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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만주 지역 조선 독립군을 조선인으로 토벌하기 위하여 만든 군대] 간도특설대(일본어: 間島特設隊 간토 토쿠세스부타이[*]

Bawoo 2019. 7. 10. 23:27



간도특설대

 

1. 소개

일본어 : 間島特設隊(かんとうとくせつた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만주군 육군 소속이었던 군사 조직. 이제는 말할 수 있다-만주의 친일파 편
오마이뉴스 기자 정운현 씨의 관련글 참조

일제"조선인 독립군은 조선인으로 잡아야 한다"이이제이 전략에 따라, 만주에서 활동하는 항일 조직을 토벌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정규부대를 상대하는 게 아니라, 민간인으로 구성된 항일독립군과 항일조직을 소탕, 체포, 와해하기 위한 목적의 부대였다. 부대장은 일본인이었으나 그 외 장교들은 조선인들이 많았고, 병사들은 전원 친일 조선인으로 구성된 지원병이었다. 부대원들은 인간도 아니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철저하고 잔혹한 토벌을 실시해서 일제로부터 많은 훈포장을 받았기에 여기에 몸을 담았다는 것으로 민족반역자임을 판단할 수 있는 상징적인 조직으로 여겨 일단 여기에서 복역했으면 장교는 물론 부사관, 사병까지 전원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되어 있다. 징병이나 학병 등 이런저런 상황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일제를 위해 싸우게 된 다른 부대의 조선인들과 달리 간도특설대는 사병, 장교 가릴 것 없이 이 부대에 소속되었다는 것 자체가 명백한 자발적 친일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1]

1938년도에 관동군 간도특무기관장 오코시 노부오 육군중좌의 통제 아래 창설되었으며, 본격적인 활동은 1939년부터 시작되었다. 주로 만주 동쪽에서 활동하다가 1943년 말에 러허성으로 이동해 팔로군을 비롯한 항일부대 토벌 작전에 투입됐고, 나중에는 철석부대[2] 산하로 편입되면서 독립보병대대로 개편되었다. 이후 일제가 패망해 상급 지휘부와 통신이 두절되었음에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여전히 임무를 수행하다가 팔로군으로부터 패망 소식을 듣고서야 랴오닝성 진저우로 철수한 뒤 부대를 해산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해산한 이후에도 일부 병력은 조선인 선임장교의 지휘 아래 펑톈으로 이동하는 등 끝까지 일제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않았다. 1945년 8월 소련의 대일 참전이 시작되면서 패색이 짙어지자 조선인이 포함된 많은 부대에서 일본인 장교를 프래깅하는 등 반란과 독자 행동이 속출했지만, 간도 특설대만큼은 예외였다.파일:attachment/매일신보_간도특설대.jpg매일신보_간도특설대
1938년 10월 12일자 매일신보.# 간도 특설대 설립과 대원 모집을 알리는 기사.
덤으로, 그 왼쪽에 실린 기사의 "성대"는 경성제국대학을 의미한다.

간도 특설대의 전투교리는 게릴라전에 치중되어 있었는데, 이는 간도에서 동북항일연군, 팔로군 등 조선인과 중국인이 연계한 반일-반만주국 투쟁이 게릴라전 위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똑같은 방식으로 대항하기 위함이었다. 일부 상위 장교를 제외한 대다수의 일선 전투원은 조선인이었는데, 이 또한 일제가 고의로 이렇게 구성한 것이다. 그리고 이걸 제안한 사람은 중추원 참의직까지 지냈던 이범익이었다.#

광복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이 무산되면서, 간도 특설대 출신자들 중 상당수는 이전의 실전 경험을 십분 활용해 국군해병대육군의 지휘부로 자리잡았다. 이들은 이후에도 지금까지도 민족반역자라기보다는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3]

간도 특설대는 1944년 무렵에 치열하게 전투가 전개되었던 열하성으로 그 활동 무대를 옮겼다. 열하성에서의 전투능력을 인정받아 하북성으로 그 활동 영역을 넓혔다. 따라서 1944년 이후부터는 '간도특설대'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간도를 벗어나 중국 본토로 부대 이동했고 관동군 산하로 편입되어 산해관 지역으로 그 활동 무대를 넓혀 중국 팔로군과 항일세력 토벌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현재까지도 조선족 가운데 일제강점기를 직접 겪은 고령의 노인들은 간도 특설대라는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 정도라고 한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인민해방군으로 참전한 조선족 사이에서는 "남한으로 도망친 친일반민족행위자 놈들 잡으려고 자원입대했다.", "정일권, 김석범, 김일로 잡으러 가자."는 증언도 나왔다.[4]
시대의 자랑, 만주의 번영 위한
징병제의 선구자 조선의 건아들아
선구자의 사명을 안고
우리는 나섰다 나도 나섰다
건군은 짦아도
전투에서 용맹 떨쳐
대화혼(大和魂)[5]이 우리를 고무시킨다
천황의 뜻을 따르는 특설부대
천황은 특설부대를 사랑하네
- 간도 특설대가 -

2. 창설 및 활동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를 비롯한 연변 쪽 자료에 의하면 간도 특설대를 창설하자는 아이디어는 만주국 간도성 성장 이범익이 생각하였다고 한다. 일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일본군의 치안 환경에 맞추어 조선인 청년을 징모해 항일연군을 토벌하자는 특설부대 창설을 조선총독부에 주동적으로 건의하였고, 일제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창설을 결정하였다. 이 내용은 연변 쪽 자료에만 나오고 중국 쪽 자료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일단 관동군 간도특무기관장 오코시 노부오 중좌의 통제로 창설되었다는 것은 확실한데, 이범익이 기여했다는 부분은 그가 조선인이었기 때문에 차별을 받아 무시된 것인지, 아니면 그냥 이범익이 거짓 주장을 한 것인지 확실치 않다.

