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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와 분석적 입체주의
Pablo Picasso and the Analytical Cubism
오 병 욱 (Beung-Ouk Oh)
| 약 력 |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원 회화과
프랑스 파리 제8대학교 조형미술학과 박사
원광대학교 미술대학 부교수 역임
피카소의 신화
1973년 4월 8일 93세의 파블로 피카소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서거 소식은 전 세계의 중요한 뉴스였다. 그만큼 그는 유명했고, 중요한 미술적 업적을 남겼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막대한 재산과 여러 명의 여인들과의 이혼과 결혼이 그의 작품세계보다 더 화젯거리가 되었을 정도로, 그의 작품들은 일반인들에게는 낯설었고, 괴상했고, 난해했다. 피카소는 자유분방하게 그렸는데, 그 자유분방함은 마치 현대미술 발전의 척도와도 같았다.
그의 그림들에는 다양한 미술 사조가 들어있다. 상징주의, 야수파,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추상표현주의가 들어있다. 이 중 그의 것은 입체주의뿐이다.
상징주의와 야수파는 오딜롱 르동, 모리스 드니, 폴 고갱의 것이었고, 야수파는 앙리 마티스와 앙드레 드랭의 것이었다. 초현실주의는 그의 후배 작가들 것이었고, 추상표현주의도 그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사조를 뒤섞고, 재창조하면서 그만의 예술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일반인들이 가장 이해하기 곤란한 작품은 그의 창안으로 알려져 있는 입체주의, 즉 큐비즘이다.
스페인 사람인 피카소는 1900년 당시 예술의 중심지인 파리에 도착했다. 1년쯤 머물렀던 그는 바르셀로나로 돌아갔다가 1904년 파리에 정착했다. 1881년 스페인의 남부 해안도시 말라가에서 태어난 그는 나이 20도 되기 전에 바르셀로나에서 사실주의적 아카데미즘의 화가로 유명했고, 1900년부터 파리에서 고갱, 보나르, 루오 등등의 화풍을 모방해 습작들을 제작하면서, 당시 미술의 흐름과 감각을 익혔다.
그의「자화상」(그림 1 참조)에서 보듯이 1906년경부터 그는 입체주의 미술이라 명명될 작품을 시작했다. 27~8세의 피카소가 당시 미술의 경향을 이끌어갈 수 있도록, 파리 화단이 취약했던 것인가?
아니면 피카소는 몇 세기에 하나 있을까 말까하는 천재인가?
Self-Portrait by Pablo Picasso via DailyArt app, your daily dose of art getdailyart
그림 1. 파블로 피카소, 「자화상」, 1906,
야수들(les fauves)
1905년 가을 싸롱전(Salon d’automne)에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와 앙드레 드렝(Andre Derain) 등의 젊은 화가들은 거친 형태들과 강렬한 색채의 그림들을 출품했다. 이들의 그림이 진열된 전시장 중앙에는 르네상스 양식의 조각상이 있었다. 평론가 루이 복셀이 이 광경을 보고, 마치 이 조각상이 야수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이 야수들이라는 표현은 곧 야수주의 혹 야수파라는 조롱적인 이름을 유행시켰다. 그런데 이들의 강렬하고 거친 표현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들의 자의적인 색채의 사용은 오딜롱 르동, 폴 세뤼지에, 모리스 드니, 폴 고갱 등의 상징주의 미술에서 비롯되었다. 즉 이들은 상징주의 화가들처럼 대상의 외관보다 대상의 본질을 추구하는 화가들이었다.
본질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색채의 힘을 발견했다. 1905년 마티스와 앙드레 드렝은 작은 항구 꼴리우르에서 공동작업을 했으며, 마티스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우리는 아이들처럼 자연을 마주하고 앉았고 우리의 기질이 명령하는 대로 그렸다. (...) 나는 느끼는대로 그렸고, 색채만 가지고 그렸다.”
그들은 색채를 다이너마이트처럼 사용했고, 결과는 색채의 폭발과 같은 화면이었다.
마티스의「모자 쓴 여인」(그림 2 참조)에는 사실적 묘사라 할 만한 것이 없다. 그는 가슴이 불러주는 대로, 과장되거나 비상식적인 색채를 사용해서 그렸다. 노란색 뺨과 에메랄드색 그늘, 빨간 머리와 파란 모자 등으로 현란하고 비사실적인 색채로 그렸다. 그러나 반면에 이 작품들은 색채의 완전한 해방이며, 색채 그 자체의 아
름다움을 주장하고 있다.
