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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관련]마을로 간 한국전쟁 : 한국전쟁기 마을에서 벌어진 작은 전쟁들 - 박찬승

Bawoo 2019. 7. 12. 22:33


마을로 간 한국전쟁

마을로 간 한국전쟁 : 한국전쟁기 마을에서 벌어진 작은 전쟁들

책소개 - 인터넷 교보문고

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 박찬승의 『마을로 간 한국전쟁』. '마을'을 중심으로 한국전쟁을 재조명한다. 한국전쟁기에 종교나 이념, 친족과 신분 등의 갈등으로 인해 마을에서 벌어진 상호 학살 사건에 대해 치밀하게 파헤치고 있다. 아직까지도 짙게 드리워진 한국전쟁의 어두운 그림자를 확인하게 된다. 10여 년간의 답사와 연구를 모아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기념하여 출간된 것이다.


저자


박찬승
박찬승 대학교수

1957년 2월 24일 출생.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미국 하버드대학 한국학연구소 방문교수, 역사문화학회 회장, 한국사회사학회 회장, 목포대학교와 충남대학교 교수,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있으며, 한국사연구회 이사, 역사학회 편집위원, 'Korea Journal' 편집위원,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개념사 프로젝트의 연구진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근대정치사상사연구',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민족주의 시대ㅡ일제하의 한국 민족주의', '근대이행기 민중운동의 사회사', '언론운동', '한국 근현대사를 읽는다', '민족, 민족주의'가 있으며 그 밖에도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목차


책머리에

총론 마을에서 바라본 한국전쟁
1. 프롤로그
2. 전쟁과 마을 주민 간의 갈등 구조
3. 마을 지도자·국가권력과 전쟁
4. 전쟁 이후의 마을
5. 에필로그―복합적 갈등구조론

1 친족 간 학살의 비극, 진도 동족마을 X리
1. 진도에서 X리는 어떤 마을인가
2. 1930년대 X리 청년들의 민족·사회 운동 참여
3. 해방 직후 X리 현풍 곽씨의 동향
4. 한국전쟁기 친족 내 갈등의 폭발과 학살의 반복
5. 맺음말: 친족 내 갈등과 배후의 국가권력

2 ‘영암의 모스크바’, 한 양반마을의 시련
1. 두 양반가 전주 최씨와 거창 신씨
2. 한말·일제강점기 영보마을의 민족·사회 운동
3. 해방에서 한국전쟁기까지 격동의 영보리
4. 맺음말: 전쟁은 마을에 무엇을 남겼나

3 양반마을과 평민마을의 충돌, 부여군의 두 동족마을
1. 부여군 두 동족마을의 역사와 흔들리는 신분제
2. 한국전쟁기 두 동족마을의 충돌
3. 전쟁의 상처와 강호동지회의 발족
4. 맺음말: 신분 간 투쟁으로서의 마을 전쟁

4 땅과 종교를 둘러싼 충돌, 당진군 합덕면 사람들
1. 전쟁 이전 지주·마름과 소작인 간의 갈등
2. 한국전쟁기 마을 주민 간의 갈등
3. 맺음말: 계급·이념 간 대립으로서의 마을 전쟁

5 두 명문 양반가의 충돌, 금산군 부리면의 비극
1. 금산군 부리면의 명문가 해평 길씨와 남원 양씨
2. 두 가문의 좌우 분화
3. 한국전쟁기 두 가문의 동향과 11·2사건
4. 끝나지 않은 이야기: 전쟁을 기억하는 사람들
5. 맺음말: 좌우 이념 대립으로서의 마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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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마을에서 벌어진 갈등과 상호 학살을 통해 살펴본 한국전쟁의 미시사