간도 특설대의 자세한 역사는 다음과 같다. 안투 현 치안대, 훈춘 국경감시대, 옌지 청년훈련소, 펑톈 만주군관학교, 기타 몇몇 만주군 부대에서 일본인과 조선인 장교를 특설부대 창설요원으로 뽑아 밍위에거우에서 본격적인 준비작업에 들어갔으며, 1938년 9월 15일 만주국 치안부 산하 부대로 창설이 결정돼 그 해 12월 14일에 지원병 1기생 입대식이 거행되었고, 1939년 3월 1일 창설식을 갖고 열병식을 가졌다.

1기생의 경우 모집인원은 228명[6]으로, 지원조건은 만 18세 이상 20세 미만 간도성 내 거주 조선인 남성 중 보통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과 일본어가 통하는 자로 제한되었다. 복무연한은 3년.

1938년 10월 25일 만주 각지에서 탄생 축하회가 열렸는데, 만주국군 비행대 소속 비행기가 간도성 내 각지 상공을 돌며 기념 비행까지 선보일 정도로 성대한 축하회였다. 1940년 1월에 2기생을 모집했을 때에는 조건이 보다 강화되어, 기본적인 사항은 1기 때와 같으나 나이가 만 20세 이상 22세 미만으로 상향되었으며, 형벌을 받은 일이 없고 군인이나 경찰의 전력이 없는 자로서 신원 보증을 위해 보증인 두 명 이상을 내세울 것이 요구되었다. 이후 일제 패망까지 7기에 걸쳐 병사를 징모했다. 전원이 지원병인 것은 1, 2기 뿐으로, 3기부터는 만주국 전체에서 징병제가 실시됨에 따라 병사는 대다수가 징집병으로 채워졌다.

부사관과 사병은 전원 조선인이었으며 장교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섞여 있었다. 1940년 1월 기준으로 일본인 부대장을 뺀 나머지 장교가 조선인, 일본인 각 일곱 명씩이었다.

창설 때는 본부에 부관, 군수, 의무 3실과 1개 보병련, 1개 기박련[7]의 2개 중대로 편성되었다. 보병련과 기박련에는 각각 3개와 2개의 내무반을 두었다. 중대 격인 연 밑으로 각각 소대와 분대 격인 배와 반이 있었다. 정예부대라 해서 기관총도 일본제 기관총이 아니라 무고장기관총을 받았다고 한다.

훈련과정은 4개월 가량으로, 2기 지원병이 훈련을 끝낼 무렵인 1940년 12월에 1개 보병련을 신설함에 따라 보병 1, 2중대와 기박련으로 이뤄진 대대급 부대가 되었다. 통계마다 사소한 차이가 있으나 평균적으로 300여 명의 병력을 유지했으며, 전체 입대자의 숫자는 2,100명에 이른다. 당시 만주군의 장교를 키우는 군관학교의 교육과정에는 "비적 토벌"[8]작전이라는 진짜 실전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간도 특설대 역시 훈련 중에도 독립군 토벌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로 현지 부대에 위탁배속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서도 “반도인 특설부대는 아직 제1기 교육도 끝마치지 않았지만 김일성, 최현 등 군소 비적 토벌을 위해 산악과 밀림 속으로 돌진했다”고 나온다.

관할 관구 사령부는 창설 당시에는 만주국 치안부 지린 주둔군 2군관구 사령부 관할이었다가 1939년 초부터 1943년 말까지는 무단장 제 6군관구 산하로 들어갔다. 부대가 1944년 1월 러허성으로 이동배치된 후에는 무단장 제 6군관구과 칭더 제5군관구 시령부의 지휘도 받았다. 부대장은 줄곧 일본인 장교가 맡았고 계급은 만주군 소좌나 중좌였다. 초대 부대장은 소메카와 가즈오였고, 후임 부대장은 와타나베 스테고로, 소노베 이치지로, 사사키 고로, 하시모토 기요시, 시바타 기요시, 후지이 요시마사 순이였으며 다른 일본군 부대와 마찬가지로 부대장 이름을 딴 소메카와 부대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최후에는 후지이 유격대 또는 지원보병대라는 명칭으로 통했다.

