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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제의 난 (李弼濟─亂)

Bawoo 2018. 10. 5. 21:43

 

이필제의 난 (李弼濟─亂)

 

1871년(고종 8) 3월 10일(음) 동학교도인 이필제가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과 함께 영해에서 봉기한 사건.

 

역사적 배경

1863년(철종 14) 동학에 입교한 이필제는 자신이 체포되어 처형당하는 1871년 말까지 9년 동안 진천·진주·영해·문경 등지에서 4번에 걸쳐 봉기를 주도하였다.

특히 1871년 3월 10일(음) 전개된 영해봉기는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1870년 7월 진주작변(晋州作變)에 실패한 이필제는 영해로 피신, 잠복하여 5차례에 걸쳐 최시형에게 사람을 보내 면회를 요청하였다. 이에 최시형은 수일간 이필제와 머물면서 영해봉기를 계획하였다.

경과 및 결과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이 난을 동학과 관계없는 민란으로 보아왔고, 또한 동학측에서도 최시형이 이필제의 요구를 끝까지 거절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최근 동학측의 기본 사료가 발견되면서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필제·최시형 등은 3월 10일(음) 교조 순교의 원일(寃日)을 영해봉기일로 정하고, 사전 면밀한 담당부서를 정하여 봉기를 계획한 뒤 동학 조직망을 이용하여 경상도내의 동학교도 500여 명을 동원하였다.

먼저 이필제는 천제(天祭)를 지낸 뒤 최시형과 더불어 500여 명의 동학군을 이끌고 야반(夜半) 게릴라작전법으로 영해부를 야습하여 군기고의 병기를 접수한 뒤 부사 이정(李)을 문죄, 처단하였다.

당시 정부측은 “이는 어떠한 적도인지 알 수 없다”라며 당황해 했으며, 인근 고을의 수령들은 영해봉기에 겁을 먹고 모두 도망쳤다. 이곳에서 성공을 거둔 이필제는 이 해 8월 2일 문경 봉기를 주모하다가 체포되었다.

의의와 평가

동학 최초의 교조신원운동과 반봉건투쟁을 전개한 영해봉기는 분산고립적인 당시의 일반 민란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으로 동학조직망을 통한 광범위한 인원동원, 야습작전 등으로 강한 저항력을 보여주어, 후기 전반적 농민봉기의 맹아(萌芽)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주목된다.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최선생문집도원기서(崔先生文集道源記書)』
  • 『교남공적(嶠南公蹟)』
  • 「고종조의 민란연구」(박경성, 『인천교육대학논문집』14, 1980)
  • 「신미년(1871) 이필제난고: 동학과의 연관성을 중심으로」(김의환, 『우리나라 근대화사논고』, 삼협출판사, 1964)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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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제는 자신과 같은 몰락한 양반 출신의 사람들을 모아 반란을 도모했다. 이들은 군현단위를 넘어서서 지방 관아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서울까지 진격하고자 했다. 1869년 진천작변은 공주·천안 등지를 중심으로 사람을 모으던 중 밀고로 실패했다. 이후 이필제는 남해거사를 준비하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다시 진주작변을 계획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투서로 밀고하는 자가 있어 실패했다. 이후 이필제는 영해로 가서 동학교도 이수용을 찾아가 동학교도를 이용한 변란을 계획했다. 1871년 3월 10일 난을 일으켜 관아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주민들의 호응이 없어 결국 관군의 공격을 피해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그후 이필제는 다시 거사계획을 세웠으나 이를 미리 눈치를 챈 조령별장의 수색으로 1871년 8월 2일 체포되었다.

진천작변·진주작변·영해난·조령난을 가리킨다. 이 가운데서 실제로 일어난 것은 영해난뿐이었다. 진천작변과 진주작변은 모의 단계에서 밀고로 발각되었고 조령난도 거사 직전에 실패했다.

이필제는 몰락한 양반 출신으로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끌어모아 반란을 도모했는데, 종래의 농민항쟁과는 유형이 달랐다. 이전에는 군현 단위의 농민이 각 고을의문제를 해결하고자 일으켰다면, 이들은 군현단위를 넘어서서 지방 관아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결국은 서울까지 진격하고자 했던 병란이었다. 당시는 봉건 말기의 사회모순이 극도에 달하고, 서구 자본주의 열강이 무력으로 동아시아에 침략해오고 있었다.

또한 1861년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베이징[北京] 함락 소식이 조선에도 전해져 양이침공의 가능성에 대한 위기의식이 팽배해지고 있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다가오는 전란을 예고하고 이를 피할 수 있는 피난처로서 백성을 구원하는 진인의 출현을 예언하는 정감록류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이에 이필제도 자신이 진인임을 자처하고 사람들을 끌어모았으며, 그에게 호응했던 사람들도 이미 정감록류의 참서·비기를 접했고 직접 거사를 도모하고자 했다.

1869년의 진천작변은 공주·천안·진천 등지를 중심으로 사람을 모으던 중 밀고에 의해 실패했다. 진천작변이 실패한 후 이필제는 거창·합천 등지에서 주성칠·주성필로 이름을 바꾸어 유영렬·성하첨·정만식 등과 1869년 12월 남해거사를 준비하다가 여의치 않아 중도에 포기하고 다시 진주작변을 계획했다. 그리하여 1870년 2월 28일에 덕산에서 사람들을 모아 곧장 진주로 들어가 읍성을 공략하고 군기를 탈취하기로 했는데 그 계획은 투서로 밀고하는 자가 있어 실패했다. 진주작변의 실패 후에 이필제는 진천작변을 같이 준비했던 김낙균과 함께 영해로 가서 난을 준비했다.