피카소가 다시 파리로 돌아와 완전히 정착했을 때가 이때쯤이다. 몽마르트르에 초라한 아틀리에를 마련한 그는 빈털터리였다. 그는 그의 심경을 반영하는 듯, 이때 그가 주로 다루던 주제는 굶주림과 노동으로 피폐한 인간상이었다.「 포옹」(그림3 참조)은 바로 ‘청색시대’로 알려진 이때의 작품이다.
이어서 조금의 명성을 얻기 시작하면서 그는 서커스단 인물들을 소재로 한 그림의 ‘장밋빛 시대’ 로 접어들었다. 이전에 그는 파리의 화가들을 모방했는데, 「자화상」(그림4 참조)은 로트렉의 필치가 엿보이는 작품이고, 「곡예사」(그림 5 참조)는 인물들의 윤곽선이 고갱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1906년에 피카소는 또 다른 종류의 그림을 시도한다.「 자화상」(그림 1 참조)은 나무를 서툴게 깎아 놓은듯이 그린 작품이다. 그는 이미 아프리카 나무 조각상과 가면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피카소의 이 네 점의 작품을 놓고 볼 때, 그들 간에는 별로 공통점이 없다. 각기 다른 화가들에 의해 그려진 듯한 이 그림들은 당시 그림 경향의 다양성과 무엇인가 색다른 것을 찾으려는 젊은 화가들의 시도들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Woman with a Hat, 1905. San Francisco Museum of Modern Art
그림 2. 앙리 마티스, 「모자 쓴 여인」, 1905, 81×60cm, 개인소장.
pablo-picasso-la-view
그림 3. 파블로 피카소, 「포옹」, 1904,
Self-Portrait (Yo Picasso) by Pablo Picasso
그림 4. 파블로 피카소, 「자화상」
Pablo Picasso Harlequin and Companion, 1901 The State Pushkin Museum of Fine Arts, Moscow
그림 5. 파블로 피카소, 「곡예사」, 1901, 모스크바, 푸쉬킨 미술관.
신세기의 미술
미술사는 1905년 포비즘, 1908년 큐비즘, 1916년 다다이즘 1924년 슈르레알리즘 등으로 단정해 놓지만, 실제는 그와는 매우 다르다. 포비즘이 상징주의와 연결되어 있듯이, 입체주의도 포비즘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포비즘보다 더 다양한 작품들을 보여주는 입체주의는 그 양식적 성격조차도 분명하게 규정할 수 없다.
너무나 많은 화가들이 관여되어 있고, 너무 다양한 방향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미의 기준이 더 이상 인정받지 못한 이후로 화가들은 각자가 새로운 예술을 모색해 왔다.
그 풍부함 혹은 혼란스러움이 극에 달했을 때가 1900년대 초반이었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 앙드레 살몽, 막스 쟈콥 같은 문필가들이 미술비평에 다수 참여한 것도 이 시대의 특징이다. 이들은 새로운 세기를 표현하는 예술을 만들고자 화가들과 함께 노력했다. 그러나 무엇이 진정한 예술이 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입체주의의 대표적인 옹호자로 알려진 아폴리네르도 새로운 회화에 대한 비전을 아직 확실히 갖고 있지 않았다. 다만 “미라는 괴물은 영원하지 않아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한다는 것, 그리고 새로운 기계문명처럼 새로운 미술은 자연을 모방하지 않는, 그래서 자연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회화를 불꽃에 비유했다.
“불꽃은 회화의 상징이고, 세 가지 조형적 미덕은 빛을 내며 불탄다. 불꽃은 이질적인 것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고, 접촉하는 것들을 사정없이 그 자신과 동화시켜 버리는 순수함을 가졌다. 불꽃은 나누면 나뉘지만, 모든 작은 불꽃들을 원래의 불꽃과 닮게 만드는 마법적인 통일성을 가졌다. 그리고 불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빛이라는 숭고한 진실을 가졌다.”
순수성, 통일성, 진실성의 미술. 아폴리네르가 말하는 이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불꽃’ 같은 회화는 피카소와 브락크로 대표되는 입체주의 작품보다는 강렬한 색채의 야수파 회화를 우선 상기시킨다.