창설 목적에 맞게 임무는 항일, 항만주 세력에 대한 토벌이 주 목적이었고, 연변지역을 중심으로 한 독립군 부대인 동북항일연군이 주 타격대상이었다. 열하성, 하북성 등지까지 활동반경을 넓히게 되면서는 팔로군과의 교전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전투보다는 항일세력을 색출한다는 이유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살상, 강간, 약탈한 것으로 더 악명이 높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간도 특설대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하며, 이외에도 수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포로가 되거나 강간, 약탈,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 조선족 작가 고 류연산의 저서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 등에 기록된 대표적인 만행은 다음과 같다. 일단 김춘선 연변대 역사민족연구소장이 국사편찬위원회에 제공한 중국측 사료집의 머리말에서 언급하였듯 본 자료의 1차적 목적은 자료의 대집성이었기 때문에 "본 자료집에 수록된 구비문헌자료들의 진실성과 사료적 가치에 대해서는 금후 진일보 검토되어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는 점을 감안하고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
  • 1939년 5월 일본수비대와 함께 안도현 서북차에서 야간 토벌을 진행하던 중, 산나물을 뜯던 인근 마을의 민간인을 체포해 살해한 뒤 시신을 불에 태웠다.
  • 1939년 7월 1일 천보산 광산이 항일연군의 습격을 받자 도문 일본군 수비대와 함께 출동해 천보산에서 교전을 벌인 뒤, 충혼비에 제를 지낸다는 명목으로 항일연군 전사자들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 빈 통조림통에 넣었다. 통을 운반하던 민간인 부역자가 그냥 통조림인 줄 알고 허기를 달래기 위해 훔쳐 먹으려고 했는데 생고기인지라 버렸다고 한다.
  • 1941년 겨울 안도, 돈화, 화전 등 3개 현에 대한 토벌을 진행하던 중 위장한 항일군 2명을 체포했다. 한 명은 탈출했다가 도목구 인근에서 다시 붙잡혔는데, 부관이었던 중위가 부대를 명월구 공동묘지 앞에 집합시킨 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군도로 그를 참수하고 시체 옆에서 목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 1941년 1월 안도현 대전자에서 동쪽으로 약 30리 떨어진 산림에서 붙잡힌 항일연군 여성 4명을 압송하던 도중 강간을 시도하다가 저항하자 살해했다.
  • 1942년 8월 차조구에서 정보를 수집하던 중 논밭에서 일하던 농민 두 사람을 불심검문했는데 양민증을 갖고 있지 않자 폭행한 후 체포했다.
  • 1944년 음력 7월 27일, 특설부대는 현지경찰과 합동으로 미윈 현 황거좡에 가 ‘식량 징수’(실제로는 식량강탈)를 하며 21명의 백성을 체포했다. 그중 한 농회 주임은 한달 동안 구금된 뒤 살해됐다.
  • 1944년 9월, 특설부대가 스샤 진에서 30리 떨어진 곳에서 몽골 기병과 연합해 팔로군을 토벌 했으며, 쌍방 교전중 특설부대가 참패 했다. 특설부대는 돌아오는 길에 스샤 진 서쪽 20리 되는 부락에서 농가 20호에 불을 지르는 보복을 했다. 또 두명의 백성을 붙잡아 일본인 소노모토 유이치가 군도로 찔러 죽였다.
  • 1944년 11월 5일 화이러우현 다슈이위(현재 베이징시 소속)에 주둔하던 만주군이 현성에 가 식량 운반을 하던 도중 팔로군의 습격을 받아 트럭 한 대가 소각되고 만주군이 몇 명 죽자, 만주군과 특설대 합동으로 일대를 토벌. 특설대는 현장 부근 마을에서 백성 두 명을 쏴죽이고 세명을 다치게 해 불구로 만들었다. 같은 날, 이들은 또 두명의 팔로군 제대 군인도 붙잡아 총으로 쏴 죽였다.

사실상 일본군의 일부이니만큼 당연히 똥군기도 강했는데, 부대 안에서의 구타나 욕설은 극히 평범한 일이였다고 한다. 4기생 안권현은 군사수칙을 잘 외우지 못한다는 이유로 지독한 구타를 견디다 못해 탈영해서 팔로군에 가담했다.

출정을 나간 사병이 귀대시간에 늦자 상관에게 누를 끼쳤다고 자살하고, 위병근무가 철저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지적을 받자 그 분대원을 훈계한 분대장이 책임을 통감한다며 그 자리에서 권총 자살을 해 전군의 귀감으로 시달된 일이 있는 등 군기가 비정상적으로 강했다.

3. 미화[편집]

소수민족들의 특수부대 가운데서 조선인 부대가 가장 강력했고 유명했다. 일본군, 만주군이 못 해내는 작전을 간도특설대가 가서는 거뜬히 해치우곤 했던 것이다. 특설대는 전투도 잘했지만 선무공작에도 능해 지방민들의 환심을 샀다. 작전 때 무자비하고 잔학한 일본군과는 극히 대조적이었다고 한다. 조선인의 공적 평가에 인색한 일본인들도 간도특설대에 대해서는 ‘상승의 조선인부대’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만주군, 관동군 안에서 벌어지는 총검술, 격투기, 사격 등 무술대회에서는 특설대가 주로 우승기를 차지했다. 특설대는 문주의 5족 사이에서 경쟁하며 살고있는 ‘’‘우리 동포들에겐 큰 긍지와 희망을 안겨주었다.’‘’ 각 교민 단체에서는 부대가 이동할 때마다 각종 연예단을 보내 위문했고, 뜻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부대가 쌓은 전투 경험과 군사지식이 조국 독립에도 큰 힘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일본 육사 출신 전 합참의장 장창오 육군대장. 1982년 11월 10일 중앙일보 기고

간도 특설대에 근무한 창군 원로, 장관, 고위관료들은 수십명에 달하지만 그들 중 자발적으로 당시 일을 고해한 사람은 없다. 잘해야 2006년 8월 세계일보 기자에게 당시 일을 담담히 털어 놓은 이용 전 철도청장 정도이다. 심지어 미화하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써놓은 장창오의 글을 간도특설대 미화의 일반적인 논조이다. 그런데 위에 글에도 나오지만 누구를 상대로 싸웠는지가 나오지 않는다.
종종 간도특설대가 만주의 공비들을 상대로 싸웠다는 식의 글이 보인다. 예를 들어 ‘일본군도 아닌 만군에 복무한 것이 무슨 문제가 있느냐’, ‘만주에서 상대한 군대는 공산군이었다’. 즉 당시는 독립군이 전부 괴멸하여 만주를 떠난 상태이고 일부 공산주의자들만 팔로군 등의 중국 군벌들과 함께 남았다는 것이다.

물론 사회주의 계열의 조선인 군대도 항일군대였으나, 만주 독립군은 민족주의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나눌 수 있는데 민족 계열은 괴멸하여 생존자들은 임시정부를 찾아 떠났고, 사회주의 계열만 남아 있다가 태평양 전쟁이 시작하기도 전에 중국이나 소련측에 흡수되어 '독립군'으로서의 의의는 상실하였다. 해방 전까지 독립군으로서의 기능을 유지나마 할 수 있었던 조직은 중국 내륙과 미얀마 후방지역에서 활동한 한국 광복군 정도가 있다.

