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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성리학자들은 명나라의 정신적·문화적 식민지를 자처했다. 명·청 교체기 명(明)과의 의리 고수는 조선의 국익과 배치하는데도 어떻게 하는 게 국가와 백성을 위하는 길인지 몰랐다.
사대(事大)만이 유일한 외교이던 조선 앞에 만주와 일본이라는 신흥 세력이 나타났으며 그 틈새에서 줄을 타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조선 중기 이후 심화된 중화숭배주의는 자주의식을 약화시켰으며 변화에 대한 대응력을 떨어뜨려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었다.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성 동문(좌익문)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1644년 4월 청(淸) 실권자 아이신고로 도르곤(도얼곤·1612~1650)에게 투항한 명나라 요동방위사령관 오삼계(吳三桂)는 2만 대군을 동원해 베이징 방향으로 도주하는 이자성의 순군(順軍) 추격에 나섰다.
이자성은 4월 29일 베이징에서 다시 한번 황제 즉위식을 치른 후 이튿날 베이징을 탈주했다. 청나라군은 5월 1일 베이징에 입성했다.
병자호란(1636~1637) 이후 청나라의 인질이 된 조선 소현세자는 청군-오삼계 연합군과 이자성군 간에 벌어진 산하이관 전투를 참관하고 청군을 따라 베이징에 입성했다.
청군에게 격파당한 이자성은 부하들과 함께 산시(山西)를 출발해 산시(陕西), 후베이, 후난을 거쳐 창장 유역 주장(九江)까지 도주했으며 1645년 5월 그곳에서 죽었다.
명나라 말기로 돌아가보자.
명-해서여진, 예헤부-조선연합군이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누르하치군에게 대패하자 만력제는 전략가 웅정필(1569~1625)을 요동방위사령관에 임명했다. 웅정필은 부임하기에 앞서 만력제에게 상소해 언관(言官)이 자신의 전략(戰略)을 방해하지 못하게 해줄 것을 간청했다.
속보를 생명으로 하는 언론은 그날그날 일어나는 일에 대한 보도와 논평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있다. 중장기적 시각에서 정책을 세우고 집행해야 하는 관료들은 보도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황제 독재국가인 명나라에서 황제가 보호해주지 않으면 전선의 장군들은 언관들에게 휘둘려 전쟁을 제대로 치를 수 없는 상황으로 몰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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랴오양과 선양 함락에 놀란 명나라 조정은 그해 6월 웅정필을 다시 요동방위사령관으로 기용했다. 웅정필은 요서(遼西)로 줄어든 방어선을 지키게 됐다.
웅정필은 명 조정에 ①산하이관 포함 요서의 명나라 육군 ②발해만과 서해의 명나라 해군 ③측방의 조선군을 활용해 후금의 공격을 저지하는 삼방포치책(三方布置策)을 건의했다. 이는 나중 만주가 조선을 침공하는 이유 중 하나로 작용한다.
위충현은 부사령관 격인 광닝순무(廣寧巡撫)에 왕화정을 기용해 웅정필을 보좌하게 했다. 왕화정 역시 사르후 전투 때 두송과 같이 이번 전쟁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누르하치를 얕잡아 보았다.
왕화정은 1622년 만주에 투항한 이영방군과 조선의 평안도 가도(椵島)에 주둔한 모문룡군(毛文龍軍), 몽골군 등 40만 명의 지원을 확보했다고 호언장담하면서 16만 대군을 이끌고 다링허(大凌河) 서안(西岸) 광닝에서 출격해 서평보를 공격했다. 웅정필이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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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는 수도를 랴오양에서 선양으로 옮겼다. 누르하치군이 요서에서 활동했으나 베이징의 관문 산하이관 80㎞ 전방에는 영원성(寧遠城)이 버티고 있었다. 광닝 패전 후 대학사 손승종(孫承宗) 추천으로 산하이관 진장(鎭將)으로 기용된 원숭환(1584~1630)이 부하장수 조대수(祖大壽)를 독려해 개축한 성이다.
