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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베트남 10,000일의 전쟁:마이클 매클리어

Bawoo 2021. 5. 1. 22:30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저 

목표와 전략이 없었던 전쟁, 누구도 이길 수 없었던 전쟁

The ten thousand day war : Vietnam, 1945-1975

 

[소감]15년 전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사서 읽고 이번에 도서관에서 다시 빌려 읽은 책. 읽을 책이 많아 한 번 읽은 책을 또 읽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이 책만큼은 예외가 되었다. 그만큼 베트남에 대해서는 동병상련의 마음이 강해서이다. 강대국에 치이는 운명인 나라라는 측면에서...^^

 책 내용은 일제가 패망한 1945년부터 미국이 패퇴한 1975년까지-얼추 책 제목에 나와 있는 10,000일이다-의 베트남 전쟁에 관한 기록인데 전투 장면을 다룬 전쟁사라기보다는 이면사라는 쪽이 맞을 것 같다. 

우리나라도 참전했던 이 전쟁에 우리나라 관련 내용은 몇 줄 정도뿐이 없다. 다른 참전국 내용과 함께 사망자가 몇 명-5,000여 명-이라는 정도가 다이다. 그러곤 처음에 프랑스가 디엔비엔푸에서 패퇴한 내용을 일부 기록한 외에는 미국이 참전한 내용 위주로 베트남전을 들여다보고 있다. 편파적인 내용은 아니다. 오히려 미국을 비판하는 측면이 강하다.  프랑스를 디엔비엔푸에서 패퇴시킨 베트남에 대신 들어왔다가 역시 패배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원인,  케네디 대통령때 시작해서-쿠바 피그만 침공 실패 만회가 원인이었다고 한다- 존슨 대통령 때 본격적으로 참전, 닉슨 대통령 때 철군하기까지의 이야기가 꼼꼼히 기록되어 있지만, 참전을 하게 된 이유가 명확하게 나와 있지는 않다. 막연하게 짐작하건데 프랑스를 대신하여 자기 나라-미국-이 베트남을 식민통치까지는 아니라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사족] 미국이 지원했던 장개석 국민당 정부나 남부 베트남 정부가 부패와 독재로 인해 민중의 지지를 얻지못해 패퇴했고 공산화됐는데 우리나라만 유일하게  공산화가 안 되었다. 그 이유가 뭘까?

 

책 소개:인터넷 교보문고 

 

해외특파원 25년 경력의 기자가 쓴 베트남전에 대한 해부서. '얼굴없는 전쟁'이라 일컬어지는 베트남전의 진실은 무엇인가? 그 시작과 끝을 방대한 자료와 인터뷰를 바탕으로 다시 썼다. 한편의 소설처럼 스피디하게 읽히며 중간 중간 흑백사진이 실려있어 당시의 분위기를 전해준다. 베트남은 멀리 있지만 베트남전의 여파는 우리 가까이에도 있다. 미국 '군사서적클럽'과 '문학협회'에서 필독 도서로 선정한 책.끝나지 않은 전쟁, 베트남전쟁의 실체를 파헤친 책!

 

 

 

20세기 후반부를 수놓았던 전쟁, 식민주의의 쇠사슬을 스스로의 힘으로 끊었던 전쟁,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전쟁, 프랑스와 미국이 패배를 자인할 수밖에 없었던 전쟁. 처음에는 인도차이나전쟁으로 알려졌던 ‘베트남전쟁’의 시작은 1945년 4월이었고, 끝은 1975년 4월 30일이었다. 얼굴 없는 전쟁, 신비스러운 전쟁으로 알려졌던 베트남전쟁은 때로는 왜곡되기도, 때로는 묻혀 버리기도 했다. 이 책은 20세기 세계사에서 가장 논란이 심했던 베트남 30년 전쟁을 새롭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재조명하여 베트남전쟁의 진실을 파헤침으로써 중동분쟁, 보스니아내전, 아프가니스탄전쟁으로 혼란을 거듭하는 21세기의 향방을 가늠해 보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호치민과 패티 소령

 

제2차 세계대전의 끝자락이 펼쳐지던 1945년 4월 어느 날, 베트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중국 윈난 성 근처의 시골 찻집에서 그저 ‘장군’이라고만 부르던 50대 중반의 게릴라 지도자와 미군 OSS 대원 ‘아르키메데스 패티’ 소령이 만난다.

