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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부인]Gala Dalí

Bawoo 2017. 1. 5. 22:10

Gala Dalí


Salvador Dalí, Portrait of Galarina (1940–45)
(7 September [O.S. 26 August] 1894 – 10 June 1982), usually known simply as Gala, was the Russian wife of Paul Éluard and later of Salvador Dalí. She inspired many other writers and artists.

Early years

Gala was born as Elena Ivanovna Diakonova[1] (Russian: Елена Ивановна Дьяконова) in Kazan, Kazan Governorate, Russian Empire, to a family of intellectuals. Among her childhood friends was the poet Marina Tsvetaeva. She began working as a schoolteacher in 1915, at which time she was living in Moscow.

Marriage to Éluard

In 1912 she was sent to a sanatorium at Clavadel, near Davos in Switzerland for the treatment of tuberculosis. She met Paul Éluard while in Switzerland and fell in love with him. They were both seventeen. In 1916, during World War I she traveled from Russia to Paris to reunite with him; they were married one year later. Their daughter, Cécile, was born in 1918. Gala detested motherhood, mistreating and ignoring her child.[2]


With Éluard, Gala became involved in the Surrealist movement. She was an inspiration for many artists including Éluard, Louis Aragon, Max Ernst and André Breton. Breton later despised her, claiming she was a destructive influence on the artists she befriended. She, Éluard and Ernst spent three

years in a ménage à trois,[3] from 1924-27. In early August 1929, Éluard and Gala visited a young Surrealist painter in Spain, the emerging Salvador Dalí. An affair quickly developed between Gala and Dalí, who was about 10 years younger than her. Nevertheless, even after the breakup of their marriage, Éluard and Gala continued to be close.[4]

Marriage to Dalí

Gala asomada a la ventana, sculpture by Dalí, Marbella


After living together since 1929, Dalí and Gala married in a civil ceremony in 1934, and remarried

in a Catholic ceremony in 1958 in the Pyrenean hamlet of Montrejic. They needed to receive a special dispensation by the Pope because Gala had been previously married and she was a believer (not Catholic, but was an Orthodox Christian). Due to his purported phobia of female genitalia, Dalí was said to have been a virgin when they met on the Costa Brava in 1929.[2] Around that time she was found to have uterine fibroids, for which she underwent a hysterectomy in 1936. She was Dalí's muse, directly inspiring and appearing in many of his works.[5]


In the early 1930s, Dalí started to sign his paintings with his and her name as "(i)t is mostly with your blood, Gala, that I paint my pictures".[2] He stated that Gala acted as his agent, and aided in redirecting his focus. According to most accounts, Gala had a strong sex drive and throughout her life had numerous extramarital affairs (among them with her former husband Paul Éluard), which Dalí encouraged, since he was a practitioner of candaulism. She had a fondness for young artists, and in her old age she often gave expensive gifts to those who associated with her.[2]


In 1968, Dalí bought Gala the Castle of Púbol, Girona, where she would spend time every summer from 1971-1980. He also agreed not to visit there without getting advance permission from her in writing.[6]


In her late seventies, Gala had a relationship and bond with millionaire multi-platinum rock singer Jeff Fenholt, former lead vocalist of Jesus Christ Superstar. Fenholt acted as a business representative[citation needed] for the Dalís in the United States, arranging sales of Dalí's work to Alice Cooper (a hologram), The Grateful Dead, short film, "Journey Through Upper Mongolia", short film, "Blood Is Thicker Than Honey", and others. Fenholt has stated that Gala told him from her hospital bed in Spain, that Dali had assaulted her, knocking her down and breaking her hip, which later resulted in her death.[citation needed]

Death and legacy

Gala died in Port Lligat in the early morning of 10 June 1982, aged 87, and was buried in the Castle of Púbol[5] in Girona, which Dalí had bought for her. In 1996, Gala's private castle in Púbol was opened to the public as the Gala-Dalí Castle House Museum.[6]

