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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을 통치했던 창녀, 비잔틴 제국의 황후]테오도라Theodora (6th century)

Bawoo 2019. 7. 25. 22:17


Theodora
Augusta
Meister von San Vitale in Ravenna 008.jpg
Depiction of Theodora from a contemporary portrait mosaic in the Basilica of San Vitale, Ravenna

The Empress Theodora at the Colosseum, oil painting by Jean-Joseph Benjamin-Constant


Theodora (/ˌθəˈdɔːrə/; Greek: Θεοδώρα; c. 500 – 28 June 548) was empress of the Eastern Roman Empire by marriage to Emperor Justinian I. She was one of the most influential and powerful of the Eastern Roman empresses, albeit from a humble background.[1] Some sources mention her as empress regnant with Justinian I as her co-regent. Along with her spouse, she is a saint in the Eastern Orthodox Church, commemorated on November 14.

Bust of Theodora - Museo d'arte antica -Milan 2014 (2).jpg
Bust of a Byzantine empress, possibly Theodora. 6th century.

Museum of Ancient Art in the Castello Sforzesco in Milan, Italy.


Depiction of Justinian from a contemporary portrait mosaic in the Basilica of San Vitale, Ravenna



인류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여왕들과 왕후들을 통틀어도 테오도라만큼 평가가 극단으로 갈리는 사람을 찾아내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성인으로 인정하는 반면 그녀와 같은 시대의 역사가는 그녀를 사악한 악녀이자 방탕한 요부로 매도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창녀였다. '품행이 단정하지 않은 여자'를 의미하는 창녀가 아니라 '매춘을 전문 직업으로 하는 여자'라는 의미의 창녀로, 테오도라는 콘스탄티노플의 이 분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성 중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현대적인 어휘로 해석하자면 극장 소속으로 대중 앞에서 공연을 하는 배우였지만, 당시에는 이 직업이 창녀와 동의어였다. 테오도라의 예를 들자면 그녀의 공연 레퍼토리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레다와 백조〉였다. 그녀와 동갑이었던 역사학자 '캐사리아의 프로코피우스(Procopius of Caesarea)'가 쓴 《비사(Anekdota, Secret History)》에는 〈레다와 백조〉의 공연 내용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비사》는 저술한 지 천 년 넘게 공식적으로 출판되지는 못했지만 분명히 역사책이고 포르노그래피가 아니다.

극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한가운데로 나와 옷을 모두 벗고 나체로 섰다. 몸에 걸친 것은 오직 음부를 가리고 있는 띠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음부를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나체로 공연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겨우 무화과 잎 정도의 리본으로만 몸을 가린 그녀는 무대의 바닥에 주저앉아 등을 비스듬히 기대고 누웠다. 그러면 노예들이 나와 이 열정적인 꽃의 꽃받침 속으로 보리쌀을 뿌렸으며, 그 다음에는 특별한 훈련을 받은 거위들이 나와서 부리로 그 보리쌀을 하나씩 쪼아 먹었다.


유스티니아누스와의 만남

테오도라의 아버지 아카시우스(Acacius)는 콘스탄티노플의 원형경기장에서 곰을 조련하는 사람이었으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그의 어머니는 무희이자 배우였다.

아버지가 일찍 죽자 테오도라는 다섯 살 무렵부터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의 머리에 화관을 씌우고 원형극장에 나가 사람들의 동정심에 호소했다. 테오도라는 두 언니와 함께 무대에 섰으며, 뛰어난 미모와 명랑한 성격으로 열두어 살 무렵부터는 수많은 팬을 거느린 대스타가 되었다.

프로코피우스는 테오도라를 쾌락에 몸을 던진 타락한 여자로 묘사했지만, 그녀의 행적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녀는 일찌감치 열여섯 살 때 이러한 생활을 청산하려고 시도했다. 그녀는 헤케볼루스(Hecebolus)라는 시리아 출신의 장교를 만났으며, 그를 따라 리비아로 갔다. 그곳에서 4년 동안 살았지만 세상이 그녀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헤케볼루스는 테오도라를 학대하다 마침내 그녀를 버렸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콘스탄티노플까지 돌아오는 여비를 벌어야 했다.