 

30년 전쟁은 이렇게 시작된다. 일본의 패전, 베트남의 독립, 프랑스의 재점령이 이어지면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식민주의는 문명의

 

수치다’라고 생각해 베트남의 독립을 지원했다. 그러나 식민주의가 젖줄이라고 여겼던 영국의 처칠과 프랑스의 드골이 루스벨트의 발목을 잡았다.

 

베트남은 다시 투쟁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5월, 전쟁의 달인 보 구엔 지압 장군이 이끄는 베트민 병사들은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 공수부대 진지를 초토화시켜 버린다. 프랑스군 사령관 나바르 장군은 ‘백기는 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투항한다. 대포의 포신에 줄을 매서 허리에 묶고 하루에 반 마일씩 정글 속을 끌고 간 베트민 병사들과 물자 수송용 자전거의 펑크를 막기 위해 입고 있던 바지를 벗어 타이어를 감싸는 바람에 팬티밖에 입을 수 없었던 노력 봉사자들의 의지가 베트남이 식민주의의 쇠사슬을 끊은 원동력이었다.

 

고 딘 디엠과 군부의 부패

 

프랑스가 물러간 자리에 공산주의 도미노 이론에 빠져 있던 미군의 깃발이 세워졌다. 미국은 한반도 분단을 베트남 문제 해결의 정답으로

 

인식하고, 고 딘 디엠을 대통령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고 딘 디엠은 족벌정치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CIA가 지원한 남베트남 군부

 

쿠데타 세력에 의해 살해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군정의 부패와 초점 잃은 미국의 정책은 베트남 인민들의 마음을 북베트남에게로 돌아서게

 

하는 계기가 된다.

 

미국은 55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파견했으나 실제 전투 병력은 10%에 불과했고, 병사들의 평균 연령도 18세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1년마다 교체되는 복무 기간으로는 강철같은 의지로 무장한 북베트남 게릴라들과 대적한다는 것이 역부족이었다. 국방장관을 지냈던 클라크 클리퍼드는 이런 대목을 꼬집어 ‘미국은 정책과 전략이 없었기 때문에 도저히 이길 수 없었던 전쟁이었다’고 평했다.

 

호치민의 타계

 

1969년 9월 호치민은 통일을 보지 못한 채 저세상으로 갔다. 죽음에 앞서 11명의 정치국원들에게 ‘단결하라’는 한마디 유언을 남겼다. 단결만 하면 통일은 기필코 이룰 수 있다는 뜻이었다. 지하 30피트에서 7만 명이 3년 반을 견디어 낸 인내심, 밥 한 공기를 먹고 험악한 ‘호치민

 

루트’를 하룻밤에 50km씩 행군했던 북베트남 병사들, 성년이 된 이후부터는 오직 독립이라는 한 가지 생각밖에는 안 했다는 청렴 강직한

 

‘호 아저씨’가 만들어 낸 신화의 실체였다.

 

 

 

호치민이 공산주의자인가, 아니면 민족주의자인가 하는 논쟁은 무의미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프랑스 식민주의의 잔인한 행태를 젊어서 수없이 목격한 호치민이 당시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등장한 공산주의에 빠져들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는 확실한 어조로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공산주의는 새로운 베트남을 건설하는 데는 맞지 않는 이데올로기’라고 고백했었다. 식민지 베트남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프랑스의 욕심이 그를 철저한 공산주의자라고 매도하면서 미국을 흔들어 댔을 뿐이다.

