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폴 세잔느와 그림의 깊이
Paul Cezanne and the Deeper Meanings of Paintings
오 병 욱 (Beung-Ouk Oh)
동국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 약 력 |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원 회화과
프랑스 파리 제8대학교 조형미술학과 박사
원광대학교 미술대학 부교수 역임
실패한 화가
흔히 세잔느를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부른다. 중고등학교 시절 그렇게 배웠는데, 누가 어디서 그런 표현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하튼 세잔느의 투박한 그림을 보고 도대체 왜 그런 찬사가 가능했는지를 그 당시에는 알 수 없었다. 그의 그림은 고갱의 것처럼 화려하지도, 반 고흐의 것처럼 격정적이지도 않았고, 덜 그린 듯 여백이 남아있는 것도 있었고, 네모난 필치는 서로 아귀가 맞지도 않아서, 초보자가 그린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2006년은 세잔느의 100주기가 되는 해이다.
그래서 그의 고향인 남부 프로방스 지방의 소도시 엑스 엉 프로방스에 있는 그라네 미술관에서는 그의 회고전이 열렸다. 그리고 그 전시의 기획자는 세잔느의 그림은 엑스에서 볼 때, 그 진가가 보인다고 했다.
왜? 남불의 햇빛과 건조한 기후, 환경이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엑스 출신으로 세잔느 보다 더 유명한 사람은 문필가 에밀 졸라이다. 그들은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함께 파리로 상경해서 각자의 분야를 개척하기도 했던 예술적 동지이기도 하다.
그런데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 <올렝피아>를 옹호하기도 했던 졸라는 친구 세잔느에게서는 재능도 총기도 발견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는 화가 클로드 랑티에를 주인공 삼아서 당시의 예술과 사회를 묘사한 소설 <작품, 1886>을 발표했다.
주인공 클로드는 빛의 표현을 통해 자연의 본질을
포착하려는 소위 인상파(외광파)의 주도적 화가였고,
소설가 상도즈, 비평가 조리, 화가 파주롤, 가르니에
등과 함께 새로운 예술을 개척해 나가는데, 클로드의
예술적 행보는 갈수록 미궁으로 빠져든다. 낙선을 거
듭하다 살롱전에 처음 입선한 작품이 사람들의 조롱
거리도 되지 못하는 것을 보고 클로드는 결국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온 대작을 앞에 두고 목을 맨다.
그림 1. 세잔느「자살자의 집」
이러한 줄거리의 소설을 읽은 세잔느는 실패한 화가 클로드가 자신을 모델로 한 것으로 판단했고, 죽마고우 졸라와 절교한다. 실제로 그는 인상주의자로 1874년 첫인상주의 전람회에 출품했고, 1876년 3회 전람회에 출품했는데, 모두 악평을 받아, 더 이상 그곳에조차 출품을 하고 있지 않은 상태였고, 1882년에는 살롱전에 입선한 적도 있었다. 1880년경부터 인상주의를 벗어나기 위한 독자적인 화풍을 암중모색하던 괴로운 시절에 졸라가 불을 지른 격이었다.
에두아르 마네를 용기 있게 옹호해서, 마네로부터 초상화까지 그려 받은 졸라에게 그림의 감식안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세잔느에게 화가의 길을 권한 당사자가 졸라였다. 다만 졸라의 미술감식안은 현실을 이상화시키거나 증폭시키지 않고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쿠르베식의 사실주의에 서 멈추어 있었다. 마네의 후기작들에서 원근법의 상실을 안타까워했던 만큼, 졸라는 인상주의와 또 인상주의를 넘어서고 있던 세잔의 작품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세잔느의 작품이 경쾌한 감각과 시원한 구도를 결여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가 인상주의 첫 전람회에 출품했던 <자살자의 집>이라는 풍경화(그림 1)를 보면, 인상주의자들의 빛나는 풍경이 아니다. 색채도 칙칙하고, 구도도 답답하다.
