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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

Bawoo 2019. 9. 30. 23:41


출생1732년 4월 5일, 프랑스 그라스
사망1806년 8월 22일,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중요한 시적 화가로 평가받는 18세기 프랑스 로코코 회화의 거장으로 주요 작품은 <그네>. 초기에는 변호사의 도제였으나 곧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프랑수아 부세의 제자가 되었으며 그후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로마 바로크 시기의 작품들을 모사하면서 그림을 공부한 후 살롱전에 데뷔했다. 렘브란트, 루벤스,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그림에서는 인물보다도 환상적인 의상과 장식적인 표현이 강조되었다. 초기의 로코코 회화에서 후기에는 신고전주의적인 주제로 방향이 바뀌었으며, 프랑스 혁명 후에는 점차 잊혀졌지만 후대에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시적 화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

18세기 프랑스 화가이자 판화 제작자이다.

ⓒ Jean-Honoré Fragonard/wikipedia | Public Domain

〈그네 The Swing〉(1766경)와 같이 섬세하고 쾌락주의적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네(The Swing)

1767년 작품

ⓒ Jean-Honoré Fragonard/wikipedia | Public Domain

아버지는 잡화상 점원이었으며 가족이 1738년 파리로 이사했다. 1747년 변호사의 도제로 들어갔는데 그 변호사가 그림에 대한 프라고나르의 의욕을 알아채고 그에게 그림을 배우도록 제안했다. 주위의 설득으로 프랑수아 부셰가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으며(1748경), 1752년 기초 과정이 끝나자 그에게 파리에서 루이 15세의 궁정화가인 샤를 방 로 밑에서 공부할 수 있는 자격을 따기 위해 로마상에 응모하도록 추천했다.

로마상을 받은 프라고나르는 1756년 9월 17일 로마에 있는 아카데미 프랑세즈로 떠났다. 아카데미에서 그는 주로 로마 바로크 시기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많은 그림을 모사했으며, 친구이자 프랑스 화가인 위베르 로베르와 함께 로마 근교의 풍경을 스케치했다. 1759년 7월 장학 기간이 끝났으나 아카데미의 허락을 받아 계속 그곳에 머무르다가 11월 말엽 부유한 미술애호가인 아베 드 생농을 알게 되었고 그뒤 그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1760년초 생농은 프라고나르와 로베르를 데리고 오랫동안 이탈리아를 여행했는데, 이 여행중에 두 미술가는 이탈리아의 회화 및 고미술품들을 연구했으며 지방의 경치를 주제로 수백 점을 스케치했다.

1761년 프라고나르는 파리로 돌아온 뒤 몇 점의 풍경화와 대작 〈칼리로이를 구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시키는 코레소스 Coresus Sacrifices Himself to Save Callirhoe〉를 살롱에 전시했는데 누군가 이 대작을 사들여 루이 15세에게 바쳤다.

칼리로이를 구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시키는 코레소스(Coresus Sacrifices Himself to Save Callirhoe)

1765년 작품

ⓒ Jean-Honoré Fragonard/wikipedia | Public Domain

그결과 그는 이 작품과 한 쌍을 이룰 수 있는 또다른 작품 제작을 의뢰받고 루브르 궁에 작업실을 제공받았으며, 아카데미 회원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1767년 이후 살롱에 작품을 전시하는 것을 거의 중단하고 종종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인 야코프 반 로이스달의 양식을 모방한 풍경화(〈소떼의 귀환 Return of the Herd〉, 우스터)와 초상화 및 부셰의 양식을 따르면서도 그보다는 좀더 솜씨 있게 그린 장식적이고 반(半)관능적인 들놀이 장면(〈그네 The Swing〉)에 집중했다.

1760~67년에 그린 것으로 생각되는 유연하고 활기찬 화풍의 초상 연작(〈노인의 두상 Head of an Old Man〉)을 보면, 그가 렘브란트와 페테르 파울 루벤스, 프란스 할스 및 베네치아의 동시대 화가인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에게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뒤이어 이와 비슷한 양식으로 그린 일련의 초상화(1765경~72)에서 모델은 실제 인물이었지만 얼굴 표정보다는 그들의 환상적인 의상이 강조되었다.

1769년 그라스 태생의 마리안 제라르와 결혼하고 그뒤 곧 상류사회에서 찬사를 받았다.

1770년에 바리 부인의 부탁을 받아 그녀의 새로 지은 루브시엔의 별장을 4점의 대형 그림(〈사랑의 발전 Progress of Love〉, 뉴욕 프릭 컬렉션)으로 장식했으며, 1772년에는 유명한 여배우 마들렌 기마르에게 유사한 주문을 받았다. 이 작품들은 둘 다 성공을 거두지 못했는데, 루브시엔의 그림들은 전체적으로 신고전주의적인 건물에 비해 그림들이 지나치게 로코코 양식을 띠고 있어거절된 것으로 여겨진다.