1937년 간도성 거주 조선인은 46만명으로 총 인구의 71%이며 해방 후 또한 중국 당국이 공인한 옌벤의 “항일열사” 3125명 가운데 조선인 비율은 98%이다. 즉 중국의 항일군으로는 정의내릴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이들의 다수는 6.25 전쟁에서 중공군 측 조선의용군으로 참전하게 된다. #

일본인 간도특설대 복무자인 고모리야 요시이치 만군 중위는 간도특설대가 상대하였던 항일군 세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그들은 잡군이 아니고 반만항일군이라고 칭하며 실로 군기 엄정한 부대였다. 복장도 좋았고 장비도 중화기를 갖춘 부대였다. 그들은 물자를 조달할 때 상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부역 차출에 임금을 지불했기 때문에 지역 주민들의 호감을 샀다.”

간도 특설대 복무자중 가장 유명한 백선엽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진지하게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진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들이 역으로 게릴라가 되어 싸웠으면 독립이 빨라졌으리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라며 합리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신현준 해병대 사령관 역시 “그때 나는 만주국 내에 특별히 한국인만으로 구성된 특수부대를 창설하려는 데는 어떤 특별한 정치적인 목적이 있지 않은가 생각하면서도, 자신은 단지 하급 간부 요원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한 처지라, 내게 부여되는 임무를 완수하는 데만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했다.” 라며 해방된 이후에도 별다른 심적 부담을 느낀 흔적이 없다.

4. 만주의 ‘동양귀’ 시절[편집]

스스로를 ‘무적의 상승 부대’라고 하며 한번 호되게 당한 공비 무리는 다시 마주치기를 두려워해 피해갔다고 자화자찬 했지만, 주로 상대하는 조선인 독립군은 끈질기게 싸웠고 특설대의 인적 물적 피해를 강요 하였다.

대표적인 전투인 1939년 8월 23일 다샤허 전투에서 숨진 특설부대원 16명을 기리기 위한 ‘16용사 전적비’는 조선 입장에서 보면 조선인 중심으로 편성된 항일연군 1로군 산하 3방면군 600명이 일본군 수비대와 특설대 지원 부대에게 결정적 타격을 입힌 쾌거이다.

생각해볼 점은 특설대의 경우 만군내 각종 대회에서 우승할 정도로 사격 실력 등이 뛰어난 정예부대이며 무기와 군수품이 만군 내 최상급 수준이였다. 그에 반해 만주내 독립군들은 중국에서는 “고군孤軍”이라고 불렀는데, 중국 내에서 각종 보급을 받는 국공합작군에 비해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싸우는 군대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당시 항일연군은 엄정군기하여 민간에 피해를 안끼치고 보급품을 돈주고 구입한다는 일본측 증언이 있을 정도. 그에 반해 만주/일본군은 민폐가 심각했고 만주가 자신들의 조국 혹은 자신들의 영토임에도 불구하고 무상징발을 일삼고, 독립군 협조 의심자에 대한 고문을 자행하여 원성이 자자하였다고 전한다.

5. 러허성 이동과 특설대 해산

이 문단은 토론을 통해 근거없는 비난 성격이 강한 서술을 작성하지 않기(으)로 합의되었습니다. 합의된 부분을 토론 없이 수정할 시 제재될 수 있습니다.
특설대는 1943년 12월 러허성[9]으로 이동 하였다. 43년 2월 특설대에 배속된 백선엽 예비역 장군은 이 시기 게릴라 활동이 거의 봉쇄되었기 때문에 자신은 독립군과 싸운 적이 없다고 증언하였는데[10], 그 대신 러허성은 중국공산당 산하 팔로군이 침투해 유격구를 만드는 공세적 전술에 따라 일만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였다.

일제는 남방전선으로 일본군이 대거 이동하자 이를 메꾸기 위해 만주국의 군대와 경찰 병력을 러허성으로 이동시켜 철도 경비와 토벌 등의 임무에 종사케 하였다. 특설대 역시 이러한 맥락으로 러허성으로 이동하였다. 이 무렵이면 만주군 내 다른 조선인 장교이든 특설대이든 똑같이 팔로군과 싸우던 시기였다. 즉, 특설대 백선엽이든 1944년 4월에 만군 8단 부관을 했던 박정희든 똑같이 팔로군과 싸우는 것이 주 임무였다.

이에 따라 특설대 역시 기존의 독립군 토벌에 특화된 특수공작대 성격에서 소모품인 알보병으로 변화하게 되었는데, 1944년 철석부대 산하로 들어간 것이 그 상징적인 사건이다. 철석부대라는 것은 물론 만주의 국훈인 “철석신념, 철석기율, 철석훈련”에서 따온 명칭으로 1만5,6천의 보병, 기병, 전차 합동의 전투 부대로 만주군 내에서도 ‘만족, 몽골, 조선, 일본인’ 혼성 부대로 전공이 있는 우수부대에서 선발, 충당하여 중국의 정규군인 팔로군과의 전투에만 전념하였다. 무기 등 보급품은 일본 정규사단인 갑(甲) 사단에 준해서 지급되었다. 특이하게도 따로 사령부가 없는 만주군에서 차출된 부대 연합체였다. 이때 정보반을 창설하여 모든 토벌에 정보반과의 조율이 있었는데 정보반의 적극 활용은 철석부대 상급부대인 북지특별경비대의 특징이였다. 철석부대는 다시 북지특별경비대에 소속되어 있었다. 약칭 특경은 헌병 사령관 가토 하쿠지로 중장의 지휘 아래 헌병대와 일반병 혼합의 치안작전 부대로 주로 철도 경비를 위한 일본군 10개 대대와 만주군 철석부대로 구성되었다.