Gala as model

Gala is a frequent model in Dalí's work, often in religious roles such as the Blessed Virgin Mary in the painting The Madonna of Port Lligat. His paintings of her show his great love for her, and some are perhaps the most affectionate and sensual depictions of a middle-aged woman in Western art. Among the paintings she served as a model for are: Imperial Monument to the Child-Woman, Gala; Memory of the Child-Woman; The Angelus of Gala; Gala and "The Angelus" of Millet before the Imminent Arrival of the Conical Anamorphoses; William Tell and Gradiva; The Old Age of William Tell; The Discovery of America by Christopher Columbus; The Ecumenical Council; Corpus Hypercubus; Galatea of the Spheres; and others.

Portrait of Galarina

Salvador Dalí, Portrait of Galarina (1940–45)

In Portrait of Galarina, (1940–45) Gala's face is shown severe and confrontational, her bared breast meant to depict bread, and the snake on the arm a gift of Dalí's sponsor Edward James.[영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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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달리’와 ‘갈라’ - 욕망의 화신인가 예술의 지배자인가

    갈라를 처음 만났을 때 달리는 무명화가였다.

     

    갈라는 달리의 잠재된 영혼을 뒤흔들고 내부의 열정을 예술로 승화시키도록 이끈 진정한 뮤즈였다. 하지만 말년의 달리는 돈에 대해 맹목적인 집착을 보였고 그 옆에서는 언제나 갈라가 웃고 있었다. 갈라는 과연 예술의 지배자인가 아니면 세속적 욕망의 화신인가. 동전의 양면에 대한 질문은 어리석지 않은가 싶다. 인간이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단순할까. <아주 특별한 관계-현대예술을 탄생시킨 파트너들> 95쪽 중에서 /화가 정은미의 로맨틱 갤러리/한길아트 간



 


어김없이 새벽에 일어나 뉴스와 메일을 확인하고 블로그를 열었다. 오늘의 포스트는 현재 쓰기가 진행 중인 ‘과학콘서트’의 그 세 번째 주제 ‘지프의 법칙’에 관한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혹은 지난번에 영화 ‘사마리아’와 함께 보고도 그 감상을 적지 못한 ‘고독이 몸부림칠 때’나 어제 감상한 문제작 ‘올드보이’에 관한 영화평을 써야지 생각하였다. 그런데 찾아주신 님들의 블로그 위주로 블로깅을 하다가 우연히 블로그홈에서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1904~89) 전시회에 즈음하여 이벤트가 진행 중임을 알았다.
얼마 전부터 나를 매료시킨 그림의 세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던 내게는 꽤나 반가운 소식이다. 이벤트에 참여하여 광고동영상을 내 블로그에 담고 보니 불현듯 달리에 대하여 예전에 읽었던 책의 내용이 생각났다. 그래서 오늘의 포스트는 부랴부랴 서재의 책장에서 찾아 빼낸 달리에 관한 이야기가 되었다. 달리의 예술세계보다는 예술가들의 특별한 파트너들, 즉 그들의 사랑과 삶에 대한 에세이인 이 책 말고도 어느 책에선가 달리에 관하여 더 읽은 기억이 나는데 쉬 찾을 수가 없다.

낯설고 이해하기 힘든 광기의 세계

어차피 내가 그림에 대하여 문외한이고 그 미학의 근처에도 가기 힘든 나의 불민함으로 그저 위 에세이에서 소개하고 있는 ‘갈라’라는 여인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며 초현실주의를 탄생시킨 세 거두, 자유시인 폴 엘뤼아르, 화가 막스 에른스트, 살바도르 달리 간의 운명의 헝클어짐을 살펴보는 것이 오늘의 포스트가 될 것이다.


