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1561년 ~ 1619년)는 센고쿠 시대 말기에서 에도 시대 초기의 성리학자이다. 이름은 슈쿠(肅). 자는 렌부(斂夫)이다. 가명(家名)인 레이제이(冷泉) 대신 중국식으로 본성(本姓)인 후지와라(藤原)와 그것을 줄인 글자인 도(籐)를 공식 이름에 사용하였다. 승려로 있을 때에는 순수좌(舜首座)라고 불렸다.
에이로쿠(永祿) 4년(1561년), 구게(公家) 레이제이 다메즈미(冷泉爲純)의 셋째 아들로서 시타레이제이케(下冷泉家) 소유의 영지였던 하리마 국(播磨國) 미키 군(三木郡) 이사카와(細川) 장원(지금의 효고현 미키 시)에서 태어났다.
장남은 아니었던 그는 일찍 교토로 가서 상국사(相國寺)에 들어가 선승(禪僧)이 되어 주자학(朱子學)을 공부하였다. 유학을 배우러 사쓰마 국에서 명(明)에 건너가려고 시도했지만 갑자기 병을 얻는 바람에 실패로 끝나고, 그 뒤 조선(朝鮮)의 유학자 강항(姜沆)과의 교류를 통해[1], 그때까지 교토의 산승들 사이에서 교양의 일부이기도 했던 유학을 체계화하여 경학파(京學派)로서 확립한다. 그의 학풍은 주자학을 기조로 하면서도 양명학(陽明學)도 수용하는 등 포용 분야가 넓은 것이 특징이다.
후지와라 세이카는 근세 일본 유학의 시조로 여겨지고 있으며, 문하의 제자 가운데서도 특히 하야시 라잔(林羅山) · 나와 갓쇼(那波活所) · 마쓰나가 세키고(松永尺五) · 호리 교안(堀杏庵) 등의 네 사람이 특히 뛰어났고 이들을 가리켜 세이분(惺門) 사천왕이라 칭할 정도였다. 와카(和歌)나 일본의 고전에도 능통하여 그 시대의 가인(歌人) 기노시타 죠쇼시(木下長嘯子)와도 교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게도 인정받아 그들에게 유학을 강의하기도 하고, 이에야스로부터 관직 출사를 요청받지만 사퇴하고 대신 제자 라잔을 추천하였다.
주요 저서로 『촌철록(寸鉄録)』, 『치요모토구사(千代もと草)』, 『문장달덕강령(文章達徳綱領)』이 있다.
또한, 그의 본가인 시타레이제이케가 하리마에서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 벳쇼 씨(別所氏)의 공격으로 멸망하자 아우 다메마사(爲將)를 새로운 당주로 옹립하여 시타레이제이케의 재흥에 힘썼다. 자신은 시타레이제이케의 당주의 자리에 있지 않았지만, 아들인 다메카게(爲景)는 이후 시타레이제이케의 당주가 되었다.
겐나(元和) 5년(1619년)에 사망한다. 향년 59세였다.
강항의 《간양록》에는 후지와라 세이카에 대해 "두뇌가 총명하여 고문(古文)을 익히 다룰 줄 아는 사람으로 어느 책이나 모르는 것이 없고 성품은 아주 꿋꿋해서 그들 측에서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고 평하고 있다.
[문하 제자]
1561년 ~ 1619년
센고쿠 시대 후반기에서 에도 시대 초반기의 성리학자. 일본 최초의 성리학자라고 할수 있다.
오기마치 덴노 4년(1561년), 구게(公家) 레이제이 다메즈미(冷泉爲純)의 셋째 아들로서 하리마 국(播磨國) 미키 군(三木郡) 이사카와 장원(지금의 효고현 미키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교토로 가서 쇼토쿠지(相國寺)에 들어가 선승(禪僧)이 되어 유교(儒敎)를 공부하였다. 그리고 명나라에 유학가려고 시도했지만 갑자기 병을 얻는 바람에 실패로 끝나고, 그 뒤 임진왜란 때 포로로 붙잡혀온 조선의 유학자 강항과의 교류를 통해, 그때까지 교토의 승려들 사이에서 교양의 일부이기도 했던 유학을 체계화하는데 성공하였다. 그의 학풍은 성리학을 기조로 하면서도 양명학(陽明學)도 수용하는 등 포용 분야가 넓은 것이 특징이다.
성리학이 일본에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하기 전 독학으로 성리학을 공부하였으나[1] 일본인이 중국의 언어인 한자를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어려웠고, 애초에 성리학 자체가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인 측면이 강한 학문이었기 때문에 그는 강항을 만나기 전까지 성리학의 해석에 굉장한 집착을 보였다. 1590년에 조선 통신사로 온 황윤길, 김성일 등과 교토에서 교류하며 주자학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졌고 159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초청되어 에도에서 정관정요를 강의했다고 한다.
묘주인(妙壽院)의 승려로 있을 때 강항을 만났고, 그래서 그는 강항을 만나자 유학자로서 궁금했던 질문을 쏟아내는데 간양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신에게 우리 나라의 과거 보는 절차 및 춘추 석전(釋奠)과 경연, 조정 등의 절목을 묻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초야의 사람이라 미처 참석하여 듣지 못했다' 라고 하였고, 단지 과거, 석전 등의 대개를 알려주었더니, 중은 매양 실심하여 길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애석하게도 내가 중국에서 나지 못하고 또 조선에서 나지 못하고 일본에서도 이런 시대에 태어났단 말인가'[2]
이런 상황으로만 보더라도 성리학에 대한 그의 집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강항의 존재는 세이카에게 거의 구세주 급. 이 때, 강항의 나이 32세였고, 세이카는 38세였다. 그가 유학자가 되면서 승적을 벗고 이름을 슈쿠(肅), 자는 렌부(斂夫), 호를 세이카(惺窩)[3]로 바꾸었다.
또한 강항과 조선 선비 포로들에게 주자학을 이해할 수 있게 육경를 써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은전(銀錢)을 주어 객지의 생활비에 보조하게 하였다. 이들이 저서한 것은 주자의 주석에 따라 일본식의 해석본을 표시한 사서오경 일본어판이었다.
세이카는 강항의 가르침에 보답하기 위해 임진왜란 때 강항을 끌고온 다이묘를 설득하여 훗날 강항이 조선 귀국 허락을 받아내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성리학자다운 의리가 아닐 수 없다.
세이카는 강항과 헤어진 뒤에도 홀로 성리학을 연구하여 후학을 양성하는데 이는 일본 주자학에 큰 기틀을 마련한다. 그의 제자 중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년 ~ 1657년)이 160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강(侍講)이 된 후 도쿠가와 이에츠나에 이르기까지 도쿠가와 막부의 시강이 되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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