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인터넷 교보문고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박서보는 20세부터 평생 작가로만 치열하게 살아왔다. 잘 팔리는 그림으로 전향하자는 유혹이 없지 않았지만, 자존심이 센 박서보는 철두철미 반골로 일관했다. 일반적인 의식을 한 발 앞서 전위적 미술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달픈 일인지 잘 알면서도 시대를 거스를 수 없다는 신념으로 우직하게 한길만 걸었다. 지금의 단색화 열풍은 그의 참된 노동과 우직함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자본주의에서 불어오는 미세먼지 같은 것이다.
박서보는 우연히 캔버스 위에서 ‘비움’의 방법론을 터득하고 그것을 자신의 시그니처 작업으로 올곧게 진행시켰다. 흰색 물감을 바른 캔버스 위에 연필로 반복해 선을 긋고, 다시 그 위에 흰색 물감을 발라 선을 지운 뒤,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한가득 선을 그으면 지우고 그은 뒤 또 지웠다. 이것을 ‘묘법’이라 부르고, 불혹의 시간을 오롯이 묘법을 하며 보냈다.
박서보는 “아무래도 살기 위해 다시 작업을 해야만 한다”고 말하며 다시 작업실에 있다. 구순을 바라보는 그의 머릿속은 하루 종일 작업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 있으며, 창조 욕구로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 박서보는 팔의 힘을 기르기 위해 캔버스를 직접 만들고 망치질을 한다. 집게로 캔버스 천을 잡아당긴 날이면 손은 어김없이 떨려서 들고 있는 수저로 저녁 테이블을 두드리는 드러머가 된다. 사실 아무도 그가 작품을 끝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연필을 깎는 그의 떨리는 손에는 무기를 닦으며 전쟁터로 나갈 준비를 하는 노장의 비장함이 서려 있다.
저자 : 박승숙
홍익대학교 예술학과와 동 대학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The School of the Art Institute of Chicago에서 미술치료 석사과정을 마쳤다. 20년간 국내에서 미술 치료사로 일하면서 행복하게 글을 쓰고 교육자로 일했다. 현재는 더 중요하거나 더 재미난 일을 하려고 준비 중이다.
목차
작가의 말 ㆍ 4
프롤로그
광기의 시대를 건너는 법 ㆍ 12
단색화 열풍 ㆍ 18
행위의 반복성과 무목적성 ㆍ 20
세상을 다시 담다 ㆍ 25
제1부 나를 찾아가다
꼬마 재홍
큰 인물이 될 거요 ㆍ 33
편애는 차례대로 ㆍ 35
걱정스런 녀석 ㆍ 37
게으름을 깨닫다
전쟁의 충격 ㆍ 41
국민방위군 ㆍ 48
홍대 전시학교 ㆍ 56
‘나’는 누구인가ㆍ
다시 배지를 달고 ㆍ 60
도망자, 서보 ㆍ 67
수덕사에서 김일엽을 만나다 ㆍ 74
발동을 걸다
사이다 발언 ㆍ 78
안국동파 ㆍ 81
뭉치고 갈라지고 시끄럽고 ㆍ 85
제2부 기회를 잡다
운명의 여인
그녀가 서보 앞에 ㆍ 107
얼결의 프러포즈 ㆍ 111
번갯불에 콩 볶듯 ㆍ 118
가장으로서의 책임
준비되려면 너무 먼 당신 ㆍ 126
파리로 가다 ㆍ 133
창피한 옐로
일이 꼬이다 ㆍ 139
그래도 작업은 계속되고 ㆍ 145
제3부 나만의 것을 만들다
혈기지분
나를 위한 친구, 김창열 ㆍ 163
좌충우돌 깃발 경쟁 ㆍ 169
아내를 함부로 하지 마라 ㆍ 184
유일한 어른, 김환기 ㆍ 190
체념과 포기를 배우다
묵묵한 그대 덕에 ㆍ 197
나만의 작업을 찾아서 ㆍ 201
서로 필요했던 사람, 이우환 ㆍ 220
개천에서 들키다 ㆍ 226
모순 속 총화단결 ㆍ 234
시그니처를 작성하다 ㆍ 247
현대미술 운동을 하다
가족의 변화 ㆍ 263
박서보 사단 ㆍ 267
제4부 색을 발견하다
최루탄과 함성 속에서
한지를 만나다 ㆍ 279
홍대에 발이 묶여 ㆍ 292
사방으로 뻗는 힘 ㆍ 300
풍토성과 한국적인 것 ㆍ 31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ㆍ 313
사실은 형님이던 정창섭 ㆍ 319
정겨운 친구, 윤형근 ㆍ 326
기쁜 날이 오고야 말리니
평생의 작업실 ㆍ 334
색을 구하다 ㆍ 342
에필로그
삶의 가치와 행복 ㆍ 355
온전함과 완벽함의 사이에서 ㆍ 358
눈물을 허락한 아버지 ㆍ 363
권태를 모르는 노동자 ㆍ 366
주 ㆍ 373
작품·사진 출처 및 소장처 ㆍ 376
책 속으로