테오도라가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오는 길은 멀고 험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도중 알렉산드리아에 잠시 정착했을 때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 고결한 인품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진 콥트 교회의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티모티우스 3세(Timothius III)를 만나 신비한 종교적 체험을 경험한 것이다. 그녀는 뼛속까지 철저한 청색당원각주1) 임에도 불구하고 콥트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단성론자(Monophysite)각주2) 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를 떠난 테오도라는 팔레스타인의 안티오크에서 마케도니아(Macedonia)라는 청색당 소속의 무희를 만났다. 정황으로 볼 때 두 사람은 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음이 분명하다. 마케도니아는 청색당 내에서 마당발이었고 테오도라의 직업은 아직까지는 무희 겸 배우였다. 테오도라는 마케도니아의 소개로 비잔틴 황제 유스티누스(Justinus)의 조카인 유스티아누스(Justianus)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머지않아 황제가 될 운명이었던 유스티아누스는 테오도라와 마찬가지로 청색당 지지자였으며, 테오도라를 만나는 순간 그녀에게 반했다.

스물두 살의 그녀는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시절을 맞이하고 있었고, 유스티아누스는 그녀보다 열여덟 살 위였지만 아직 미혼이었다. 2년에 걸쳐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온 테오도라는 과거의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왕궁 부근의 자그마한 집에서 양털로 실을 짜서 팔면서 검소한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타고난 미모와 발랄한 천성은 여전했으며 거기에다 6년이라는 고통의 세월을 통해 자연스럽게 몸에 밴 성숙한 지혜까지 갖추고 있었다.

테오도라에게 완전히 매료된 유스티아누스는 정식으로 그녀와 결혼하기를 원했지만 몇 가지 장애 요인이 있었다. 당시에는 계급 간의 결혼을 금하는 법률이 있었으며 특히 고급관리의 경우는 결혼 대상을 선택하는 데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는데, 그때 유스티아누스는 내무대신이었다. 그보다도 더 큰 장애 요인은 황후 유피미아(Euphemia)였다. 조카인 유스티아누스의 이야기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주던 황후였지만 테오도라와의 결혼만큼은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반대의 이유

사실 황후의 이러한 태도는 자기모순이었다. 황후 본인이 최하층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황제 플라비우스 유스티누스(Flavius Justius)는 오직 자신의 힘으로만 출세를 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나이수스(현재의 세르비아 남부에 위치한 도시 니시) 부근에서 이스톡(Istok)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평범한 농부였다. 그 지역에 이민족이 침입하자 그는 두 동생과 함께 콘스탄티노플로 피난했다. 여기에서 그는 생계 해결책으로 군에 입대했으며, 직업이 적성에 맞았는지 크게 두각을 나타냈다. 유스티누스는 전투에서 여러 번 뛰어난 전공을 세웠고, 장군을 거쳐 제국의 최정예 부대인 황궁 경비대의 사령관 '코메스 엑스쿠비토룸(Comes Excubitorum)'에 올랐다.

프로코피우스의 《비사》에 의하면, 유피미아 황후의 원래 이름은 암컷 늑대를 의미하는 루시피나(Lucipina)였으며, 이름이 나타내는 것처럼 이민족 출신의 노예였다. 유스티누스는 자기 주인의 첩 노릇을 하고 있던 그녀를 사들여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키고 결혼했으며, 황후라는 지위를 얻을 무렵 보다 종교적이고 로마적인 이름인 '유피미아'로 개명했다고 한다.

유스티누스가 전임 황제 플라비우스 아나스타시우스(Flavius Anastasius)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의외의 일이었다. 여기에 관해서는 두 개의 일화가 전해진다.

아나스타시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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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황제 아나스타시우스는 '신의 뜻'에 의해 후계자가 결정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에게 자식은 없었지만 세 명의 조카가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조카들을 모두 만찬에 초대했다. 당시 로마의 식사 습관은 비스듬히 누워서 음식을 먹는 것이었는데, 아나스타시우스는 조카들을 위해 세 개의 긴 의자를 준비하고 그중 하나에 '제국(Regnum)'이라고 쓴 쪽지를 숨겨 놓았다. 누구라도 그 자리에 앉는 사람이 다음 황제로 지명될 판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세 조카 중에서 두 명이 사촌 이상의 사이였다. 이 두 연인이 한 의자에 앉는 바람에 쪽지가 숨겨진 의자는 공석이 되었다.

