배를 피운다면 폐속까지 빨아들인 담배연기를 허공에다 대고 길게 내뿜었으리라. 돌아가시기 전 아빠가 엄마와 대판 싸우고 난 뒤에 당신의 무능력을 한탄하는 모습으로 끊었던 담배를 몸에 안 좋은 것을 알면서도 그랬던 것처럼.

"우선은 이곳을 빠져 나갈 생각이야. 그동안 봉급은 적어도 업무량이 많지 않아 공부할 시간이 있어서 좋았는데 그것도 이젠 끝나가는 것 같아. 내 존재가 본부에 알려지면서 업무지원 차출이 많아졌어. 지난 여름방학 때는 교양학부에 내려가 1학년생 전체 성적표 만드는 일에 내내 매달려야 했어. 직원들 중 내가 제일 젊은 데다가 업무량이 적은 게 알려진 탓이지. 결국 공부할 시간이 그만큼 없어졌던 거지. 설사 봉급이 많더라도 계속 있어야 되나 망서릴 판인데 봉급 자체가 적은데다가 공부할 시간까지 없으면 있어야 할 이유가 없거든. 그래서 지금도 여기저기 시험 볼 곳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야. "

"졸업을 못했는데 어디 시험 볼 데가 있어요?"

"그리 많지 않아. 대부분 기업은 학력 제한에 걸려 지원 자체가 불가능해. 유일하게 가능한 곳이 정부 투자기관들이야. 이 중에도 학력제한을 하는 곳이 있긴 하던데 그런 곳을 빼고 나머지 기업 중에 시험을 봐야지. 그런 곳들은 학력 제한 없이 고졸 수준, 대졸 수준으로 뽑더라구. 자, 이제 가슴 답답한 이야기 그만하고 나갈까? 학교 구경한 뒤 후문 쪽으로 나가보자. 그리가면 공원이 나와. 내가 일요일마다 공부 끝나고 잠시 쉬는 아주 전망 좋은 곳도 있고. "

여기까지 말한 일석 오빠는 나를 사무실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나가면서 벽에 갈려있는 시계를 보니 얼추 한 시간 정도가 지나 있었다. 작년에 학교 근처 빵집에서 만났를 때와 비교하면 배 이상 길어진 시간. 이렇게 조금씩 일석 오빠와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갈수록 만나는 회수가 잦아지고 많아지게 되면서. 그게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로구나라는 생각.

일석 오빠는 나에게 학교 구경을 시켜주는 동안 별 말이 없었다. 건물이 쓰이고 있는 용도만 설명해주는 정도였다. 무슨 무슨 단과대학이라는 정도.  나에게 별 의미가 없음을 알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다니고는 싶으나 여건이 안 되어 못 다니게 된 대학, 그 중 한 대학의 건물들이 무슨 용도로 쓰이고 있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아서 뭐할 것인가. 그냥 참고삼아 알아두라는 정도인 것 같았다. 종합대학 시설이란 대충 이런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정도. 학교를 대충 둘러본 우리는 후문을 통해 공원가는 쪽으로 올라갔다. 산 위쪽이라 경사가 좀 있었지만 대신 전망이 좋았다. 올라가는 중에 힘에 부쳐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내려다 본 산 아래 쪽은 가슴을 탁트이게 해주었다.

" 힘들지? 그래서 내가 하이힐 신고 오지 말라고 미리 말했던 건데. 조금만 더 올라가면 내가 쉬는 곳이 있으니까 거기까지만 참아라."

일석 오빠는 내가 굳이 하이힐을 신고 온 마음을 모르는지,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태도를 하고서 손을 내밀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투병 생활할 때 할아버지 산소에 같이 가던 때 내 손을 잡아주었을 때와 똑같이. 그러나 느낌은 달랐다.  무엇일까 이 느낌은? 이제는 성인이 되어 있는 나인데 어린 그때 잡혔던 느낌과는 다른 것은? 그게 뭔지 정확히 꼬집어 말 할수는 없었다. 분명한 것은 어렸던 그 시절 잡혔을 때의 느낌이 더 좋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비록 억지로이긴 하지만 마음을 열고 있는데 일석 오빠는 좀 변한 것 같은 느낌.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길이 그 시절과는 다르듯이 손을 잡은 느낌도 그랬다.그렇다고 나를 멀리하려 한다는 마음까지 든 것은 아니었지만.

"길이 경사가 져서 좀 힘들었지? 사실 산에 오르는 거나 마찬가지야. 학교 정문에서 여기까지가 다 산에 오르는 거로 보면 틀림없어. 지금 보고 있는 이 도로 위로도 산인 거고. 산 중턱을 끊어서 도로가 나 있는 거야. 지금부터는 내려가는 길이니 힘이 안 들꺼야.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삼청공원이 나오고 거기서 더 내려가면 경복궁이 나와. 그래도 경치는 이곳이 제일 좋아. 여기서는 멀리 남산까지 다 보이거든. 자동차길 따라 위로 조금만 더 가면  내가 쉬는 장소가 있어. 전망이 아주 좋은 곳이지. 거기가서 잠시 쉬었다가 내려가자." 

일석 오빠는 학교 후문을 벗어나 산 중턱을 잘라 만든 도로가 나오는 지점에 이르자 이리 말하면서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나를 자동차길 위쪽 방향으로 조금 더 데리고 갔다. 올라갈 수록 산 아래 쪽이 점점 더 잘 보였다. 5분쯤 올라가니 정말 전망이 아주 좋은 곳이 나왔다.

"어때, 아늑하고 전망이 아주 좋지? 여기가 내 쉼터야. 일요일에 사무실에 나와 공부하고 난 뒤 거의 들렀다 가는 곳이야. 이곳에 들러 쉬면서 피로도 풀고 앞날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도 하고 그래."

일석 오빠는 그리 말하면서 가방에서 책을 한 권 꺼내 바닥에 놓고 앉으라고 권했다. 제법 두툼해서 깔고 앉으면 훌륭하게 방석 대용이 될 듯 싶은 책. 무슨 책인지는 알 수 없었다. 책 겉표지를 내가 못보게 의도적으로 아래 쪽으로 놓은 탓이었다.

그곳에서는 멀리로는 남산, 가까이로는 학교 전경, 그 양옆으로 오래전부터 있었을 동네와 창경궁, 종묘가 다 보였다. 극과 극의 대조를 보이는 모습을 하고서. 한 곳은 지금은 관광 대상인 옛 건물에 지나지 않으나 조선 시대에는 나라 최고의 권력을 지닌 왕과 그 가족들이 살았던 곳이고 다른 한 곳은 아마도 이 궁과 연관된 사람들이 살지 않았을까 싶은 곳. 그곳의 모습은 초라했다. 달동네. 지금도 초라한 모습이지만 옛적에는 더 그랬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래도 이곳은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 한때 왕과 왕족들이 영화를 누리며 살았던 궁에는 이제는 사람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고 구경하는 사람들만 오가는 것과는 달리, 과거에도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살고 있을 것임을 보는 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곳 모두에 벚꽃이 피려하고 있었다. 남산까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창경궁에도 달동네에도 똑 같이. 활짝 핀 때와 달리 아직은 새하얗게 수놓은 모습은 아니지만 며칠내로 그리 될 것임을 예고하는 듯한 모습으로.  그곳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때가 되면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없을 터이지만 이 벚나무들만은 해마다 반복하여 꽃을 피우리라. 자기 수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사람들이 몇 대를 살고 떠나는 기간 동안.


"곧 벚꽃이 필 것 같네. 그러고보니 내가 주영이와 함께 절로 투병생활하러 갔던 딱 그 무렵이구나. 내가 연숙이 너를 처음 본 바로 그 무렵."

일석 오빠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면서도 시치미 뚝 떼고 이리 말했다. 수많은 감회가 묻어나는 듯 싶은 목소리였다.

"그러고보니 세월이 많이 흘렀네. 그때 국민학교 4학년짜리 꼬마였던 네가 이제는 어엿한 숙녀가 되어 있으니. 나는 참 암울했던 시절이었는데 그래도 그때가 많이 생각나네. 그런데  연숙이 너, 주영이는 보고 싶지 않아. 그동안 만나 보기는 한 거야?"

일석 오빠는 시선을 멀리 남산 쪽에 두고 있으면서 무심한 듯한 목소리로 한 마디 툭 던졌다. 그러나 목소리에는 그동안 내 마음이 어땠는지 몹시 궁금했다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사실 나도 그동안 많이 궁금했었다. 그러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 물어보기도 조심스러웠다. 일석 오빠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내가 자기보다는 주영 오빠를 더 따르고 좋아했다는 걸. 그런데 그동안 일언반구 단 한 마디도 해준 적이 없었다. 하긴 일석 오빠와 대화랍시고 제대로 해 본 자체가 오늘이 겨우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3학년이던 작년에 학교 앞 빵집에서 였다. 그전에 1년에 한 번씩 봤던 일은 일석 오빠의 일방적인 행동 아래 얼굴만 잠시 본  짦은 만남이었다.

"아니요. 사실 많이 궁금하기는 했는데 그동안은 물어볼 겨를도 없었잖아요. 오빠는 1년에 한 번 나타나 내 얼굴 보는 정도만 하고 간 셈이니까요. 작년에서야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눈 셈인데 그때도 주영 오빠 얘기할 기회는 없었고요."

"그랬었나?"

일석 오빠는 그리 말하면서 피식 웃었다. 자기가 한 지난 날 행동이 생각 키워서인 것 같았다.

"사실 그동안은 네가 어떻게 자라고 있나 정도만 확인한다는 생각이었어. 넌 계속 학생 신분이었잖니? 아까 사무실에서 잠깐 얘기했지만 마음에 여유도 별로 없었어. 군대 있을 때는 무사히 제대하는 일이 중요했고 제대해서는 바로 학교에 복학해서 죽을 둥 살 둥 책과 씨름하는 생활을 해야했거든. 집안 상황이 학업을 계속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나빠져 있기 때문이었어. 나 혼자 문제라면 어떻게든 해결해 보겠는데 어머니와 두 여동생이 나만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어. 취직을 하려면 시험을 봐야 되는데 군생활 거의 3년이 다 되는 기간 동안 녹슬어 있던 머리로는 불가능했거든. 거기다가 고생해서 들어간 학교 바로 휴학하는 것도 속상했고. 그래서 무리해서 1년을 더 다닌거야. 나 때문에 막내 여동생 고등학교 진학도 1년 미뤘었어. 내 등록금은 어렵게 마련했지만 동생 등록금까지는 도저히 형편이 안 됐거든.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너를 자주 볼 생각을 할 수 있었겠니? 그래서 1년에 한 번 정도 잘 지내고 있나 확인하는 걸로 만족하며 지냈던 거야."

"휴학할 때 마음이 많이 아팠었겠네요?"

일석 오빠는 나의 이 물음에 얼굴이 약간 어두워졌다. 그렇지 않아도 그늘져 있던 얼굴에 더 그늘이 드리운 것이다. 힘들었던 당시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탓에 그런 것 같았다. 실수했구나 싶었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이었다. 그냥 눈치만 볼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제대하고 복학할 때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일이라 생각보다는 덜 했는가 모르겠다. 그래도 많이 힘들었지. 학교에 휴학계를 제출하고 교문까지 걸어나가는데 그 길이 왜 그리도 멀고 길던지. 교문을 나서서 학교 쪽을 바라보며 마음 속으로 많이 울었어. 기회가 되면 그때 비통한 심경을 꼭 글로 써보겠다고 마음도 먹었었지. 취업을 위한 공부하느라 글 쓸 시간이 없어 아직 손도 못 대고 있지만."