중국측에서는 이 시기의 간도특설대가 만주 시절과 달리 “음험하고 악독했다”라고 주장한다. 혐의자를 사격장의 과녁에 묶어놓고 쏴 죽였다거나, 팔로군 동향에 관한 정보를 캐기 위해 마을 주민을 집단으로 고문했다거나, 군도로 혐의자를 참수했다는 식이다. 무고한 백성을 살해했다거나 지역에 따라 주민 수보다 사살 또는 체포된 사람이 더 많을 정도로 특설대의 토벌은 극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45년 8월이 되면 본토는 대규모 공습에 이은 핵폭탄 투하로 초토화되고 소련군 170만명이 세 방면에서 만주로 돌진해 온다. 이 시기에는 몽골계나 만주계 만주군이 잇달아 반란을 일으켜 일본인 장교가 연금 혹은 살해되되었는데 만주해군 야야마 무쓰네 중위가 부대로 돌아와 보니 부대 내 일본계 장교가 몽땅 살해되어 있어 겨우 도망갔다거나,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동기인 류펑줘가 일본인 행세하는 조선계 일본군을 쏴죽이고 동포인 만주 정치범들을 풀어주던 등 대 혼란기였다. 더불어 천황의 항복선언문을 통지 받고 특설대가 소속된 철석부대중 만주계인 철심부대는 일본계 장교들을 구금하고 국민당군과 팔로군중 저울질 하다가 대거 국민당군에 투항하여 하루아침에 국민당군 행세를 한다. 이후 ‘동북보안 제2총대’로 개칭하여 가장 먼저 창춘(신징)에 입성하는 등 국민당군으로서 활동하게 된다. 철석부대중 몽골기병으로 구성된 철혈부대는 아예 일본장교들을 살해하고 팔로군 진영에 합류한다.

특설대는 8월 20일까지 일제의 항복선언도 통지받지 못하다가 팔로군에게 항복선언을 전해듣고야 진저우로 철수하였다. 이들은 마지막 부대장인 후지이 요시마사 소령의 지휘 아래 8월 26일에야 진저우에 도착하였다. 특설부대 300명은 부대 해산식까지 가지고 일본인 장교 이탈 후 선임 중대장 김백일 대위의 지휘 아래 선양(펑톈)에서 여비를 지급받고 해산한다. 소련군에 포로로 잡힌 관동군 출신 조선인들은 상당수가 시베리아로 끌려가서 엄청난 고생 끝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들에게는 행운이었던 셈이다.

이때까지 헤이룽장 성에서 교육 받던 특설대 신병 보충대는 소련군과 전면 교전에 동원되었다가 8월 24일밤 남쪽으로 도주하여 간도 왕칭 현 바이차오거우까지 1000여리를 도보 행군하여 8월 31일에야 스스로 해산했다. 이들은 개별적으로 귀국하여 돌아가거나 해방 후 입지강화를 위해 숫자를 크게 보여야 했던 광복군에 흡수처리되지만 난립하는 군사조직을 정비하려던 미군정에 의해 해산하여 역시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다. 마지막 간도특설대장 후지이 요시마사와 초대 대장 소메카와 가즈오, 그리고 중간에 특설대장을 역임했던 하시모토 기요시는 소련에 체포 된 60만명중 포함되었다가 전후 복구 사업을 위해 몽골에 나눠준 1만 2318명에 포함되어 몽골에 갔다가 거기서 셋 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11]

6. 유사품[편집]

이들은 대부분 대소전을 위해 준비한 부대이다. 간도 특설대 출신자들이 항상 하는 얘기가 소수민족 부대중에서 간도 특설대가 가장 용맹하며 실적이 뛰어났다고 하는데, 창설 목적 자체가 다른 소수민족 부대는 대소전 준비이고 조선인 부대는 항일독립군 토벌이니 비교 대상이 아니다. 백선엽이 간도 특설대의 임무를 “일본과 소련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면 소련 영내에 들어가 교량이나 통신시설 등 중요 목표를 폭파하는 것”이라고 위증한 것도 이러한 흐름에 묻어가려는 시도이다.

다만 중국/일본쪽 자료를 보면 만주쪽 특수부대중 간도 특설대가 가장 먼저 등장한다. 백계 러시아 부대가 창설일이 더 빠르고, 회교도 부대가 규모가 더 크지만 간도 특설대를 더 중시하는 것이다. 만주군 내에서 특설대의 위상이 확실히 높기는 했던 것 같다.

6.1. 아사노 부대[편집]

1937년 관동군 명령으로 소련에서 망명한 백계 러시아인과 탈주한 소련군인을 모아 편성한 부대. 부대장은 아사노 상교이며 하사관 이하 사병은 전원 러시아 인으로 하얼빈 쑹화 강 부대에 250명, 하이라얼 부대에 150명, 헤이룽장 성 하이린시 부대에 50명 가량 있었다. 창설 목적은 소련에 대한 정보 수집과 모략 공작을 비롯해 전쟁 돌발 시 소련 영내로 잠입해 유격대 활동을 벌이며 주민 봉기를 유도하는 것이다. 간도 특설대 창설 명령이 1938년 9월에 나왔으니 이쪽이 소수민족 부대로는 원조이다.

6.2. 회교부대[편집]

1939년 이슬람교를 믿는 병사들을 모아 펑톈 북대영에 1개 여단을 편성했다. 소련을 상대로 유격전을 펼치는 것이 창설 목적. 병영 내 이슬람 사원을 설치해주기도 했으나, 중국인이 인근에서 돼지고기를 많이 먹어 갈등이 심했다.

