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chmaninov, Piano Concerto No.3 in D minor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Sergei Rachmaninov
1873-1943
Martha Argerich, piano
Riccardo Chailly, conductor
Radio-Symphonie-Orchester Berlin
1982.12
“라흐마니노프는 강철과 황금으로 만들어진 사람이었다. 강철의 팔과 황금의 심장! 나는 눈물 없이는 전지전능한 그의 존재감을 생각할 수조차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의 탁월한 예술성을 존경했을 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1945년 5월 16일, 요제프 호프만(Josef Hofmann)
1873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1943년 미국에서 생을 마감한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자기 자신을 작곡가라고 생각했지만, 생의 마지막 30여 년 동안에는 자신의 작품을 연주하고 녹음하는 피아니스트라는 두 번째 직업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이역만리 타국에서 생활하기에 작곡가라는 직업은 배가 고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세월 동안 그가 보여준 놀라운 피아노 음악의 경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결국 그를 전설적인 피아니스트로 아로새길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정력적이고 외향적이었던 그의 친구 피아니스트 요제프 호프만에 비해 라흐마니노프는 사색적이고 내향적이었는데, 그가 연주를 시작하면 곧 음표가 구조에 달라붙듯이 청동처럼 견고한 건축물로 변화하였다. 한편 호프만이 자연스럽고 다채로운 음색과 변덕스러울 정도로 거침없는 스타일을 구사한 반면, 라흐마니노프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한결같은 음색과 기계적일 정도로 잘 계산되고 정돈된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그의 사진에서도 느낄 수 있는 수도승과도 같은 이미지, 즉 삭발에 가까운 머리 스타일과 고정된 시선, 굳게 닫힌 입술에서 느낄 수 있는 엄격함은 곧 그의 연주 및 작곡 스타일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피아노의, 피아노를 위한, 피아노에 의한 협주곡’
러시아의 정서와 작곡가의 시정이 매 순간을 아름답게 채색하는 피아노 협주곡 2번이 라흐마니노프를 있게 한 가장 대중적이고 유명한 작품일지는 모르겠지만, 3번 협주곡이야말로 피아니스트로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 초월적 의지를 반영한 작품이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피아노의, 피아노를 위한, 피아노에 의한 협주곡’이다. 오죽하면 작곡가 자신도 이 작품을 “코끼리를 위해 작곡했다.”라며 곤혹스러워했을까.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모든 기교와 작곡역량을 동원해 거대하고 초인적인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완성했다.
1909년 라흐마니노프는 이바노프카의 시골집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면서 자신의 미국 데뷔 무대를 위한 새로운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다. 그러니까 이 3번 협주곡은 순수하게 미국을 위해 작곡한 곡으로 작곡가로서는 자신의 기량을 한 번에 쏟아내어 새로운 무대를 휘어잡을 만한 도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의 바람대로 피아노 협주곡 역사상 무서울 만큼 가공할 테크닉과 초인적인 지구력, 상상을 뛰어넘는 예술적 감수성과 시적 통찰력을 요구하는 매머드급 작품이 탄생했다. 이 곡은 라흐마니노프를 미국으로 이끌었을 뿐더러, 예술적 동료로 평생토록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피아니스트 호프만에게 헌정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호프만은 이 작품을 연주하기에는 손이 작았기 때문에 공개석상에서는 한 번도 연주하지 못했다고 한다.
1909년 11월 28일, 이 곡은 월터 담로슈(Walter Damrosch)의 지휘와 뉴욕 필하모닉의 연주, 라흐마니노프 자신의 피아노 연주로 초연되었고, 7주 후 구스타프 말러의 지휘로 다시 한 번 연주되었다. 작품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은 피아노 협주곡 2번 초연 때만큼 뜨거웠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오히려 연주자 라흐마니노프에게 관심이 집중되며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이날의 성공 덕택에 다음 시즌 연주회를 위한 계약이 쇄도했고,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직책까지 제안 받을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연주하기가 너무나 힘들 뿐더러 그 정서적 표현 역시 당시로서는 대단히 혁신적인 곡이었다. 그래서 대중적으로 어필하기까지에는 1960년대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가 등장할 때까지 50여 년의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선 1928년 한 젊은 러시아 피아니스트가 나타나 이 3번 협주곡을 말 그대로 ‘삼켜버린’ 사건이 벌어졌다.
Horowitz/ Reiner - Rachmaninov Piano Concerto No.3
Vladimir Horowitz, piano
Fritz Reiner, conductor
RCA Victor Symphony Orchestra
1951
추천음반
경쟁자는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평가를 받는 호로비츠의 6종 레코딩 중 2종의 연주를 추천한다. 하나는 1951년 프리츠 라이너의 지휘로 녹음한 스튜디오 레코딩(RCA)이고, 다른 하나는 라흐마니노프와 함께 이 곡을 녹음했던 유진 오먼디의 지휘로 녹음한 1978년 라이브(RCA)이다. 두 연주는 스타일과 해석에 있어 차이가 나는데 전자는 고전적인 반면 후자는 도취적이고 자의적이다. 아시케나지/하이팅크 녹음(DECCA)은 가장 스탠더드한 명연으로 손꼽히며 호로비츠의 재래로 일컬어지는 볼로도스는 러시아 비르투오소를 잇는 우리 시대의 명반이다.
글 박제성(음악 칼럼니스트) <베토벤 이후의 교향곡 작곡가들>의 역자. 클래식 음악 전문지 <음악동아>. <객석>. <그라모폰 코리아>. <피아노 음악>과 여러 오디오 잡지에 리뷰와 평론을 쓰고 있으며, 공연, 방송, 저널활동, 음반리뷰, 음악강좌 등 클래식 음악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