"괜히 쓸데 없는 걸 물어봐서 오빠 마음을 아프게 한 것 같네요. 미안해요. 근데 오빠 글도 써요?"

"아니야. 당시 내 마음이 어땠는지 알아서 나쁠 거야 있겠니. 또, 이런 이야기 아무한테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경우야 약간 다르지만 너도 나와 마찬가지 마음 아니겠니? 마음 아픈 거로 말하면 대학 진학 자체를 못한 네가 더 클수도 있고. 글은 쓰고 있는 단계는 아니야. 쓰고 싶다는 거지. 아직은 쓸 시간도 능력도 안 돼. 군대 있을 때 시간이 난 적이 있어서 잠시 습작을 해본 게 다야."

일석 오빠는 이리 말하면서 나를 흘깃 쳐다봤다. 내 표정이 어떤가 궁금한 듯 싶었다. 그랬다. 대학 갈 생각 자체를 접을 수밖에 없었던 내 마음이 대학을 다니다가 휴학한 일석 오빠 마음보다 나을 게 뭐 있겠는가. 일석 오빠는 그래도 대학을 다닌 것이니 나보다는 덜 아쉬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고 싶은 일이 좌절된 점에서는 같지만 나보다는 나은 것 아닌가 싶었다.

비록 졸업은 못 했지만 명문대학 출신이라는 자체로 남들에게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자격은 갖추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명문 대학에 가려는 시도도 못 해봤지만 갈 자신은 있었다. 집이 풍비박산만 나지 않았다면, 나더라도 일석 오빠처럼 대학을 들어간 뒤에였더라면 지금처럼 여상출신이라는 딱지가 아닌 명문대 출신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을 것 아닌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는 일이었다. 공고 출신 일석 오빠와 명문대를 중퇴한 일석 오빠. 가상이긴 하지만 명문대 출신일 나와 야간 여상 출신인 현실의 나. 

그런데 글을 쓴다는 건 또 무슨 이야기인가? 국문과를 다닌 것하고 관계가 있는 것인가? 아무튼 이 오빠는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놀래키는 일만 계속 보여주고 있구나 싶었다. 절에서 투병생활할 때의 무기력한 모습은 일시적인 허상에 지나지 않았음을 새삼 깨닫게 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주영 오빠는 자주 만나요?"

"주영이? 아니, 얼굴 본 지 오래됐다. 정확히 말하면 같이 입시 공부할 때 빼면 딱 한 번 만났어. 그것도 내가 군대서 휴가 나왔을 때 집에 찾아가서. 짜식 군대도 안 갔으면서 면회도 한 번 안 오더라. 아마 아쉬운 일 생기면 그때나 또 나타날꺼야. 지금은 내게 아쉬운 일이 전혀 없는 상황이거든.  근데 연숙이 너한테는 한 번도 안 찾아 갔었니? 나는 그게 궁금했다. 나한테는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너한테는 자주 찾아간 건 아닌가 싶어서."

"아뇨, 오빠들 대학 들어갔다고 절에 온 적 있었잖아요? 그때 본 게 마지막이예요."

"그래? 참 무심한 놈이네. 네가 그리 따르고 좋아했는데."

일석 오빠는 이리 말하면서도 얼굴에는 안도하는 표정이 역력한 모습을 내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 표정은 만약에 주영 오빠도 일석 오빠와 같은 마음을 먹고 나를 찾아왔을 경우 자기는 당연히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겸하고 있는 그런 것이었다. 그랬을까?  만약에 주영 오빠가 나를 찾아왔다면? 분명한 것은 일석 오빠보다는 편한 마음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내가 주영 오빠를 따르고 좋아한 것은 이성으로서의 감정은 분명 아니었다. 그럴 나이는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 감정의 연장 선상에서 주영 오빠를 계속 보면서 자랐다면 이성으로서의 감정이 안 생긴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비록 어린 시절의 감정이었지만 그게 싫은 쪽으로 바뀔 리는 절대 없는 일이었다.  3수까지 하고도 원하는 대학을 못 간 무능함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안 들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아쉽기는 했겠지만 좋아하고 따른 감정은 그런 외형적인 조건보다는 그냥 순수하게 좋아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때는 대학생도 아닌 재수생 시절이었으니까. 일석 오빠가 염려한 것은 바로 그 점이었을 것이다. 나는 일석 오빠가 나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는 그 시절에 주영 오빠 무릎에 앉아 내 턱을 만지는 것을 좋아하며 테레비를 보고 있었다. 그러던 나를 생각하면 자기는 주영 오빠에게 밀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내내 했음이 틀림없었다. 한창 어려운 상황에서도 1년에 한 번씩 어김없이 나를 보러온 일에는 그걸 확인하려는 마음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임은 분명한 일인 것이고.

"근데 주영 오빠가 군대를 안 갔어요? 오빠처럼 병약한 사람도 갔다 왔는데 어떻게요?"

"으응, 방위병 제도라는게 있는데 그걸로 때웠어. 군대 안 가고 집에서 출퇴근하면서 1년만 복무하면 되는 개같은 제도지. 때문에 돈있고 배경있는 놈들은 그쪽으로 많이 빠져나갔어. 덕분에 나같이 군대 안 가도 되는 자원이 군대에 간 거고."

일석 오빠는 방위병 제도 이야기를 하면서 병역 제도에 대해 불만이 많은 듯 누구인지도 모를 대상을 향해 욕을 해댔다. 제도는 불가피하게 생긴 것일 것이나 그것을 악용하는 약삭빠른 인간들에 대한 불만인 것 같았다. 자식 군대 안 보내고 싶은, 능력이 되는 부모가 먼저 안 보낼 방법을 찿았을 것이고 이를 부정한 방법으로 해결해주는 관련 공무원들이 있는 것일 테고.

"자, 이제 그만 공원 쪽으로 내려가 볼까? 그리로 쭉 가면 광화문이 나오니까 그쯤 가서 저녁먹고 헤어지자."

"오빠, 잠깐만요. 나도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요. 그동안 내내 궁금했던 거."

"그래? 그게 뭔데."

일석 오빠는 나의 이 말에 반쯤 일으켰던 몸을 다시 주저앉았다. 내가 물어보려는 게 뭐일까 몹시 궁금해하는 표정을 하고서.

"오빠, 군에 있을 때 편지에다가 나를 처음 본 순간 색시 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그랬잖아요? 그 이유가 되게 궁금했어요. 그때 나는 고작 국민학교 4학년짜리 어린애였는데 그런 나를 보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더라구요. 도대체 나의 뭘 본 것인지 기회가 오면 꼭 물어보고 싶었어요."

"아! 그거?"

일석 오빠는 그리 말하며 지난 날이 생각나는 듯 잠시 뜸을 들였다. 지금도 힘들지만 그때는 참 암담했었다는 그런 표정. 그러고는 내게 되레 물었다.

"연숙이 너는 나를 처음 봤던 그때 내 첫인상이 어땠었어? 좀 답답해보이지 않았어? 얼굴은 병색에다가 뭔가 잔뜩 기가 죽어있는 듯한 모습. 다른 사람들이 보면 자신감이라곤 눈 씻고 볼래야 볼 수 없는 그런 모습으로 안 보이대?"

실제로 그랬었다. 어린 내 눈에도 어쩌면 저리 무기력하고 자신감 없어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을까 싶었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절 일석 오빠의 모습을 생각하니 괜시리 가슴이 답답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지금의 일석 오빠 모습은 그 시절에 비하면 얼마나 당당해져 있는 모습인가.

"네가 본대로 그 시절의 나는 지독한 열등감에 빠져 있었어. 뭐하나 남 앞에 내세울 게 없었거든. 가난한 시골 출신인데다가 고등학교는 별로 알려지지도 않은 공업계 학교를 나왔잖니. 거기다가 장기 치료를 해야하는 병까지 걸려 있는 상태였고. 모두가 하나같이 암담한 일 뿐이었거든"

"뭐 그렇다고 다들 그러나요? 오빠가 좀 유별난 거 아녜요?" 

"그럴런지도 모르지. 내 고등학교 동창들이 다 나같지는 않았으니까. 다들 가정환경이 나보다 딱히 좋을 리 없는데도  여학생도 잘 사귀고 그러더라구."

"근데 그게 어린 나와 무슨 상관이 있었어요?"

"으응. 그게, 난 너를 처음 본 순간 내가 갖고 싶은데 못 갖고 있던 것들을 다 갖추고 있는 모습을 본 거였어. 그걸 보고 반해버린 거지. 어린 소녀가 어떻제 저리 자신감에 넘치는 당당한 모습을 갖추고 있을까 싶었던 거야.  아마 내가 태어나서 처음 본 모습이었을꺼야. 내 주변의 그 누구도 너처럼 자신감 넘치는 당당한 모습을 가진 사람은 없었거든. 그건 어른이나 아이나 다 마찬가지였어. 그래서 그 모습에 매료됐던 것 같아. 나는 갖고 싶으나 갖고 있지 못했던 성격. 물론 외모도 전혀 안 본 것은 아니지. 얼굴도 꽤 예뻤잖니. 지금도 여전히 예쁘지만. 일석 오빠는 내 외모 이야기를 하면서 좀 멋적은 표정을 지었다. 너무 어린 나를 두고 외모를 봤다는 게 좀 쑥스러워서인 것 같았다. 그러더니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말을 이었다.

"아! 한 가지 더 있다. 3층 할아버지 댁에서 TV를 볼 때 넌 무슨 일이 있어도 9시만 되면 내일 학교에 가야 된다고 그러면서 집에 간 거 기억하지?"

난 다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때 네가 다른 아이들하고는 뭔가 다르다는 걸 본 거야. 쌍둥이, 성오, 성순이는 다 그대로 TV를 보고 있었거든. 참, 경이스러운 마음이 들더라구. 고작 국민학교 4학년짜리가 저렇게 의지력이 대단할 수가 있다니 참 놀랍다 싶은 마음이었지. 사실 나도 그럴 자신이 없었거든.  TV에 한창 재미있는 프로가 나오는데 그거 보는 걸 중간에 포기할 수가 있다니, 그것도 무슨 입시나 고시공부하는 것도 아닌 어린 국민학생이 말이지. 이런 말 하면 좀 우습게 들리겠지만 존경스럽기까지 했었어. 1년 동안 입시공부할 때 지치고 힘들 때면 그런 너를 생각하면서 힘을 냈다면 믿을 수 있겠어? 그런데 실제로 그랬어. 어린 너도 그리 의지력이 강한데 힘내자, 힘내자 그러면서 공부했었어. 어떻게 궁금증에 대한 답이 됐니?"

나는 말없이 몸을 일으키면서 엉덩이에 깔고 앉았던 책을 일석 오빠에게 건넸다. 물음에 대한 답을 긍정한단 뜻으로, 책 제목을 슬쩍 보면서. 얼핏 본 책에는 신경제원론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앉으라고 깔아줬을 때는 볼 수 없었던 책 제목이었다. 일석 오빠가 일부러 책 뒤쪽을 위로해서 깔고 앉게 해서였을 터였다. 취직시험 공부용 책인가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오빠가 다녔다는 국문과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듯한 책. 만약에 휴학을 안 했다면 안 볼지도 모르는 책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거기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책을 건네주고 삼청공원 쪽으로 내려가면서 한 가지 더 물어봐야 할 일이 생각났지만 이는 나 스스로 답을 내는 걸로 참기로 했다.