 

 

 

베트남에는 진정한 평화가 오지 않았다

 

파병 인원이 늘어나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미국 내에서 반전 여론이 거세게 일어난다. 그러자 1972년 12월 평화협상을 끌어내기 위해 미국은 크리스마스 대공습을 감행한다. 이 공습으로 하노이와 하이퐁은 초토화가 되었고, 외국 언론들은 ‘인륜의 파괴’라며 강도 높게 비난했다.

 

1973년 1월 파리에서 잠정적인 평화협정이 이루어지자, 키신저와 북베트남 정치국원 레 둑 토는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자로 지명된다. 그러나 레 둑 토는 “베트남에 진정한 평화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노벨평화상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을 남긴 채 수상을 거부했다. 키신저 같은 협잡꾼과 함께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시 보는 30년 전쟁

 

디엔비엔푸 전사였던 UN 주재 초대 베트남 대사 ‘하 반 라우’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지도자들은 프랑스 점령 시절 같은 형무소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어깨를 맞대고 싸웠지요. 자주독립 외에 다른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또 이런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30년 전쟁 동안 약 1천 5백만 명의 베트남인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아마 각 가정마다 최소 한 사람씩은 희생되었다고 보면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극복해 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들을 보살피기 위해서도 평화가 필요합니다.”

 

이탈리아에서 이민온 뉴욕 서민 집안 출신인 아르키메데스 패티 소령은 30년이 지난 뒤 플로리다에서 글을 쓰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베트남은 미국의 얼굴에 남겨진 화농化膿 자국이다. 미국의 정가는 자본주의로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분위기에 젖어 있다. 이런 생각은

 

잘되어야 미국의 고립만 자초할 뿐이다.”

 

 

 

 

 

작가 소개

 

 

 

저자 | 마이클 매클리어

 

마이클 매클리어CBC(Canadian Broadcastung Corporation)의 극동 특파원과 런던 주재원을 지내는 등 약 25년에 걸친 해외 특파원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전장을 현지에서 보도했다. 1959년 미 군사고문단의 남베트남 주둔이 시작되면서 매클리어의 베트남 추재가 막을 올렸다. 확전 과정에서 그의 보도는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1969년 9월 호치민이 사망했을 때, 북아메리카 기자로는 처음으로 하노이 방문이 허용되어 호치민의 장례식과 미국의 공습으로 폐허가 되어 버린 북베트남 전쟁 지역을 생생하게 취재했다. 이때의 영상은 세계90개국 이상에서 방영되었다. 매클리어는 북베트남을 두 번 더 방문했다. 1970년 포로가 된 미군 조종사와 인터뷰를 했으며, 평화협사이 결렬된 다음인 1972년에는 B-52 폭격기들의 하노이 공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Tv 영상을 통한 '베트남전쟁'의 실상 보도와 함께 <뉴욕타임스>가 전한 매클리어의 목소리는 독자들의 폭넓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79년 매클리어는 다큐멘터리 제작자로 하노이를 다시 찾았다. 텔레비전 사상 처음으로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이라는 전쟁 기록물 제작을 위한 흔적 수집에 나섰다. 매클리어는 이 기록에, 100여 명이 넘는 베트남전 관련 인사들의 증언을 더하여 이 책을 펴냈다. 런던에서 태어난 매클리어는 1959년 캐나다 시민이 된 이후, 지금은 토론토에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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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글은 블로거 '도토리 순경'님의 독후감입니다. 내용이 좋아 옮겨왔습니다.

 

 

 

19세기 이래 서구 열강의 식민지였던 나라들 가운데 홀로 외로이 싸워 독립을 쟁취한 나라는 베트남 밖에 없다. 대부분은 정치외교적인 타협의 산물로 독립을 얻었다. 그렇다면, 동남아시아의 조그만 약소국 베트남이 프랑스와 미국을 상대로 거의 30년 동안 싸워서 ... 힘으로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아니, 그보다도 프랑스나 미국과 같이 세계를 주름잡는 강대국이 어떤 이유로 무기도 변변찮고 힘도 없는 베트남 사람들에게 참담한 패배를 당했을까?