첫 등록금을 받아 의기양양 서울에 올라간 재홍은 회현동에 사는 친척 아주머니 댁에 머물며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홍대 미술과는 용산구 효창동의 원효사에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요인 백범 김구가 국가 재건을 위해 인재를 양성하고자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설립했던 곳이다. 그가 암살되는 바람에 2년 만에 해체되고 홍익재단이 그 본부를 매입했다. 1949년 법학부, 문학부, 초급 대학부의 4년제 사립대학으로 인가를 받은 홍대는 조각가 윤효중이 문교부에 힘을 써서 문학부 내에 미술과를 설치하게 되었다. 당시 이화여자대학교와 숙명여자대학교를 제외하면 남자가 갈 수 있는 미술과는 서울대학교와 홍대 두 곳뿐이었다. 재홍은 1950년 홍대 문학부 미술과 2기 3명 중 1명으로 입학했다. 당시 이름을 날리던 청전 이상범과 고암 이응노 밑에서 그림을 배우는 것이 재홍은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걱정스런 녀석」(본문 39~40쪽)
김일엽과의 문답은 오랫동안 서보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하지만 마음에 더 와닿았던 것은 당시 유행하던 실존주의 철학이었다. 친구에게서 카뮈의 책을 빌려 읽으면서 서보는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에 동일시했다. 아프리카 해변에서 엉뚱한 사람에게 방아쇠를 당기던 뫼르소의 등 뒤로 쏟아져내린 뜨거운 햇살이 자기 등에도 느껴지는 듯했다. 천천히 당기는 손가락을 자극하는 방아쇠의 저항도 제 것인 양 실감났다.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면 난해한 줄거리지만, 그 기분만큼은 알 것 같았다. 명동과 을지로의 술집이나 다방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대학생과 예술가에게 프랑스의 실존주의는 전쟁의 벼랑 끝에서 그들이 맞닥뜨렸던 ‘생존’의 문제를 건드렸고 ‘부조리’를 인식시켰다. 「수덕사에서 김일엽을 만나다」(본문 77쪽)
그래도 파리에서 체류가 길어지니 순간순간 울적해질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센강가에 하염없이 앉아 아내와 아들을 생각했다. 숙소로 돌아오면 그 마음 그대로 종이에 센강의 풍경을 유화로 옮겼다. 그것을 본 리아가 너무 좋다고 감탄했다. 그런 그림만 그린다면 자기가 다 팔아줄 수 있다고 장담하며 서보에게 파리에 남으라고 했다. 가족도 파리로 데려올 수 있게 해주겠다고 설득했다. 하지만, 서보는 거절했다. 자신은 추상미술의 길을 걷기로 작정한 사람인데, 그런 구상 그림을 팔려고 그렸다는 것이 알려지면 두고두고 오명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작업은 계속되고」(본문 146~148쪽)
서보의 곁에는 끝까지 남은 속 깊은 친구가 많지 않다. 서보의 혈기지분(血氣之憤)에 치명적으로 다치는 일 없이, 그의 혈기가 더 생산적인 것을 향하도록 방향을 잡아주면서 젊음을 아낌없이 투자한 김창열은 현대미술의 불모지에서 서보가 제 일을 다 할 수 있게 하늘이 준비해준 선물 같은 친구였다. 물론 서보도 창열에게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제 속을 터놓고 흉 없이 지낼 수 있었던 편한 친구였고, 좋은 라이벌이었다. 둘은 서로의 작업을 지켜보고 격려하며 각자 자기만의 정체성을 찾아나가 훗날 한 ...사람은 물방울로, 한 사람은 묘법으로 서로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올릴 작품을 들고 다시 만난다. 「좌충우돌 깃발 경쟁」(본문 183~184쪽)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우환은 심한 고문과 폭행으로 이러다 내가 죽겠구나 생각했다. 그 순간 남산에서 풀려났다. 떠나기 전 중앙정보부 사람이 여러 장에 빼곡히 볼펜을 꾹꾹 눌러쓴 달필의 편지를 보여주었다. 서울에서 우환의 행적을 일일이 해명하며 우환이 세계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예술가이며 한국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인지 구구절절 호소하는 서보의 탄원서였다. 세상에 자기편이 있다는 벅찬 감정을 안고 우환은 서보의 새집으로 왔다.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며 서보의 집에서 며칠 동안 명숙의 도움을 받아 몸조리를 했다. 서보와 우환 둘 다 남산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입을 다문다는 각서를 쓰고 나왔기 때문에 어디에도 하소연을 하지 못했다. 얼마나 무서웠냐, 아팠냐, 가혹했냐 서로 묻지도 못했고, 위로도 해줄 수 없었다. 「모순 속 총화단결」(본문 239~240쪽)