일석 오빠는 자기 스스로 자기가 싫어하는 성격인 것을 알고 있었으니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 여기에 일조한 것이 명문대학에 들어간 것하고 군대에 갔다 왔다는 것일 터이고. 내 생각에는 이 두 가지만 해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명문 대학에 들어가는 것도 그렇지만 군대 갔다 오는 것도.  사람들은 군대야 이 나라 남자들이면 누구나 다 갔다오는 것으로 알고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당장 주영 오빠도 군대를 안 갔다지 않는가.  이렇게 어떤 방법으로든 군대 안 가는 남자들이 많은데도 현역으로 갔다왔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당당해질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날 이후로 나는 토요일 퇴근 후에 종종 일석 오빠에게 들렀다. 매주는 아니었다. 공부하는데 방해될 듯 싶기도 했고 그 정도로 절실하게 보고 싶은 것도 아니어서였다. 우리 둘 사이는 사랑하는 사이는 분명 아니었다. 그렇다고 싫은 사이도 아닌 것이고. 연인 관계라기보다는 가족같은 느낌이 더 들었다. 친오빠는 아니지만 오빠 같은 느낌. 그런 마음이 더 강했다. 마음에 끌리는 이성이 나타나면 언제든지 그쪽으로 끌려갈 것 같은 상황. 일석 오빠와 결혼해 같이 살 수는 있겠지만 이는 사랑하는 마음보다는 신뢰하는 마음이 더 강해서 일터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사는 것보다는 밋밋하기 그지 없을 그런 생활. 그러나 거기까지 가기에는 아직 난관이 많았다. 어찌보면 도저히 밖으로 빠져나올 수 없도록 되어 있는 첩첩산중에서 헤매고 있는 느낌이랄까? 뭔가 모르지만 그런 느낌이 자꾸 들었다.


일석 오빠는 우리 둘 사이의 문제에 대해서는 별 이야기가 없었다. 이런저런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중에는 쌍둥이 문제, 엄마 문제가 걸려 있을 것이었다. 보다 큰 문제는 우리 둘에게 있는 것일 터이고. 내가 처음으로 일석 오빠를 만나러 갔던 날 저녁을 먹고 헤어질 때쯤 오빠는 내게 말했다.

"일요일에도 학교에 나와 공부하다가 집에 간다.  평일, 토요일 오후도 보통 9시까지는 그러고. 사무실을 혼자 쓰고 있으니까 도서관보다 훨씬 편하고 좋거든. 그러니 네가 편한 시간에 아무 때나 연락해라. 아마 내가 만나자고 연락하기는 쉽지 않을꺼야. 이 직장을 하루라도 빨리 뜨려면 시간을 아껴 조금이라도 더 공부해야 되니까."

그리 말하는 이면에는 나를 처음 봤을 당시에 먹었던 절실한 마음은 많이 접어둔 상태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고 아주 포기한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무슨 마음일까 이 오빠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직접 물어 볼 수도 없었다. 설사 물어봤다고 해도 제대로 말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기 자신의 현재 처지가 자기가 꿈꾸고 있던 삶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어 그것을 견디기 힘들어 하고 있는 모습으로 내게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런 점에서 나라고 다를 것은 없지만 나는 현실에 굴복하고 진작에 포기하고 있었는데 반하여 이 오빠는 안 그런 것 같았다. 해결 할 수 없으면 체념이라도 해서 극복해야 할 터인데 이게 안 되는 성격인 것 같았다. 현실에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을 포기 못하고 미련을 갖고 있다보니 자기가 처한 현실에서 보이는 것이 다 마뜩치 않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나도 여기에 포함되고 있는 것 아닐까 싶은  불길한 생각이 만나는 회수가 늘어가면서 들었다.

일석 오빠는 전화를 하면 싫다고 그러지는 않았으나 아주 반기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공부할 시간이 부족한 때문이라는 느낌보다는 뭔가 나에 대한 마음이 달라져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더 많이 들었다. 내가 한 여인으로 성장해 있으나 이성으로는 보지 않는 듯 싶은 느낌 뭐 그런 것이었다. 내 마음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일석 오빠를 이성으로 받아들여야겠다고 결심을 하기는 했지만 마음 먹은대로 잘 안 되었다. 그저 어린 시절에 본, 투병생활하던 그때 그 모습만이 연상될 뿐이었다. 그러니 사랑한단 감정이 생길 리가 없었다. 나를 마음에 품어두고 습관적으로 연락해 온 일석 오빠의 마음을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은 이성적인 것이었다. 사랑이 이성적인 것일까? 감성적인 쪽이 먼저 아닐까? 낮에는 사동일을 하고 밤에는 학교를 다니는 탓에 이성에 대한 사랑을 느껴 볼 사이도 없이 사춘기, 고등학교 시절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나였다. 주변 환경도 도와주지 않았다. 대입재수 학원은 비슷한 나이 또래들이 넘쳐나는 곳이었으나 그들은 이성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는 존재들이었다. 한시적이긴 하겠지만, 명문대학을 가겠다고 재수의 길을 택한 그들에게 이성이란 존재는 거치장스러운 장애물일 뿐이었다. 그러니 나란 존재, 더구나 사동일을 하는, 그래서 집안이 가난할 것이 틀림없음을 들어내고 있는 나에게 크게 관심을 기울일 재수생들은 없었다.  내 시선을 끄는 재수생은 제법 있었지만 그들은 나에게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인생길을 걸어갈 존재로는 안 보였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들의 장래를 생각하고 참았던 것일까? 아마 둘 다일 것이었다. 재수생 각자의 성격에 따라서. 

그중에 유독 내게 관심을 나타낸 재수생이 한 명 있기는 했다. 3학년 초일 때였다. 새로운 재수생들이 학원을 꽉 채운 바로 그때. 그 재수생은 얼핏 보아 주영 오빠를 생각나게 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뭔가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 재수를 하면서도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자체가 딱 주영 오빠를 닮아 있었다. 반을 보니 국립 S대 반이었다. 공부를 꽤 잘했는가 싶었다. 이 재수생은 성격이 활달한 탓인지 가끔 나에게 아는 척을 했다. 이따금 음료수 같은 것도 건넸다. 그러나 거기까지 뿐이었다. 일요일에 밖에서 한 번 만나자는 등의 데이트 신청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저 학원 안에서 오가며 아는 척 하는게 전부였다. 속으로 많이 섭섭했지만 어쩌는 수 없었다. 상대는 일분일초가 아쉬운 재수생이었다. 재수를 하면서 이성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일임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 읊는다는 속담이 내게 딱 들어맞은 것이다. 재수학원에 오래 있다가보니 저절로 알게 된 일. 그러니 당사자인 본인은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고 나면 혹시 모르겠다고 은근히 기대했으나 결과를 알기도 전에 내가 학원을 떠나게 된 탓에 인연이 여기까지 뿐인가보다라고 생각하며 체념했었다. 이 재수생을 다시 본 것은 일석 오빠가 근무하고 있는 대학에서였다. 국립 S대 진학에 실패한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거의 3년간 직장으로 다녔던 학원을 그만 둔 것은 졸업을 하기도 전에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에 취업이 되어서였다.  전기대학 입시는 이미 끝나 합격자 발표만 나면 될 때였다. 내 빈자리는 내가 잘 아는 후배로 채웠다. 나를 채용해준 선생님이 나를 신뢰한 덕분이었다.

"졸업도 하기 전에 취업이 되었다구. 축하할 일이구나. 네 뒤를 이어 일할 학생은 네가 알아서 데리고 오너라."

나를 채용해 준 중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 친구분은 3년동안 내가 일한 태도에 충분히 만족했는지 취직이 되었다고 말씀 드린 날 이리 말씀하셨다. 고마운 일이었다. 내 마음에 드는 후배를 내 힘으로 낮에 일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해 준 것이니. 취업 한 달뒤 첫 봉급을 받아 든 나는 음료수와 과일을 사들고 학원에 들렀다. 근로라는 대가를 지불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동안 내가 안심하고 학교를 다닐 수 있게 해준 고마운 곳이었다. 그 고맙다는 마음을 이렇게라도 표하고 싶어서였다. 궁금한 것이 있기도 했다. 나에게 관심을 표시했던 이 재수생은 과연 원하는 대학에 들어 갔을까 알고 싶었다. 학원에서는 명문대 합격생 명단을 파악해 놓고 있었다. 명문대학 합격생 수가 많고 적음에 따라 학원 명성이 좌우되기 때문이었다. 학원 자료에 이 재수생 이름은 없었다. 실패했으니 후기 대학을 갔거나 다시 재수를 하겠구나 생각하며 잊고 지냈다. 어차피 현실에서 인연으로 맺어질 사람은 아니었다는 쪽 생각이 강했던 터여서 잊기도 쉬웠다.  그 재수생을 일석 오빠가 직장으로 다니고 있는 이 대학에서 보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이었다. 그런데 보게 되었고 이날 일석 오빠에 대한 내 마음이 어떤 것인가가 적나라하게 들어났다. 일석 오빠도 내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다. 아마 무척 마음 아파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일석 오빠의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나를 처음 봤던 그 시절 같지는 않을지라도 어쨌든 곁에 나 외에 다른 이성은 없는 것이 틀림없어 보였으니까.  공부할 시간도 모자라 절쩔매고 있는 사람이 이성에게 관심을 기울일 리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설사 있더라도 참고 지낼 수밖에 없었을 터이고.


가을 무렵이었다. 일석 오빠를 만나러 다니기 시작한지도 어느덧 반년이란 시간이 지나 있을 즈음. 나무잎들이 형형색색으로 물들은 걸 보면 10월 말쯤 되려나? 아마 대충 그 무렵일 것이다. 그날은 대학 뒷문으로 나가 삼청공원 쪽으로 간 것이 아니라 정문 쪽으로 갔었다.  창경궁을 가려고 했을 것이다.  고궁의 단풍들이 아름다우리란 생각에 그걸 보려는 마음으로. 교문을 들어서서 일석 오빠가 있는 사무실로 가는 길에는 봄에 봤던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샛노랗게 물든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면서 오늘은 창경궁으로 단풍 보러 가자고 그래야지 생각을 한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은행나무 있는 곳에서 전화해서 내려오라고 그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조금이라도 공부할 시간을 벌어줘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는 일석 오빠는 선선히 그러자고 응했다. 우리는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사무실을 빠져나와 교문을 향해 천천히 경사진 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멀리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보이는 곳까지 이르렀을 때 왠지 낯익은 모습의 남자가 은행나무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은행잎을 줍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구일까, 어디서 봤을까 곰곰히 생각하며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비로서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바로 학원에서 보았던 그 재수생이었다. 3수를 포기하고 후기대학에 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 많은 대학들 중에 이 대학이리라곤 미처 생각을 못했었다. 하긴 국립 S대 입시에 실패하면 법, 상경계 지망생의 경우 이 대학에 많이 온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 가능성은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막상 보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해 본 일이었다. 너무 반가운 김에 내가 먼저 아는 척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의 밝고 명랑하던 성격이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온 것이다. 그 학생도 나를 알아보고는 엉거주춤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서, 그러면서도 반가움이 담긴 얼굴로. 이 학교에는 무슨 일인가 궁금해 하는 그런 표정도 같이 지으면서, 내곁에 서있는 일석 오빠도 흘깃 바라보면서. 이때 나의 행동이 아주 돌발적이었다. 일석 오빠를 몹시 당황하게 만들었을 행동. 두고두고 일석 오빠 보기가 민망하게 만든 행동.