아나스타시우스는 다음 황제는 자기의 혈육 중에서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는 밤새워 간절한 기도를 올린 후 그 다음날 누구라도 자신의 방에 처음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황제로 지명하라는 계시를 받았다. 그날 아침 처음 황제를 알현한 사람은 황제가 내린 명령이 제대로 집행되었음을 보고하러 들어온 황실 경비대장 유스티누스였다.

이 이야기의 신빙성에 대한 논란은 접어두더라도 아나스타시우스 황제는 점잖고 나름대로 리더십도 있는 사람이었지만 대단히 유약했으며, 이 이야기가 사실로 믿어질 정도로 단성론에 편향되어 종교 문제에 집착하는 고집스러운 성향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통치 시절에 제국은 페르시아, 불가족과 같은 외부 세력의 도전과 내부의 종교 갈등으로 인해서 위기에 처해 있었지만, 황제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동시대의 연대기 작가 요아네스 말라라스(Joannes Malalas)에 의하면 황제가 서거한 후에도 한동안 후계자는 결정되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황제의 환관 아만티우스(Amantius)는 테오크리투스(Theocritus)라는 인물을 황제로 앉히려는 음모를 꾸미고 유스티누스를 매수하려 했다. 그러나 유스티누스는 아만티우스의 거사 자금을 모두 챙겨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썼다. 드디어 황제를 선출하기 위해서 원로원이 소집되었고 원로원에 인접한 원형극장에는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원로원 의원들이 바깥과의 접촉을 차단당한 상태에서 황제를 선출하는 동안 결정을 기다리던 시민들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나더니 소요로 번졌다. 즉각 황실 경비대가 출동해서 사태를 수습했다. 그러자 원로원은 완전무장한 황실 경비대에 의해 둘러싸인 형세가 되고 말았다. 여기까지는 아만티우스가 쓴 각본 그대로였지만, 황실 경비대는 테오크리투스가 아니라 자신들의 '코메스'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원로원들도 코메스를 연호하는 데 동참하자 유스티누스는 몇 번 사양하다 황제 자리를 수락했다. 아만티우스와 테오크리투스는 다음날 참수되었다.

어쩌면 원로원이 유스티누스를 황제로 선택한 것은 당시의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 그리고 유일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콘스탄티노플에 주둔하고 있던 황실 경비대는 당시 극도로 혼란한 제국에서 유일하게 효율적으로 움직이고 있던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황제가 된 유스티누스와 유피미아 사이에는 후사가 없었고 조카들 중에서 아주 영리한 페트루스 사바티우스(Petrus Sabbatius)라는 소년을 아들처럼 키웠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이 소년은 성장해서 가장 충성스럽고 믿음직스러운 부하이자 조언자가 되었으며, 이 조카는 백부에게 감사하는 의미로 자신의 이름에 '유스티아누스'를 추가했다. 후일 일부 역사가들이 '대제(大帝)'로까지 추앙하는 바로 그 사람이고, 또한 풍운의 여인 테오도라의 평생 반려자이다.

유스티아누스는 유피미아 황후가 생존해 있을 때는 꼼작도 하지 못했지만, 그녀가 죽자 황제를 졸라 계층 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률을 폐기하고 정식으로 테오도라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테오도라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이들은 사이에 딸을 하나 두었는데 일부 역사가들은 유스티아누스의 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테오도라의 전직 이외에 별다른 근거는 없으며 유스티아누스 본인은 언제나 이 아이를 적법한 딸로 대우했다. 이 딸은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유스티아누스는 '준비된 황제'였다. 백부인 유스티누스는 문맹이었고 황제로 임명될 때 이미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였기 때문에 통치의 상당 부분을 똑똑한 조카에게 의존했다. 테오도라와 결혼하고 2년이 지나 유스티누스 황제가 서거하고 유스티아누스가 제위를 계승했다. 후일의 빛나는 업적과는 상관없이 신임 황제와 황후는 그 시대의 신민들로부터 인기를 전혀 얻지 못했다.