이필제는 전부터 알던 동학교도 이수용을 찾아가 동학교도를 이용하여 변란을 일으킬 것을 계획했다. 당시 최제우의 처형 이후에 최시형은 동학재건 작업에 착수하여 영해·영덕·경주·상주 등지의 교도들과 교류를 갖고 있었다. 처음에는 변란에 적극적으로 참가할 것을 주장하는 주변 동학교도들의 의견에 반대하던 최시형도 진인임을 내세우는 이필제에게 설득되어 난에 참가할 것을 수락했다. 이후 준비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1871년 3월 10일 난을 일으켜 부사를 죽이고 관아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주민들의 호응이 없었다. 결국 관군의 공격을 피해 관아를 내놓고 도망갈 수밖에 없었고, 도망중에 무리가 흩어지고 관군의 공격을 받아 잡히거나 사살당했다.

그후 몸을 피한 이필제와 김낙균은 조령관 내 초곡에서 전부터 단양을 중심으로 난을 준비하던 정기현과 함께 합세하여 다시 거사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거사전에 미리 눈치를 챈 조령별장의 수색으로 이필제·정기현 등은 1871년 8월 2일 체포되었으며 이로써 이필제의 난은 막을 내렸다. 이필제의 난은 다른 병란들과 함께 대내외적 위기가 고조되던 현실에 불만을 품은 몰락양반, 빈곤한 지식층의 대응양식의 한 형태였다.[다음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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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제 (주성칠(朱成七), 李弼濟)1825(순조 25)∼1871(고종 8).

조선 말기의 동학교도·농민운동가.

개설

본관은 예안(禮安). 충청남도 홍주 출신. 증조는 태안군수(泰安郡守)를 지낸 이완(李烷)이고, 할아버지는 이원규(李元圭), 아버지는 이종원(李鍾源)이며, 외조는 안규묵(安奎黙)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충청북도 진천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신분은 향반(鄕班)으로, 1863년(철종 14) 동학에 입도하여 동학을 적극 포교하면서 농민을 규합해 나갔다.

이 때문에 체포령이 내려져 피신하였는데, 1866년에 다시 체포령이 내려지자 충청남도 일대로 피신하였다. 피신 중에도 동학을 적극 포교하면서 농민을 규합해나갔기 때문에 또다시 관의 추적을 받아 1869년말에는 경상남도 진주일대로 피신, 잠복하였다.

이곳에서 이름을 주성칠(朱成七)로 고치고, 1870년 7월 농민을 규합하여 진주작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중국으로 쳐들어가 새 왕조를 세우겠다는 정치적 야망을 품고, 양영렬(楊永烈)이 추천한 초계의 정만식(鄭晩植)과 정만식이 추천한 장경로(張景老)와 함께 농민을 규합하여 진주군기고(晉州軍器庫)의 군기를 빼앗아 금병도(錦屛島)로 가서 중국으로 들어갈 계획을 세웠으나 밀고로 실패하였다.

진주작변이 실패한 뒤 경상북도 영해로 피신, 잠복하여 동학의 제2대교주 최시형(崔時亨)을 설득하여 동학교문 전체의 신원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세워 1871년 3월 10일 이른바 이필제의 난을 일으켜 성공을 거두었다.

그 해 8월 문경에서 봉기하려다가 체포되어 12월 서울 서소문 밖에서 능지참(凌遲斬) 교수형을 당하였다. 동학에 입교한 뒤 9년간에 걸쳐 진천·진주·영해·문경에서 4회의 농민대봉기를 조직, 주도한 농민운동의

지도자였다.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신미역적필제(辛未逆賊弼濟)·기현국안(岐鉉鞫案)』
  • 『죄인필제등봉결안(罪人弼濟等捧結案)』
  • 『최선생문집도원기서(崔先生文集道源記書)』
  • 「이필제난고」(김의환,『우리나라 근대화사논고』, 삼협출판사, 1964)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보- 책:조선에 반하다(지배와 저항으로 보는 조선사)저자 조윤민 | 글항아리 | 2018.8.13.

조선 사회의 주류 흐름과 지배세력에 맞서 이탈하고 전복하고 봉기한 자들에 대한 사연을 담은 『조선에 반하다』. 이탈과 불온, 역류의 이야기를 넓고 깊게 다루고 저항과 항쟁의 세계를 본격적으로 펼쳐낸 책이다. 1부에서는 권력 행사의 부당함과 상전의 억압, 관료의 수탈에 대응해 하층민들이 기물파괴와 방화, 복수살인, 상전살해, 폭력 대응, 소요, 난동, 도적질 등으로 맞서나간 행위와 사건을 다룬다.

2부는 몰락 양반, 유랑지식인, 평민지식인, 저항지식인 등으로 불리는 이들을 주인공으로 집권세력의 부당한 통치 행위와 민생정책 실패, 관료의 억압과 수탈 등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을 기치로 일으킨 정치변란 사건을 다룬다. 3부에서는 19세기에 일어난 대규모 민중 항쟁과 기층 민중을 동원해 봉기한 변란 성격의 반란을 다루고 있다.

조선에 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