"오빠 먼저 가요."

나도 모르게 저절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때 당황한 표정을 한 채 아무런 대답도 없이 교문 쪽으로 빠르게 걸어가는 일석 오빠의 뒷모습을 나는 전혀 의식 못했다. 그게 얼마나 일석 오빠를 실망시킨 행동인지를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학생은 여자 친구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약속 시간이 남아 은행나무 밑에서 그러고 있던 중이었던 것이다. 내게 할애한 시간은 그 은행나무 밑에서의 잠깐 뿐이었다. 정문 쪽에서 한 아가씨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더니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간다면서 그쪽으로 휭하니 내달려 가버렸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한 번 만나자는 의례적인 말만 한 마디 던지고서. 황당한 마음으로 일석 오빠 뒤를 쫒아 버스 정류장까지 부지런히 가봤지만 그 어디에도 일석 오빠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일석 오빠에 대한 내 마음이 어떻다는 걸 보여준 이 돌발적인 행동에 대해 나는 사과하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 뒤로 학교로 찾아가지 않는 걸로 사과를 대신했다. 나를 용서한다면 먼저 전화를 하리라는 기대를 하고서. 그러나 일석 오빠로부터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애가 좀 타긴 했지만 내가 먼저 연락하기에는 너무 면목이 없었다. 혹시나하고 생각하고 있던 내 마음을 그날 알아버린 탓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일분일초를 쪼개서 공부하는 사람이니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석 오빠도 나를 이성으로 사랑하는 마음은 아니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기도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공부하느라 시간이 없다고 해도 이리 연락 안 할 리는 없는 것 아닌가 싶어서였다. 설사 내가 좀 섭섭한 행동을 했다고쳐도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다면 먼저 연락을 해야 되는 것 아닌가 싶었다. 그게 아닌 걸 보면 그저 나를 처음 봤을 때 가졌던 그 마음을 다시 확인하면서 인연을 이어가는 데까지 가보겠다는 그런 마음인 것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일석 오빠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은 은행나무 사건이 있은 뒤 거의 두 달이 다 되어서였다.해가 바뀌기 전 연말 경. 연말결산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바쁠 때였다.

"경리과 이연숙입니다."

사무실로 걸려 온 전화를 받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연숙아 나다. 일석 오빠."

교환양이 연결해 준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히 일석 오빠였다. 

"어머, 오빠 어쩐 일이세요. 전화를 다 하고."

"으응, 나 직장 옮겼다. 그래서 알려주려고."

" 어머, 어디로요?"

" J은행이라고 알지? 국책은행. 거기 시험에 합격해서 지금 연수 중이야.  내년 4월에 정식 발령이 난다."

" 어머나, 오빠. 너무너무 축하해요."

"그래, 고맙다. 은행이 네가 다니는 회사하고 가까우니 일간 한 번 만나자. "

일석 오빠는 그리 말하면서도 목소리에 신이 나 있지는 않았다. 기업체들이 인기가 좋던 시절이었다. 대기업이나 무역상사들. 수출 활황에 힘입어 봉급이 제일 세서 대졸, 실력우수자들이 그쪽으로 많이 몰린다고 매스컴에 나 있었다. 은행은 정부에서 강제로 봉급을 깍는 조치를 한 탓에 인기가 좀 떨어져 있었다. 박대통령 군 재직 중 겪은 경험 때문에 그랬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은행은 여전히 좋은 직장에 속했다. 정년이 보장되고 보수도 좋은 안정적인 직장.  그런 곳에 들어가서도 힘이 안 나는 목소리인 것은 일석 오빠가 살고자 했던 삶을 못 살고 있는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었다. 일석 오빠는 아마 어느 직장을 가게 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자기가 다녔던 학과인 국문과에 관계가 되는 분야의 직장이라면 혹 모를까. 이를테면 방송사나 언론사 같은 곳. 원래 하고 싶은 일은 책 속에 파묻혀 사는 학자가 되는 삶이라고 했으니 그와 유사한 일을  할 수 있는 곳이라면 혹 몰라도 절대로 만족을 못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나는 일석 오빠의 그런 성격이 이해가 안 되었다. 사람은 책보다는 사람들 속에서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야 되는 거 아닌가? 내가 대학을 갈 수 있었다고해도 학문을 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다. 아나운서가 되는 게 꿈이었다. 여자라면 누구나 선망할 직업. 대중들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게 내 꿈이었던 것이다. 시작도 못해보고 회사의 경리사원으로 있는게 내 현재의 모습이지만.


일석 오빠로부터 한 번 만나자는 연락이 온 건 해가 바뀌고 한 달쯤 지나서였다.

내 신상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 때. 죽은 남편과 막 교제가 시작되고 있을 때였다.

"본점에 배치돼서 실습을 받고 있어. 정식 발령도 지금 실습받고 있는 부서로 날꺼야. 너네 회사에서 가까우니 퇴근후 이쪽으로 올래? 광화문 근처에 있는 O경양식집 알지? 그리로 퇴근후에 오렴."

O경양식집은 광화문 일대에서 꽤 알려지진 곳이었다. 젊은 연인들이 애용하는 가격도 만만치 않은 곳. 죽은 남편과 데이트하면서 간 적이 있었다. 약속 장소를 다른 곳으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 그만 두었다. 일석 오빠로서는 난생 처음 가는 곳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우리가 만났던 동안 간 곳은 싸구려 빵집이 고작이었다. 데이트하는 성인 남녀가 가기엔 어울리지 않는 곳. 중고등학생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었다.

"봉급이 많지 않아 이런 곳뿐이 못 데리고 와서 미안하다. 집에 생활비 주고 나면 내가 쓸 수 있는 용돈이 별로 없어. 여동생 등록금도 보너스가 나와야 줄 수 있을 정도야. 그러니 네가 이해해줘라. 대신 좀 더 나은 직장에 취직하면 멋있는 경양식집 같은데 꼭 데리고 갈께."

"아녜요. 오빠. 빵집이면 어때요. 나는 괜찮아요."

"하긴 너 2학년 때 집으로 데리고 갈 때보다는 형편이 나아지긴 한 거다. 그때는 빵집에 데리고 갈 돈 조차도 없었거든."

비로소 그 당시의 의문이 풀렸다. 학교 근처에 빵집이 있는데도 왜 굳이 집까지 데리고 가는걸까 이상하게 생각했던데 대한 의문이. 일석 오빠는 그때 내게 찐빵 한 접시 사줄 돈조차 호주머니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불쌍한 오빠. 내가 비록 사동일을 하면서 야간고등학교를 다니고는 있지만 집안 형편이 그 정도로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물려 준 우리집도 있고 엄마에게 얼마간 남아있는 돈도 있었다. 단지 고정적인 수입이 없는 탓에 나와 쌍둥이를 위한 투자가 여의치 않은 상황일 뿐이었다. 엄마 입장에서는 여자인 나보다는 남자인 쌍둥이 문제가 더 심각했을 터이고. 나는 여자니까 제쳐두고라도 남자인 쌍둥이는 공부를 시켜야 되는데 그게 과연 가능할까 하는 문제.


쭈뼛쭈뼛한 마음으로 약속 장소로 나갔다. 괜시리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데도 발걸음이 무거운 탓인지 평소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 것 같았다. 일석 오빠는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음식점 안으로 들어서자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지금까지 봐왔던 모습하고는 완전히 달라진 말쑥한 신사복 차림을 하고서. 가까이 다가가자 웃도리 왼쪽 옷깃에, 다니고 있는 은행 표시인 듯 싶은 금장 뺏지가 반짝거리고 있는게 보였다. 

"어서 와라. 그동안 잘 지냈지?" 

"뭐 그럭저럭요. 오빠, 신사복이 너무 잘 어울려요."

"그러냐. 말만이라도 고맙다."

일석 오빠는 내 말이 싫지 않은 듯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지금까지 봐온 웃음 중에 제일 밝은 웃음. 빈 말은 결코 아니었다. 신사복을 입은 일석 오빠의 모습은 지금까지 봐왔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멋있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이 음식점 어때. 분위기 좋지? 너를 위해서 일부러 알아본 데야. 전에 한 약속 있잖아. 번듯한 직장 취직하면 경양식집에 꼭 데리고 오겠다고 한 약속."

괜시리 양심이 찔렸다. 난 일석 오빠 아닌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는 중 아닌가. 그것도 마음을 많이 뺏긴 상태로. 일석 오빠는 식사를 하면서도 특별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저 취직한 턱을 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오랜 기간 인연을 맺어온 나에게 이제서야 비로서 제대로 대접을 하고 있다는 뿌듯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행동에서 느껴졌다. 이와는 관계없이 얼굴 표정이 그리 밝지 않은 것은 자기가 가고 싶은 길로 가지 못하고 있는 삶인 때문일 터이고.

"은행 들어가니 좋지요?"

"뭐, 그저 그래. 시험 볼 곳이 제한되어 있다보니 뜻하지 않게 은행에 들어가게 된 셈이니까. 그래도 좋은 게 있긴 하더라. 아직 수습기간인데도 월급이 학교에 있을 때보다 4배나 많은 거 있지. 그거 하나는 좋더라."

나는 이 오빠가 사람보다 책을 더 좋아하는 성격만 아니라면 참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책을 더 좋아하는 성격이니 은행 일에 만족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이라는 것이 맡겨진 일을 해야하는 것이니 거기서 어떻게 만족감을 느낄 것인가. 절대 그러지 못할 것이다. 책을 좋아한다는 것은 자기 혼자서 지내는 것을 좋아한다는 뚯 아닌가. 사회성 면에서 남한테 뒤진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일석 오빠가 남들이 알아주는 직장을 다니면서 생활이 안정되고 지위도 높아지고 그러는 것에 그런대로 만족하며 살게 되는 그런 성격이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근무 경력이 쌓이고 나면 나중에는 지점장이 될터인데, 그것만으로라도 대단히 성공적인 삶을 산 것이 되는 것일텐데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당사자인 일석 오빠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많은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이날 일석 오빠는 무슨 특별한 언질 같은 건 전혀 주지 않았다. 이제 자리를 잡았으니 본격적으로 만나자든가 언제 또 만나자든가 하는 이야기를. 다행이다 싶기도 했지만 한 편으론

서운한 마음이 없지도 않았다. 일석 오빠가 그리 했어야 내가 죽은 남편과 일석 오빠 사이에서 고민을 할 터인데 그럴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죽은 남편과의 사이가 점점 더 가까워지게 되었다. 일석 오빠는 가슴 한편에 놔두는 것으로 끝내고 죽은 남편과 앞날을 꿈꾸기 시작한 것이다.


