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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브람스, 대학 축전 서곡(Akademische Festouvertüre, Op.80)

Bawoo 2014. 1. 25. 19:12

 

브람스, 대학 축전 서곡

Akademische Festouvertüre, Op.80

 

Johannes Brahms 1833∼1897

 

<바트이슐에서의 브람스와 요한 슈트라우스>
고전적인 형식에 의한 차분하고 진지한 음악만을 쓴 브람스와 경음악인 비너 왈츠의 작곡가
요한 슈트라우스(아들)는 공통점이 적은 대조적인 존재로 생각되는데,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자못 친밀하고 아름다운 교류가 계속되었다. 이슐에서는 두 사람이 울타리를 사이하고 각각 별장을 가지고 있어서, 여기에서 머무를 때면 같이 산책을 하고 함께 자연을 즐겼다.

 

 

Academic Festival Overture /
Josef Krips cond, Philharmonia Orchestra

 

브람스의 작품 중에는 연주회용 서곡이 두 곡 있다. [비극적 서곡]과 [대학축전 서곡]이 그것이다. 브람스는 1876년 초 편지를 한 통 받았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명예음악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조건이라면 영국에 가서 학위수여식에 참여하는 것이었는데, 배를 타기 싫어했고 영어를 잘 못했던 브람스는 손에 쥐고 있었던 자신의 [교향곡 1번]의 완성을 앞당기기 위해 이 학위를 거절했다.


그리고 3년이 지났다. 1876년 3월 이번에는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준다는 통지가 왔다. 이것을 제안한 사람은 브레슬라우 관현악협회의 지휘자이며, 브람스의 열렬한 옹호자였던 베른하르트 숄츠였다. 브람스는 숄츠에게 바로 편지를 써서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었다. 숄츠는 새로운 교향곡이나 축전에 어울리는 노래라도 한 곡 작곡해주었으면 고맙겠다고 답장했다. 케임브리지만큼 브람스에게 신경 쓰이는 조건은 전혀 없었다. 브람스는 그 감사 인사로 [대학축전 서곡]을 작곡하게 되었다. 그 소재와 구성 등에 구상을 가다듬고 있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작곡은 1880년 여름 무렵에야 착수했고, 오스트리아 북부의 휴양지 바트 이슐에서 완성됐다. 이곳에서 브람스는 [비극적 서곡]도 작곡했다.

 

<브레슬라우 대학 전경>

 

브람스의 관현악곡 중에서 가장 널리 애호되는 곡으로, <제2교향곡>과<제3교향곡>의 사이인 1880년에 완성되었다. 매우 쾌활하고 유머러스하며 명랑하여 브람스도 <웃는 서곡>이라 부르기도 했다. 1887년 브람스는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으로부터 명예 음악박사 칭호를 증정하겠다는 통지를 받았으나, 브람스는 영국에 대해 별로 호감을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일부러 대학까지 가서 따분한 의식에 참여해야 했으므로 그 칭호를 사양했다. 그 2년 뒤인 1879년 3월 11일에 독일의 브레슬라우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 칭호를 제시받았는데 여기서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와 같은 귀찮은 조건이 없었으므로 기꺼이 이것을 받았다. 그래서 그 답례로 이 <대학축전 서곡>을 작곡하게 되었다.

 

악기편성 : 피콜로 1, 풀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파곳 2, 콘트라 파곳 1, 호른 4, 트럼펫 3, 트롬본 3, 베이스 튜바 1, 팀파니 3, 큰북, 심벌즈, 트라이앵글, 현5부 

 

 이 곡은 서곡이긴 하지만 소나타 형식을 엄격하게 따른 것이 아니라 상당히 자유롭게 만들어졌다. 상세히 말하자면 4개의 학생의 노래를 연결시켜 놓은 것이다. 그 4곡은 <우리들은 훌륭한 학교를 세웠다>, <나라의 어버이>, <신입생의 노래>, <기쁨의 노래>이며 더욱이 이 곡들은 모두 성격이 달라서 서곡에 변화를 줄 수가 있었다. 그래서 브람스는 이 학생의 노래들을 단순하게 연결시킨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자작의 주제도 넣었으며 연결시키는데는 브람스 특유의 뛰어난 기교를 충분히 사용하였으며 전체를 한 덩어리로 멋지게 묶어 놓았다.