전쟁 영웅이었으며 충직한 군인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백부와는 달리 유스티아누스는 젊은 시절부터 백부의 후광을 등에 업고 줄곧 엘리트 코스만 달린 사람이다. 일반 대중들은 이런 사람들을 좋게 보지 않는데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이 유스티아누스에게 드러나는 분위기도 냉소적이고 매정한 것이었다. 테오도라의 경우에도 당시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의 인터뷰가 남아 있을 리 없지만 그 시대 연대기 작가들의 저술로 미루어 볼 때 대다수의 사람들이 '제국의 수치'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테오도라의 업적

유스티아누스 황제의 업적은 크게 세 분야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건축 분야로 그는 이스탄불의 상징인 소피아 대성당의 건축자이다. 이 경이로운 건축물 이외에도 여러 개의 성당들을 새로 건축하거나 대대적으로 재건축했다. 두 번째는 법률 분야였다. 엘리트 법률 교육을 받았던 유스티아누스는 기존의 로마법을 집대성해서 하나의 법체계로 통합하기를 원했다. 우리가 〈시민법 대전(Corpus Juris Civilis; Body of Civil Laws)〉 혹은 〈유스티아누스 법전〉이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는 법전이 치세 초반에 편찬되어 제국 전반에서 시행되기 시작했다. 마지막 분야는 군사 정복으로 '제국 재건(Renovatio Imperii)' 프로젝트를 세우고 비잔틴 제국의 영역을 확장했다.

새로운 건축물, 법전 편찬, 그리고 대대적인 군사원정과 같은 일은 모두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제위를 물려받았을 때 유스티아누스의 재정적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아나스타시우스 황제는 유스티누스에게 32만 파운드 이상의 금화를 물려 주었지만, 재위 말기에 고트족과 페르시아를 동시에 상대해서 힘겨운 전쟁을 치러야 했던 유스티누스는 텅빈 황실 금고를 남겼다.

황제는 새로운 조세 시스템을 세웠다. 전통적으로 로마는 지방의 유력자를 '세리'로 임명해서 이들로부터 세금을 거두고 이들이 다시 일반 시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지만, 유스티아누스는 관리들이 직접 시민들에게 부과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아주 올바른 조치였고 후일 제국의 조세 시스템으로 정착되었지만, 당시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황제는 '카파도키아의 요한네스(Johannes of Cappadocia)'라는 사람을 발탁하여 민정청독(Praetorian Prefect)에 임명하면서 재정적인 난국을 타개했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상당히 거친 성격에 술과 색을 몹시 밝힌다는 단점은 가지고 있었지만, 근면하고 열성적인 관리이며 부패하고는 아예 담을 쌓은 결벽증 환자인 그는 세금을 거두는 문제에 관한 한 최고의 적임자인지도 몰랐다.

유스티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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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과유불급(過猶不及). 요한네스는 독한 사람이었다. 세금을 조금이라도 속이는 낌새가 있으면 무조건 잡아들여 고문하고 악착같이 세금을 징수해 주민들은 밥 먹는 식기까지 내줄 정도로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빼앗기는 일이 속출했다. 그는 일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제국에서 가장 증오받는 사람이 되었다.

황제가 임명한 법무관 트리보니아누스(Tribonianus)의 경우는 요한네스와 반대였다. 〈시민법 대전〉의 편찬을 주도했을 정도로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법률 전문가는 제국에서 발생하는 모든 부패 행위의 근원지였다. 뇌물을 받고 자기 마음대로 법을 적용해 판결을 하면서 사리사욕만 채웠다. 가뜩이나 인기가 없는 황제에게 이런 측근들은 치명적인 존재였다.

테오도라는 언제나 유스티아누스의 가장 강력한 조언자였지만, 치세 초기에는 교회의 통일을 추구하는 황제의 뜻에 반해서 이단으로 몰린 단성론자들을 피신시켜 보호하는 정도 이외에는 자신의 개성을 크게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에게 니카(Nika) 폭동이라고 알려진 일생일대의 위기가 닥쳐오면서 비로소 황제나 그 측근들이나 일반 대중들까지 테오도라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다.

