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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몽골(원) 항쟁의 영웅]쩐꾸옥뚜언(陳國峻, 진국준, Trần Quốc Tuấn).

Bawoo 2017. 5. 21. 00:46



陳興道(Trần Hưng Đạo)
(1228~1300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7/71/Tranhungdaosta.jpg/414px-Tranhungdaosta.jpg

호치민 시에 있는 동상


본명 쩐꾸옥뚜언(陳國峻, 진국준, Trần Quốc Tuấn). 베트남 쩐(陳,진) 왕조의 명장. 쩐흥다오라는 호칭은 

그의 시호인 흥다오브엉(興道王,흥도왕)에서 따온 것이다.



베트남 쩐 조의 황제태종(太宗, 타이똥, 1225∼1258)의 조카로, 1257년 원나라 제1차 침입 때 베트남의 북방을 굳게 지켜 공을 세웠다. 이후 5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원나라의 제2차 침입(1284∼1285)으로 수도 탕롱(昇龍, 승룡, 지금의 하노이)이 함락되고 황제 인종(仁宗, 1257~1308)까지 항복을 고려하자, 그는 《격장사(檄將士)》라는 유명한 글을 써 장수와 병졸들에게 왕조의 위급을 호소하고[1] 무려 25만에 달하는 장정을 모집할 수 있었다.


격장사의 발췌문
이제 나는 그대들에게 분명히 말한다. 마땅히 장작더미 밑에 불을 놓아둔 위기라고 여겨야 하고, 뜨거운 국물에 데어본 사람이 찬 나물도 불면서 먹듯이 경계해야 한다. 사졸들을 훈련시키고 활쏘기를 연습시켜서 모두가 봉몽(逢蒙: 중국 신화에 나오는 명사수)이나 후예(后羿: 봉몽의 스승)같은 명사수가 되도록 해야 한다. 필렬(必烈 : 쿠빌라이)의 머리를 대궐 아래 매달고, 운남왕(雲南王 : 쿠빌라이의 아들인 토곤)의 살점을 고가(藁街 : 한나라의 수도 장안의 남문에 있던 거리, 죄인의 목을 베어 효수하는 곳이었다.)에서 썩게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나의 채읍(식읍)이 길이 전해질 뿐 아니라 그대들의 봉록 또한 종신토록 주어질 것이다. 나의 권속(眷屬)들이 편안한 잠자리를 얻게될 뿐만 아니라 그대들의 처자식 또한 평생을 함께할 것이다.

- 최귀묵, 『베트남문학의 이해』, 2010에서 재인용


그는 현명하게도 이 병력으로 전면전을 시도하기보다는 청야전술게릴라전으로 일관[2]하여 원군을 괴롭혔고, 원군은 결국 풍토병[3]과 식량 부족으로 철수한다. 당시 베트남 군인들은 팔꿈치에 '살달(殺韃)'[4]이라는 글까지 새겨 가며 치열하게 저항했다고.

그 뒤 원나라가 세 번째로 침입(1287∼1288)하자, 강폭은 매우 넓지만 도처에 얕은 여울이 있고, 조수간만의 차가 매우 크기 때문에 함선의 운행이 자유롭지 못한 지역인 바익당 강(白藤江, 백등강, 현재의 송코이 강 혹은 홍하)을 전장으로 삼아, 강바닥에 말뚝을 박은 후 만조(滿潮) 때 원의 수군을 상류로 유인하였다. 그리고는 간조(干潮) 때 말뚝에 걸려 움직임이 멈춰버린 원의 군선들을 공격하여 피해를 크게 입혀 물러가게 하였다.


참고로 원나라의 남방 원정의 주축은 세간에 알려진 "몽골"이라는 이름과 달리 한족 특히 남송의 항장 및

항군이 주력이었다. 애초 원나라에서 해군은 전부 다 한족들로 이루어진 부대가 운용했고 이는 청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몽골이나 만주의 황무지에서 뛰놀던 유목 민족들보단 바다를 맞닿으며 살아 온 남방의 한족들이 더 바다를 잘 알아서이다. 일본 원정도 고려를 제외한 원 세력의 거의 90%는 한족 부대였고 거란과 여진의 혼성부대가 그 다음이었다. 애초 몽골족은 황족 및 귀족이고 수도 적어서 절대 잡병으로 있지 않았다.