 

 "대학축전서곡"은 구조적으로 조금 복잡한 느낌을 받게되는데 이는 다루어진 주제도 많고 주제들에 변주원리를 적용시켜 진행하고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곡에서 소나타형식과 변주곡형식의 이상적인 조화를 엿볼 수 있다 참고적으로 이 작품의 주제로 사용된 "4곡의 학생의 노래"는 다음과 같다.

 

  • 제 1곡: "우리들은 훌륭한 교사 (校舍)를 세웠다 (Wir hatten gebauet ein stattliches Haus).
  • 제 2곡: "국가의 아버지 (Der Landevater)"
  • 제 3곡: "신입생의 노래 (Was kommt dort von der Höhe)"
  • 제 4곡: "기쁨의 노래 (Gaudeamus igitur)"

 

 

 

 

Academic Festival Overture 

  Leonard Bernstein cond, Wienner Philharmoniker

 

 

 

브레슬라우 대학 명예 박사학위에 대한 감사


빈 서쪽으로 200km에 위치한 광천수 온천 휴양지인 바트 이슐은 브람스가 선호하던 피서지였다. 피아니스트 이그나츠 브륄은 브람스가 바트 이슐에 기거할 때 그를 돌봐주곤 했다. 1880년은 비가 많이 왔지만 브륄이 마련해준 숙소가 쾌적해서 브람스는 바트 이슐을 마음에 들어했고 그 뒤로도 단골이 됐다. 1889년 무렵부터 만년의 브람스는 매년 여름 바트 이슐로 갔다.

 

1880년 5월 바트 이슐에 당도한 브람스는 9월 중순까지 거기에 머물며 작은 여행도 다녔다. 8월 19일에 슐츠에게 보낸 편지에서 브람스는 ‘브레슬라우를 위한 닥터 심포니’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닥터 심포니’는 물론 [대학축전 서곡]을 의미한다. 이해 9월 9일 브람스는 클라라 슈만과 함께 독일 남동부 베르히테스가덴에 가서 클라라 생일(9월 13일)에 [대학축전 서곡]과 [비극적 서곡]의 기초인 네 손 피아노용 악보를 선사하고 이것을 클라라와 둘이서 연주했다.

 

이때 관현악용 악보는 이미 완성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12월 3일 요아힘과 함께 베를린의 호흐슐레 오케스트라가 이 두 곡을 연주한 것은 일종의 시연이었다. 1881년 1월 4일 [대학축전 서곡]은 브레슬라우 관현악협회 콘체르트하우스 홀에서 브람스의 지휘로 공개 초연되었다. 초연은 평이 좋았고, 라이프치히, 뮌스터, 크레펠트, 암스테르담, 덴 하그 등지에서 연주되었고 이들 연주회를 지켜본 브람스는 악보에 수정을 가했다.

 

 

 <당대의 명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하임1831~1907>

1881년 3월 브람스는 [대학축전 서곡]의 파트 악보의 교정과 총보의 초고를 출판업자 짐로크에게 보냈다. ‘대편성 오케스트라를 위해’라고 적힌 총보와 파트보는 1881년 7월 출판되었다. 그리고 브람스는 브레슬라우 대학을 위해 헌정한다는 내용을 담은 페이지를 충가한 장정판을 완성했다. 악보의 서두에는 브람스의 필적으로 ‘축전서곡’이라고만 적혀 있다. 이 최종고의 사본 악보(브람스의 손에 의한 것이 아닌) 머리에는 짐로크에 의해 [대학축전 서곡]이라 적혀있다.

 

 브람스는 1880년 11월 중순 경 네 손 피아노용 악보 인쇄를 위한 최종고를 짐로크에게 보냈다. 이 네 손 피아노용 악보 역시 1881년 3월 출판되어 [대학축전 서곡]이라는 제목이 붙여졌다. 따라서 현재의 [대학축전 서곡]이란 제목은 브람스 자신보다도 오히려 짐로크의 아이디어에 의한 것이 아닐까 하는 가능성도 제기된다. 브람스는 곡의 제목에 대해 고민하면서 친구의 조언도 구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브람스의 곡으로서는 드물게 타악기가 많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터키 군악대 행진곡’으로 부른 적도 있었다 한다.