유스티아누스가 제위에 오르고 7년 정도 지나자 사회적인 불만이 팽배해져 폭발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이 상황은 요한네스와 트리보니아누스가 주도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처음에는 불한당들과 불만 세력들이 작당을 했지만 곧 오랫동안 반목해온 녹색당과 청색당이 단합하면서 사태가 크게 번졌다. 결정적인 사건은 황제가 참가한 전차경기에서 발생했다. 이 혼란 사태를 니카 폭동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전차경기에서 응원을 할 때 지르는 '이겨라!'라는 구호가 그리스어로 '니카(Nika)'였기 때문이다.

전차 경기는 중단되고 거리로 나온 군중은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치안대를 습격하여 경비병들을 살해하고, 원로원과 성당을 비롯한 중요 건물에 방화를 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날에 군중들은 경기장에 모여 요한네스와 트리보니아누스의 해임을 요구했다. 황제는 이들의 요구를 수락했지만 난동은 계속되었으며, 점차 황제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그들은 아나스타시우스 황제의 조카인 프로부스(Probus)를 새 황제로 추대했으나 그가 콘스탄티노플을 빠져나가자 그의 집에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사흘째 되던 날 황제는 군중들을 만나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군중들은 오히려 아나스타시우스 황제의 또 다른 조카 히파티우스(Hypatius)를 황제로 옹립했다. 당시 나이가 많았던 히파티우스는 야심이 없는 사람이라 군중들을 피해 다녔는데도 사람들이 그를 찾아내 목마를 태워 경기장까지 데려왔다. 유스티아누스는 콘스탄티노플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테오도라가 강력하게 반발했다.

"자주색이 가장 좋은 수의이다."

이때 테오도라가 인용했다는 고대의 격언이다. 자주색은 황제의 색깔로 다른 사람들은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테오도라가 비록 황제가 피신한다고 해도 자신은 남겠다며 고집을 세우자 유스티아누스는 생각을 바꿨다. 그때 그의 곁에는 충성스러운 내시장 나르세스(Narses)와 막 동방으로부터 개선한 젊은 장군 벨리사리우스(Belisarius), 그리고 문두스(Mundus) 장군과 그가 이끄는 스칸디나비아 용병대가 있었다.

황실 경비대와 용병대는 원형극장을 완전히 봉쇄한 다음 잔혹한 방식으로 폭동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폭도로 규정하고 사살한 것이다. 이날 살해된 사람은 약 3만 명 정도로 집계되었다. 히파티우스는 황제에게로 압송되었다. 유스티아누스는 이 노인이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황제에 추대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를 용서하려고 했지만, 테오도라가 한번 황제로 추대되었던 사람은 언제라도 반란의 핵심이 될 수 있음을 환기시켜 주었다. 히파티우스와 그의 동생 폼페이우스(Pompeius)는 바로 그 다음날 처형되었으며, 소극적으로라도 폭동을 지지했던 원로원 의원들도 모두 추방되었다.

니카 폭동은 유스티아누스에게 도리어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황제가 결코 쉽게 굴복시킬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황제 역시 화해를 모색했다. 요한네스와 트리보니아누스를 복직시키기는 했지만 그들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세금을 조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폭동의 와중에 파괴된 콘스탄티노플을 전보다 더 멋지게 재건하자는 데 의견이 일치하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세운 소피아 대성당도 이 폭동의 와중에 전소되었다. 이런 일이 벌써 두 번째였다. 유스티아누스는 세 번째로 세우는 소피아 성당이야말로 규모나 아름다움에서 기독교 세계 최고의 성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 제국으로부터 최고의 자재들만 모아서 착공한 지 거의 6년 만에 이 성당이 완공되었을 때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성당에 들어가면서 한 말은 매우 유명하다.