*

죽은 남편이 나에게 반해 접근을 시도한 건 우연히 나를 본 처음부터였다. 입사해서 1년 쯤 지났을 무렵. 남편은 토목 기사였다. 주로 현장에서 일하는 직종이라 본사에 근무하는 나를 볼 기회는 거의 없었다. 현장 직원이 본사에 들를 일은 거의 없으니까. 그런데 책임자로 승진하면서 본사에 들를 기회가 생긴 것 같았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본사 기술부와 경리부에 업무 협의차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들러야 했던 모양이었다. 그때 경리과 창구에 앉아 있는 나를 본 것 같았다. 다음 달 본사에 들렀을 때는 음료수하고 자기 명함을 건넸다. 그러더니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지방에 있는 공사 현장에 있는 탓에 내가 근무하는 서울로 올라오기가 쉽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이후 본사에 들를 때마다 데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나도 남편이 싫지 않았던 것이다. 허약해 보이는 일석 오빠와 달리 건장한 체격에다 성격도 시원시원해서였다. 마음을 표시하는 강도, 방법에도 차이가 컸다. 마치 주영 오빠를 보는 느낌이었다. 일석 오빠의 경우는 이성으로는 생각도 못했던 존재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성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었다.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굳혔을 때도 사랑한다는 마음이 앞선 건 아니었다. 나를 그토록 생각하고 있다니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다는 쪽이었다. 나 스스로 더 끌리는 대상이 나타난다면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마음. 그 대표적인 게 일석 오빠가 전에 다녔던 직장인 대학의 은행나무 아래서 본, 학원에 근무할 때 호감을 가졌던 학생을 봤을 때 일어났던 돌발적인 행동이었을 것이다. 이런 것 말고도 일석 오빠와 내가 맺어지기에는 장애물이 너무 많았다. 가장 큰 이유는 둘 다 가난하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둘 다 직장을 가지고 있으니 이 문제는 일단  해결이 된 셈이기는 했다. 결혼하면 나는 직장을 그만둬야 되지만 최소한 먹고사는 문제는 걱정을 안 해도 되는 셈이었다. 그래도 여유있게 출발하는 삶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었다. 두 번째는 동생들 뒷바라지 문제였다. 일석 오빠는 여동생이 한 명, 내게는 남동생이 두 명이나 있었다. 일석 오빠는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이제는 3학년이 되어 있을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여동생이 졸업을 하면 되는 일이었다. 대학까지 보내주려는 건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것까지는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 문제는 나였다. 쌍둥이 동생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을. 지금 중학교 다니는 거는 돌아가신 할아버지 덕분에 해결이 되었지만 고등학교 문제는 어찌 할 것인가?  너무 벅찬 일이었다. 한 명도 아니고 두 명 아닌가 말이다. 일석 오빠가 나온 고등학교에 국비장학생 제도가 있다는 이야기를 엄마에게 하기는 했다.  그렇다고 엄마가 반색할 일은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 식구들 힘으로 보내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내가 엄마 입장이라도 그럴 테니까. 문제는 그리하려면 하숙이 언니하고 내가 희생을 해야 하는 데 있었다. 많지 않은 봉급을 쌍둥이 동생 뒷바라지에 밀어 넣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되면 내 인생은 없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동생들 뒷바라지나 하다가 20대 초중반을 다 보내게 되는 것이다. 


엄마는 내가 그래주기를 바라는 눈치였지만 차마 말은 못 꺼냈다. 고등학교도 자기 스스로 학비를 벌어 다닌 딸에게 동생들 뒷바라지를 부탁하기에는 너무 염치가 없어서 일터였다. 하숙 언니는 이즈음 자기 갈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좀 엉뚱한 길이었다.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다. 엄마가 아무리 길길이 뛰었지만 소용없었다. 원래 튀는 성격이긴 했지만 골치아픈  집안 문제를 이런 식으로 피하게 될 줄은 미처 상상도 못했다. 그렇다고 재력이 있어서 집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남자를 잡은 것도 아니었다. 다니고 있는 회사에  가끔 들르는 거래처 직원일 뿐이었다. 속은 것이라고 했다. 언니에게 한 눈에 반해 총각이라고 속인 것을 몰랐고, 알았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고 했다. 사랑하는 마음을 지울 수도 없었고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기는 더더구나라고 했다.


죽은 남편은 결혼을 서둘렀다. 사랑하는 사이인데 기왕 할 거면 빨리하고 싶다는 생각에서인 것 같았다. 우리집 사정을 다 알고 난 뒤에는 처남 될 두동생 뒷바라지 내가 다 할께라며 팔을 걷어 부쳤다. 엄마도 마음에 들어했다. 건강 관리에 실패한 것이 원인이 되어 먼저 가버린 아빠 때문인지 사위감은 건강한가 아닌가가 최우선이었다. 일석 오빠는 거기에서부터 엄마의 눈에 나 있었던 것이다.

"일석 총각은 안 돼. 언제 어떻게 건강을 상하게 될지 모르는 사람이야."

엄마의 반대가 아니라도 장애는 또 있었다. 일석 오빠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계속해서 내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을 보면 나를 포기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적극성을 띄는 것도 아니었다. 사귀는 다른 여자가 있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이 오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지?"

궁금했지만 알 수가 없었다. 물어 볼수도 없었다. 막연하게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삶이 싫어서인 것 아닐까라는 생각은 들었다. 도저히 치유될 수 없는 어리석은 병.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면 포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내 마음은 점점 더 남편 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모든 조건이 일석 오빠보다 좋았던 것이다. 나이도 일석 오빠보다 3살이나 적었다. 나하고는 5살 차이. 집안도 괜찮았다. 크게 유복한 편은 아니지만 시골에서 아들 대학 보낼 정도는 되는 것이니 괜찮은 편에 속했다. 무엇보다도 좋은 조건은 집안의 막내라는 점이었다. 위로 누나, 형들이 이미 다 결혼을 해 있었던 것이다. 시부모 될 분 중 시아버지 될 분은 이미 이 세상 분이 아니었다. 시어머니 될 분은 큰아주버니 될 분과 시골에서 같이 살고 계셨다. 난 그저 죽은 남편만 신경쓰면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결혼을 하기로 했다. 일석 오빠가 마음에 안 걸린 것은 아니지만 남편에게 얘기할 필요도 없었다. 설사 안다고 해도 문제될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일석 오빠와 나는 연인들 사이에 있게 마련인 그 흔한 신체 접촉 한 번 없던 사이였다. 유일하게 한 게 손 잡은 일이었다. 그것도 의도적인 게 아니라 경사진 산길인 탓이었다. 일석 오빠는 내게서 여성으로서의 매력은 전혀 못 느꼈을까? 그건 아니었을 것이다. 여성으로서 한창 아름다울 때인 20초반인데 그럴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턱이 조금 나와있는 것 빼면 괜찮은 외모 아닌가. 그러니 일석 오빠 성격 자체가 유별난 편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어쩌면 결벽증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결혼을 할 여자가 아니면 사귀지도, 육체적 접촉도 하면 안 된다는. 이런 성격은 군대를 갔다왔다고 해서 고쳐질 성질의 것은 아닐 것이다. 타고난 성격을 어떻게 고칠 것인가. 하숙 언니는 일석 오빠를 보고 여자를 무슨 신비스런 존재로 보는 것 같다면서 깔깔댔었다. 거기다가 안 기간은 오래 되었지만 일석 오빠가 투병생활을 하던, 내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을 제외하면 얼굴을 자주 본 사이도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1년에 한 번 그것도 무슨 이유인지 1학년 때는 걸렀다. 사회인이 되고 나서는 주말을 이용해 보름에 한 번 정도 본 게 다였다. 그것도 내가 찾아가야만 됐었다. 공부할 시간이 부족해서 그런다고는 했지만 보다 큰 이유는 다른 데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의 자기 처지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를 생각하면서 자기 처지를 싫어하고 있는 것은 아닐가 싶은 느낌. 그러다가 은행나무 사건 이후로는 그나마도 중단이 되었었고. 은행에 들어가고 나서도 연락이 별로 없었던 것을 보면 나의 이런 생각은 더욱 신빙성이 있었다.

"더 이상은 힘들어서 공부 못하겠더라. 고시 공부하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다른 직장이라고 크게 나을 것도 없을텐데 새삼 더 공부하는 것도 의미가 없는 것 같고."

은행에 취직이 되었다면서 한 번 만나자고 해서 만난 날 일석 오빠가 한 말이었다. 많이 지친 모습이었다. 은행에 취업이 되었다고 해서 크게 기뻐하는 모습도 아니었다.  정작 가고 싶은 길은 따로 있는데 못가고 있는 탓에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퇴근 후에 서예 학원에 다니고 있다. 그림은 재능이 없어서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엄두가 안 나 못하고 글씨 쓰기도 좋아해서. 나중에 정년퇴직하면 서예학원이나 하나 차리고 싶어."

일석 오빠는 이 말을 하면서 조금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이건 또 무슨 얘기인가 싶었다. 서예라니? 글 쓰는 게 아니고 글씨 쓰는 거 아닌가. 이 오빠는 도대체 머리 속에 무슨 생각을 담고 사는 건지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행에 들어갔으면 이제 좀 쉬던지 하면 될 것 아닌가? 학문을 못 하게 된 대신 대안으로 서예를 배워, 나중에 정년퇴직하고 나면 서예학원을 차리겠다는 생각 아닌가 말이다. 만나면 만날 수록 불가사의한 성격을 가진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시라도 몸을 가만 놔두면 안 되는 성격. 참 힘들겠다 싶었다.

"오빠. 글도 쓰고 싶다고 했었잖아요?"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글을 쓰는 일은 머리를 싸매고 끙끙거려야 되는데 지금 체력으로는 감당하기가 힘들더라. 몇 번 시도하다가 중단했어. 혹 나중에라도 기회가 생기면 모를까 지금은 서예학원 다니는 정도로 만족해야 돼."


이런 일석 오빠가 내게 속내를 비친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은행에 들어가고 1년 쯤 지나서였다. 토요일 퇴근 시간이 임박한 시간. 엉덩이가 들썩들썩하고 있는데 일석 오빠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연숙아, 나다. 잘 지내고 있지?"

"뭐, 그냥 그리 저리 지내요."

이때 이미 죽은 남편과 한창 만나고 있었으니 거짓말이었다. 지방 현장에 있는 관계로 한 달에 한 번 꼴로만 만나면서 주로 전화 데이트로 사랑을 키우고 있는 중이었다.

"퇴근 후에 별 약속 없으면 나 좀 만날래?"

" 왜, 무슨 일 있으세요?

"아아냐, 얼굴 본지 오래되기도 했고 해서." 

"알았어요. 몇시에 어디로 나갈까요?"

"전에 우리 만났던 그 경양식 집으로 퇴근하면 오렴."

또 다시 벚꽃 필 무렵이었다. 일석 오빠와 나와의 인연이 처음 시작되었던 그 무렵처럼. 그러고 보면 일석 오빠는 나를 처음 봤던 그 시절을 못 잊어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동안 해마다 그 무렵이 되면 거의 어김없이 모습을 나타내거나 연락이 오거나 했었다.

그날 일석 오빠는 나를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까지 데리고 갔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 근처에 있는 동네. 의도적인 것 같았다. 만난 곳은 광화문이었고 일석 오빠가 사는 동네는 무악재 고개 너머에 있었다.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기는 했지만 내가 사는 동네까지 가는 버스는 많은 편이 아니어서 좀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그 버스가 아닌 일석 오빠네 동네만 갈 수 있는 버스를 타라고 하는 것이었다. 왜 그러는가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거절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석 오빠에 대하여 신뢰하는 마음이 그리 깊었기 때문이었다. 버스가 내가 다녔던 학교가 있는 곳 정류장에 다다르자 일석 오빠는 내리자고 말했다. 그러고는 전에 살았던 집하고는 반대 방향에 있는 동네 쪽으로 걸어갔다.

