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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베트남 전쟁사 - 1.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화

Bawoo 2017. 11. 4. 22:25

 

바스코 다 가마가 1498년 인도항로를 발견한 이래 제국주의적 팽창정책을 취하고 있던 유럽세력은 베트남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1540년 포르투갈을 선두로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가 베트남에 진출하였으나 가장 집요했던 나라는 가장 늦게 진출한 프랑스이다.

프랑스의 베트남에 대한 최초의 관심은 무역보다 선교활동에 있었다. 프랑스의 알렉상드르 드 로즈(Alexandre de Rhodes) 신부는 1624년 베트남에 도착한 후 8년여 선교활동을 하였다. 베트남에서 추방된 그는 선교활동을 돕기 위하여 라틴어와 베트남어로 된 교리문답과 번역사전을 편찬하면서 베트남어를 로마字로 표기하였다. 전에는 漢字를 적당히 나누고 모아 뜻과 소리를 만들었던 문자가 사용되었으나 로즈 신부가 만든 로마字 표기가 나온 후부터는 이 로마字 표기가 오늘의 베트남 문자가 되었다.

알렉상드르 드 로즈

 

베트남 왕조는 프랑스의 선교활동을 계속 박해하다가 1802년 구엔 왕조가 들어서면서 포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서구 제국에 문호를 개방하려 하였으나 1819년 영국이 싱가포르를 점령하자 서구세력의 진출에 의구심을 품고 이후 서구의 통상협정 요구에 불응하였다. 1821년 프랑스의 요구와 1824년 영국과 미국의 요구도 거절하였다. 1825년에는 카톨릭에 대한 금지령을 내렸고, 국내 반란을 카톨릭 교도들이 지원하자 선교사 8명을 포함한 다수의 베트남인 신도를 처형하기도 하였다. 1836년에는 선교사를 살해하는 것은 살인죄가 되지 않는다는 칙령까지도 선포하였다.

1839년 중국에서 일어난 아편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자 서구 열강의 힘을 인식한 베트남은 억류된 선교사를 석방하라는 프랑스의 요구를 받아들여 1845년 이들을 석방하고 유화정책을 폈다. 당시 미 해군함장 존 퍼시벌(John Percival)은 다낭에 군대를 상륙시켜 관리들을 인질로 억류된 선교사의 석방을 요구한 일도 있었다.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최초 무력개입인 셈이다. 그러나 1847년 다낭에서 프랑스 군함과 베트남 함대와 충돌이 있자 베트남 정부는 대대적인 박해정책을 취하여 유럽인 선교사 25명을 포함하여 3만여 명의 베트남인 신도를 처형하였다.

다낭의 이름은 참어(Cham語)의 Da Nak에서 유래하는데, 이는 큰 강의 입구라는 뜻이다.

 

존 퍼시벌 함장

 

옛날 나폴레옹의 영광을 재현시키고자 했던 프랑스는 베트남에 대한 침략의 구실을 잡고 1858년 9월 1일 스페인과 연합하여(스페인 주교도 처형되었음) 주누이(Charles Rigault de Genouilly) 제독 지휘 하에 15척의 전함과 1,500명의 병력으로 다낭에 상륙하여 5개월 동안 다낭 항을 점령하였다. 각종 질병과 우기가 겹쳐 후에로 진격이 어렵자 프랑스 군은 1859년 2월 지아딘 省(사이공 일대) 인근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샤를 리고 드 주누이 제독

 

제2차 아편전쟁으로 인해 중국으로 병력전환이 불가피했던 프랑스군은 800명의 수비대를 남겨 거의 1년 동안 악전고투하며 사수케 한 후, 1860년 9월 중국에서 전쟁이 끝나자 70척의 군함과 3,500명의 정예 육군을 베트남으로 보내 베트남군을 공격하였다. 숫적으로는 베트남군이 우세하였으나 빈약한 무기로는 프랑스군을 당할 수 없었고 여기에다 국내의 반란도 아직 진압되지 못한 상태였다. 1862년 초까지 프랑스군이 미토, 지아딘 省, 비엔 호아를 점령하게 되자 구엔 왕조의 투둑 황제는 프랑스의 요구대로 1862년 6월 5일 제1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베트남 구엔 왕조의 4대왕 투둑 황제, 구엔 푹 후옹 남

 

이 조약에서 베트남은 포교의 자유 인정, 비엔 호아와 지아딘, 딘투옹 등의 3개 省 할양, 3개 항 개항, 군함의 메콩 강 통과 인정, 프랑스의 승인없이 타국에 영토 할양 불가, 배상금 400만 피아스타(베트남의 화폐단위) 등의 불리한 조약을 감수해야 했고 프랑스는 식민화의 기반을 완전히 닦아놓은 셈이 되었다.

베트남으로부터 3개 省을 할양받은 프랑스는 1863년 캄보디아를 보호령으로 하여 인도차이나 반도의 지배권을 넓혀가기 시작하였다. 베트남 후에(당시 베트남 구엔 왕조의 수도) 정부의 은밀한 지원을 받는 베트남인들의 끊임없는 저항을 물리치고 프랑스군은 1867년 메콩 델타 지역도 점령하였다.

후에는 '평화의 도시'라는 뜻의 딴 호아(Than Hoa)로 불리다가 베트남 마지막 왕조인 구엔 왕조의 수도가 된 후 현재의 지명인 후에(Hue)가 되었다.