1772~73년 네덜란드 지방을 여행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렘브란트와 할스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고 그의 후기 초상화들에 이러한 경향이 반영되어 있다. 1773~74년 2번째로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이번에는 채색화보다 소묘로 아름다운 이탈리아의 풍경을 그리는 데 전념했다. 빈과 프라하, 독일을 거쳐 파리로 돌아오는 중에 처제인 14세의 마르게리트가 그들 가족과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프라고나르는 그녀와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

그결과 그는 새로운 주제로 관심을 돌려서 장 자크 루소의 도덕철학이나 낭만적인 소설에서 착안한 가정적인 장면들(〈행복한 가족 The Happy Family〉), 또는 종종 그의 아들 에바리스트(1780 출생)를 주인공으로 해 어린이 교육과 관련된 장면들(〈여교사 The Schoolmistress〉)을 그렸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몇 년 전부터 프라고나르는 결국 신고전주의적인 주제로 방향을 바꾸어 보다 경직된 신고전주의 양식(〈사랑의 샘 The Fountain of Love〉)을 발전시켰는데, 이런 점은 그의 후기 작품들, 특히 마르게리트 제라르와 함께 그린 풍속화들(〈사랑스러운 아이 The Beloved Child〉)에 점점 더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그의 미술은 혁명 전의 시기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어서 혁명기간 동안 그는 환영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후원자들도 잃었다. 처음에 그는 그라스에서 칩거하다가 1791년 다시 파리로 돌아가 그곳에서 중요한 신고전주의 화가인 자크 루이 다비드의 도움으로 박물관을 관리하는 직위를 얻었지만 1797년 이 직위마저 박탈당했다. 그후 그는 여생을 사람들에게 잊혀진 채 거의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서 살았다. 1806년 죽었을 때 그의 죽음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의 작품은 1850년이 훨씬 지나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프라고나르는 와토와 함께 18세기의 단조로운 프랑스 미술계에서 중요한 시적 화가로 평가되고 있다.

놀랄 만큼 활동적인 미술가였던 그는 550점이 넘는 회화와 수천 점의 소묘(그중 수백 점은 없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음) 및 35점의 에칭 판화를 제작했다. 주로 루벤스의 작품에 기초를 둔 그의 양식은 동시대의 화가들처럼 꽉 차거나 지나치게 장식적이지 않았으며, 민첩하고 활기차고 유연했다. 활동기간의 상당 부분이 신고전주의 시기에 속하지만,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바로 전까지 계속 로코코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림들 중 단지 5점만이 연대가 적혀 있지만, 나머지 작품의 연대도 판화나 문서 등의 다른 자료들을 기초로 정확하게 추정되고 있다.


출처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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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작〈코레수스와 칼리로에〉, 〈그네〉, 연작인 〈구애〉, 〈밀회〉, 〈화관 쓰는 연인〉, 〈연애편지〉 등

프랑스 로코코의 마지막 대가로 생기발랄하고 유쾌한 풍속화가 특징이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는 프랑스 로코코의 마지막 대가다. 감성적이며 충동적인 기질을 타고난 예술가로, 1789년 혁명 전 프랑스 상류 계층의 열망과 분위기에 관능과 생기발랄함을 담아 가볍고 유쾌하게 표현했다. 그의 작품들은 ‘장르 갈랑트(genre galante)’ 일명 연애풍속화로 분류되는데, 사랑을 즐겁고 쾌락주의적인 시각에서 대담하게 묘사하고 육체적 에로티시즘을 함축하고 있다. 미술비평가 헤럴드 로젠버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가 그린 세상 속에는 삶의 기쁨, 쾌활함, 솔직함, 행복, 생기가 넘쳐흐른다. 그는 황홀함을 담아 확신에 찬 시선으로 묘사했다.
〈자화상〉

그라스 프라고나르 미술관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8세기 말 사회 체제의 전복을 생각해 보면,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지나치게 근심 걱정 없는 유쾌한 분위기는 오히려 쾌락이나 인생의 아름다움이 짧고 덧없음을 느끼게 한다.