모네의 <일출>이나, 피사로의 <서리>, 시슬레의 <세느강>과 비교할 바가 되지 못한다(그림 2, 3, 4).
무딘 필치와 칙칙한 색은 그가 후일 “모네는 눈에 불과하다. 그러나 얼마나 놀라운 눈인가!” 라고 높게 평가했다는 것이 당연할 만큼, 세잔의 그림을 초보자의 것으로 보이게 한다.
모네가 눈이라면, 그는 무엇이라고 했겠는가? 그는 스스로를 인식, 생각, 사고라고 했다. 모네가 감성이라면, 자신은 이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모네가 눈으로 남고, 반 고흐가 그의 그림이 되었다면, 세잔느는 눈과 두뇌이면서 그의 그림이 되고자 하였다.
그림 2. 모네「일출
Hoarfrost (Gelée blanche) Camille Pissarro
그림 3. 피사로「서리
Painting entitled "La Seine a Suresnes" by Alfred Sisley (1839-1899), oil on canvas, 1877
그림 4. 시슬레「세느강」Alfred Sisley
눈으로 그리기와 머리로 그리기
인상주의자들에게도 재능 없는 화가로 여겨지던 세잔느는 그림이 빛과 색보다 더 중요한 무엇을 재현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인상주의 풍경화들은 대상위에서 散散이 부수어지는 빛의 조각들을 재현해내느라, 대상의 본모습을 제대로 재현하지 못했다. 그들은 대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쏟아진 빛의 껍질(?) 같은 것을 그렸다. 그들의 거친 화면은 색색이 영롱한 껍질이 되었다. 대상의 사실적 모습은 찾기 어려웠고, 예술이 그렇게도 탐구하던 진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가 남산을 그린다고 하자. 이젤을 세우고, 캔버스를 놓은 후, 우리는 산이 보여주는 윤곽선, 덩어리와 세부, 색깔 등등을 보고, 그것을 그대로 그린다.
그러나 아무리 그럴듯하게 그렸다 해도 이것은 남산의 실제 모습이 아니다. 우리가 그 그림을 들고 남산을 향해 다가가면, 우리가 보고 그린 남산은 이미 윤곽선도 덩어리도 색깔도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그것은 남산이라는 대상의 극히 찰나적인 순간에 불과한 것이고, 그렇다면 그림은 대상의 재현이라는 목표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 괴리. 보이는 것과있는 것의 차이를 어떻게 메워야 할 것인가?
모네의 <정원>(그림 5)에서 정물화를 볼 수 있다.
햇빛으로 가득한 정원의 일각에 놓인 테이블 위의 정물이다. 여기에서 무엇이 그려졌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네는 빛을 그리기 위해, 다양한 색을 가진 물건들을 가져다 놓았을 뿐이다. 빛과 그림자, 밝고 화려한 색들과 보라색 그림자를 잘 그려낼 수 있다면, 모네는 그 무엇이라도 그렸다. 모네가 드물게 그린 정물화와 세잔느가 그린 정물화를 비교해 보자.
모네의 <정물>(그림 6)의 과일들은 정말 먹음직하다. 포도와 청포도, 사과와 덜 익은 토마토들의 색채들이 화려한데, 빛이 들어 찬란하기까지 하다. 과육의 맛도 느껴질 정도로 풍부하다. 세잔느의 <정물>(그림 7)의 청색 화병과 벽, 몇 개의 과일들은 평평하고, 색도 그리 풍부하지 않다. 전혀 먹음직하지 않다.