 

보불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 중앙정부가 해외 식민지에 관심을 보일 겨를이 없게 되자 중국과 베트남에 있는 프랑스의 현지 관리들은 홍하(紅河)를 경유, 중국 운남까지 왕복하는 프랑스 무역선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1873년 11월 200여 명의 병력으로 20일 만에 홍하(紅河) 델타의 주요지역을 점령하고 1874년 4월 베트남과 제2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의 내용은 프랑스가 점령한 남부 지역의 주권인정, 홍하 개방, 하노이와 하이퐁 등에 프랑스 영사 주재 승인, 프랑스 국익에 위배되는 외국과의 조약체결 금지 등이었다.

사이공을 공격하는 프랑스 함대

 

홍하 델타는 베트남의 북부 홍 강 하류와 타이빈 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평원으로 통킹 델타로 불리기도 한다.

 

본국 사정이 안정되자 완전 식민화의 구실을 찾던 프랑스는 홍하의 통행이 반란군들에 의해 저지되자 조약 위반의 구실을 잡고 1882년 4월 25일 하노이를 점령하고 베트남의 보호국화, 하노이 할양 등의 가혹한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구엔 왕조의 투둑 황제는 이를 거절하고 중국 청조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청조는 이에 응하여 중국, 베트남 국경지대에 군대를 파견하여 무력시위를 하였다. 프랑스는 홍하를 경계로 하여 통킹 지역을 분할점령하자고 중국에 제의하기도 하였으나, 베트남을 단독으로 점령할 것을 결정하고 군대를 증원하였다. 1883년 8월에 프랑스는 자기들의 요구를 무조건 수락하지 않으면 구엔 왕조를 멸망시키겠다고 후에 조정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당시 인도차이나에 프랑스군의 총병력은 16,500명에 불과하였다.

프랑스 원정군사령관(가운데)과 참모들

 

국가의 존망을 가름하는 중대 시국에 처한 베트남의 국내사정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서구열강이 식민지 점령에 혈안이 되어있던 1830년대부터 1860년대까지 베트남에서는 舊 왕조의 부흥운동, 자치요구, 왕위계승을 둘러싼 내란 등의 크고작은 반란이 100여 건이 있었다.

1867년 프랑스가 사이공 이남지역을 완전히 점령하게 되자 후에 조정은 큰 충격을 받았으나 이는 충격으로 끝나야 했다. 과감한 내정개혁론이 있었으나 권력투쟁이나 일삼고 이에 안주하려는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개혁은 무시되어 버렸다.

궁중 내부의 혼란도 대단하였다. 프랑스가 군대를 증원하고 최후의 통첩을 보내는 시기였던 1883년 7월 투둑 황제가 사망하자 왕위를 승계하는 과정에서 권력투쟁과 음모로 1년여 기간에 4명의 황제가 바뀌었다(1883년 7월 9일에 투둑이 승하하고, 조카인 죽득(육덕(育德))이 즉위를 하지만, 이틀 만에 폐위되고 히엡호아(협화(協和))가 옹립되었으나 그도 중신에 의해 독살되고 만다. 이후 즉위한 끼엔푹(건복(建福))도 즉위한 지 반년 만에 죽고, 동생인 함응(함의(咸宜))이 즉위를 하게 된다). 프랑스의 침략에 대해서도 친불파, 반불파로 나뉘어 암투가 계속되었다. 프랑스의 통치가 오히려 베트남에 유익하다는 논리도 다수 있어 국론통일도 되지 못했다.

후에 조정으로부터 아무런 통보가 없자 프랑스군은 통킹으로부터 후에로 진격하였다. 외우내환으로 저항이 불가능한 구엔 왕조는 8월 25일 아르망(Harmand)조약(제1차 후에조약, 계미조약)을 체결하여 프랑스의 보호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종주국 행세를 해 온 청국과 2차에 걸쳐 무력충돌이 있었으나 청국도 1885년 6월 프랑스와 제2차 천진조약을 맺고 프랑스의 보호권을 인정하고 말았다.

청프전쟁 당시의 청나라 정규군

 

프랑스군과 청국군의 전투

 

프랑스는 베트남을 코친차이나(남부 베트남), 안남(중부 베트남), 통킹(북부 베트남)으로 나누어 분할 통치하였다. 여기에 라오스, 캄보디아까지 합하여 5개 지역을 프랑스 식민성 예하 인도차이나 총독이 통치토록 하였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이제 프랑스에만 봉사하는 <동양의 진주>로서 프랑스의 착취와 압박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프랑스 세력의 확장과정

 

1933~1937년간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서 677,000톤의 쌀을 수출하였는데 이는 당시 프랑스 총 수출의 41%를 점하는 양이었고, 석탄도 15만 톤을 본국으로 수송하였다. 그러나 베트남 노동자들의 임금은 프랑스 노동자들의 13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자식들이 배가 고파 울부짖으면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프랑스 놈들이 온다.”고 해서 우는 자식을 달래었다.

1939년 통계에 의하면 5백만 명의 아동이 초등학교에 취학하였으나 그 10%만이 중학교, 1%가 고등학교로 진학하였고, 국민의 80%는 문맹이었다.

출처 : 푸른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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