6.3. 이소노 부대[편집]

1941년 5월 가나가와 싱안 특무기관장의 주도로 몽골인 기병 제대병을 모아서 구성했다. 부재장은 이소노 소교. 부대규모는 3개 중대로 여기는 사병들만 몽골인이며 장교와 하사관은 전원 일본인이다. 관동군 정보부의 통솔을 받았다.

6.4. 오로촌 부대[편집]

우랄알타이계 퉁구스 종족인 오로촌족 전체 인구 3000명중에서 장정 300명에게 38식 보병총 등을 주며 포섭하였다. 소련 공작원의 국경 침투를 막고 유사시 게릴라 부대를 편성해 소련군을 교란하는 것이 목적이다. 소련군도 만주로 진격할 때 독자적으로 키운 오로촌 특수부대원을 활용했다고 한다.

7. 특설대 장교 명단[편집]

김석범 전 해병대 사령관이 집필한 <만주국군지>에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 장교 명단이 만주국육군군관학교 기수별로 정리되어 있다.

창설요원은 장교로는 김상찬 대위(군수관), 마동악 대위(군의관), 강재호, 이원형, 박경조, 김백일, 신현준 소위이며, 하사관으로는 대부분 국경감시대 출신인 김대식, 방관득, 홍청파 상사 등 10명이다.

단, 사병의 경우 “몸과 마음이 우수한 인재가 쇄도해서 지원해 각지의 대표적 청년이 입대했다. 그중에서는 혈서를 쓴 지원자도 있었다.(고모리야 요시이치 특설대 장교)”라는 증언이 있을 정도로 열렬한 친일파들이지만 장교들의 경우 만주군의 인사 방침과 개개인의 근무평가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순수하게 자원에 의하여만 입대 가능한 조선인 만주군 장교들은, 특설대 복무 여부와 관계 없는 처음부터 친일파들이다. 다시 말하자면 만군 장교출신자들은 자신이 특설대 복무는 안했다고 일제에 대해 충성도가 약하거나 친일행적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7.1. 간도 특설대 복무 경력주요 인사[편집]

  • 신현준(초대 해병대 사령관) : 간도 특설대 창설 요원. 두차례에 걸쳐 3년 4개월 근무.
  • 김석범(2대 해병대 사령관) : 간도 특설대 부(副)대장, 조선계 최선임. <만주국군지>를 썼다.
  • 김대식(3대 해병대 사령관)
  • 박창암(예비역 소장): 하사로 복무했다. 이 사람은 유일하게 친일파 명단 관련에 제외되어 있다. 만주군 장교인 박승환이 비밀리 만든 건국동맹 군사분맹에 포섭된 몇 안되는 인물이었기 때문. 후일 대표적 환빠로 전향한다.
  • 송석하(예비역 소장)
  • 김백일: 김백일의 본명은 '김찬규'로 만주군 장교로 복무한 경력이 있는데, 특설부대 창설 때부터 활동해왔던 인물로 일제 패망 때까지 쭈욱 간도 특설대로 복무했을 만큼(패망 당시 계급이 대위였다.) 가장 커다란 활동을 했다고 한다. 광복 이후에는 자신의 만주군 장교 시절을 감추고 싶었던지 '청천백일'의 '백일'로 이름을 바꾸고 월남했다.[13]
  • 최남근: 간도 특설대 출신으로 광복 이후 월남하여 좌익계열 군인으로 활동한다. 여순사건때 숙군 과정에서 지목 당해 총살된다.
  • 백선엽(육군 예비역 대장) : 1943년 2월 부임. 시기적으로 간도지역 항일 무장운동 소원해진 때여서 '조선 독립군'과 교전해보진 못했고 대신 러허성으로 이동하여 공산당 팔로군과 전투에 종사하였다라고 주장한다. 팔로군에 속해있던 관련 기록을 보면 조선인들과 싸운 경험은 있는 걸로 보인다.

8. 간도 특설대 복무 경력 의혹이 있는 사람

정일

8.1. 박정희의 간도 특설대 복무 의혹?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거 없다

한때 박정희가 만주군 복무를 한 것을 넘어 간도 특설대에 복무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다. 주재덕의 서적 탄백서[14]에서 박정희가 간도 특설대원으로 근무하였다고 적힌 것을 보았다고 차상훈이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의 결전편에서 증언을 실었다. 하지만 그 외의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탄백서란 내용을 바탕으로 한 박정희 간도 특설대 근무설의 골자는 1939년 대사하 전투에 참여하여 무공훈장까지 받은 간도 특설대원 마츠모토란 인물이 있는데 그 인물이 박정희가 아니냐는 것이다. 심지어 박정희가 간도에서 독립군 토벌하러 나갈 때마다 "요시 토벌이다!" 라는 전투함성(...)을 지르곤 했다는 루머도 퍼졌었다. 이 떡밥을 물었던 것이 반박정희 성향의 재미 언론인 문명자와 만화가 백무현, 그리고 과거 박정희 항목의 편집에 참여한 일부 위키러들이다.

헌데 이 소문에서 박정희의 이름이나 박정희의 일본식 이름인 다카키 마사오는 언급되지 않았다. 게다가 박정희는 1939년 9월까진 교사로 근무했고 동년 10월에 시험을 쳐서 1940년 4월에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했는데 위에서 언급한 마츠모토란 자는 박정희가 입학하기 전부터 복무했다는 기록이 있다. 게다가 박정희가 창씨개명을 한 것은 1940년 2월 17일인데 창씨개명을 하기도 전이고 군관학교 입학을 하기도 전인 1939년에 전투에 참여해서 일본 이름을 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오마이뉴스의 기자 정운현과 연변의 역사학자 박창욱도 박정희 간도 특설대 근무설을 조사한 끝에 간도 특설대 명단에도 없으며 심지어 임관 이후에 만주군에서 전투에 참여한 기록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박정희와 함께 복무했던 조선인 장교들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는 단(연대) 을종부관[15]이라서 전투 경험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마츠모토란 자의 정체도 박정희가 아닌 현학춘이란 자로 밝혀졌다.