그런데 모네의 정물화의 그 아름다운 과일들이 오른쪽 아래로 쏟아져 내릴 것 같다면, 세잔느의 과일들과 화병은 매우 안정되어 있다. 화면을 수직선과 수평선들이 내려 긋고 가로질러서 조용한 모습을 보여준다. 벽면에 언뜻 사선이 질러가서 적막을 깨기도 한다. 그리고 몇 개의 이러한 의외의 선들은 어느 물건에도 속해 있지 않은 것이다. 화면의 필요에 따라 세잔느가 꾸며낸 것이다. 그의 정물화에서 색채와 형태와 선은 자유롭다. 대상을 보이는 그대로 재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네가 눈의 대상에서 찾을 수 있는 모든 매력을 찾아내었다면, 세잔느는 머리를 사용해서 화면에 질서를 부여해나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네는 명암법을 사용하고 있지만 세잔느는 대상의 볼륨이 나타나지 않도록 명암법을 역으로 사용하고 있다.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 만나는 곳이 앞으로 튀어나와 보이는데, 세잔느는 밝은 부분과 밝은 부분을 만나게 하고, 어두운 부분은 어두운 부분과 만나게 해서 화병도 사과도 입체감이 없게 했다. 그 대신 색채들은 대상으로부터 자유스러워졌고, 그것들 자체들 사이의 조화를 만들고 있다. 현실은 현실, 그림은 그림이 된 것이다.
그림이 현실이 되는 듯 착각하고,현실이 그림에서 실현된 듯한 착각은 사라졌다.
세잔느는 가볍기만 한 인상주의 그림을 미술관의 그림처럼 견고하게 만들겠다고 했다. 미술관의 그림의 견고함이란 꽉 짜인 구도, 빈틈없는 구성, 질서와 위엄 같은 것이다.
"Le déjeuner Claude Monet 1868 / Claude Oscar Monet - The Luncheon (Monet's Garden At Argenteuil) 그림 5. 모네「정원」
Monet-Still-Life 그림 6. 모네「정물」
Le Vase Bleu Paul Cezanne
그림 7. 세잔느「정물」
오래 그리기
그림으로서 갖춰야 할 모든 덕목을 갖추면서, 그려진 대상의 색과 모양, 성질을 함께 표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남산의 본모습을 어떻게 그려내어야 할까?
세잔느는 이를 끈질긴 관찰과 대상과의 호흡을 통해서 이루려고 했다. 그는 한 점의 정물화를 100번 그렸고, 한 점의 인물화를 150번 그렸다. 여기서 한번 그린다는 의미는 화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리기 시작해서 한 번 쉴 때까지를 말한다. 30분을 한 번으로 잡으면, 3000분, 150시간, 6일 꼬박이다. 그동안 정물로 사용 되었던 양파, 사과, 배 등은 퇴색하고 부패해 갔다. 화면의 필요에 따라 그것들이 놓인 자리도 바뀌고, 화가의 위치 변화에 따라 테이블의 선도, 벽의 선도 조금씩 달라졌다. 오전에 그늘이었던 부분이 오후에는 밝은 부분이 되었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물들의 색도 달라보였다. 그는 끊임없이 반복해서 관찰함으로써 시각의 오차를 수정하여 실제에 가까운 선과 색을 찾아내었다. 시간에 따른 변화를 모두 그리면, 대상은 평평해지고, 색채도 단순해진다. 그리고 그림의 구성은 더욱 단단해진다.
인물화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그 유명한 <빨간 조끼의 소년>(그림 8)은 공간감이라고는 거의 없는 실내에, 볼륨이라고는 전혀 없는 소년이 앉아 있는 그림이다. 우선 유난히 긴 소년의 오른 팔이 눈에띈다. 그런데 그 비정상적인 크기는 오히려 화면의 안정감에 기여하고 있다. 소년이 기대고 있는 녹색 탁자, 탁자를 덮은 갈색 천, 탁자 위에 놓인 편지도 화면의 구성을 위해 필요한 꾸밈들이다. 소년의 무릎을 덮은 갈색 천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화면의 필요에 따른 장치이며, 화면을 가로지르는 벽의 띠나, 왼쪽의 어두운 커튼도 화면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장치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다시 소년을 부각시키는 데 이용된다. 세잔느가 그리고자하는 것이 질서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소년의 리얼리티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소년의 리얼리티를 재현하기 위해 고안한 소품들과 장치들은 다시 화면에 총체적인 안정감, 질서를 만든다.