한국전쟁 기간에 마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한국전쟁 발발 60년을 맞는 올해, 마을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한국전쟁을 조명한 책이 출간됐다. 저자는 마을에서 벌어진 상호 학살 사건의 과정과 원인을 치밀하게 파헤침으로써 한국전쟁의 미시사를 제시한다. 이 책에 실린 사례는 진도의 현풍 곽씨 동족마을, 금산군 부리면의 해평 길씨 동족마을 등 전라남도와 충청남도의 다섯 마을이다. 저자가 10여 년간 해당 지역을 현장 답사하며 관련자 구술을 채록하고 희생자 씨족 가문의 족보까지 꼼꼼히 조사하여 얻은 연구 결과물이다.
기존 한국전쟁에 관한 역사학계의 연구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전쟁의 발발 배경과 진행과정을 분석한 거시사 연구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2005년 출범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조사한 한국전쟁 사망자 통계에서 알 수 있듯 실제 희생자 규모는 전선(戰線)이 아닌 후방에서 훨씬 더 컸다. 그것은 남북한군 간의 직접적인 교전과는 별개로 마을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진 주민들 간의 크고 작은 학살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시야를 한반도 전체에서 마을공동체라는 구체적 공간으로 좁힘으로써, 그동안 거시사 연구가 놓쳐왔던 마을 주민들 간의 신분·이념·종교·토지소유 등의 갈등까지 세밀하게 짚어낸다. 이들 사례 연구는 학살 사건의 마을들이 동일한 농촌 마을이었다고 하더라도 해당 지역의 씨족 구성, 마을 지도자의 계급성향과 주민 장악력 등에 따라 그 충돌 양상은 많이 달랐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책은 한국전쟁기 마을에서의 갈등 원인을 주로 이념과 계급 갈등으로 한정지어왔던 기성 학계의 통념을 재검토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는 불모지와 다름없던 한국전쟁의 미시사 분야에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줄 것이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마을 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마을로 내려간 국가권력, 전쟁 전 마을 갈등의 폭발


‘왜 한 마을의 주민들은 서로를 죽이려고 했을까?’, 저자의 일차적인 연구 동기이기도 한 이 물음은 이 책의 다양한 사례 연구를 관통하고 있는 중심적인 문제의식이다.
저자는 마을에서 벌어진 주민들 간의 상호 학살의 일차적인 책임을 마을로 침투한 남북한 국가권력에 돌리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남쪽으로 내려온 인민군은 점령 지역의 면 단위부터 내무서를 두고 인민위원회, 농민위원회, 부녀동맹 등의 단체를 만들어 마을 단위까지 통제했다. 토지개혁을 내세워 하층민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고 인민재판으로 마을의 주요 우익 인사를 처형함으로써 마을의 질서를 해체시켰다. 반대로 인민군이 빠져나간 뒤에는 국군과 경찰이 들어와 인민군에 협조한 부역자들을 색출하여 처단했다. 특히 우익 단체인 치안대와 청년단이 조직되어 부역자 대부분을 경찰에 넘기거나 경찰의 묵인하에 직접 처단했다.


그렇다면 남북한의 국가권력은 왜 이와 ...같이 마을 공동체에 깊숙이 침투하려 했을까? 저자는 국가권력이 마을 단위까지 침투하려고 애쓴 이유가 분단정부의 불안한 위치를 빠르게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국가권력은 마을 주민들에게 상호 학살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강요함으로써, 자신들의 체제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려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같은 국가권력의 개입이 없었다면 마을에서 그렇게까지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1948년 남과 북에는 각각 정부가 들어섰지만, 아직 국가에 대한 국민들의 충성도가 그리 높은 상황은 아니었다. 그것은 양쪽 모두 분단정부라는 한계를 안고 있었고, 남북 모두 국민들 사이에 좌우 대립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과 북의 국가권력은 전쟁 상황을 이용하여 마을 주민들에게 어느 한쪽을 분명히 선택하도록 함으로써 충성도를 높이고자 했다. 남북의 국가권력이 마을 주민들을 동원하여 직접 학살에 나서도록 몰아간 것은 주민들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어느 한쪽 편에 서서 다른 쪽 편을 학살하는 행위는 곧 자신의 목숨을 어느 한쪽에 맡기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본문 p.49~p.50)