더 나아가서는 1912년경에 제작되는 로베르 들로네의「동시에 열린 창들」(그림 6 참조), 「원반」(그림 7 참조)같은 색채추상 작품들에 더욱 어울린다.
아폴리네르가 입체주의에 헌정한 그의「미학적 명상, 입체주의 화가들」이라는 제목의 책도 입체주의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입체주의는 미술이 현대미술이 거쳐야 했을 필연적인 양식도, 또 확고한 이념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이 책에서 보이는 역설은 1907년경 시작해서 1914년 끝나는 입체주의 미술운동 전반에 걸친 것이기도 하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입체주의’ 라는 괴상한 이름은 목표도 모르면서 전진하는 새로운 미술의 모든 시도들에 붙여진 것이다. 즉 입체주의는 과거 미술의 한계를 벗어나서 현대성을 추구하는 작가들의 시도들과 비평가들의 해석들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면서 그 성격을 형성해 나간 미술운동에 붙여진 꼬리표였다.
혹은 다양하게 발표되던 입체주의 이론들을 넓게 적용하거나 오해해서 스스로를 입체주의자라고 표방하던 수많은 혁명적 화가들이 모여들었던 깃발이었다.
그림 6. 로베르 들로네, 「동시에 열린 창들」, 1912, 46×38cm, 런던, 테이트 갤러리.
Le Premier Disque, 1912-1913, oil on canvas, 134 x 52.7 inches, Private collection
그림 7. 로베르 들로네, 「원반」, 1912, 코너티 , 개인소장
Les Demoiselles d'Avignon, 1907 by Pablo Picasso
그림 8.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여인들」, 1907, 244×234cm, 뉴욕, 현대미술관.
Three figures under a tree, 1907-08 - at the Picasso:
그림 9. 파블로 피카소, 「나무 밑의 세 사람」, 1907, 99×99cm, 빠리, 피카소 미술관.
아비뇽의 여인들
1907년 피카소는「아비뇽의 여인들」(그림 8 참조) 을 그린다. 피카소가 공부했던 바르셀로나 미술학교 근처에 있는 아비뇽 거리의 매춘부들을 소재로 그린 작품이다. 입체주의에 대한 모든 연구업적은 입체주의 운동의 시작이 바로 피카소의 이 작품에서 비롯되었다고 의견을 모으면서도 이 작품은 입체주의적 작품이 아니라고 한다. 사실 이 작품은 입체주의적이라고 할만한 아무런 특징도 갖고 있지않다.
후일 규정된 입체주의 미술양식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입체주의는 원근법적 시각으로 보이는 대상의 모습이 아니라, 여러 시점에서 관찰된 대상의 여러 모습들을 한 화면에 모두 그려내는 그림이다.
둘째, 그 결과로 화면은 대상들의 파편화된 모습으로 가득 차게 되는데, 이 화면의 균질감이 입체주의 미술의 특징이다.
피카소의 이 그림은 아프리카 미술품에서 왔다.
「아비뇽의 여인들」의 정면을 향한 얼굴에 그려진 측면의 코, 측면의 얼굴에서 정면을 응시하는 눈들은 강한 왜곡의 산물이다. 다섯 여인들 중에 어느 여인의 모습이 여러 시점에서 관찰된 것인가? 아프리카 흑인 미술인 가면의 강한 왜곡만이 이 여인들을 지배하고 있을 뿐 여러 시점의 산물은 없다. 납작하게 찌그러진 깡통표면 같은 바탕 위에 여인들의 모습이 돋보이며, 주제와 배경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 균질함을 특징으로 하는 후일의 입체주의의 새로운 화면이 아니다.
이 작품보다 일년이나 후에 그려진「나무 밑의 세 사람」(그림 9 참조)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피카소의 선은 아프리카 가면의 선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즉 이 작품은 입체주의적이 아니라 아프리카적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입체주의의 첫 작품이다. 왜냐하면 이 작품을 통해서 피카소는 시인 아폴리네르와 화가 브락크를 만났고, 이 작품을 시작점으로 그들이 상호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새로운 운동을 모색해 나갔기 때문이다. 또 이 작품의 크기가 예외적으로 컸다. 당시의 화가들은 습작처럼 그림을 그려나갔기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크게 그릴 필요가 없었다. 미술사의 이정표를 세운다면 이 244×234cm 크기의 작품이 적격이었다.