번역자 서문에 호치민이 했다는 말이 나온다 :

"그래 폭격을 해라. 그러면 웅덩이가 파여 연못이 생길 것이다. 우리는 그 연못에서 자란 메기를 잡아 먹고 베트남의 통일 위해 목숨을 바쳐 투쟁할 것이다."

참으로 지치지 않는 저항정신이다. 그런 용기와 낙관이 결국은 승리의 원동력이었을 텐데 ... 그런 말을 하며 국민을 이끌었던 지도자의 리더십은 어디에 그 원천이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며 몇 가지를 생각한다.

첫째, 프랑스라는 나라다. 우리나라와도 이런 저런 역사적 애증이 얽힌 나라. 프랑스 혁명을 통해 세계사에 지워지지 않는 역사적 위업을 남겼고, 지금도 세계의 철학을 이끌어 가는 나라. 강대국은 역시 뭔가 깊은 저력이 있구나, 느끼게 해주면서 ... 동시에 약소국에 가했던 집요한 침략과 압제의 야누스. 프랑스 ... 


베트남의 전쟁과 그로인한 고통에 프랑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나 크다. 46년 8월, 드골은 "문명세계에 개방된 해외 식민지와의 연합이 프랑스를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식민지가 없다면 프랑스는 강대국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선언한다. 그 말이 약소국 민중들에게 얼마나 큰 수모와 고통이 되는지 ... 그런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었던 프랑스의 사상적, 철학적 배경이 무서울 따름이다. 디엔비엔푸(1953.11-1954.5)의 참담한 패배는 그 동안의 가해(加害)에 대한 수지결산이라고 보아야할까?

둘째, 국제정치, 외교의 무서움이다.

호치민은 미국과 손을 잡고 항일전을 수행했다. 그는 미국이 필리핀의 경우 처럼 베트남의 완전 독립을 보장해 줄 것으로 간절히 원했고 믿었다. 베트남을 잘 알고 있던 미국의 정보 관계자들 역시 당연히 그런 방향으로 정책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누차 보고서를 올렸다. 베트남과 미국이 서로 적대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유럽에서 소련의 위협이 현실화 되자, 프랑스의 도움이 필요했던 미국으로서는 프랑스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었다. 프랑스는 집요하게 호치민을 공산주의자로 몰았다. 결국, 미국은 현실에 눌려 진실을 외면했다. 강대국의 외교적 흥정에 약소국은 그저 바둑판의 사석에 불과했다. 호치민은 다시 정글의 거점 <탄트라오>로 들어갔다. "이 추운 겨울이 지나면 봄의 꽃을 보게 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셋째, 정치 논리와 전쟁 논리의 엇갈림이다. 지리한 전쟁을 경험하면서, 한 프랑스군 대대장이 물었다. "사령관님, 우리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여기 있는 우리 병사들을 위해서라도 이 전쟁의 도덕적인 타당성을 이해시켜 주십시오."  디엔비엔푸의 결정적 패배 후에 어느 병사는 죽어가며 말했다. "프랑스 정치 지도자들의 게으름, 믿을 수 없는 무감각, 환상 그리고 더러운 정치가 인도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밝혀야 한다."  아무리 국익과 정치적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도덕성을 갖춘 명분있는 설득력이 없으면 오래갈 수 없다.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의 전철을 그대로 밟았다. 정치가 지나치게 개입되면서, 일선의 전투는 목표 자체가 모호해졌다. 군인들은 왜,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 신념을 가질 수 없었다. 자연히 군기가 문란해지고 ... 모두가 미쳐가는 전쟁이 되었다. 반면 베트민은 정치와 전쟁의 논리가 일치했다. 혼선이 있을 수 없었다. 하나의 목표만 있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죽고 .. 고통의 극한을 맛보았으나 ... 결국은 승리했다.