그러나 저자의 또 다른 고민은 아무리 한국전쟁기 남북의 국가권력의 침투가 강력하고 치밀하게 이뤄졌다고 하더라도, 수백 년간 견고하게 유지됐던 마을 공동체가 그렇게 쉽게 국가권력에 조종당했을까 하는 의문점에 있다. 저자는 20세기 초 일제식민지하의 국내 환경 변화에서 그 점을 이해해보려고 시도한다. 당시 신분제와 지주제, 친족관계에 기반을 두고 그 나름의 질서와 규율을 갖고 있던 농촌 마을은 신분제의 이완과 함께 마을 내의 위계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또 1910년대에 일제가 면사무소를 설치하고 부락연맹과 애국반 등 인적·물적 자원의 수탈을 위한 말단조직들을 만들면서 국가권력의 의지가 마을 단위에서까지 강력히 관철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런 농촌 마을의 환경 변화가 국가권력의 침투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로 전쟁 이전 각 마을 공동체가 안고 있던 갈등이 현명하게 해소되지 못하고 한국전쟁 기간에서야 비로소 상호 학살의 형태 표출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예컨대 이 책에 소개된 반촌마을과 민촌마을이 충돌했던 부여군의 두 동족마을의 사례를 보면, 제도로서의 신분제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반촌 주민들은 공공연히 민촌 주민들을 하시(下視)하고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해왔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국 민촌 주민들의 불만은 한국전쟁기에 폭발했고, 좌우익으로 갈라선 두 마을은 거듭된 학살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또한 당진군 합덕면의 주민들 간의 대립은 지주와 머슴 간의 갈등, 마을 간의 농수와 소작지를 둘러싼 갈등, 경쟁 집안 간의 갈등 등 해묵은 갈등들이 전쟁기에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이다. 저자는 이처럼 잠재되었던 마을 주민들 간의 갈등의 틈을 남북의 국가권력이 잘 파고들어 이용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실제 인민군들은 마을의 하층민과 소외됐던 신분 계층을 이용하여 자주 인민재판을 진행시키곤 했다.


기성 학계의 한국전쟁기 민간 차원의 충돌 원인 연구는 재검토 필요
계급·이념 갈등보다는 친족·마을·신분 간 갈등이 더 중요


저자는 마을 학살 사례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기존 한국전쟁 연구가들이 민간 차원에서 벌어진 학살을 주로 계급·이념 갈등으로 국한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고 강한 의문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실제 저자가 연구한 마을의 사례들은 지주―소작인 간의 계급 갈등 외에도, 친족 내부의 갈등, 마을 간의 갈등, 기독교도와 사회주의자 간의 종교·이념 갈등과 같은 ‘복합적 갈등구조’를 띠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저자는 한국전쟁 연구의 고전이 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 남부지방에서 일어난 지방 봉기의 원인을 지주―소작인 간의 계급 갈등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에 대해 재고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부르스 커밍스가 주장한 갈등 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관련 연구를 여전히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일제하의 지주-소작관계에 주목하고, 이러한 오래된 계급관계에 기초한 깊은 원한은 해방 이후 남한에 혁명적 정세를 조성하였다고 보았다. 특히 1946년 10월 남부 지방의 봉기에 대해 이를 ‘추수봉기’라고 이름을 붙일 정도로 지주-소작인 간의 계급관계를 중시하였다. 하지만 1946년의 10월 봉기는 지주-소작인 간의 갈등과는 별 관계가 없었다. 그것은 오히려 미군정의 공출제 실시나 친일경찰의 횡포 등에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브루스 커밍스를 비롯하여 많은 이들은 흔히 한국전쟁기에 가난한 소작농민계급이 지주층을 상대로 계급투쟁을 벌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를 증명하는 연구는 아직 찾아보기 어렵다.(본문 p.222)