 

 

학생 노래를 인용한 자유롭고 친숙한 분위기

 

브람스는 처음에 축전서곡으로 위엄 있는 분위기나 기쁨에 넘치고 빛나는 곡상을 의도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 계획을 변경, 괴팅엔에서 학생들과 어울렸던 무렵에 익혔던 학생 노래를 인용해서 자유로운 소나타 형식의 연주곡을 썼다. 왠지 접속곡(메들리) 풍의 성격도 있어서 브람스는 ‘주페 풍의 서곡’이나 ‘주페풍의 접속곡’이라 쓴 적도 있다. [경기병 서곡]이나 [시인과 농부 서곡]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프란츠 폰 주페는 당시 빈 주위에서 유행했던 오페레타 작곡가인데, 서곡을 접속곡풍으로 썼다.

 

곡의 제목에 대해서 한 가지 더. 대학의 축제와 관련있는 것이 아니라 브람스 자신이 대학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과 기쁜 감정을 담고 있는 것이 당연하므로 그것을 ‘대학축전’이라 한 것이 정말 타당한지는 의문이 든다. 어쨌든 축전 혹은 축제(festival) 자체를 위해 작곡된 곡이 아닌 것은 사실이다. 곡의 시작을 알리는 제1주제는 학생들이 멀리서 행진해 오는 듯하다. [라코치 행진곡](리스트와 베를리오즈도 이 곡을 썼다)에서 힌트를 얻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젊은 브람스는 이 행진곡을 아주 좋아했다. 현은 바순과 호른과 함게 부드러운 찬미가 풍의 악구를 연주한다.

 

 

브람스의 관현악곡중 가장 명랑하고 밝은 곡

브람스하면 흔히들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의 작곡가로 생각한다. 사실 맞는 말이다. 그의 관현악이나 실내악작품들에 있어서 어두운 그림자를 배제한다면 브람스의 음악적 특성이 희석되버리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겠다. 특히 그의 실내악들은 주제는 물론이려니와 음악을 접할때의 느낌도 가볍게 다가오는 작품은 거의 없다. 색으로 표현하자면 회색빛의 곡들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브람스에게도 밝은 분위기의 작품을 발견할 수 있는데 헝가리무곡과 여기 소개되는 "대학축전서곡 (Academic Festival Overture)"이 그 좋은 예라하겠다. 이 곡들에선 그의 여느 작품에서는 보지 못하는 흥겨움과 밝은면이 강조되어있다.

브람스는 작품번호가 100을 훨씬 넘어서는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관현악 작품은 그리 많지않다. 교향곡 4곡, 협주곡 4곡, 헝가리무곡, 그가 초기에 작곡한 세레나데 2곡, 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 그리고 서곡 2곡이 전부이다. 특히 그의 관현악 작품들은 주로 1번 교향곡을 완성한 이후에 만들어졌는데 그의 단 두곡뿐인 서곡 또한 2번 교향곡 (1877년)과 3번 교향곡 (1883년)의 작곡시기의 중간 (1880년)에 완성되었다. 브람스의 관현악곡중 가장 대중적인 곡이기도 한 "대학축전서곡"은 그 느낌이 경쾌하고 유모가 깃들어 브람스 자신도 라이네케에게 보낸 서신에서 "웃는 서곡"이라 명명할 정도로 밝은 곡이다.

이 곡은 서곡이기는 하지만 엄격한 소나타형식을 따르지않고 자유로운 형식으로 작곡되었는데 1958년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 때 괴팅겐에서 학생들과 사귈 무렵 익힌 "4곡의 학생의 노래"에 작곡가 자신이 만든 주제를 교묘하게 엮어서 브람스 특유의 뛰어난 음악성으로 전체를 하나로 화려하게 혼합하여 완성하였다. 특이할 만한 점은 그가 즐겨 사용하지 않는 타악기들이 많이 사용된 점인데 - 브람스는 이 곡에서 타악기를 장난삼아 '터키보병의 음악'으로 동원하였다고 말함 - 그는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 장식적인 것이 아니라 알맹이를 궁극의 목표로 삼았기에 박자를 맞추기위해 사용되는 팀파니 이외에는 그의 교향곡이나 협주곡에서는 타악기가 철저히 배제되었다.

 

 

 

출처 : 클래식 사랑 그리고 인생
글쓴이 : 클래식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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