20세기 초 세기말의 혼돈과 시대의 높은 파고를 몸으로 겪은 유럽의 젊은 지성인들은 반항적이고 들끓는 삶을 예술적 편력으로 보여준다. 자본주의 사회를 부정하고 이의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어지면서, 정치적으로는 혁신과 혁명, 예술적으로는 재래의 예술형식을 파괴하는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1910년대 유럽 미술은 다다이즘의 영향 아래 있었으나 그것은 기존 질서에 반대되는 행동을 보여주는데 그쳤을 뿐이었다. 즉 다다이즘이 파괴적이고 소비적이었다면 20년대 중반부터 등장한 ‘초현실주의’라는 새로운 예술적 경향은 창조적이고 생산적이었다.


특히 인종이나 정치적인 면에서 복합적인 요소를 지녔던 스페인에서 걸출한 작가들이 출현하게 되는데, 초현실주의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부르주아 문명의 종말을 예감한다. 그들은 인간의 의식에 관심을 둔 최초의 예술적 시도를 하였으며 실천적이고도 치열한 삶을 살았다. 이런 예술적 경향과 시대상 속에서 등장한, 위에서 말한 세 거두 폴 엘뤼아르와 화가 막스 에른스트 그리고 달리. 이 위대한 세 명의 예술가들은 한 여인에 대한 굴곡진 사랑으로 인해, 피와 눈물로 점철된 20세기의 역사적 사건만큼이나 서로 복잡하게 얽히게 된다. 그 여인이 바로 ‘갈라’라는 슬라브계 여인인 ‘엘레나 디미트리예브나 디아코노바’다.


그녀는 파괴적이고 까다로운 남성 편력이 있는 여인이었다. 그렇다고 이 예술가의 연인이 통속적이고 진부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는 그녀가 만난 세 명의 예술가 모두 만날 당시에는 무명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그녀는 그들의 잠재된 영혼을 뒤흔들고 내부의 열정을 예술로 승화시키도록 이끈 진정한 뮤즈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거침없이 자유롭고 활화산 같이 타오르는 갈라의 영혼은 특히 달리를 통해서 정열의 불꽃을 뿜어내게 되는데 독서가였고 몽상가였지만 갈라 자신은 결코 창조의 주체는 아니었다. 그녀는 남성들의 재능을 통해 스스로 완전히 자유로운 여성이 되고자 했으며 이를 실현한다.


스위스의 한 결핵요양소에서 엘뤼아르를 만난 갈라는 단번에 그를 사로잡고 1917년 결혼하여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파리에 번지던 초현실주의 예술운동에 뛰어든다. 하지만 갈라는 경박하고 변덕스러운 애욕의 화신이기도 하여 당시 자신의 집에 머무르고 있던 독일 화가(막스 에른스트)에게 눈을 돌리더니 아슬아슬하고 비정상적인 삼각관계를 이어간다. 친구와 아내 둘다 포기할 수 없었던 엘뤼아르는 에른스트에게 동성애와 동지적 우정을 느끼는 것으로 이 기묘하고 뒤틀린 동반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뒤틀린 운명이 얼마나 갈 것인가. 엘뤼아르는 증발하고 만다.


이미 엘뤼아르에 대해 마음이 시들해진 갈라에게 달리라는 25세의 젊은 화가는 마치 운명처럼 끼어든다. 1929년 여름, 달리와 전위영화(‘안달루시아의 개’ ‘황금시대’ 등)를 함께 만든 영화감독 루이스 브뉴엘 부부,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필자의 블로그 메인 이미지가 그의 작품 ‘빛의 제국’입니다), 폴 엘뤼아르와 갈라 등이 달리의 숙소를 방문한다. 열 살이나 연하인 달리를 거만하게 내려다보는 갈라, 달리는 운명을 깨닫는다. 결코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 차가운 여인, 갈라는 매달리는 엘뤼아르와 딸 세실을 내팽개치고 촌스럽고 엉뚱한 화가 달리와 새 삶을 시작한다.