[1] 단 후술되어 있는 바와 같이 오로지 지원병에 의한 편제는 1기와 2기에 한하며 3기부터는 사령부에서 파견하였거나 징병된 인원들로 채워졌다. 예를 들어 백선엽은 자서전에서 본인이 "착임(부임)하였다"고 표현하였다. 다만 장교는 굳이 간도특설대가 아니더라도 병사와는 달리 100% 자발적인 판단으로 간부가 되었으므로 간도특설대 여부와는 무관하게 친일파에 속한다.[2] 만주국의 국훈인 철석신념, 철석기율, 철석훈련에서 명칭을 따온 북지특별경비대 산하 부대. 북지는 화베이 지방을 가리킨다.[3] 다만 대한민국 해군만큼은 초창기부터 독립운동가 출신인 손원일 제독이 지휘했고, 해군에 남아 있던 일본군/만주군 출신 친일파 군인들의 대부분을 새로 창설된 해병대로 몰아넣어 버렸기 때문에 그 잔재가 덜한 편이다.[4] 일제 은혜 보답… 자진 입대 일제 고관·軍간부로 호사… 독립군 토벌도[5] 야마토타마시이. '대화'는 일본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대화혼은 '일본혼', 즉 일본민족의 정신을 뜻하는 말이다.[6]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는 250명 모집에 1,000여 명이 응모했다고 나와 있다. 2개월 전 동아일보에는 288명으로 나오는데, 1차 선발 이후에 이런저런 사유로 탈락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7] 기관총과 박격포를 장비한 화기중대를 말한다.[8] 당시 일본군은 단순한 도적 말고도 한국 독립군을 포함한 항일세력 또한 비하하여 비적이라고 지칭했다.[9] 열하성(熱河省), 1955년 폐지되며 허베이성, 랴오닝 성, 내몽골 자치구에 나뉘어 편입[10] 예를 들어 동북항일연군 같은 경우 1941년을 전후해서 이미 소멸상태였다.[11] 몽골의 사망자 명부에 위 간도특설대장 3인방의 이름은 있는데 출생연도와 계급이 불명으로 되어 있기에 추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들이 장교 신분을 숨기기 위해서 계급 등을 안 밝혔을 수 있다.[12] 신징 군관학교 출범으로 펑톈 군관 학교의 역할과 위상이 애매해 지자 하사관중 소위 후보자를 골라 단기 교육하여 초급 장교를 양성함. 특히 7기는 전원 간도특설대출신[13] 90년대 후반 차인표가 주연한 국군홍보 영화 님의 침묵이 바로 김백일을 소재로 했다. 아무래도 부끄러운 과거 때문에 일제 때 모였던 친구들이라는 명칭으로 넘어간다.[14] 중국어로 坦白书. 과거를 솔직하게 털어놓은 글이라는 뜻인데 정치적으로 자아비판하는 책이란 뜻으로도 쓰인다.[15] 단장(연대장)을 보좌하는 것도 아니고, 단장을 직접 보좌하는 상위(대위) 계급의 갑종부관을 보좌하여 단기(연대기) 관리 및 명령 전달 임무만을 하는 보직이라고 한다.[이상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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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to infobox military.png
간도특설대
間島特設隊
활동 기간 1938년 ~ 1945년
국가 만주국의 기 만주국
소속 만주국군
역할 대분란전
규모 대대
본부 간도성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간도특설대(일본어: 間島特設隊 간토 토쿠세스부타이[*]) 또는 간도특설부대일본 제국의 괴뢰국인 만주국동북항일연군 · 팔로군 등 항일 조직을 공격하기 위해 1938년 조선인 중심으로 조직하여 1939년부터 본격적인 작전을 수행하였으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존속한 800~900여 명 규모의 대대급 부대였다.



개요[편집]

간도 특설대는 당시, 간도에서 조선 독립군과 중국인이 연계한 반일-반만주국 투쟁(대표적인 조직은 중국 공산당휘하의 동북항일연군)의 활약으로 곤경에 빠진 만주국-일본 당국에 의해 설립되었다. 만주국의 참의원을 지낸 친일파 이범익이 '조선 독립군은 조선인이 다스려야 한다'며 설립하여 대대장 등 몇몇 직위를 제외하고 조선인으로 채워졌다. 명칭도 이에 유래하였고, 일본군이 아닌 만주국군에 소속되었다.[1]

동북항일연군 등 다수의 항일조직은 군대, 관헌 등의 단속과 집단주거 마을건설에 의해 주민과 격리된채 은신하면서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 간도 특설대는 게릴라전에 특화된 부대로 육성되었다. 간도특설대는 1939년에서 1943년까지는 만주국 내에서 항일운동을 하는 독립군과 전투를 수행하였다. 1944년과 1945년에는 열하성과 하북성에서 팔로군과 전투를 수행하였다.[1]


조국 독립을 위해 싸우는 독립운동 조직을 진압하는 부대의 특성상, 대부분의 조선사람으로부터 거부되었다. 그러나, 당시 만주국에서 살고 있던 친일파 군인들 다수가 소속되어, 독립운동과 항일 항만주운동의 탄압에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1] 역사학자 필립 조윁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일본군의 만주 점령 기간 동안 간도특설대는 잔악한 악명을 얻었으며, 그들이 통치하는 광범위한 지역을 황폐화시켰다.[2]

간도특설대에 장교로 활동했던 조선인 한국에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의하여 친일부역자로 분류하는데, 150여명 이상의 조선인이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한 것이 조사되었다.[3]