여하튼 이 회화운동이 1907년에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이것은 1907년 당시 그 지향점이나 목적지를 갖지 못하고서 출발했고,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어 나갈 지를 피카소도 브락크도 아폴리네르도 전혀 예견하지 못했다.
The Estaque, 1906 Georges Braque
그림 10. 조르쥬 브락크, 「보르도 해변」, 1906,
Georges Braque, 1908, Baigneuse (Le Grand Nu, Large Nude)
그림 11. 조르쥬 브락크, 「커다란 나신」, 1908, 140×110cm, 빠리, 알렉스 마기 콜렉션.
Houses at L'Estaque, Georges Braque
그림 12. 조르쥬 브락크, 「레스타크의 집」, 1908, 73×60cm, 베른, 미술관.
브락크와 큐비즘
피카소와 브락크는 뗄 수 없는 이름이다. 이 둘이 거의 공동작업을 하는 것처럼 서로를 의지하며 새로운 길을 개척했기 때문이다. 죠르쥬 브락크(Georges Braque, 1882~1963)는 르아브르 출신이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던 그는 1900년 파리에 왔으며,‘ 마티스와 드렝이 내 길을 열어 주었다’고 회고했을 만큼 야수파 미학에 심취해 있었다. 「보르도 해변」(그림 10 참조)은 강렬한 원색들로 그려진 야수파 작품에 속한다. 라 시오타와 레스타끄에서 보낸 1907년 여름까지도 그는 야수파 회화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러한 그의 작품세계를 변모시킨 것은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이었다. 브락크는 피카소의「아비뇽의 여인들」을 보고 그 해 겨울 동안「커다란 나신」(그림 11 참조)을 그려내어 피카소의 방향에 동의했다. 1907~08년 피카소와 브락크의 작품에서 대상의 왜곡된 형태는 화면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즉 대상물의 색채나 묘사, 선이 모두 강하며, 그것을 받쳐주는 배경과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다. 이 매우 강한 형상은 야수파적 혹은 표현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야수파적 입체주의 혹은 입체적 야수주의는 1908년을 통과하면서 모습이 바뀐다.
브락크는 1907년의 <가을 싸롱전>에 기획된 폴 세잔느의 회고전을 보고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의 작품은 화려하고 강렬한 색점에만 너무 의지하고 있지 않은가? 순간적이고 우연한 감정이 화면 전체를 좌우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야수파 화가들에 의한 색채의 폭발은 회화의 다른 중요한 측면을 잊게 하지 않았는가? 이러한 의문들은 세잔느가 빛과 색채를 발견했던 인상주의 미술에 대해 회의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상 브락크는 야수파 미술의 성과를 보존하면서, 세잔느처럼 그림 속에 질서를 추구하려했다.
그는 레스타끄에서 세잔느를 생각하며 일련의 풍경화들을 그렸다. 그는「레스타끄의 집」(그림 12 참조)에서 세잔느처럼 대상물들을 우선 황색계통의 집들과 녹색계통의 나무들로 대상을 확실히 구분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모든 대상을 가장 간략한 형태로 단순화시키고, 집들을 입방체로 표현했다. 1908년 11월 칸바일러 화랑에서 발표한 이 일련의 작품들을 평론가 루이 복셀이‘입방체들, cubes로 그린 그림’ 이라고 부르면서 큐비즘, 입방체주의라는 괴상한 이름이 탄생했다.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새로운 미술운동과 그 작품들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림 13. 조르쥬 브락크, 「항구」, 1909, 91×73cm, 후스톤, 미술관.
Georges Braque, 1909, La Roche-Guyon, le château (The Castle at Roche-Guyon), oil on canvas, 80 x 59.5 cm, Moderna Museet, Stockholm
그림 14. 조르쥬 브락크, 「라로쉬 기용의 성」, 1909, 81×60cm, 스톡홀름, 현대미술관.
Georges Braque, The Portuguese, 1911, oil on canvas, 116.8 x 81 cm
그림 15. 조르쥬 브락크, 「포루투갈인」, 1911~12, 117×81cm, 바젤, 미술관.
브락크는 대상을 관찰하지만, 그 관찰을 통해 대상의 외면적인 미를 찾아내지는 않는다. 그 대신 대상물에서 찾아낸 선, 질감, 부피 같은 조형요소들 자체에서, 또 그들의 배열에서 회화의 아름다움을 찾고자 했다. 그의「항구」(그림 13 참조)에는 공간이 거의 없다.