원숭환은 지방의 중하급 관리에서 고위 장령으로 파격 승진했는데, 총병 만계(滿桂), 조대수, 하가강 등과 함께 영원성을 철저히 수비했다. 그는 푸젠에서 들여온 홍이대포(紅夷大砲)를 성곽에 배치해 밀집대형으로 돌격해 들어오는 누르하치군을 집중 포격했다. 누르하치는 생애 처음으로 패전했다.
“우리가 명나라를 섬긴 지 200여 년이 지났으니, 의리로는 군신 사이요, 은혜로는 부자 사이다.
임진년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선조께서는 42년간 보위에 계시면서 지성으로 명나라를 섬겨 한 번도 서쪽을 등지고 앉지 않았다. 그런데 광해는 명(明)의 은덕을 저버리고, 오랑캐와 화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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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비는 조선 인조 17년(1639)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태종의 요구에 따라 만들어진 청나라의 승전비로 우리나라 외침의 역사를 상징한다.
이즈음 반정군을 지휘한 이괄은 좌포도대장에 임명돼 한성부 치안을 담당했다. 반정 정권의 핵심 김류, 이귀, 김자점 등은 이괄을 배척했다. 논공행상 과정에서 이괄은 김류와 이귀, 김자점보다 한 등급 아래인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봉해지는 데 그쳤다. 그는 반정 후 2개월 만에 후금이 침공할 우려가 있다면서 도원수 장만(張晩)의 추천 형식으로 평안병사 겸 부원수에 임명돼 평안도로 떠났다.
이괄은 영변에 주둔하면서 후금의 침략에 대비했다. 문회와 허통 등이 이괄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귀는 이괄을 잡아다 문초할 것을 극력 주장했다. 이종은 타협책으로 이괄 대신 그의 아들 이전을 잡아 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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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이관의 원숭환과 조선군의 합동 공격을 우려한 후금군이 먼저 화친을 요청했다.
1619년 사르후 전투 이후 후금에 투항해 있던 강홍립이 후금과 조선 사이를 중재했으며, 온건한 내용의 조약이 체결됐다.
①후금군은 즉시 철병하며 ②후금군은 철병 후 압록강을 건너지 않고, ③후금-조선 관계는 형제국으로 하며 ④조선은 후금과 조약을 맺되 명나라와는 적대하지 않는다는 게 요지였다.
동아시아 정세가 급변하는데도 조선 사회는 중화존숭주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백성들도 후금을 오랑캐로 여겨 멸시했다. 조선 서당과 서원의 교육이 성리학 위주 중화숭배론으로 점철됐기 때문이다.
두 차례의 호란 이후 나온 박씨전과 유충렬전, 조웅전, 신유복전 등에는 조선인들의 후금에 대한 적개심과 명나라 존숭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조선 백성들은 후금이 인종적으로도 조선과 매우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정묘호란 후 서인 정권은 “조선군의 배신으로 인해 사르후 전투에서 패배했으며, 강홍립이 호란(胡亂)을 야기했다”고 강변했다. 병자호란 후에도 똑같은 행태가 되풀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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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淸) 황제 홍타이지.
1629년 12월 원숭환이 산하이관 병력을 동원해 베이징성까지 진출한 청나라군을 물리쳤는데도 숭정제는 그를 소환해 투옥했다. 숭정제는 다음 해 원숭환을 사지를 찢고 살을 발라 죽이는 책형(磔刑)에 처했다.
요동방위총사령관에는 손승종이 임명됐다. 그는 조대수 등과 함께 산하이관 전방의 금주, 송산, 행주, 탑산 등 4개 성을 겨우 확보했다. 조대수는 1631년 10월 살아 있는 병사가 전사한 병사들의 시신을 잘라 먹을 정도로 참혹했던 다링허성 공방전 끝에 1만1000기를 거느리고 홍타이지에게 투항했다.