이는 우리 학계가 지금까지 한국전쟁에서의 민간 차원의 내전 연구를 깊이 있게 다뤄오지 못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구체적인 마을 사례까지 내려간 정밀한 연구 없이, 기존 학계의 주장을 단순하게 되풀이해 온 것이 아닌가 반성할 대목이다. 저자는 그간 연구한 마을 사례를 종합해보았을 때, 이념과 계급의 갈등보다는 친족, 마을, 신분 간의 갈등이 민간 차원의 학살에서 보다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저자는 여기에 대해서는 더 치밀하고 깊은 연구가 필요하며, 이것으로 앞으로 마을을 중심으로 한 한국전쟁의 미시사 연구가 더 활발히 진행될 때 풀릴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에 벌어진 마을 학살 사건은 저자에게 오늘날의 한국사회를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수많은 희생자를 낸 ‘마을에서 벌어진 작은 전쟁’은 곧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누적된 우리 사회의 여러 갈등과 모순들이 폭발한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남북분단은 마을 내의 갈등을 차근차근 해소할 기회를 주지 못했다. 그렇게 갈등을 현명하게 풀어내지 못한 마을들은 국가권력의 침투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고, 극단적인 학살로 이어졌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오늘날 한국 사회를 돌아보며 하는 다음 말은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어느 사회든 갈등이 없는 사회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갈등을 어떻게 현명하게 풀어가느냐 하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그러한 점에서 미숙했으며, 그 결과가 그토록 엄청난 비극을 가져오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이 책을 쓰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이다. (……) 오늘날 우리는 남북 간의 갈등, 남한 내 각 사회집단 간의 갈등을 과연 얼마나 현명하게 풀어가고 있을까? 한국 사회는 갈등을 대화와 타협으로 풀기보다는 여전히 힘으로써 상대를 굴복시키는 데 익숙한 것은 아닐까?” (책머리에 p.11)


각 장에서 다루는 주요 학살 사건

1장 진도 동족마을 X리의 친족 학살
5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진도의 현풍 곽씨 동족마을은 선대에 후손들이 갈라지면서 장파, 중파, 계파의 소문중을 형성했다. 이들 소문중 가운데 중파는 좌익, 계파에서는 우익으로 간 이들이 많았다. 그러다 한국전쟁 초기 계파 쪽의 경찰이 중파 쪽 인물인 마을의 보도연맹원 5명을 학살하면서 그 갈등이 폭발하였다. 보도연맹원의 유가족들은 인민군들을 앞세워 우파 쪽에 보복을 시작했고, 특히 인민군이 철수하게 된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우파에 대한 대대적인 처형이 자행되었다. 거꾸로 경찰이 들어온 뒤에 이번에는 좌파에 대한 보복학살이 일어났다. 이렇게 한국전쟁기 이 마을에서는 인민군과 좌익 측에 의해 희생된 이가 110명, 입산한 이들이 37명, 경찰과 우익에 의해 희생된 이가 20명으로 모두 167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2장 영암군 영보마을의 노노동 학살
한국전쟁 때 영보리 내에서 있었던 큰 사건은 노노동에서의 학살이었다. 1951년경 유격대들이 야간에 내려와 식량을 요구하자 쌀가마니를 내어준 이가 있었다. 그런데 그 쌀가마니에는 쥐가 쏠아서 생긴 작은 구멍이 있었다. 유격대는 쌀가마니를 지고 금정 쪽으로 들어갔다. 당시에는 그런 일이 있으면 반드시 경찰에 신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마침 비가 와서 가마니 구멍으로 땅에 떨어진 쌀이 불어 있었기 때문에 경찰은 쉽게 유격대를 추적할 수 있었다. 결국 경찰은 유격대가 숨어 있는 곳을 찾아냈고 유격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자 유격대 쪽에서 쌀을 내어놓은 이가 고의로 가마니에 구멍을 뚫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보복 행동으로 이어졌다. 결국 유격대는 야간에 마을을 습격하여 세 가족 18명을 살해하였다고 한다. 이는 한국전쟁기 영보에서 있었던 가장 큰 학살 사건이었다.