"오빠, 어디 가는거예요. 혹시 집에 가는거예요?"

"아냐, 그냥 너 학교 다닐 때 얼굴보러 갔었던 생각이 나서 내리자고 한 거야. 한 정거장만 같이 걷고 거기서 차 한 잔 하고 헤어지자. 그리고 지금은 전에 살던 그 집에 안 살아.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쪽 동네로 이사했어."

"그 집을 팔고 새로 샀어요?"

"아냐, 그 집, 우리집이 아니었어. 고향 친척아저씨 집에 전세를 살았던 거야. 방 하나만 우리 식구들이 쓰고 나머지 두 방은 다시 세를 줬었어. 전세금을 담보로 집주인한테  돈을 빌려 학교 등록금 낸 거고. 기한이 되니까 이사를 요구하더라. 이미 전세 보증금을 많이 되돌려 준 상태니까 계속 집 빌려주는 게 아깝다는 생각을 하는 거 같았어. 고향이 집성촌이라 같은 성씨들끼리 모여 살고 있는데  아주 가까운 친척은 아니었어. 그렇지만 너무하다 싶었지. 다른 문중 중에는 장학금 지원해주는 곳도 있거든. 나하고 친한 대학 동기 한 명이 그렇게 지원를 받아 서 지금 대학원에 다니고 있어. 옛날로 치면 서얼 출신인데도 말야. 그걸 생각하니 열불이 나더라. 아무리 자기 개인 돈이지만 그 정도도 못 봐주는 가 싶어서였지. 지금도 고향에 가서 어쩌다 그 아저씨를 보게 되어도 아는 척도 안 해."

나는 일석 오빠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이 오빠 참 복이 없는 삶을 살았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그래도 행복한 삶을 살아온 거였다. 비록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끼지 뿐이었지만 말이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일석 오빠의 말만 들으며 그 옆에서 묵묵히 따라 걷기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싶어서였다. 나한테 이런 시시콜콜한 집안 일까지 다 이야기하는 의도도 궁금했다. 남이 알아서 좋을 일 없는 내용은 대부분 감추고들 살지 않는가. 당장 나만해도 그런데.  

"지금은 어머니하고 두 여동생과 따로 떨어져 혼자 살아. 대학 입시 공부할 때처럼 밥만 집에서 먹고 다니는 식인 거지. 다 큰 여동생들하고 어머니와 함께 한 방에서 지내는 게 너무 불편해서 더 이상은 안 되겠더라구. 그렇다고 독채 전세 얻을 여유는 아직 안 되고. 이 방 얻는 돈도 꼬박 1년 걸려 모은거야. 저기 주유소 보이지? 그 뒤쪽에 있는 한옥의 방 하나를 얻어서 지내고 있어."

일석 오빠는 그리 말하며 자기가 살고 있다는 집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보고 보라는 듯. 한번 가보지 않을테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의 반응이 어떤가만을  살피는 것 같았다. 내 반응의 정도에 따라 같이 가볼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다는 뜻인 것이 내 눈에 다 읽혔다. 나는 못 들은 척 했다. 내가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일석 오빠와의 지금까지 인연을 평생을 같이 하는 쪽으로 이어가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임을 알아서였다. 남의 집 방 한 간에서 동거로부터 시작하지 않겠냐는 뜻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일석 오빠는 네가 여기서 거절하면 나하고 평생을 같이 하는 인연은 일단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나름대로 심각하게 생각하고 내린 결정. 일석 오빠가 1년 만에 연락을 해 온 건 그런 뜻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나에 대한 마음도 다잡으면서 나의 마음이 어떤지 확실히 확인해보려는 뜻. 그 뜻을 나는 받아들이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이때 이미 죽은 남편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면에서 일석 오빠보다 나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였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의 강도도 가지고 있는 조건도. 무엇보다도 나의 사랑하는 마음의 강도가 일석 오빠보다 강하다고 느꼈다. 나의 마음 역시 그랬다.  일석 오빠의 나에 대한 마음은 가슴 깊은 곳 한 쪽에 담아두기로 했다. 평생 미안한 마음을 안고 살아가기로.


*

남편이 결혼하자고 말한 것은 이듬해 봄이었다. 만나기 시작한 지 3년 째가 되가는 벚꽃 필 무렵이던 어느 토요일 오후. 그 전날 전화가 걸려왔었다.

"연숙씨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내일 퇴근 후에 좀 만나요."

나를 만나고 간 게 지난 주였다. 그런데 또 만나고 그러고 있는 것이었다.

"왜, 무슨 일 있어요? 지난 주에 만났잖아요.?"

궁금하긴 했지만 대충 짐작은 갔다. 결혼하자고 조를 판이라는 것을. 

"만나 보면 알아요."

이틑날 퇴근 후 만난 우리는 늦은 점심을 먹고 회사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고궁에 갔다. 일석 오빠가 근무하고 있는 은행 본점이 있는 곳을 거쳐가야만 되는 곳이었다. 은행 앞을 지나갈 대 마음이 약간 심란했다. 이 오빠 아직도 일하고 있을까 아니면 퇴근했을까도 궁금했다. 시간상으로는 이미 퇴근했어야 하지만 직장 일이라는게 뭐 그런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퇴근했다면 무엇을 하고 있을까도 궁금했다. 혼자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니 어디 음악감상실 같은데 혼자 처박혀 있는 것은 아닌지. 여자를 만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여자를 볼 때 결혼까지 생가하면서 보는 성격이니 아무나 좋아할 리는 없을 것이고 좋아한다면 십중팔구 현실의 일석 오빠 조건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그런 대상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를테면 자기가 다녔던 대학에서 본 마음에 드는 여학생이나 그와 비슷한 조건을 가지고 있을 직장내 여직원 . 그런데 그런 조건의 여성들과 인연을 맺기에는 자기가 갖고 있는 조건이 너무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행동도 안 해보고 지레 포기할 성격. 그러고는 자기가 처해 있는 현실을 비관하며 혼자 끙끙대다 말 성격.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의 장점보다는 단점을 먼저 본다. 일석 오빠도 그런 스타일이었다. 주영 오빠라면 마음에 드는 여성이 있으면  자기 조건 같은 거 생각 안 하고 저돌적으로 밀어붙혔을 것이다. 내 어린 시절에 본 주영 오빠에 대한 기억으로 미루어 보면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일석 오빠는 그럴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일석 오빠가 전에 다닌 직장에 있을 때 만나러 다니면서 본 경험으로는 그랬다. 군대에 갔다와서 많이 당당해진 모습을 갖추기는 했지만 군생활이 타고난 성격까지 깡그리 바꿔주는 역할까지는 하지 못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대하는 모습이 어릴 때 나를 대하듯이 여전히 조심스럽고 점잖았기 때문이었다. 내 주변에 보면 서로 좋아하다가 선을 넘은 뒤에 헤어지는 일은 다반사로 일어났다. 하숙 언니만해도 남자 관계가 복잡한 편이었었다. 내가 알고 있는 만났다가 헤어진 남자만 해도 서너 명은 됐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일석 오빠와는 전혀 관계없는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적어도 내가 겪은 일석 오빠를 보면 그랬다. 만약에 일석 오빠가 나를 만나면서 육체적인 접촉을 원했다면 나는 어찌했을까? 이를테면 키스 같은 거. 사실 일석 오빠를 만나기로 마음 먹었을 때 그런 문제를 생각 안 한 것은 아니었다. 나도 이성에 대한 육체적 호기심이 한창 왕성한 나이 아닌가. 일석 오빠가 원한다면 받아들이겠다는 각오를 하고 연락해서 만나러 다닌 것이었다. 그러나 일석 오빠는 그런 면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나를 싫어해서가 아니었다. 성격 탓이었다. 육체적 접촉은 결혼을 하고서 하는 것이라는 지극히 보수적인 생각. 여자도 아닌 남자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놀라웠지만 일석 오빠이기에 가능하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국민학교 4학년짜리 어린소녀를 훗날 색시삼겠다는 마음을 먹었을 때 마음이 내 고등학교 시절에 반에 몇 명씩 있던 불량스러운 애들이 하는 말에 해당되는 것은 아닌 것이 틀림없었으니까. 자기들이 만나는 남자애들이 "남자들 세계에는 여자애들을 키워서 잡아 먹는다" 말이 있다고 하더라며 낄낄대는 더러운 모습을 보여주던, 졸업하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이성 관계가 난잡했던 불량스러운애들이 한 말.

*

주말이라 그런지 고궁에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주로 우리처럼 젊은 연인들.  이따금 아이를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 모습도 보였다. 간난아기도 있고 어린 아이도 있는 모습. 벤치에 다정하게 앉아있는 초로의 할아버지, 할머니 모습도 보였다. 그들 모두 하나같이 행복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걷고 있는 연인거나 아이를 안거나 무동 태우고 있는 젊은 부부거나 벤치에 앉아있는 노부부거나. 아이들이 좀 커서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을 듯 싶은 나이대의 부부들 모습만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연인들은 팔장을 꼈거나 안 꼈거나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세상에서 가장 여유롭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듯한 모습으로 걷고 있었다.  죽은 남편과 나도 그들 사이에 섞여 그들의 발걸음에 맞춰 걸었다. 그들이 느끼고 있을 행복을 우리도 같이 느끼면서 아주 천천히. 벚나무들은 금방이라도 꽃망울이 터질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마 하루 이틀 사이에 활짝 피리라.  햇볓이 따사로웠다. 바람도 포근했다. 더불어 마음도 아늑하고 편안했다.

"날이 참 좋네요. 벚꽃도 금방 필 것 같고."

"그러게요."

"연숙씨는 나를 어떻게 생각해요?"

"무슨 뜻이예요?"

"결혼 상대로 어떻게 생각하냐고요."

순간 나는 올 것이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나를 결혼 상대로 보고 접근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첫인상에서 성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도 했지만 만남을 이어가는 2년 동안 나를 대하는 진지한 태도에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는 복이 있는 편인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고마운 일이기는 했다. 일석 오빠도 나를 본 순간 색시 삼을 생각을 했었다지 않았는가. 성실한 사람들이 좋게 봐주는 것은 복이라면 복일 수도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복보다는 부모 뒷바라지 잘 받으면서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복이겠지만 그런 복은 못 타고 났으니 이런 복이라도 있다는 것이 그나마다행이다 싶었다.

"지금 내 형편이 결혼하기는 좀 곤란해요."

일석 오빠를 전혀 안 떠올린 대답은 아니었다.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보다 더 큰 이유는 집에 있었다. 나마저 결혼해버리면 쌍동이 동생은 어떻게 될까 싶어서였다.

"연숙씨 마음 다 알아요. 집안 문제가 신경 쓰여서 그러죠? 그건 걱정 말아요. 내가 힘 닿는데까지 도울께요."

엄마한테 결혼 신청이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엄마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

"쌍둥이 문제는 걱정말고 결혼하거라. 그동안 한 고생도 적지 않은데 동생들 때문에 너를 희생하라고 그러긴 에미로서 염치가 없다. 쌍둥이 인생은 쌍둥이 인생이니 걱정말고 네 갈길을 가거라. 일석 청년 나왔다는 고등학교 국비장학생으로 가면 우선 급한 불은 끄는 것이니 그리 하련다. 다 주어진 복대로 살아가는 것 아니겠니?"