서보는 일단 한지로 바닥지를 만들어보았다. 방의 온돌을 뜨끈하게 해놓고 한지를 원하는 폭으로 접어 물칠을 해서 찢었다. 한 장 한 장 오공본드를 칠해 3겹지 3장을 배접하고 따끈한 온돌에 잘 펴서 말렸다. 안료 색이 강조되는 것이 싫어 자연스런 발색(薄色)이 가능한 재료를 고민하다가, 을지로 시장에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파는 곰방대에 넣고 피우는 ‘장수연(長壽煙)’이라는 담배를 사왔다. 금연시대인 지금으로 치면 황당한 이름인데, 아무튼 장수연을 물에 끓여서 액을 냈다. 안성 작업실 주변에서 뽑은 쑥도 삶아 물을 내 그 두 액을 큰 통에 섞고 먹물을 뿌려 물감 대신 써보았다. 먹을 직접 갈지 못하고 먹물을 사다 썼더니 나중에 썩은 냄새가 났지만 색감은 좋았다. 「한지를 만나다」(본문 288쪽)
그때부터 서보는 자유분방해서 힘이 많이 드는 지그재그 작업을 줄이고 직선을 내려 긋는 작업으로 바꾸었다. 한지를 찢으면서 밑으로 내려와 맨 끝에 물방울처럼 종이가 뭉치는 작품이 한동안 지그재그 작업과 겹쳤다. 하지만 종이 뭉친 자욱이 괜한 첨언(添言)처럼 느껴져서 그 작업은 조금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 대신 한 줄로 일정하게 내려 긋는 작업은 계속 이어갔다. 몇 십 번을 왕복해서 긋자 종이가 양옆으로 밀려 골이 패이고 밀린 종이는 선(線)이 되었다. 내려 긋는 것은 가로로 긋는 것보다 팔의 움직임을 조절하기 어려워서 서보는 캔버스를 90도 돌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선을 그었다. 겹친 한지가 연필에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한지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붙였고, 한 줄씩만 조금씩 붙여 물을 뿌려가며 작업했다. 물감은 아크릴을 개어 썼고, 색상은 블랙 계통으로 작업했다. 1999년부터는 화이트 계통의 작업이 섞였고, 레드는 2000년부터 등장했다. 2003년부터 블랙은 제작이 멈추었다.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본문 315~316쪽)
서보는 대신 다른 작업에 몰두했다. 여전히 작업실에 매일 나와 책상에서 묘법을 디자인했다. 예전처럼 혼자 작업하면서 즉각적인 감에 따라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전에 미리 전체 이미지를 그려보는 것이 필요했다. 승호가 컴퓨터로 만들어준 모눈종이를 판화공방으로 보내 4절보다 조금 더 큰 아르슈지에 석판으로 찍게 했다. 그런 다음 묘법의 구도와 형태와 명암을 상상하면서 그 위에 연필로 초벌 그림을 그렸다. 문방구에서 볼펜 지우는 화이트 용액을 사와 모눈종이의 선들을 지우며 물감 대신 썼다. 「색을 구하다」(본문 348쪽)
출판사서평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는 화가 박서보!
“변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그러나 변하면 또한 추락한다.”
2019년 5월 18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박서보의 대형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이번 회고전의 제목은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다. 70여 년의 화업(?業)을 정리하는 이번 회고전에서는 1950년대 초기작부터 신작 2점까지 총 160여 점을 만날 수 있다. 박서보는 한국 추상미술의 선두주자다. 1957년에 발표한 작품 <페인팅 NO.1-57>(본문 13쪽 작품)은 국내 최초의 앵포르멜 작품으로 꼽힌다. 2016년에는 한국 화가 중에서 최초로 영국 런던 화이트큐브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의 작품은 현재 미술 경매시장에서 100만 달러(약 10억 원) 이상에 거래되고 있다.