파리에서 열리는 달리의 개인전을 이틀 앞두고 바르셀로나로 떠난 그들에 대해 모두들 미친 사랑에 빠졌다고, 곧 끝장날 것이라 입방아를 찌었지만 그들은 이후 50년을 한 몸처럼 붙어 다닌다. 그리고 달리의 서명은 ‘갈라와 살바도르 달리’로 바뀐다. 이제 달리가 그리는 모든 그림은 갈라가 되었고 젊거나 늙었거나 성모 마리아도 그에게는 갈라였으며 빵 광주리는 갈라의 팔이고 불룩한 빵은 갈라의 젖가슴이었다. 그들의 애정행각의 도피처였던 카다케스 해안과 리가트 항은 달리에게 자궁 속 같은 평안함을 주었다. 


 

갈릴리 땅을 연상케 하는 리가트 항을 배경으로 한 <십자가에 매달린 성 요한네스의 그리스도>는 이 때 탄생한 종교적 주제의 걸작이다. 이 그림에서는 하늘 높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보인다. 달리의 난해함은 종교화라고 빗겨가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위에서 내려다보도록 그린 시점, 통상의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아야 하는 구도가 아니다. 해서 우리가 크리스천이든 아니든, 우리는 그리스도의 머리위에서 인간의 세상을 심판하듯 내려다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늘을 향한 비젼을 제시하는 묵시론자인가 아니면 삶의 방식을 이 땅에 일깨워준 지혜자인가.” 이것이 달리가 찾고자 한 신인동격체의 모습은 아닌지.


달리의 그림은 모두 괴상하고 파괴적이며 한편으로는 역겹기까지 하다. 달리가 어떻게 사물을 받아들이는지 그의 정신세계를 엿보게 해주는 이런 자극적인 모습에서, 그럼에도 우리가 눈을 뗄 수 없는 것은 그의 작품 속에 많은 현대인들이 안고 사는 불안, 공포, 모순, 절망 등을 거침없이 토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우 낯설고, 이해하기 힘들며, 광기에 차있는 세계. 하지만 사실 인간은 그리 논리적이지도 합리적인 존재는 아니지 않는가.


갈라는 이런 달리를 화가로서 입지를 세울 수 있도록 기획하고 관리하며,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미국 자본주의에 편승해 막대한 부와 명예를 거머쥔다. 그림의 세속적인 이미지들과 대중을 의식한 기괴한 옷차림 그리고 계산된 기발한 언행으로 달리는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곧 대중적인 인기 작가로 부상한다. 물론 그칠 줄 모르는 돈에 대한 그의 추한 집착 옆에서는 항상 갈라가 웃고 있었다.


시대의 반항아로 출발한 화가와 뮤즈의 괴팍한 나르시시즘 그리고 돈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을 보인 이들은 누가 보아도 탐욕의 화신 그 자체였다. 달리는 초현실주의 화가 모임에서 제명당하면서까지 원자과학이나 카톨릭의 신비주의를 추구하며 르네상스의 고전주의로 복귀하려 했고, 가극이나 발레의 의상, 무대장치 등, 돈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손을 댔다.


갈라로부터 버림받은 후, 참여 없는 예술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며 레지스탕스에 뛰어들어 시대의 파랑 속에서 정의와 박애를 위해 싸우다가 1952년 공산당원으로 죽은 자유시인 폴 엘뤼아르. 이와는 너무 대조적으로 세속의 부와 명예를 탐한 달리의 그림 속에서 갈라는 영원한 숭배의 대상으로 존속한다. 죽은 형에 대한 정신분열적인 고통과 성적 불능이라는 강박관념에서 그를 구원한 여인이 갈라였다면, 그녀가 비록 지독한 에고이스트였다하여도 달리가 고백하였다시피 그에 대해서만은 영감의 샘을 분출케 한 성녀였던 것이다.

[카페-제주철학 사랑방에서 발췌]


[정보-책 "아는만큼 보이는 그림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