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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러파, 친미파, 개화파 대 친일파 간의 무력 충돌 사건] 춘생문 사건(春生門 事件

Bawoo 2019. 1. 30. 21:59



춘생문 사건(春生門 事件)은 1895년 11월한성부에서 발생한 친러파, 친미파, 개화파 대 친일파 간의 무력 충돌 사건이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친일세력에 의해 감금되다시피한 고종을 친미파 및 친러파, 개화파가 계파를 초월하여 협력, 왕궁 밖으로 탈출시키고자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 사건 관련자들은 대부분 처형당했으며 윤웅렬은 기적적으로 상하이로 도피한다.


춘생문의 위치

춘생문은 현재 청와대 춘추관의 위치, 즉 경복궁의 북동쪽 신무문 밖의 후원 동쪽의 문이었다.[1]

사건의 전개

김홍집 내각의 반대파가 주동하고, 을미사변 때 외국공관으로 피신한 인사들, 그리고 언더우드, 에비슨, 헐버트 등 미국선교사, 또 주조선 미국 공사 알렌과 주조선 러시아 공사 웨베르 등도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다. 또한 경무사 윤웅렬 등도 여기에 협조하였다.

11월 28일 이도철과 이민굉은 동별궁에서 칙령을 칭해 남만리· 이규홍 양중대장에게 800병의 군사들을 따르게 하여 안국동을 경유하여 건춘문으로 문을 열고 궁으로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문을 열수가 없어 궁궐 담을 끼고 삼청동으로 올라가 북장문과 춘생문에서 담을 넘어 입궐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중추원 의관 안경수가 변절하여 외부대신 김윤식에게 밀고하였고, 친위대대장 이진호도 서리군부대신 어윤중에게 밀고로 하여 궁은 숙위병에게 더 철저히 호위되어 성공하지 못했다. 어윤중도 현장에 나타나 동원된 군사들에게 중지를 설득하였다. 동원된 군사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군사 수십명과 이도철이 체포되었다. 이로 인하여 핵심 주모자들은 역모죄로 목숨을 잃었다.[2] 윤웅렬함경도의 북병영과 남병영의 병력들까지 동원했으나 사태가 실패하자 원두우의 집에 피신하였다. 그 뒤로 변복하고 중국으로 도피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가 1896년에 조선의 인천항으로 귀국했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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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을미사변 이후 친일정권에 포위되어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던 국왕 고종을 궁 밖으로 나오게 하여 친일정권을 타도하고 새 정권을 수립하려고 했던 사건이다.


경과

시종원경(侍從院卿) 이재순(李載純), 시종(侍從) 임최수(林最洙), 탁지부사계국장(度支部司計局長) 김재풍(金在豐), 참령(參領) 이도철(李道徹), 정위(正尉) 이민굉(李敏宏), 전의원(前議員) 이충구(李忠求),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안경수(安駉壽) 등이 합작, 모의하였다.

여기에 정동파(貞洞派) 관료 이범진(李範瑨)·이윤용(李允用)·이완용(李完用)·윤웅렬(尹雄烈)윤치호(尹致昊)·이하영(李夏榮)·민상호(閔商鎬)·현흥택(玄興澤) 등이 호응하였다. 또 친위대 제1대대 소속 중대장 남만리(南萬里)와 제2대대 소속 중대장 이규홍(李奎泓) 이하 수십명의 장교가 가담하였다.

언더우드(Underwood, H. G.)·에비슨(Avison, O. R.)·헐버트(Hulbert, H. B.)·다이(Dye, W. Mc) 등 미국인 선교사와 교사 및 교관, 그리고 미국공사관 서기관 알렌(Allen, H. N.), 러시아공사 베베르(Veber, K. I.)와 같은 구미외교관도 이 사건에 직접·간접으로 관련되어 있었다.

1895년 11월 28일 새벽에 남만리와 이규홍 등의 중대장은 800명의 군인을 인솔, 안국동을 경유해 건춘문(建春門)에 이르러 입궐을 기도하였다. 뜻대로 안 되자 삼청동으로 올라가 춘생문에 이르러 담을 넘어 입궐하려 하였다. 그런데 이 계획에 협력하기로 약속했던 친위대 대대장 이진호(李軫鎬)가 배신해 미리 서리군부대신 어윤중(魚允中)에게 밀고하였다.

그리하여 쿠데타군이 춘생문에 나타나자 궁성 내의 친위부대가 즉각 반격을 가하고 또 어윤중이 직접 현장에 달려와 선무공작을 폄으로써 일부 쿠데타군이 체포되고 나머지는 도주하였다.


결과

이 사건으로 체포된 임최수·이도철은 사형, 이민굉·이충구 등은 종신유배형, 이재순·안경수·김재풍·남만리 등은 태(笞) 100, 징역 3년 등의 처벌을 각각 받았다.

한편, 거사가 실패하자 정동파 인사들은 재빨리 미국 및 러시아 공사관 또는 선교사 집으로 피신하였다. 일본측은 이 ‘국왕탈취사건’에 서양인이 직접·간접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대서특필하였다.

그리고 이를 기화로 히로시마(廣島)감옥에 수감 중이던 을미사변 관련 주모자들을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전원 석방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의 주동세력인 정동파는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俄館播遷)을 성사시켜 일시적이나마 일본세력을 물러나게 하였다.


참고문헌

  •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 『윤치호일기(尹致昊日記)』
  • 『한국사강좌(韓國史講座)-근대편(近代篇)-』(이광린, 일조각, 1982)
  • 『관보(官報)』
  • 『日本外交文書』
  • Korean-American Relations Vol.Ⅱ-Documents Pertaining to the Far Eastern Diplomacy of the United States The Preiod of Growing Influense 1887∼1895-(Palmer, S. J.,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보- 책 87쪽: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살해한 '을미사변'에 면죄부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