원숭환이 처형된 후 통제할 사람이 없게 되자 모문룡의 옛 부하들은 제멋대로 행동했다. 공유덕과 경중명은 1631년 반란을 일으켜 산둥성 덩저우와 라이저우를 점령한 후 그곳에 진을 쳤다. 그들은 명나라 총병 조대필에게 패해 서해 도서 여기저기를 도망다니다가 1633년 요동반도 근해 장쯔다오(獐子島)로 들어갔다.
가도 지배자 심세괴와 조선 해군이 협공해오자 궁지에 몰린 그들은 1만 명이 넘는 병력과 전함, 30문(門)의 홍이대포를 갖고 후금에 투항했다.
홍타이지는 1635년 이복동생 도르곤으로 하여금 칭기즈칸의 후손 알탄칸이 도읍했던 내몽골 후호하오터까지 원정케 했다. 후금은 몽골 대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차하르부는 물론, 투메트부와 오르도스부도 복속시켰다. 내몽골을 평정한 홍타이지는 다음 해(병자년) 국호를 청(淸)으로 고쳤다.
권력을 강화한 홍타이지는 조선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황제로 섬길 것을 요구했다. 조선은 청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해 11월 홍타이지가 직접 지휘하는 청나라 10만 대군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공했다.
병자호란이 발발한 것이다. 사르후 전투와 이괄의 난 이후 포로 또는 투항한 조선인으로 구성된 조선팔기를 앞세운 청군은 쉽사리 한양을 점령하고, 인조를 남한산성에 몰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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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장수 웅정필(그림)은 언관들에 휘둘리다 후금군에 체포돼 처형됐다.
조선은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농민반란에 시달리던 명나라는 구원군을 보낼 수 없었다. 인조를 구원하고자 경상 좌·우병사 허완(許完)과 민영(閔栐)이 군사를 모집해 북상했다.
모집된 조선군 숫자는 4만여 명이었다.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이들은 1637년 1월 광주(廣州) 쌍령(雙嶺)에 도착했으며 쌍령 양쪽에 진을 치고 청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6000명의 청군이 곤지암을 점령한 뒤 조선군의 동태를 살피고자 30여 명의 기마병으로 구성된 척후대를 보냈다. 청의 척후병들이 허완 부대 목책에 다다르자 조선군은 즉시 발포했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조총으로 무장했으나 아직 사격에 익숙하지 못한 병사가 다수였던 조선군은 첫 발포에서 소지하고 있던 탄환을 거의 다 소진해버렸다. 조선군 진영은 탄환 보급을 요구하는 병사들로 인해 혼란에 빠졌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청군이 조선군의 목책을 넘어 급습했으며, 이에 놀란 조선군은 조총을 내던지고 무질서하게 도주했다.
반대쪽 고개에 진을 친 민영 부대는 청군의 공격에 그런대로 잘 대응하고 있었으나 탄환과 화약을 다시 분배하기 위해 진영 한가운데 모아놓았던 화약이 조총의 불꽃에 닿아 폭발했다. 갑작스러운 폭음에 조선군은 우왕좌왕했으며, 청나라군 300여 기(騎)가 돌진해 조선군을 짓뭉갰다.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 때의 칠천량 해전 △6·25전쟁 때의 현리전투와 함께 한국사 3대 패전의 하나인 ‘쌍령전투’다. 이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남한산성에 포위된 인조를 지원할 병력은 조선 어디에도 없게 됐다.
남한산성에서는 최명길 주도 주화파와 김상헌 주도 척화파가 소모전을 벌였다. 40여 일을 버티던 이종은 삼전도(三田渡)에 나가 홍타이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로써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 됐다.
나라 자체를 빼앗긴 한족의 명나라보다는 나은 처지라고 할까. 중화주의의 미몽에 사로잡힌 조선 성리학자들의 어리석음이 조선의 속국화를 가져왔다.
800만 인구의 조선이 무능한 지배층으로 인해 120만 인구의 만주에 속절없이 당하고 만 것이다.