현실의 리얼리티와 화면의 리얼리티가 이런 식으로 공존한다. <카드놀이 하는 남자들>(그림 9)은 세잔느가 카드에 열중한 주인공들을 그리고자 했는지, 화면의 질서를 그리고자 했는지를 판단하기 어려운 그림이다. 잠정적으로 세잔느가 이 두가지 목적을 모두 달성했다고 하자.
The Boy in the Red Vest 그림 8. 세잔느「빨간조끼의 소년」
The Card Players, Paul Cézanne 그림 9. 세잔느「카드놀이 하는 남자」
Mont Sainte-Victoire and the Viaduct of the Arc River Valley
그림 10. 세잔느「셍트 빅트와르 산」
경험을 그리기
세잔느는 1896년에 고향인 엑스 엉 프로방스에 돌아와서 작품에만 몰두하였다. 특히 그는 고향풍경을 많이 그렸다. 그는 엑스의 뒷산을 수없이 많이 그렸는데, 그 중 하나가 <셍트 빅트와르 산>(그림 10)이다.
그는 무시로 이 산을 드나들었고, 그때그때 달라 보이는 산을 그렸다. 그래서 인상주의자들과는 다른 풍경화를 그려내었다. 만약 같은 경치를 모네가 그렸다면, 한 시간이면 빛으로 가득한 풍경화를 그려내었을 것이다. 며칠에 걸쳐 그려졌을 세잔느의 이 풍경화는 한 순간의 장면이 아니다. 전경 언덕 비탈에 소나무가 몇 그루 있는 초가을 풍경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찾아낼 수 있다. 바위산을 향해 사선으로 난 길과 주변의 밀밭, 마을의 집들, 주변의 관목 숲, 원경에 농사를 짓기 위한 수로까지 매우 정확하게 그려놓았다. 멀리서 보면 그것이 집인지, 수로인지 알 수도 없겠지만, 그 길을 수시로 지나다녔던 세잔느는 그것들의 위치와 크기 색깔까지 있는 그대로 옮겨 놓았다. 그는 그가 본 것이 아니라,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는 것, 곧 그가 경험한 자연을 그린 것이다. 보는 것 그리기와 경험한 것 그리기는 이렇듯 매우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보는 만큼 경험하고, 경험한 만
큼 본다. 그리고 경험한 만큼 알고, 보고, 표현한다.
세잔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분명히 과거보다는 많이 알고 있다. 그런데 그 표현은 아직도 정말 어려워.”
“색채가 충실해질수록 대상이 진실하게 포착된다.”
“자연을 구형, 원통형, 원추형으로 축약시킬 수 있다.”
이 세 마디는 세잔느의 그림을 압축해서 표현한다.
불규칙하고 복잡한 자연물들을 이성적인 형태인 기하학적 도형으로 축소시켜서, 그것들로 화면을 구성하는 것, 그리고 그 사물들의 본질을 잘 나타내기 위해서, 사물들의 색채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그가 경험하고 잘 알고 있는 대상들만이 진실하게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대상의 본질과 작품의 본질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했다.
<샤토 느와르 1900-04>(그림 11)은 엑스와 르 토로네 사이에 있는 성이다. 짙은 녹음 사이로 보이는 황색 건축물은 단순화되어 있는데, 그것을 그려내는 필치는 매우 중첩되어 있다. 녹색에 조금 다른 녹색이 덮이고, 필치 위에 더 작거나 큰 필치들이 덮인다.