그는 대상을 모방하지 않고, 배와 건물에서 끌어낸 형태들과 선들, 질감을 이용하여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브락크의「라 로쉬 기용의 성」(그림 14 참조)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있다. 여기서는 더 간략한 입방체들이 수평선, 수직선, 사선 등의 선적인 구성으로, 또 보다 단순하고 완화된 색채로 정리되어 있음을 볼 수있다. 이 작품에서 새로운 공간이 탄생한다. 여기서 공간은 원근법이나 명암법을 사용해서 실제처럼 보이는 환영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건물들 간의 관계를 추리해 가면서, 이 마을의 도로나 건물들과 숲을 구별해 낼 수 있다. 그러나 전경에 있는 숲과 원경의 숲은 동일한 색조와 명도와 필치로 그려져 있고, 이 녹색의 변조로 화면은 편평하게 통일되어 있다.
전경의 숲은 건물들을 가리고 있어서, 원경의 숲이 건물들보다 앞으로 나오기도 하는데, 밝은 황색의 건물과 도로는 낮은 명도의 초록색 숲보다 전체적으로 튀어나와 보이기도 한다. 시각적으로 또 논리적으로 서로 얽혀 있는 작은 평면들은 결과적으로 환영적인 삼차원의 공간을 재현하지 않는다. 선들과 면들은 화면을 조화롭게 구성하고, 모자이크같이 편평한 공간을 만든다.
「라 로쉬 기용의 성」은 곧 1910~1911년의 분석적 입체주의의 시원이 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과 1911년의「포루투갈인」(그림 15 참조)은 모든 면에서 닮아 있다. 후자가 단색조이며, 더 평평하게 보이는 점 이외에 무엇이 다른가? 마티스의「모자 쓴 여인」(그림 2 참조)이라는 야수파적인 그림과 비교해보면, 브락크가 세잔느를 배워서 획득한 것이 질서라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Pablo Picasso Bather winter 1908-09
그림16. 파블로피카소,「 목욕하는 여인」, 1909, 뉴욕, 130×97cm, 버트람 스미스 콜렉션
Artwork by Pablo Picasso - 1909 Deux femmes nues,
그림 17. 파블로 피카소, 「두 누드」, 1909, 100×81cm, 개인소장
Woman with a Book, Pablo Picasso (Spanish, Malaga 1881–1973 Mougins,
그림 18. 파블로 피카소, 「책과 여인」, 1909, 92×73cm, 개인소장.
Pablo Picasso. Bust of a Woman (Fernande), 1909
그림 19. 파블로 피카소, 「여인 흉상」, 1909, 93×74cm, 히로시마 미술관.
분석적 입체주의
평면처럼 판판하고, 어느 곳에서 시작되는지도, 끝나는지도, 어디가 상대적으로 들어가고 나왔는지도 알 수 없는 이 새로운 화면의 추구와 조형요소들 자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전통적 회화의 세 요소 중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형태까지 해체시켰다. 여기까지 오기 위한 피카소와 브락크의 여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피카소가 1909년 봄에 제작한 네 점의 누드화를 보자.
우선 그의「목욕하는 여인」(그림 16 참조)에서 여체는 덩어리로 볼륨감이 있게 포착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두 누드」(그림 17 참조)에서 피카소는 인물들을 모두 납작하게 눌러 버리고, 색면들로 그렸다. 그리고 곧 이어서「책과 여인」(그림 18 참조)에서는 오징어포를 만들듯이 여인의 모습을 넓게 늘려 펴고 있다. 인체의 아름다움은 이제는 어디에도 없다. 그해 여름 피카소는 그의 첫 애인 페르디낭드, 「여인흉상」(그림 19 참조)을 그렸다. 초기 입체주의가 왜곡과 재구축을 시도하고 있다면, 그녀는 그 시도의 실명을 가진 첫 희생자인 셈이다.
피카소는 대상을 더욱 부숴나갔다.
1909년 여름 제작한「여인좌상」(그림 20 참조)에서 여인의 형상은 찾아내기조차 힘들 정도이다. 찌그러진 깡통 같은 머리와 목, 어깨선만을 구별해 낼 수 있다. 그리고 몸통부분이나 배경은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화면 전체를 균질하게 만드는 좋은 방법은 대상과 배경 모두를 잘게 부숴서 섞어버리는 방법이다. 그림의 대상과
배경이 구분되지 않는 점이야말로 1909년 이들 작품의 가장 특징적인 것이다. 불규칙한 색면들은 처리방법이나, 집중도, 밀도에 있어서 거의 동일하다. 또한 대상과 배경은 동일한 색으로 그려졌다.