"솔로몬이여, 내가 당신을 이겼노라."각주3)

니카 폭동이 진압되고 이어서 페르시아와의 평화협정이 체결되자 유스티아누스는 오랫동안 꿈꿔왔던 '제국 재건'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니카 폭동을 진압하는 데에도 참가했던 장군 벨리사리우스였다. 북아프리카를 장악하고 있던 반달(Vandal) 왕국에서 왕위 찬탈 사건이 일어나자 유스티아누스는 기회를 잡았다.각주4)

벨리사리우스가 파견되었고, 2년 남짓 만에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하는 옛 로마의 북아프리카 영토를 회복했다. 물론 군사적으로 점령된 이 지역을 완전히 속주로 만드는 데는 여러 해와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그러한 업무는 군인의 일이 아니었다. 벨리사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와 프로젝트의 다음 단계를 준비했다. 바로 동고트족이 지배하고 있는 이탈리아 반도였다.

후일 '비잔틴 제국 최고의 명장'으로 평가되는 이 젊은이는 당시 이십 대 중반 정도의 나이였는데, 테오도라는 그에게 젊은 시절 자신의 절친한 친구였던 안토니나(Antonina)를 소개했다. 벨리사리우스는 안토니나에게 빠져서 결혼까지 하기에 이르렀지만, 테오도라의 희망과는 달리 그녀는 이 천재적인 장군의 발목을 잡는 방해물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벨리사리우스에 비해 나이가 최소한 열 살은 위였고, 아버지를 확인할 수 없는 여러 명의 자식까지 거느리고 있었던 안토니나는 스스로를 과거와 단절시킨 테오도라 황후와는 달리 좀처럼 과거의 생활방식을 청산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몰락하여 거지가 된 벨리사리우스. 자크 루이 다비드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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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그의 저서 《비사》를 통해 유스티아누스에게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큰 전쟁을 치르지 않고도 평화롭게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실질적으로야 어찌되었건 형식상으로 동고트(Ostrogoth) 왕국은 비잔틴 제국의 제후국이었으며, 이 왕국은 고트족뿐 아니라 전 게르만의 영웅 테오도리크(Theodoric) 대왕의 외동딸인 아말라순타(Amalasuntha)가 어린 아들 아말리크(Amalic)의 섭정 자격으로 탐욕스럽고 거친 남자들의 도전을 받으며 힘겹게 왕권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말라순타는 동시대의 여성으로는 보기 드물게 지성적인 여성이었으며 유스티아누스와는 자주 비밀 서신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유스티아누스는 비록 만나지는 못했지만 서신을 주고받다 보니 그녀에게 상당한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테오도라 황후의 심기가 상당히 불편했던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왕권을 향한 남자들의 도전이 점점 거세지자 아말라순타는 황제의 도움을 요청했다.

그녀의 아버지 테오도리크는 후일 프랑크나 노르만의 정복 영주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 인물이다. 그는 위대한 전사이기도 했지만 관대한 통치자이기도 했다. 정복한 로마인들의 군대 복무는 금지했지만, 그들을 존중했을 뿐 아니라 행정 업무는 아예 그들에게 위임하였다. 이 때문에 동고트 왕국은 정복 왕조가 흔히 겪는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갈등을 큰 어려움 없이 극복할 수 있었다.

또한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자신을 낮출 줄도 알았다. 아리우스파 기독교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교황의 권위를 지켜 주었으며, 스스로를 '이탈리아의 왕'으로 낮추면서 비잔틴 제국 황제 제논(Zenon)과의 마찰을 피했다. 형식적으로 테오도리크는 제논에 의해 임명된 이탈리아 총독이었으며 자기가 발행하는 주화에도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제논의 얼굴을 새겼다.

테오도리크라는 이름이 갖는 위력은 고트족이나 이탈리아에 사는 로마인들에게 모두 대단한 것이었다. 유스티아누스가 어떤 방식이든 아말라순타와 관계를 맺게 되면 이탈리아의 회복은 그리 어렵지 않은 듯이 보였다. 그런데 이 와중에 공식적으로는 왕이었던 소년 아말리크가 죽고 아말라순타가 감금되는 변고가 발생했다. 새롭게 왕위에 오른 자는 테오도리크의 조카인 테오다하드(Theodahad)로 테오도리크의 유일한 혈육이지만 멍청하고 비겁하며 탐욕스러운 한심한 자였다.