원은  쿠빌라이 칸의 사망으로 내부 사정이 좋지 못해 베트남 정벌을 포기하게 되었고 베트남은 세계 역사상 몽골 제국을 구성한 나라의 군을 격퇴한 몇 안 되는 나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세계적인 슈퍼 파워하고 싸워서 이기는 게 특기인가 보다.[6] 물론 그 당시 베트남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한족 왕조로부터 독립 투쟁을 펼치고 또한 참파 등 여러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대립을 했기 때문에[7] 군사력이 강하긴 했으나, 상대가 이미 베트남보다 더 강력했던 금·호라즘 등을 멸망시킨 당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몽골 제국이었다. 이와 맞서 세 차례나 물리친 것은 놀라운 업적이다.


결국 몽골 제국은 베트남인들이 중국을 물리친 사례에 추가되어 버렸다. 당나라-송나라-원나라-명나라-청나라 순으로 중국의 대군을 한족, 몽골인, 만주족 불문 격파한 베트남의 전공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1979년 중월 전쟁 승리로 마무리 되고 이후의 중국은 다시는 베트남을 못 쳐들어오는 판이다.

전쟁이 끝나자 그 공으로 왕에 봉해졌으며, 성종 이후로 인종과 영종(1276~1320)을 보좌하다가 1300년

사망. 죽기 직전 영종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군대는 부모자식처럼 단결시키고 백성을 너그럽게 대하여 그 힘으로 대업을 이루십시오.

사후 흥다오 대왕(興道大王, 흥도대왕)으로 신격화되어 기일에는 대대적인 제사가 행해졌다. 저서에 《병서요략(兵書要略)》[8], 《만겁종비전서(萬劫宗秘傳書)》 등이 있는데, 모두 병법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오늘날까지 베트남에선 그를 기리는 제사가 행해지고 있으며, 베트남 전쟁 시기에는 남·북베트남 가릴 것 없이 쩐흥다오를 자신들의 이미지로 삼으려 했다. 북베트남 입장에선 미군원나라청나라 같은 오랑캐로 규정해 그를 본받아 그들을 몽땅 까부수자는 목적이었고, 남베트남 입장에서도 월맹, 베트콩을 오랑캐로

규정하는 식. 남베트남에선 자국 화폐의 디자인에 등장시키기도 했다.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vi/b/b0/500South_Vietmanese_%C4%91%E1%BB%93ng_f.jpg

남베트남 500동짜리 화폐의 모습(1966년 유통 시작)


[주]

[1] 항복할지 항전할지를 망설이는 인종에게 "항복하시려면 그 전에 신의 목부터 베어주소서"라고 했다. 인종은 이에 항전을 결심했다고.

[2] 베트남도 군마가 부족해서 고려·송나라처럼 보병 중심이다. 그래서 기병 중심의 원군과 싸우면 전면전에서 불리하기 때문에 이런 전술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밀림이 많아 보병 중심의 전술을 펼쳐야 했던 홈 그라운드의 이점을 제대로 살린 셈이다

[3] 프랑스 군, 중국군, 미군도 베트남의 풍토병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4] '타타르(=달단(韃靼), 몽골족)를 죽이자'. 정작 원나라 군의 경우 대부분 남송금나라 항복군으로 구성되어서 몽골족은 장군 몇 뿐이고 나머지는 한족이었다.

[5] 다만 오스프리치곤 고증이 좀 부족하다. 베트남 선박을 같은 책의 캄보디아 선박 형태로 고증했다. 중국 선박은 고증이 잘 된 편이다.

[6] 일본은 때맞춰 불어닥친 태풍 덕에 기사회생했고 이집트를 침공한 몽골 세력은 사실 튀르크계 국가인 일 칸국인 것과 달리 중국대만, 연해주, 위구르, 티베트, 내몽골을 아우르는 통일 중국왕조인 원나라, 즉 몽골 본진과 지리적으로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맞서 이겼기에 더 가치가 높다.

[7] 그런데 참파도 몽골이 공격했을 땐 같이 골머리를 앓았기 때문에, 베트남과 참파의 왕 체만(Chế Mân)은 감정을 접는 데 합의하고 함께 몽골을 막았다. 체만은 몽골이 물러난 뒤에도 평화를 유지하려 했으나 얼마 못 가 급사했고, 그 아들이 참파의 왕위에 올라 베트남에게 대항했다가 결국 망했다.

[8] 몽골의 제2차 침입을 막을 때 베트남 지리에 맞는 함정 설치법, 유인책, 게릴라 전법을 정리한 것으로, 이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베트남 인 스스로 적과 싸울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이 책은 훗날 월남전에서
미군을 상대하는 월맹과 베트콩의 기본 전략서로 활용되었다. 전투종족 베트남 인의 근성은 중세부터 갈고 닦아 현대까지 내려 온 것이다.

[출처] 정보-책천년전쟁 /자료 수집-나무 위키에서  발췌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