활동

주요 토벌 대상은 한족과 조선인 그리고 양정우가 지휘자로 있는 동북항일연군이었다. 간도성은 오늘 날의 연변지역이며, 연변 일대에서 활동한 항일연군은 대부분 조선인들이었다. 그들 중 생존한 이들은 해방 후 김일성을 지도자로 북한 사회를 움직이는 집권층이 되었고, 되돌아간 특설부대원들은 한국 국군의 주축을 이루었다.[1]

1939년 5월 특설부대는 일본수비대를 배합하여 안도현 서북차에서 야간 토벌을 진행하던 중 산림 속에서 불빛을 발견하고 체포를 하고 보니 산나물을 뜯는 부근 마을의 백성이었다. 그런데도 염천 대대장과 산천 중대장은 무고한 백성들을 죽여서 불에 태워버렸다.[4]

1939년 7월 1일 특설부대는 천보산 광산이 항일연군의 습격을 받았다는 급보를 받고, 도문 일본군 수비대와 협동 작전을 하여 천보산을 토벌했다. 교전 중 항일연군 전사 한 명이 희생되었는데 특설부대는 특설부대의 충혼비에 제를 지내기 위해 항일연군 전사자의 배를 가르고 간장을 꺼내 빈 통조림통에 넣었다. 그런데 그것을 메고 가던 민부가 허기를 달래려고 통조림인 줄로 알고 훔쳐서 먹다가 생고기인지라 버렸다고 한다.[4]

1941년 겨울 특설부대의 3개 중대는 원부시 대대장의 지휘 아래 안도, 돈화, 화전 등 3개 현에 대한 토벌을 진행, 제2중대와 기포중대의 3명 대원이 변복한 항일군 2명을 체포하였다. 하나는 제1중대의 취사반에서 잡일을 하게 하고, 하나는 기포련에서 말을 먹이게 하였는데, 취사반에 있던 사람이 도망을 한 것을 도목구에서 다시 붙잡아다가 부대를 명월구 공동묘지 앞에 집합 시키고, 총부의 부관 옥량 중위가 군도로 머리를 베고 시체 옆에서 목을 들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4]

1941년 1월 특설부대는 안도현 대전자에서 동쪽으로 약 30리 떨어진 산림에서 항일연군 여전사 4명을 체포, 압송 도중 강간을 시도하려다 실패하자 살해하였다.[5]


1942년 8월 특설부대 제1중대는 변의대를 조직하여 차조구에 가서 정보를 수집하는 중 논밭에서 일하는 농민 두 사람이 양민증이 없다는 구실로 형벌을 감행한 후 체포하였다.[5]

교전 중 전사한 이들에게는 《16용사 기념비》를 세웠으며, 만주국 국무원에서는 전사자 중 반장 오현상에게는 경훈장, 남일록(南日錄) 등 15명에게는 주국장을 발급하였고, 생존자 중 끝까지 저항했던 현학춘(玄鶴春)에게는 3급 무공장을 수여하였다.[5]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하였으며,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강간, 약탈,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또한 관내방면 석갑진에서 팔로군을 대상으로 36차례의 토벌을 수행하여 103명을 살해하였으며, 62명이 체포되었다고 한다.

일본 패망 후 한국에서의 인식

광복이후 한국에서 반민특위 등 친일청산작업이 실패한 가운데, 구 일본군/만주군 소속 군인들이 그대로 국군지도부가 되었다. 특히 간도특설대 출신들은 대 게릴라전 경험을 바탕으로 ‘제주 4·3 사건’ 등에서 토벌부대 지휘관으로 참여했고, 한국 전쟁 때도 많은 역할을 하였다. 백야전사령부를 창설하여 지리산빨치산을 토벌하고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던 백선엽이 대표적이다.

 

일제 식민지배에 맞선 독립운동을 대거 탄압하였으므로, 현재 알려진 간도특설대 소속 인물들의 대부분은 친일파로 인식되고 있다. 친일인명사전에는 일본군에 복무해도 일본군 소좌 이상만 등재해 놓았다. 그러나 간도특설대의 경우 그 활동이 특히 악랄하여 독립군 말살이라는 그 임무 때문에 대위 이하 장교는 물론 사병까지 전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 되어 있다.

간도특설대 역대대장

  • 초대 染川一男 소교
  • 2대 渡辺捨五郎 소교
  • 3대 園部市二郎 소교
  • 4대 佐々木五郎 소교
  • 5대 柴田清 소교
  • 6대 藤井義正 소교

부대가

1939년 12월부터 1945년에 해산될 때까지 부대가로 불렀던 노래는 간도특설대의 정신을 잘 말해준다.[6]

시대의 자랑, 만주의 번영을 위한
징병제의 선구자, 조선의 건아들아!
선구자의 사명을 안고
우리는 나섰다. 나도 나섰다.
건군은 짧아도
전투에서 용맹을 떨쳐
대화혼(大和魂)[7] 은 우리를 고무한다.
천황[8] 의 뜻을 받든 특설부대
천황은 특설부대를 사랑한다.

조선인 군인

백선엽을 비롯한 150여명의 조선인이 간도특설대의 장교로 복무를 했다. 이중 알려진 인물은 다음과 같다.

각주

  1. 이동: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 p. 58, 류연산
  2. Philip S. Jowett (2004). Rays of the Rising Sun. West Midlands: Helion & Company Limited. pp. 34.
  3. 전쟁영웅 백선엽, 일제시대 행적은, CBS 라디오 '시사자키 신율입니다'
  4. 이동: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 p. 59, 류연산
  5. 이동: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 p. 60, 류연산
  6.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 p. 57 류연산, 2004년 2월 25일 발간
  7. 야마토 타마시이, 일본의 민족정신을 뜻하는 말
  8. 당시 쇼와 천황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