유스티아누스는 즉각 사신을 보내어 아말라순타에게 변고가 발생하는 경우 곧바로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같은 시기에 테오도라도 밀사를 파견해서 아말라순타를 제거해 줄 것을 요청했다. 멍청한 테오다하드도 황제보다는 황후가 더 무서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아말라순타는 암살자들에 의해 교살되었다. 테오다하드는 자신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극구 부인했지만 암살자들에게 포상을 내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결국 제국의 원정군이 출발하게 되었다. 일리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문두스 장군은 육로로 출발했고, 벨리사리우스는 북아프리카를 통해서 시칠리아를 정복한 다음 본토에 상륙했다. 이탈리아 본토 회복은 북아프리카의 경우보다 훨씬 어려웠다. 초전에 달마시아에서 문두스가 전사하는 등 고트족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보다도 더욱 큰 문제는 이탈리아 여러 도시에서 한때는 같은 로마인이었던 사람들의 저항이 거셌다는 사실이었다.

원정군이 갖는 근본적인 문제도 있었다. 유스티아누스 군대의 주력은 잡다한 이민족으로 구성된 용병들이었고 특히 훈족이 많았다. 이들은 기독교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고트족이건 다른 이민족이건 누구에게나 신성한 피난처로 인식되던 성당까지 거침없이 공격해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다. 고트족은 아리우스파이긴 해도 엄연히 기독교도들이었다.

테오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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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경제적인 문제도 더해졌다. 유스티아누스가 효율적인 세금체계를 도입했지만, 제국의 능력으로는 일시적으로 이탈리아를 정복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숱한 이탈리아의 도시들을 방어할 정도로 재정이 풍족한 상황은 아니었다.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유스티아누스의 야심 찬 제국 재건의 계획은 그 시작부터 궁극적으로 실패할 운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벨리사리우스는 이탈리아 전역을 수복하고 고트 왕국을 붕괴시켰다. 그러나 그가 성공할수록 그에 대한 황제의 경계심도 커졌다. 이탈리아를 수복하는 과정에서 벨리사리우스는 고트족으로부터 서로마 제국의 황제를 제의받은 적이 있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유스티아누스는 벨리사리우스가 황제의 지위를 찬탈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감정을 테오도라가 더욱 증폭시켰다.

그녀는 초기의 호감과는 달리 벨리사리우스를 그녀의 경쟁자로 간주했던 것이다. 이 바람에 벨리사리우스는 평생 마음의 고통으로 지고 살아야 할 일생일대의 큰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벨리사리우스의 로마 입성은 교황 실베리우스(Silverius)의 요청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이 교황은 단성론을 철저하게 배격하던 사람이었다. 단성론자인 테오도라는 벨리사리우스에게 압력을 가해 그를 교황에서 몰아내고 후임으로 교황의 특사로 콘스탄티노플에 와 있던 비길리우스(Vigilius)를 임명하라고 종용했던 것이다.

테오도라와 비길리우스 사이에는 테오도라가 그를 교황으로 만들어 주면 그가 단성론을 공식적인 신앙으로 인정한다는 비밀스러운 거래가 있었다. 정통적인 동방정교 신자였던 벨리사리우스는 크게 반발했지만 테오도라는 평생 도움이 되지 않았던 그의 부인 안토니나를 통해 집요하게 압력을 가했다. 결국 실베리우스는 로마가 다시 고트족에게 포위되었을 때 그들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고 교황 자리에서 물러났다. 비길리우스는 그를 조그만 섬에 있는 감옥에 가두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도록 했다.


테오도라에 대한 비난

테오도라는 유스티아누스가 이탈리아를 완전히 수복하는 장면을 보지 못하고 암으로 추정되는 증세를 보이다 죽었다. 마흔여덟 살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였다. 그녀가 죽고 나서 유스티아누스는 유약함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호전적인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관계에서도 돈을 주고 평화를 사는 방식을 택했다. 특히 정통교리와 단성론의 대립이라는 종교 문제에 휘말리면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테오도라가 살아 있을 때에는 정통교리를 고수하는 황제에 대항하여 단성론자들을 보호하는 황후가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가 어느 정도 완화될 수 있었다. 테오도라는 죽기 직전 유스티아누스에게 자신이 위험을 무릅쓰고 온 힘을 다해서 보호했던 황궁 내의 조그마한 단성론자들의 교회를 끝까지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유스티아누스는 이 약속을 끝까지 지켰으며 제국 내에서 전통교리와 단성론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렇지만 바로 이런 태도 때문에 어렵게 확보한 이탈리아에서 제국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축소되었다. 유스티아누스 시절에 비잔틴 제국은 이미 이탈리아 본토를 모두 잃고 시칠리아 왕국만이 영토로 남게 되었다.