넷째, 지도자의 리더십이다. 베트남 전쟁은 호치민의 전쟁이었다. 어쩌면 그를 위한 전쟁이었다. 전쟁의 승패에는 많은 요인이 작용하지만, ... 이 책이 내내 주목하고 있는 것은 바로 지도부의 리더십이다. 호치민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었지만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다. 스스로를 버렸기 때문이다. 반면, 남베트남 지도자들은 모든 것을 가지려 전력투구 했으나, 결국은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호치민의 리더십의 바탕에는 도덕성과 전문성이 깔려 있다. 도덕성은 존경을 받을 만한 일관된 가치관과 행동에서 우러나오고, 전문성은 허위가 버틸 수 없는 환경에서 나온다. 게릴라전은 무한 희생과 무한 인내를 요구한다. 무모하고 무지하고 허세를 부리는 사람이나 군대는 절대 엄두를 낼 수 없다. 극한의 고통과 인내를 요구하는 전장 상황에서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는 리더십과 일신의 안위만을 추구하는 리더십에 맞붙었을때, 후자에게 아무리 좋은 무기가 있어도 승패는 이미 결정난 것이다.

다섯째, 국익과 보편 가치의 충돌이다. 참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선택이다. 어쨌든 후자는 당위적 명분을 갖고 있다. 그게 무서운 것이다. 국익은 때로 야누스적 성격을 띠므로 이것이 진짜 국가의 이익인지, 정치인 개인의 욕심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때가 많다. 때문에 선동에 따라, 국익이 어느 특정 집단의 추악한 이기심의 발로로 규정되기도 한다.

 

미국은 여기에서 졌다. 국익에 대한 국민들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방아쇠를 당기는 군인이 치열한 전투의지를 갖지 못했고, 군부는 최종적 승리에 대한 분명한 확신감없이 작전을 수행했다. 그리고 정부는 일종의 관성처럼, 전쟁에서 발을 빼지 못해 전쟁을 계속 했을 따름이다. 무모한 소모였다.

여섯째, 언론의 역할이다. 정치인, 군인, 언론 ... 모두, <궁극적으로는 국익을 위해서>가 그들 행동 동기(합리화)의 근거다. 그런데 언론은 까발림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본래의 의도가 어떠하였든간에 럭비공같은 특성(위험성)이 있다. 또 <국익>에 대한 정의가 제각각이므로 언론이 생각하는 국익과 정부가 생각하는 국익이 정반대로 규정되어 마주치는 열차같이 충돌할 수 있다.


따라서 미군이 상대해야 했던 적은 정글속의 월맹군과 자국의 언론이었다. 언론과 미디어의 속성에 익숙치 않았던 군인들은 정글에서는 이겼을지 몰라도 언론과의 싸움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전쟁의 참상이 여과없이 TV를 통해 안방으로 전해졌다. 군인들의 처참한 주검은 당장 일반인들의 감정선을 자극했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은 약일까? 독일까?  미군 지휘부는 적을 연구하기 전에 언론을 연구했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 군인의 명예란 도대체 무엇일까? 케산에서, 디엔비엔푸에서, 구정공세의 와중에서, 그리고 정글의 수많은 전장에서 ... 병사들은 생과사의 갈림길에서 ... 싸웠다. 그런데 그들에게 무엇이 남은 것은 무엇일까?  세상은 잠깐 몇 줄의 공치사로 위로하려 들지만, 그것 뿐이다. 곧 잊혀진다. 군인은 그래서 외로운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잊혀질지라도 이 책의 곳곳에서 보여준 인간애에 기인한 불굴의 용기와 희생의 기록들은 군인으로서, 아니, 인간으로서 그 숭고함을 증언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그것은 미군이든 월맹군이든 모두에게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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