결혼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다니던 회사는 사표를 냈다. 다닐 수도 없었다. 여직원은 결혼하면 그만두는게 당연시되던 시절이었다. 식은 간소하게 치뤘다. 그 해 초가을 무렵. 남편 쪽도 크게 여유가 있는 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 편에 맞춰줬다. 시어머니 될 분이 나를 보고는 마음에 들어 하시면서 아무 것도 필요없으니 몸만 와도 된다고 그럴 정도로 깨인 분이어서였다. 당신 시집 올 때도 시부모님들이 그리 하도록 하셨다면서. 고마운 일이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뒤로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행복을 맛보게 된 것이었다. 신혼집은 큰 언니가 살고 있는 이곳 항구도시로 정했다. 마침 남편 근무하는 현장이 이곳에 있어서였다. 비록 방 한 간이지만 전세였다.

 

"잘 됐구나. 그러면 나도 쌍둥이들 중학교 졸업하면 집을 정리해서 그리로 내려가마. 그곳은 집값이 쌀 터이니 여기 집 정리해서 작은 집 하나 사고 남는 돈하고 가지고 있는 돈 은행에 넣어 나오는 이자로 생활하면 될 것 같다. 네 신랑이야 어차피 현장따라 근무지가 옮겨질 터이니 기왕이면 큰언니가 살고 있는 그곳에서 다들 같이 살기로 하자꾸나."

친정 엄마는 게획은 그리 세웠지만 정작 내려온 건 쌍둥이 고등학교 졸업하고 난 뒤였다. 하숙을 쳐는데서 떨어지는 수입을 무시할 수 없어서였다.  남편은 5년 뒤 해외 현장으로 나갔다. 중동 건설붐이 한창일 때였다. 아들이 한창 아빠를 따르며 필요로 할 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마지못해 떼어 나갔다.

"당신하고 아들 행복하게 해주려면 젊을 때 조금이라도 더 벌어야 되니 당신이 이해해주구려. 당신도 잘 아는 그 대학 선배가 건설소장으로 나가게 됐어. 믿고 일 시킬만한 사람이 필요하다면서 같이 나가자고 그러셔."

그렇게 말하고 해외 현장으로 떠난 것이 6년 전이었다. 사고를 당한 것은 3년 전이고.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 남편의 얼굴을 본 것은 1년에 한 달씩이었다. 결혼해서 같이 산 5년을 빼고는 그게 다였다. 그래도 행복한 나날이었건만, 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뒤 처음으로 맛본 행복이었건만 그 행복이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은 것이다. 현장 근무하는 직종이라 사고 위험은 늘 있었지만 그게 왜 하필 내 남편이란 말인가. 위험이 있다고는 해도 사고 안 나는 일이 더 많지 않은가 말이다. 사고 연락을 받은 날, 나는 그 자리에서 졸도해버렸다.


남편의 사고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이 이야기부터 해야 되겠다. 일석 오빠가 친정집에 찾아 왔었던 이야기. 결혼 후 1년 쯤 지나 친정에 들렀을 때였다. 아마 추석이 임박해서였을 것이다. 추석 때는 시골 시댁에 가야되니 미리 인사 겸 해서. 주말을 이용하여 남편과 함께였는데 어머니는 아무런 얘기도 없었다. 말을 해 준것은 큰어머니였다. 어머니한테 인사를 마치고 큰댁에 들렀을 때. 남편에게 줄 다과를 준비한다고 부엌으로 내려간 큰어머니는 손짓으로 나를 불러냈다. 혹 일석오빠 이야기 아닐까 싶었는데 역시나였다.

"일석 청년이 한 번 다녀갔다."

"언제쯤에요."

"지난 봄 무렵이야. 개울가 벚나무들에 꽃이 피려고 할 즈음. 두 청년이 하숙하러 왔을 때가 그 무렵이었으니까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 내가 안주인으로 처음 맞았던 하숙생인데다가 워낙 인상깊은 청년들이었잖아. 그 뒤로도 하숙생을 많이 받아봤지만 두 청년같이 성실한 사람들은 못 봤으니까."

큰어머니에게도 일석, 주영 오빠는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음을 이 날 알게 되었다. 사실 실질적인 관계는 큰어머니와 맺고 있었던 두 오빠였다. 삼시세끼를 다 큰어머니가 챙겨 준 셈이었으니까.

"그래요? 엄마는 아무 말도 안 하시던데."

"일부러 안 한 거겠지. 알아서 좋을 일은 없다고 생각했을테니."

"그래, 무슨 얘기를 하던가요. 분위기는 어땠고요?"

" 속마음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았어. 워낙 속내를 안 들어내는 사람이잖니. 그런데 무척 궁금해하는 거 같았어. 네가 누구하고 결혼을 했는지, 시집을잘 가기는 한 것인지, 어디서 살고 있는건지. 그래서 알려줬다. 같은 회사 선배고  큰언니가 살고 있는  I시에 가서 살고 있다고."

그 다음에 한 번 더 일석오빠 소식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큰어머니의 전화를 통해서였다. 일석오빠를 한 번 봤다는 거였다. 이때는 친정 엄마와 난숙 언니가 큰언니와 내가 살고 있는 이곳으로 이사와 살고 있었다.  쌍둥이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군대에 가 있었다.

"연숙아, 나다 큰엄마."

"네 큰어머니 어쩐 일이세요. 혹 큰집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아니다. 일석 청년 만나 본 이야기해 주려고 그런다."

이즈음 큰어머니는 윗어른으로서의 관록이 붙어있었다. 일석 오빠가 절에서 투병하던 시절아직 부엌일 하던 모습이 남아있던 시절로부터 이미 10여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있을 때였으니 충분히 그럴만했다. 그 시절 큰어머니 뱃속에 있던 나의 또다른 사촌 여동생도 벌써 10살이 넘지 않았는가. 나도 그런 큰어머니를 거부감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일석 오빠를 어디서 보셨어요. 절에 또 찾아갔던가요?"

"아니다. 연숙이 너도 없는데 여긴 뭐하러 오겠니? 은행에 갔다가 본 거야."

"은행 어디요?"

"여기서 제일 가까운 J은행 지점 있잖니. ㅂ동에 있는. 거기에 주택부금 내러 갔는데 일석 청년이 있더라. 예금 창구 대리 자리에 앉아 있었어. 워낙 바쁜 은행이라 그런지 통장에 정신없이 도장을 찍고 있더라. 창구를 제대로 쳐다 볼 시간도 없는 것 같았어. 내가 온 것을 알면 틀림없이 반색할 텐데 말이야. 안되겠다 싶어 창구 여직원에게 좀 알려 달라고 부탁을 했어. 여직원 말을 듣고서야 비로서 눈을 들어 누가왔나 확인을 하더라. 나인 걸 알고는 바쁜 와중에도 안으로 들어오게 해서 차를 한 잔 대접해 줬어. 연신 도장 찍느라고 정신없어 하면서도 가족들 안부를 두루두루 물으면서. 특히 너하고 쌍둥이 안부를 궁금해 했어. 잘 살고 있느냐고. 쌍둥이는 학교 문제를 어떻게 하고 있느냐고. 그래서 알려줬다. 너는 아들 낳고 잘 살고 있고 쌍둥이는 일석 청년 나왔다는 고등학교에  국비장학생으로 다닌 뒤 군 복무 중이라고."

"일석 오빠는 결혼했다고 하던가요?"

"그게 좀 애매하더라. 하긴 한 것 같았어. 그런데 대답이 좀 시큰둥하더라구.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

큰어머니와의 통화를 끝내고 나서 잠시 계산을 해봤다. 일석 오빠 은행 들어간 해부터 따져보니 얼추 5년 쯤 지나 있을 때였다. 대리급 책임자가 되어서도 2년 정도는 지나 있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나이로는 서른 서너살 쯤 되어 있을 것 같았다.

그 뒤로는 일석 오빠에 대해 까맣게 잊고 살았다. 은행 쪽에 알아보면 어디 근무하고 있는지 언제든지 알 수 있었지만 그럴 생각 조차 하지 않았다. 남편이 해외에 나가고 없는 탓에 가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꾹 참았다. 남편이 죽고 난 뒤에는 그런 마음이 더 강해졌지만 더욱 참았다. 염치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경위야 어쨌든 나는 일석 오빠를 배신한 것이라는 마음의 부담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저 잘 지내고 있기만을 바랬다.


남편의 사고 소식은 이른 아침에 전해져왔다. 아들인 형식이 학교 보낼 준비하느라 부산할 때. 전화가 걸려왔을 때부터 뭔가 예감이 안 좋았다. 남편이 이른 아침에 전화를 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퇴근 후 밤에 했었다. 남편 일하는 곳이 공사 현장이라 마음은 늘 편치가 않은 상태였다. 더군다나 이번 공사는 위험도가 높은 산악을 뚫어야 되는 터널 공사가 많았다.  목소리는 소장이었다. 남편의 대학 선배. 사실 남편이 해외 현장에 갈 결심을 한 것도 이 선배의 영향이 컸다.

"이번에 해외 현장 소장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자네가 같이 갔으면 좋겠네. 밑에 믿고 일 시킬만한 부하가 하나 있어야 되는데 자네가 딱일세."

남편이 전해준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남편은 말하자면 소장 라인인 셈이었다. 국내 현장에도 늘 같이 다녔다고 했다. 우리가 연애하던 시절에도 같은 현장에 있었다. 공사 현장이라 휴일이 따로 없는데도 나를 만나러 서울로 오도록 배려해 준것도 당연히 소장이었고. 남편은 나하고 연애 중이라는 것도, 결혼할 것이라는 것도 제일 먼저 알렸다고 한다. 나이가 40초반이라 너무 젊은 탓에 주례를 부탁하진 못했지만 나이가 좀 많았다면 먼저 주례를 서주겠다고 할 정도로 남편을 아꼈다고 했다. 신혼집에 TV, 냉장고를 들여준 것도 소장이었다. 거래처에서 지원을 받은 것일 터이지만 그리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러고도 결혼식날 축의금도 따로 냈다. 그것도 다른 하객들보다 많이. 그런 소장의 부탁이니 거절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남편은 하루빨리 나와 아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고 그 첩경은 돈을 많이 버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터이니까. 더군다나 결혼생활 5년이면 신혼 기분이 사라진지 이미 몇 년 지나 있을 때 아닌가. 모든 조건이 잘 맞아 떨어졌었다.

"여보세요. 당신이예요? 웬일로 이른 아침에 전화를 했어요. 무슨 일 있어요?"

전화기에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더니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장 목소리였다.

"제수씨 납니다."

"어머! 소장님이 이른 아침부터 어쩐일이세요? 혹시 남편에게 안 좋은 일이라도..."

전화기 저편에서는 또 한동안 말이 없었다. 분명 남편에게 안 좋은 일이 있다는 것을 감으로 알 수 있게

"여보세요? 소장님, 혹시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많이 다치기라도 했나요?"

"제수씨, 그게... 사실은 김과장이 세상을 떴습니다. 공사중인 터널이 무너지는 바람에 그만.미안합니다."

내가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 난 것은 친정엄마가 깨워서였다. 학교갈 시간이 됐는데도 아무 기척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아들이 내가 방안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가까이에 살고 있는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3.