테오도라에 대한 비난은 그녀의 출신을 문제 삼아 아주 음란하고 방탕한 여인으로 간주하는 개인적인 것과 이단적인 단성론의 맹신자로 기독교 세계의 통합을 방해했다는 종교적인 문제 두 가지에 집중된다. 그러나 그녀와 유스티아누스를 공격하는 데 첨병 역할을 했던 프로코피우스를 비롯한 소수의 비잔틴 연대기 작가들을 제외한다면 유스티아누스와 결혼한 후의 테오도라에 관해서는 별다른 스캔들을 기록하지 않았다.

종교 문제에 관해서는 평가하기가 대단히 복잡하다. 당시 기독교 세계는 단성론이라는 이단적인 종파가 세력을 넓히면서 대단히 큰 사회적 긴장을 조성하고 있었고, 사회의 통합을 위해서는 먼저 교리의 통합이 시급한 문제였다. 그러나 이 교리의 통합을 이루는 방식을 파문이나 이단 선언, 그리고 권력을 등에 업은 폭력에 의존하는 것이 문제였고, 그 당시의 단성론자들은 분명히 핍박받는 소수였다. 그렇다면 테오도라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자 했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그녀는 상당히 현대 사회에 어울리는 감성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는 자신의 출신을 숨기지 않았으며 당당하게 하층민, 그중에서도 억압받는 하층의 여자들의 권익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따라서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로마 역사가들의 반감이 이민족에 대한 혐오감을 반영한 것이라면, 비잔틴 제국이 최대의 영역을 확보하던 시기에 그 제국의 황후였던 테오도라에 대한 비난과 조롱은 소시민들의 오만한 계급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 시대에 활동하던 대부분의 '배우 겸 무희'들이 그랬듯이 그러한 삶은 그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대부분 명문가 출신인 역사가들은 근거 없는 비난으로 그녀를 매도했다. 그들은 테오도라가 황궁 내에 고문실을 차려놓고 정적들을 잡아들여 고문하고 재산을 빼앗았다고 비난했지만, 누가 언제 얼마 동안 고문을 당해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하지 않고 있다. 그녀의 방탕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유의 포르노그래피적인 기록들은 역사적으로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

테오도라는 역사상 최초의 '여권 신장론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녀에 앞서서 수많은 여성 통치자들이 존재했지만 정작 여성의 권익을 위해 노력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지만 유스티아누스 황제 시절 콘스탄티노플의 원로원은 여성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여러 개의 법률을 제정했다. 그 결과 비잔틴 제국의 여인들은 재산권이나 상속권, 이혼을 제기할 수 있는 권리, 양육권 등 광범위한 부문에서 같은 시대나 그녀의 시대 한참 후까지도 전 세계 어느 지역의 여인들이 누리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축복을 누렸다. 그리 오래 살지 못했던 테오도라가 그들을 위해 남겨 준 선물이었다.


 글:김후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대우그룹 기획조정실에서 근무했으며, 대우조선과 대우통신에서 홍보 및 광고 분야에서 일했다. 저술 및 번역, 출판기획 분야에 관심을 기울..펼쳐보기


출처

불멸의 여인들
불멸의 여인들 | 저자김후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역사를 개척한 위대한 여인들! 우연히 모든 조건이 맞아 힘들이지 않고 인생을 산 사람들이 아닌, 치열하게 투쟁하여 그 결과 권력과 명예를 얻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펼쳐보기


[참고]테오도라에 관한 이야기는 "시오노 나나미"의 책 "로마인 이야기"에도 상세히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