3장 부여군의 두 동족마을
부여의 한 평민 동성마을(A마을)은 오랜 세월 동안 이웃한 양반 동성마을(B마을)로부터 핍박과 설움을 당해왔다. 그리고 양반 동성마을은 해방 이후 우익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던 반면, 평민 동성마을은 식민지시기부터 사회주의운동을 해왔고, 해방 이후에도 좌익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전후하여 평민 동성마을의 좌익 활동가들은 이웃한 양반 동성마을의 우익 활동가와 경찰에 쫓기게 되었고, 결국 주요 인물들은 마을을 떠나 피신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A마을 가운데 보도연맹에 가입되어 있던 이들 4명이 낙화암으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그 뒤 인민군이 들어오자 이들의 유가족은 B마을의 이장과 우익청년단 관계자를 인민재판에 부쳐 처형하였다. A마을 사람들은 이 마을이 속한 면의 면당 위원장, 치안대장 등을 맡았다. 하지만 그해 9월 말 인민군이 물러간 뒤 A마을의 성인들은 경찰과 B마을 주민들에 의해 모두 체포되어 경찰에 연행되었다. 그리고 B마을 사람 둘을 처형한 사건과 관련하여 10여 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결국 6명이 처형되거나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또 면당위원장, 치안대장을 지낸 이들도 모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4장 당진군 합덕면 마을
당진의 합덕면 H마을은 천주교 신자 마을이었다. 합덕천주교회는 구한말에서 일제시기에 걸쳐 서울의 천주교구로부터 위탁을 받아 합덕면 일대에 대규모 토지를 사들였다. 1950년 농지개혁 당시 천주교회의 소유 토지는 195정보에 달했다. 합덕성당은 성당 바로 앞의 H마을에 농민들을 모아 교회의 땅을 소작시키면서 집까지 제공하였다. 대신 농민들은 천주교 신자가 되어야 했다. 기존의 천주교인 혹은 가난한 농민들이 이 마을에 모여들었고, 이 지역은 결국 천주교 신자들의 마을이 되었다. 이 마을 농민들은 비교적 안정적인 소작권, 그리고 각박하지 않은 소작료 수취 등으로 인해 자기 땅을 사들여 자소작농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또 지역 사회에서 합덕성당의 외국인 신부의 위세는 대단하여 일본인 경찰들도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H마을은 점차 보수화되어갔다. 해방 이후에는 일부 농민들이 우익청년단에도 참여하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 합덕에 진주한 인민군은 자신들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신부와 신도회장, 복사 등을 붙잡아갔다. H마을 주민들도 마을 안에 인민위원회 등 협조 단체를 만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인근의 Y마을 주민들은 H마을을 우익마을로 간주하고 있었고, 결국 인민군 철수 시 H마을을 습격하여 주민 8명을 끌고 가 처형하였다. 9ㆍ28서울수복 이후 경찰이 진주하자 이번에는 H마을에서 Y마을을 포위하고 주민들 대부분을 끌어다 징치하였고, 상당수가 경찰과 우익청년단에 넘겨져 다시는 마을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5장 금산군 부리면의 두 양반가문
금산군 부리면은 28개 마을이 대부분 동족마을인 특이한 지역이다. 그 가운데 가장 세력이 큰 성씨는 길씨와 양씨였다. 이들은 모두 이 지역에서 가장 유력한 양반 성씨였다. 이들 두 성씨는 오랫동안 서로 경쟁과 협력의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런 가운데 1920~1930년대 길씨 집안 청년들이 사회주의운동에 관계하였고, 이는 해방 이후의 좌익운동으로 이어졌다. 반면 양씨들은 해방 이후에 우익으로 기울어졌다. 하지만 양자 사이에 커다란 충돌은 없었다. 인민군 치하에서 권력을 잡은 길씨들도 양씨들에게 큰 보복은 하지 않았다. 인민군이 후퇴한 뒤 양씨들도 길씨들에게 큰 보복은 하지 않았다. 이는 두 집안이 사돈관계 등으로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1월 1일 우익들이 면민대회를 열어 주민들의 단합을 과시한 소식이 인근의 빨치산들에게 전해지자, 그날 밤 빨치산들은 부리면을 습격하여 78명을 학살하였다. 특히 이 과정에서 면민대회를 주도한 양씨가의 사람들이 큰 희생을 치렀다. 그리고 우익 쪽의 길씨들도 피해를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