만주의 핵심을 이룬 건주위 오도리부는 15세기까지만 해도 김종서, 이징옥, 남이 등에게 힘없이 굴복하던 여진 1개 부락(部落)에 불과했다. 그러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포함해 30만~40만 명의 포로가 청나라로 끌려가고, 인조 이종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청나라는 조선의 풍습을 존중해 변발(辮髮)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병자호란 발생 원인은 다양하다.
첫째, 모문룡의 부하 공유덕, 경중명, 상가희가 해군을 이끌고 만주에 투항함으로써 동북아 군사 균형이 만주에 크게 유리하게 변했다.
둘째, 정묘조약에서 형제의 맹약을 맺은 만주가 조선에 군림하면서 반발을 샀다. 정묘조약은 병자호란을 향한 시한폭탄이었다.
셋째, 모문룡의 가도 주둔과 웅정필의 삼방포치책에서도 알 수 있듯 명나라는 조선을 요동 수복 전쟁에 끌어들이려 했다. 모문룡의 경우 요동 한족을 끌어모으고 ‘조선과 함께 요동을 수복한다’는 격문을 돌리는 등 만주를 자극했다.
넷째, 홍타이지가 칭기즈칸의 후예인 몽골 차하르부 링단칸으로부터 대원옥새(大元玉璽)를 확보함으로써 황제인 동시에 대칸으로 등극해 제국을 건설할 정치적 명분을 얻었다.
다섯째, 군사·정치적 힘을 바탕으로 황제를 칭한 청나라의 세계관과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받드는 조선의 세계관은 양립할 수 없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도 권력을 유지한 서인 세력은 중화 숭배를 고집했다. 청나라에 대한 철저한 항전을 주장한 것으로 잘 알려진 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 삼학사 가운데 특히 윤집은 척화론(斥和論)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그가 생각하는 조국은 조선이 아니라 명나라였다.
그는 “명(明)은 우리의 부모이나, 만주는 명의 원수이니 곧 부모의 원수입니다. 신하로서 부모의 원수와 형제가 돼 부모를 버리겠습니까. 나라가 없어질지언정 명과의 의리는 버릴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북학파의 대표적 인물이자 열하일기와 허생전 등으로 유명한 박지원(1737~1805)조차 출신 가문인 노론의 당론(黨論)에 따라 “효종(孝宗)의 임금은 명나라 천자이며,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효종에게 하듯이 명나라 천자에게 충성을 다했고, 우리는 명나라의 유민이다”라는 내용의 시를 지었다.
서인·노론 사대부들은 나라가 망하더라도 명과의 의리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리학자들은 명나라의 정신적·문화적 식민지를 자처했다. 명·청 교체기에 명나라와의 의리 고수는 조선의 국익과 배치하는데도 성리학자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국가와 백성을 위하는 길인지 몰랐다.
사대(事大)만이 유일한 외교였던 조선 앞에 만주와 일본이라는 신흥 세력이 나타났으며, 조선은 그 틈새에서 줄을 타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임진왜란을 일으켜 ‘불구대천(不俱戴天) 원수’가 된 일본은 정묘·병자호란을 계기로 발 빠른 행보를 보였다. 위기에 처한 조선에 조총과 화약 등 무기를 원조하겠다고 접근하는가 하면 조선의 곤경을 활용해 정치·경제적 이익을 최대한 얻으려 했다.
요컨대 조선 중기 이후 심화된 중화숭배주의는 자주의식을 약화시켰으며 변화에 대한 대응 능력을 떨어뜨려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었다.
조선은 108년 전 멸망했으나 한국 사회 일각에는 중화숭배주의가 변형된 형식으로 살아 숨 쉰다.
전광용의 소설 ‘꺼삐딴 리’의 주인공 이인국의 처세가 말해주듯 숭배 대상만 명(明)에서 청(淸), 일본(혹은 러시아), 미국(혹은 소련)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 1962년 경북 예천 출생
●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정치학박사
● 駐중국대사관 총영사
● 現 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관 총영사
/ 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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