박서보는 그 유명세에 비해 작품은 영 안 팔리는 작가로 알려져 있었는데, 2014~2015년에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10억 원을 넘겼다는 소식이 들렸다. 신문마다 스포츠 기록 갱신처럼 박서보와 ‘단색화’ 작가라고 묶인 동료 화가들의 경매가를 앞다투어 소개하기 시작했다. 미디어는 연일 ‘단색화 열풍’을 떠들어댔고 누구는 한국 미술이 세계적 브랜드를 낳았다고 칭송했다. 한편에서는 그 ‘거품’을 걷어내려고 관련 작가들을 매섭게 비평하고 재조명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그러나 미술 작품이 세상 밖으로 나가면 제 나름의 여정을 밟으며 흥망성쇠를 하는 법이다. 작가의 노력과 상관없이 미술시장에서 급작스럽게 벌어진 이러한 기이한 현상은 한동안 사람들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박서보는 “변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그러나 변하면 또한 추락한다”고 말한다. 일찍이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술적 즉흥이라는 것은 진지한 태도로 노력하여 엄선된 예술사상과 비교한다면 낮은 자리에 위치한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는 고안해내는 일뿐 아니라 내버리고, 검토하여 정리하며, 수정하고, 정돈하는 일에서도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다.” 박서보는 ‘권태를 모르는 노동자’다. 70여 년의 화업이 말해주듯, 박서보는 20세부터 구순을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작품 활동을 한다. ‘수신(修身)과 치유’를 위해, ‘자기 자신을 부정하며 포기’해나가기 위해서 말이다.
20년간 미술 치료사로 일해온 박서보의 딸인 박승숙이 그런 아버지의 삶과 예술을 정리한 책을 집필했다. 박승숙은 아버지와 똑같다는 어머니의 말이 오해임을 증명하기 위해 아버지를 거울삼아 반대로만 살려고 애썼다고 고백한다. 아버지의 딸인 것이 싫었고, 창피했고, 아버지와 관련된 일마다 무심했고, 어디에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그런데 남보다도 몰랐던 아버지의 삶과 예술을 처음으로 깊이 들여다보니, 그동안 의아하고 이해할 수 없었던 많은 것이 이해되었다고 말한다. 아버지에 대해 공부한 시간은 딸인 저자에게 용서와 화해의 시간이자,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깨닫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딸이 쓰는 화가 아버지의 진짜 모습
...
저자는 자신이 끔찍하게 여겼던 아버지의 캐릭터도 알고 보니 아버지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박서보가 살아낸 시대가 박서보에게 남겨놓은 흔적이고, 그 시대 모든 어른이 조금씩 분유(分有)하고 있던 특성이었다. 그런데 박서보에게 따라붙는 전형적인 해시태그가 많은데, 그것들이 박서보 개인의 고민이나 갈등, 포부와 좌절, 집념의 행적을 덮고 있는 듯했다. 한 인간이 자신의 시대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어떤 인연들을 만나 자기를 만들어갔는지 들려줄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 시대가 그러했듯, 박서보의 전 생애는 노동사이며, 지금은 그 가치가 현대미술에서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박서보와 그 동료들에 대해 시대사적으로 올바로 이해해야 그들에게 무엇을 책임지라고 비난하고 무엇을 감사히 여길 것인지 제대로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6?25전쟁에서 부친을 여의고 모든 게 엉망이던 시대를 살아내면서 박서보는 자신의 에너지를 통제하는 법을 차분히 배우지 못했다. 워낙 다혈질에 기운이 뻗쳐서 좌충우돌했고, 많은 사람을 곤란하게 한 것은 물론 자신도 그 결과로 늘 당황하고 아파했다. 묘법이 박서보의 인격 수양으로 이어졌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 과정조차 없었으면 그 시대에 박서보는 자기 에너지에 스스로 치여 광기를 보였을지도 모른다. 충분히 그럴 만한 삶이었고, 시대가 그랬으며, 그런 사람이었다. 박서보가 살아온 시대도 그랬다. 흑백논리로, 적군과 아군으로 세상을 가르느라 바쁘기만 했던 시절이다. 박서보는 그 속에서 너무 빨리 어른이 되었고, 세상을 보는 법이나 상처에 대응하는 법을 가르쳐줄 만한 어른을 곁에 두지 못했다. 스스로 성숙해질 기회가 없지는 않았으나, 그러기에는 박서보 개인이 가진 한계가 컸다.