나뭇가지들은 수시로 다시 그려지고, 단순화되면서도 다시 가지를 뻗는다. 그는 그가 보고 있는 대상들의 순간순간을 계속해서 그려내고, 고치고 다시 그렸다. 세잔느의 그림은 엑스에서 볼 때 그 진가가 드러난다라는 말은, 그가 그려낸 것이 경험이라는 것, 자연풍경에 대한 경험을 보는 사람도 같이 느낄 때, 가장 감동적이라는 말이다. <샤토 느와르>는 세잔느가 그렸던 수많은 엑스 주변 풍경화의 하나이다. 세잔느와 같이 그의 그림과 같이 뜨겁고 건조한 엑스 주변을 돌아다닐 때, 그 감동은 극한에 도달할 것이다.
그림 11. 세잔느「샤토 느와르 1900-4」 Le-Chateau-Noir-Paul-Cézanne
그림 12. 세잔느「水浴」The Large Bathers of Paul Cezanne
그림의 깊이
어느 작품이 감동적이라고 할 때, 그 작품은 깊이가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얕은 표현은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리고 원근법이 무시되어 평평하고, 형태가 단순화되어 간략하다고 해도, 많은 체험과 추구한 흔적이 가득한 세잔느의 그림에는 깊이가 있다. 경험의 깊이라고 해도 좋고, 탐구의 깊이라고 해도 좋고, 창작의 고뇌의 깊이라고 해도 좋다. 여하튼 그 깊이는 원근법을 사용한 그림에서 보이는 공간의 깊이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水浴>(그림 12)에서 우리는 시각적인 깊이를 보지 못한다. 그러나 인체들과 나무기둥으로 이루어진 이 그림
의 기본 뼈대는 고전적인 질서와 균형, 대담한 형태의 축약이고, 이것들이 그만의 새로운 보편적 조형의 질서
라고할때, 우리는 그의 그림이 얕다고 할수 없다.
그는 말한다.
“ 회화에는 두가지 것이 필요하다. 즉 눈과 두뇌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도와야 한다. 이 둘의 상호적인 발전을 위해 화가는 노력하여야 한다.
눈은 자연에 대한 비전에 따르고, 두뇌는 표현 수단의 기초가 되는 조직된 감각의 이론에 따라야 한다.
양자가 각기 발전한 후 상호협조가 이루어져야 한다.
모네는 눈에 불과하다. 굉장하기는 하지만.”
세잔느에게 그림은 눈과 두되의 협력이고, 시각과 이성, 감각과 사유의 종합을 지향한다. 그리고 그는 회화 그 자체에 접근한다. <셍트 빅트와르 산>이나 [수욕]에서 우리는 리듬화된 필치, 형식, 절도, 비례, 긴장, 균형, 리듬이 그의 작품의 진정한 주제가 되어 있음을 본다. 그의 풍부한 체험과 함께. 이렇게 세잔느는 눈과 두뇌이면서 그의 그림이 되었다. 이것이 20세기 미술의 핵심이기도 한 것을 보면, 그가 현대 미술의 아버지인 것 같기도 하다.
기획 : 전석원 편집간사
대한토목학회
THE MAGAZINE OF THE KOREAN SOCIETY OF CIVIL ENGINEERS
=============================
Paul Cézanne - Montagne Sainte-Victoire
https://en.wikipedia.org/wiki/Paul_C%C3%A9zanne
https://en.wikipedia.org/wiki/Camille_Pissarro
https://en.wikipedia.org/wiki/Alfred_Sisley
https://en.wikipedia.org/wiki/Claude_Monet
'♣ 미술(美術) 마당 ♣ > - 화가[畵家]'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랑스]Théodore Chassériau[테오도르 샤세리오] (0) | 2019.02.19 |
---|---|
[노르웨이- 풍경화의 아버지] Johan Christian Dahl (0) | 2019.01.31 |
[스크랩] 피카소와 분석적 입체주의 Pablo Picasso and the Analytical Cubism (0) | 2018.11.16 |
[독일 화가]프란츠 빈터할터(Franz Xaver Winterhalter) (0) | 2017.11.24 |
[영국화가]윌리엄 호가스 [William Hogarth] (0) | 2017.0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