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歷史) 마당 ♣/< 일본 >

호겐의 난/ 헤이지의 난

Bawoo 2019. 1. 7. 22:49



호겐의 난
Hōgen no ran.jpg
호겐·헤이지의 난 합전도 병풍
교전국
고시라카와 천황
후지와라노 다다미치
스토쿠 상황
후지와라노 요리나가
지휘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
미나모토노 요리마사
미나모토노 요시야스
미나모토노 시게나리
다이라노 기요모리
다이라노 시게모리
미나모토노 다메요시
미나모토노 다메토모
다이라노 다다마사

호겐의 난(일본어: 保元の乱)은 일본 헤이안 시대 1156년(호겐 원년) 7월에 황위승계문제와 셋칸케(摂関家)의 내분으로 조정이 고시라카와 천황파와 스토쿠 상황파로 분열되어 교토에서 두 세력이 무력충돌에까지 이르게 된 정변이다.

고시라카와 천황이 즉위할 무렵에 귀족, 무가 등이 천황 지지세력과 스토쿠 상황 지지세력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7월에 천황파가 선제 공격하자, 상황파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응전하였다. 일진일퇴의 치열한 접전 끝에 천황파의 승리로 끝나고 스토쿠 상황은 유배되었으며, 상황파 주요 인물들은 사가 천황의 치세 이후 347년 만에 최초로 처형되었다.

원인

당시 일본은 천황상황 간의 대립이 심했다. 당시 천황은 고시라카와 천황이었고, 상황은 스토쿠 상황이었다. 스토쿠 천황이 천황 자리에 있었을 때는 잠잠했었지만 스토쿠 천황이 상황이 되면서도 권력을 놓지 않자, 고시라카와 천황의 분노는 폭발하고 말았다. 천황 가문이 권력다툼으로 서로 분열되자 최고 전통 귀족이며 셋칸 지위를 독점해 오던 후지와라 가문도 천황, 상황 지지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후지와라 가문은 원래 셋칸(攝關) 자리와 가문 계승 문제를 두고 형제가 다투다가 덴노 가의 싸움을 계기로 완전히 두 패로 갈라섰다. 덴노 가문은 덴노 가문대로, 후지와라 가문은 후지와라 가문대로 '현실의 힘' 인 무사 계급에게 서로 지원을 요청했고 부시 가문의 양대세력인 미나모토(源) 가문, 다이라(平) 가문에 손을 뻗었다. 이 와중에 부시 가문인 겐지(源氏) 가문헤이시(平氏) 가문도 분열되어 일본의 지배계층은 완전히 두 갈래로 갈라지고 말았다.

경과

1156년 7월 천황파가 선제공격하자, 상황파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응전하였다. 헤이지, 겐지 가문은 두 패로 갈라져 치열한 전투를 벌여 결국 천황파가 승리를 거두었다.

결과

스토쿠 상황은 유배되고, 그를 도와 전쟁에 참여했던 패전 부시들은 모조리 처형되고 말았다. 참전한 것은 오직 부시계급이었던 만큼 전쟁에 져 전사한 것도 전쟁에 이겨 최고의 공신이 된 가문도 겐지와 헤이지 가문이었다.

===============================================================


.

헤이지의 난
Heiji no ran.jpg
교전국
천황파
(니조 천황)
상황파
(고시라카와 상황)
지휘관
다이라노 기요모리미나모토노 요시토모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은 일본 헤이안 시대 1159년 천황파와 상황파가 교토에서 벌인 내전이다.

호겐의 난 이후 고시라카와 천황은 그 자신이 황위를 니조 천황에게 물려주고 상황이 됨으로써 귀족, 무가 등은 또다시 고시라카와 상황 지지세력과 니조 천황 지지세력으로 재분리되었다. 12월에 상황파가 선제공격했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천황파도 즉시 이에 맞섰다. 일진일퇴의 치열한 접전 끝에 천황파의 승리로 끝나고, 고시라카와 상황은 유배되었다. 그리고 천황파를 대표하는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가 막부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무가정권을 세웠다.

전개

호겐의 난에서 승리한 고시라카와 천황은 1158년(호겐 3년)에 퇴위하여 인세이(院政-현 천황이 천황의 자리를 후계자에게 물려주고 院에 들어가 정치를 하는 것으로 실권은 그대로 유지하는 섭정형태)를 시작했으나 그 사이에 인노긴신(院近臣-인에서 정치하는 상황(上皇)을 보필하는 측근)과 무사(武士)사이에 권력투쟁이 격화되어 갔다.

측근 신하인 신제이(信西)와 후지와라노 노부요리(藤原信頼)사 이의 권력투쟁이 극에 달하여 신제이가 노부요리의 근위대장 취임을 저지하는 단계에 이르자 양측의 투쟁은 심각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무사계급의 중요인물 중 다이라노 기요모리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는 상호 경쟁하며 중앙정계에 진출하려 하였으나 호겐의 난에서 최고의 무훈을 올린 요시토모는 난 이후의 논공행상에서 기요모리가 자신보다 높은 관작을 수여받은 것에 불만을 품게되어 양자의 반목은 첨예하게 되었다. 요시토모는 처음에는 노부니시에게 접근하려 하였으나 기요모리가 선수를 쳐서 노부니시와 결탁하여 세력을 확장시키자 노부요리와 제휴하게되어 여기에서 신제이·기요모리와 노부요리·요시토모의 2개의 정치세력이 대립하는 상황이 변한다.

1159년(헤이지 1년)12월 노부요리·요시토모는 기요모리가 구마노 지역에 신사참배에 나간 사이에 거병을 하여 고시라카와 상황과 니조 천황을 유폐시키고 신제이의 저택을 불태우고 신제이를 자결시킨다 노부요리는 일시적으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나 급거 귀경한 기요모리는 고시라카와 상황과 니조 천황을 구출함과 동시에 노부요리가 점거하고 있던 궁성을 공격하여 격전끝에 요시토모군을 격파하였다.

노부요리는 고시라카와 상황에 구명을 요청하나 거절당하고 참수되고, 요시토모는 동쪽으로 피신하나 결국 요시토모의 장남 가마쿠라 아쿠겐타와 함께 처형되고 삼남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후일 가마쿠라 막부를 세움)는 이즈 국으로 유배된다. 이 헤이지의 난 결과, 요리토모 집안인 가와치 겐지는 몰락하고 기요모리 집안인 헤이케(이세 헤이시)가 중앙정계에서 거의 유일의 세도 무사(武士)가문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고 그 후 헤이케의 급격한 정계진출이 시작된다.


출처: 정보-책 /수집-위키 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