Pablo Picasso, Femme Assise (1909).
그림 20. 파블로 피카소, 「여인 좌상」, 1909, 81×65cm, 개인소장.
Sacré-Coeur of Montmartre in Paris. Facts. Opening hours. Sacré-Coeur Basilica mass times. Sacré-Coeur metro.
그림 21. 싸크레-꾀르 성당
1900년 몽마르트르 언덕위에 싸크레-꾀르(聖心) 성당(그림 21 참조)이 완공되었다. 이 성당은 그 특징적인 첨탑 때문에 로마-비잔틴풍의‘다섯 개의 좌약’이라고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1909년 피카소와 브락크는 이 유명한 성당을 그렸다. 피카소의「싸크레 꾀르」(그림 22 참조)는 길고 짧은 선들로 구축된 그림이다. 우리는 이 그림이 성당이 멀리 보이는 어느 집의 창에서 본 조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건물들 사이로 구불구불 골목길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화면 위쪽에 있는 성당의 특징적인 첨탑을 통해서 이 그림이 몽마르트르 언덕을 그린 풍경화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에 있지 않다. 요점은 피카소가 공간과 대상의 실체감을 거의 표현하지 않으면서 작품을 제작해 내었다는 데에 있다. 이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그림에서 우리는 일종의 즐거움을 느낀다. 이러한 즐거움은 길고 짧은 선들의 적절한 짜임, 소박한 농담의 변화에서 나온다.
le sacre coeur picasso - Google Search Paris Painting, Coeur D'alene, Pablo
그림 22. 파블로 피카소, 「싸크레-꾀르」, 1910, 92×65cm, 빠리, 피카소 미술관.
Georges Braque - "Le Sacre Coeur" (1910)
그림 23. 조르쥬 브락크, 「싸크레-꾀르」, 1910, 55×41cm, 빌뇌브 다스크, 현대미술관.
Girl with Mandolin, 1910 Pablo Picasso
그림 24. 파블로 피카소,「 만돌린을 연주하는 여인」, 1910, 80×64cm, 개인소장.
Pablo Picasso. Woman with Mandolin, 1910 그림 25. 파블로 피카소, 「만돌린을 연주하는 여인」, 1910, 92×59cm, 쾰른, 루드비그 미술관.
Guitar player, 1910 - Pablo Picasso
그림 26. 조르쥬 브락크, 「연주하는 여인」, 1910, 100×73cm, 빠리, 뽕피두 미술관.
브락크도 동일한 소재를 그렸다. 그의 작품은(그림 23 참조) 주로 색면으로 그려졌다. 화면 상단의 특징적인 첨탑을 빼면, 이 작품 역시 무엇을 그렸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그림이다. 피카소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이 그림의 매력은 크고 작은 사각 면들의 적절한 짜임, 명암의 적절한 안배에 있다.
인물화에 있어서도 동일한 방식이 적용된다. 피카소의「만돌린을 연주하는 여인」(그림 24 참조)에서 여인의 모습은 겨우 보일 정도이다. 피카소의 관심은 곡선과 직선들의 적절한 조화, 명암의 안배에 있다.
또 다른「만돌린을 연주하는 여인」(그림 25 참조)에서는 아예 여인을 볼 수가 없다. 제목이 없다면 이것이 풍경화인지 정물화인지 인물화인지 조차도 알 수없다. 이런 분해의 작업은 점점 더 심해진다.
1910년 가을의 브락크의「연주하는 여인」(그림 26 참조)은 전혀 알아 볼 수는 없지만 연주자를 소재로 한 것이다. 화면 하단에 악기를 연상시키는 곡선과 소리구멍같은 것이 얼핏 보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무엇을 그렸는지를 아는 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의 관심이 이미 사실적 재현을 떠났기 때문이다.
기획 : 남경필 편집간사
대한토목학회
THE MAGAZINE OF THE KOREAN SOCIETY OF CIVIL ENGINE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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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s Braque, Femme a la guitare
https://en.wikipedia.org/wiki/Robert_Delaunay
https://en.wikipedia.org/wiki/Georges_Braque
pablo picas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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