J은행은 늘 손님들로 붐빈다. 특히 부금내는 창구는 더욱 그렇다. 그래도 아침 이른 시간에 간 탓인지 의외로 한가했다. 부금을 얼른 내고 난 뒤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뒷쪽에 있는 차장석 자리를 살펴보았다. 큰언니 말이 귓가에서 맴돌고 있는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동안 일부러 피해다닌 은행이었다. 이왕 온 김에 둘러나 보자는 그런 생각이었다. 차장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런데 명패의 이름이 일석오빠가 아니었다. 그러면 그렇지라고 생각하며 잔돈 바꾸는 창구로 갔다.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직원에게 바꿀 돈을 내밀고 기다리면서 직원 뒷 쪽에 있는 대리 자리에 무심코 눈을 돌렸다.  자리는 비어있었다. 그런데 명패의 이름이 낯익었다.  대리 우일석. 분명 일석 오빠 이름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시작했다. 큰언니가 농담처럼 한 말이 현실이 되어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차장이 아니고 대리라니. 아직 승진을 못한 것인가? 나이를 헤아려 봤다. 나하고 8년 차이였으니 40초반, 그렇다면 분명 승진이 늦은 것일 터였다. 은행에 들어갔을 때부터 보이던 조짐이 현실로 나타나 있는 것이었다.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니기는 하나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다닐 것만 같았던 그 느낌. 그게 승진이 늦어지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깟 승진이야 좀 늦어지면 어떠랴.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면서 바꿔 줄 동전을 세고 있는 직원에게 살짝 물어봤다.

"저기, 대리님 어디 가셨나요? 제가 아는 분 같은데."

직원은 나를 흘깃 쳐다보더니 "지금 지점장님하고 회의 중이실 겁니다"라고 말했다.

"나이는 어떻게 되셨나요?"

"40초반 쯤 되셨습니다."

"그럼 제가 아는 분 맞는 것 같군요. 결혼은 하셨겠죠?"

직원은 별걸 다 묻는다는 듯 대답을 안 했다. 대신 "대리님에게 아는 분이 찾아왔다고 말씀드릴까요"라고 되물었다. 나는 당황해서 손사래를 치며 "아아녜요, 제가 이 근처에 사니까 다음에 들를께요."라고 말하고는 서둘러 은행 문을 나섰다. 분명 일석 오빠였다. 다음에 오면 직접 확인을 해보리라 마음 먹었다.

가게에 돌아오니 큰언니가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는 듯한 자세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디 잘 둘러봤니?

"뭘요?"

"일석 청년 혹 안 보이더냐구."

"아뇨, 그 오빠가 여기 왜 와 있어요. 언니도 참."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거짓말을 했다. 사실대로 얘기하면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큰언니의 행동이 좀 이상했다. 고개를 갸우뚱한 채 뭔가 생각대로 안 된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저 언니가 왜 저러지 싶었으나 이내 잊고 장사할 준비를 했다.

이튿날  가게를 나섰다. 아마 11시쯤이었을 것이다. 그 시간이면 일석 오빠가 자기 자리에 앉아 있을 것 같아서였다. 큰언니에게는 가까운 곳에 있는 W은행에 갔다오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언니, 나 잔돈 바꾸러 W은행 갔다 올께요."


아직 이르기는 하지만 봄은 봄이었다. 어제보다 늦은 시간이어서인지 거리는 활기가 있어 보였다. 날씨는 포근했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하루 종일 따사로운 봄볕이 온 세상을 비춰줄 것만 같았다. 학교 안에 서 있는 벚나무는 어제보다 꽂망울이 더 부풀어 보였다. 이리 좋은 날씨가 계속되면 내일이라도 활짝 피기 시작할 것 같았다. 큰길에 있는 벚나무 가로수도 마찬가지였다. 일석 오빠가 근무하고 있는 J은행으로 가는 길로 꺽어드니 거기 가로수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서울로 가는 기차역을 기준으로 삼거리 형태로 나 있는 큰길 양쪽에 언제 누가 심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수령이 몇십 년은 족히 넘었을 것으로 보이는 벚나무들. 큰언니 때문에 정착해 10여년이 넘게 살아온 이 도시에서 가장 정이 가는 곳이라면 아마도 바로 벚꽃이 만발했을 때의 이 거리이리라.


은행 안으로 들어서니 창구가 제법 붐볐다. 잘 되었다 싶었다. 손님들 틈에 숨어서 몰래 일석 오빠를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아직은 직접 볼 자신이 없었다. 괜시리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일석 오빠 자리는 또 비어 있었다. 혹시라도  눈이 마주칠 것을 겁냈던 마음과는 달리 서운한 마음이 가슴을 휩싸고 돌았다. 잔돈 교환 창구로 갔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대리님이 안 보이시네요?"

잔돈 교환용 돈을 내밀며 인사를 하자 직원은 나를 알아보고 반색을 했다.

"아, 오셨군요. 차장으로 승진하셔서 사령장 받으러 본점에 가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다녀가신 뒤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처음에는 누군지 잘 몰라하시더라구요. 이곳에 아는 여자가 있을 리 없다는 표정이셨어요. 그러더니 혹시 턱이 조금 나오지 않았더냐구 묻더라구요. 그렇다고 했더니 얼굴 표정이 환해지면서 아는 사람 맞다고 그러시더군요. 다음에 오게 되면 직접 찾아오라고 하셨습니다. 혹 시간이 안 되면 연락처를 알려주고 가라고 그러시던데요."

직원은 그러면서 서랍에서 명함을 하나 꺼내 건넸다.

"대리님 명함입니다. 혹 자리에 없을 때 오면 전해드리라고 그랬습니다.

"결혼은 하셨나요?"

나는 명함을 받아들며 가장 궁금했던 내용을 물었다. 직원은 잠시 머뭇거렸다.  담당 대리인 일석 오빠하고 어떤 관계인지는 물어 볼 수 없을 터였지만 오빠의 태도로 보아 특별한 사이란 짐작은 했을 것이다.

"전에 잠시 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은 혼자이십니다. 뭐가 잘못됐었다는 소문입니다. 여자 쪽에 문제가 있었다고 하더라구요. 그 이상은 직원 아무도 모릅니다."  

직원은 어차피 알게 될 일이라는 듯 어제와는 달리 순순히 알려줬다.

"사시는 곳은 이곳인가요? 아니면 서울에서 다니시나요."

"결혼 잘못되고 나서 이곳으로 지원해 내려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서울 가까운 곳인 ㅂ구에 살고 계실 겁니다."

"여기 근무하신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정확히는 모르지만 1년 정도 되셨을 겁니다."

직원의 이 말을 듣고서야 비로서 큰언니가  어제 내게 한 행동이 의도적인 것임을 알게 되었다.  큰언니라고 내가 J은행 가는 걸 꺼린다는 걸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친정 엄마나 난숙 언니를 통해서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억지로 시킨 건 일석 오빠가 여기 근무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던 것이다. 큰언니는 그동안 부금을 내려고 한 달에 한 번은 꼭 J은행에 들렀을 터이니 틀림없이 일석 오빠를 봤을 것이다. 이 점은 친정엄마나 난숙 언니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내 부금 통장은 친정엄마가 관리하고 있으니 부금 내러와서 일석 오빠를 본 것이다. 그렇지만 친정엄마나 큰언니는 일석 오빠를 보고도 아는 체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친정엄마는 일석 오빠가 나하고 맺어지는 것을 반대했으니 면목이 없어서 그랬을 터이고 큰언니는 미제분유 사 준 정도 인연만 가지고 아는 척 하기만 뭐했을 테고. 난숙 언니는 일석 오빠를 만나봤을 가능성이 컸다. 난숙 언니는 40줄에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눈에 띄게 건강이 안 좋아지고 있지만 아직은 활동할 만한 상태였다. 더구나 살고 있는 집이 J은행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나와 큰언니가 살고 있는 집 근처에 살 집을 구하다보니 저절로 그리 된 것이었다. 난숙 언니는 일석 오빠와 동갑내기라 일석 오빠가 절에서 요양생활 할 때도 서로 반말하며 지낸 사이였다.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일석 오빠가 혼자 살고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일 테고. 나에 대한 이야기는 틀림없이 거짓말을 했을 것이다. 남편 죽은 이야기는 쏙 빼고 잘 살고 있다고. 그러고 나서 세 모녀가 의논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일석 오빠가 여기 근무하고 있고 혼자 살고 있는 것까지 알게 됐으니 일단 내가 알게나 해보자고. 그 다음 일이야 우리 둘이 알아서 할 일이니 지켜 보자고. 일이 잘 돼서 둘이 맺어지게 되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느냐고. 불쌍한 내 막내딸, 내 막내동생 뭐 그러며 작전을 짠 것은 아니었을까? 작전 행동대장은 큰언니가 맡은 것이고. 친정엄마가 "나나 난숙이가 시켜봐야 씨알도 안 먹힐 터이니 큰애 네가 J은행 갔다오도록 시키라"고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을 내 멋대로 하면서 궁금한 것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승진은 좀 늦으신 거죠?"

직원은 나의 이 물음에는 답변을 좀 곤란해하다가 마지 못해 말했다.

"성격이 워낙 강직하셔서요. 그래도 많이 늦은 것은 아니고 아주 빠른 동기들보다 2년 정도 늦었다는 것 같습니다. 뭐, 직장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죠."

"고맙습니다. 수고하세요."

"저어~ 대리님이 오시면 연락처 받아노라고 했는데요."

내가 인사를 하고 창구를 떠나려고 하자 직원은 조심스럽게 연락처를 요구했다. 그 태도에는담당 책임자와 관계가 있는 사람이니 예의를 지켜야 된다는 느낌이 역력했다.

"아~아녜요. 며칠내로 제가 직접 찾아뵙겠다고 그러더라고 전해 주세요."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내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직원의 눈길을 등 뒤에 느끼며 은행 문을 나섰다. 큰어머니가 짐작했던 게 맞은 것이다. 결혼을 하긴 했는데 뭔가 잘못된 것 같아 보이더라는 느낌. 직원 말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결혼을 했다가 뭔가가 잘못되어 바로 이혼했다는 것 같았다. 그 뒤로는 줄곧 혼자 살아온 것이고. 내가 아들 때문에 재혼할 생각은 아직 안 하고 혼자 살고 있는 것과는 다른 경우겠지만 어쨌든 우리 둘 다 혼자인 셈인 것이다.

은행 밖으로 나오니 해는 어느 덧 중천에 올라와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 햇살이 따사로웠다. 그 햇살이 벚꽃 봉오리들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벚꽃은 내가 일석 오빠를 찾게 되는 며칠 안에 활짝 피리라.  일석 오빠나 나나 예전 그 시절 그 모습은 아니지만  벚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맞아주리라. 우리 둘 사이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다시 만나게 되는 것만큼은 100% 틀림없으리라.  우리 둘 다 삶을 바라보는 눈길이 조금은 성숙해진 모습으로, 지난 날은 추억하는 모습으로. 그러면서 끊어졌던 우리 인연을 다시 이어가 앞날을 설계할 수도 있는 모습으로.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남편 죽고 난 뒤에 처음으로 가슴이 활짝 트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둡고 침침하게만 보였던 길거리가 밝게 빛이 나고 있었다. 벚꽃이 피려고 그럴 무렵이어서만은 결코 아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