박서보는 온전함과 완벽함을 혼동해서 평생 자기가 자신을 인정하지 못해 내달리기만 했다. 박서보에게 성공은 자신이 생각하는 ‘완벽함’이었다. 박서보는 자기가 갖고 있는 인간적인 부족함과 흠을 덮느라고 자신이 내세우고 싶었던 놀라운 면만을 사람들 앞에 줄기차게 내세웠다. 하지만 자기가 인정하고 있는 자기만 알아달라고 외친들 사람들은 자기 눈에 들어오는 전체로 그 사람을 볼 수밖에 없다. 박서보는 입 다물어준 사람에게는 고마움을 느끼지 못했고, 도와준 사람에게는 화만 냈다.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박서보가 더 성숙해지지 못했던 이유다.
박서보가 뿌듯해하고 애착하던 자신의 사회적 이미지, 즉 ‘주류에 맞서는 혁명가’, ‘거침없는 행동가’, ‘한국 현대미술의 리더’, ‘18시간씩 작업하며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는 대작 작가’, ‘홍대 미대의 수장(首長)’ 등은 전쟁의 가난에서 지금의 한국으로 급성장하느라 어수선했던 이 사회가 허락하고 부추긴 박서보의 외관일 뿐이다. 그것을 한 꺼풀 벗기면, 거기에는 꼬마 재홍이 숨어 있다. 마음이 유약하고, 소심하고, 겁이 많은 아이 말이다. 눈물 잘 흘리고, 감수성이 풍부하며, 동정심 많던 사내아이. 샘 많고, 관심 받는 것을 좋아하고, 영리하지만 공부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어하고, 친구들을 몹시도 좋아해 따르던 어린 꼬마. 박서보는 ‘단색화 열풍’ 덕분에 말년에 지구촌 예술가 노릇을 하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미술 시장의 복잡한 스토리이자, 박서보의 정체성은 작업실에서 그의 일로만 설명될 수 있다.
그림은 수신과 치유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10여 년 전 뇌경색으로 한 번 더 응급실에 갔던 박서보는 인명재처(人命在妻)를 버릇처럼 읊조리며 작품에서 거의 손을 뗐다. 박서보가 작업의 핵심 행위를 멈춘 2010년 이후의 10년은 박서보에게 덤으로 주어진 시간이다. 이 10년은 인생의 과업이 바뀌고 삶의 가치와 행복이 다시 찾아지는 기점이었다. 사람들은 삶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시간이 생기면 인생을 달리 돌아보기 시작한다. 줄기차게 내달려온 인생에서 자신이 무엇을 잃고 얻었는지 둘러보게 된다. 자신의 역할과 직업이 사라진다는 것은 일종의 축복일 수 있다. 사회적 인물로 살아가느라 평생 일방적으로 강화시킨 일면 뒤에 숨죽이며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또 다른 자신이 있었음을 깨닫는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년의 과업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 통합이라고 한다.
박서보는 원형질 시기와 유전질 시기를 거쳐 1980년대 ‘묘법’을 터득한 이후 그의 화두는 ‘수신’이 되었다. 행위와 정신과 물질이 일체화하는 과정이 작품보다 중요해졌다. 무언가를 그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반복되는 선긋기는 ‘목적 없는 행위’였다. 하지만 이미지를 만들어내려고 하는 목적성을 버렸다는 의미일 뿐, 선을 긋고 지우고 다시 긋는 그 행위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그러다 한지를 만난다. 물에 불린 한지를 밀어보니, 연필로 긋는 행위와 그것이 하나가 되면서 물성(物性)이 더욱 도드라졌다. 한지의 매력에 푹 빠진 박서보는 미는 연필과 밀리는 바닥을 모두 자신처럼 느끼며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후 한지를 배접(褙接)하는 방식이 바뀌고 안료에도 변화가 생기면서 묘법이 변해갔다. 그리고 2000년대에 처음으로 자기 개인을 위한 ‘수신’이 아닌 세상 사람들에 대한 ‘치유’적 효과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색’이 있었다. 다시 말해 2000년대 들자 묘법에 컬러가 강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흑백으로만 이분되었는데, 붉은색으로 시작해 점점 더 색상이 다채롭고 화려해졌다.
박서보가 늙어가니 점점 더 원시적이 되고 어린아이가 되어 그림의 색채가 풍부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노화되면서 생각의 구분과 경계가 뭉개져 더 많은 것을 반영하고 담아내기 시작한 것일 수 있다. 일본 후쿠오카 반다이산의 단풍에 반하고, 한강의 밤풍경에 마음이 설레며, 제주도의 탁 트인 수평선에서 멈춰섰다. 한평생을 자기와만 싸우던 박서보가 노쇠해져 힘을 잃자 혈기가 빠져나간 자리에 아름다운 세상이 다시 들어찬 것이다. 그것은 박서보에게 치유적이었고, 똑같이 남들에게도 치유적으로 다가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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