프라고나르는 1732년 4월 5일 프랑스 남부 그라스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장갑을 만들어 파는 제작자이자 상인으로 집안은 그리 풍족하지 않았으며, 6세 때 부모가 돈을 벌고자 파리로 이주하면서 파리에서 성장했다. 13세 때 공증인 사무실에서 사환으로 일하며 돈을 벌었는데, 그런 와중에도 그림으로 명성을 얻겠다는 일념에 화가가 되기로 했다. 14세 때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의 화실에서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17세 때부터는 프랑수아 부셰에게 그림을 배웠다. 그는 특히 부셰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로코코 양식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20세 때 로마대상을 수상했으며, 이듬해부터 프랑스 국립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에서 공부했다. 또한 그는 로마대상 수상자를 이탈리아로 유학을 보내 주는 특전에 따라 24세 때인 1756년 로마로 건너가 아카데미 드 프랑스에서 공부했다. 이 시기에 프라고나르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거장의 작품들, 고대 유물과 유적을 보며 견문을 넓혔는데, 특히 카라치와 티에폴로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또한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하며 스케치를 했는데, 이때 후원자가 되는 미술 수집가 생 농 수도원장 장-클로드 리샤르와 동행했다.

프라고나르는 거장들의 작품에서 많은 배움을 얻었으나, 그럼에도 전통적인 화가 수업 방식인 모사를 극히 싫어했다. 그는 예비 스케치나 밑그림 없이 직접 캔버스에 유화 작업을 했으며, 신속하게 그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때문에 모사처럼 끈기 있고 세심하게 일하는 방식은 그에게 잘 맞지 않았다. 예컨대 1769년 작 〈생 농 신부〉는 한 시간 만에 그렸다는 전설적인 작품이다. 신속하고 두껍게 물감을 칠하고 인물의 세부 묘사는 무시했지만, 인물의 성격과 생동감이 생생히 살아 있다.

1761년, 로마에서 5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온 프라고나르는 자신이 걸어야 할 길에 대해 숙고하게 되었다. 그는 1765년 살롱전에 역사화 〈코레수스와 칼리로에〉를 출품하면서 엄청난 찬사를 받았고, 이로 인해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이 작품은 루이 15세의 왕궁에 걸렸으며, 그는 역사화를 재건할 신진 대가로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그러나 이후로는 역사화를 그리지 않았으며, 국가나 교회 같은 공적 기관의 주문도 거의 받지 않았다. 아카데믹한 종교화나 역사화는 그리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으며, 작업 방식을 비롯해 여러 가지 여건에 제약이 많았는데 이것이 그에게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즐겁고 유쾌하게 작품을 제작하고 싶어 했으며, 명예보다는 환금성이 높은 작품을 원했다. 그리하여 그는 귀족 계층의 취향에 맞는 가볍고 유쾌하며 관능적인 주제를 다룬 장식화로 눈을 돌렸다.

초기에 그는 전원 풍경을 배경으로 가족들의 정겨운 한때를 담은 그림을 제작했다. 그러던 1767년, 프라고나르는 후원자였던 상 쥘리앙 백작으로부터 ‘그네 타는 여인과 자신’을 그려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울창한 숲 속, 두 남자 사이에서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인이 그네 타는 모습을 그린 〈그네〉는 여인의 벗겨진 신발과 바람에 날리는 드레스 자락, 여인의 아래에서 치마 속을 훔쳐보는 남자(상 쥘리앙 백작) 등 에로티시즘과 사치, 쾌락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프라고나르에게 엄청난 명성과 부를 안겨 주었고, 그는 점차 〈셔츠를 벗는 여인〉, 〈입맞춤〉, 〈고대한 순간〉 등 로코코의 에로티시즘을 화려하게 개화시켰다.

〈그네〉

런던 월리스 컬렉션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 프라고나르는 새로운 유형의 인물화를 그렸다. 〈생 농 신부〉, 〈기마르 아가씨〉, 〈음악〉, 〈작가〉, 〈책 읽는 여자〉 등 ‘상상의 인물들(Figure de fantaisie)’이라고 칭해지는 이 유형은 당시 인물의 세부 묘사 및 심미 분석 등에 초점을 맞추던 초상화 양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으며, 특정 모델을 위해 그린 그림도 아니었다. 이 분류로 그린 작품은 총 14점인데, 그중에는 〈음악〉, 〈작가〉처럼 모델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경우도 제법 많다.

1771년, 프라고나르의 대표작이자 18세기 로코코 문화의 아이콘 ‘사랑의 단계’를 주제로 한 연작 그림이 탄생했다. 〈구애〉, 〈밀회〉, 〈화관 쓰는 연인〉, 〈연애편지〉로 구성된 이 연작은 루이 15세의 애첩 뒤 바리 부인이 루브시엔 성에 연회를 위한 파빌리온 궁을 신축하면서 주문한 장식화이다. 이 작품들은 풍경식 정원각주1) 을 배경으로 귀족들의 연애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뒤 바리 부인에게 거부당했다.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림에 뒤 바리 부인 자신의 밀회 내용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사랑의 단계’ 주제 연작 중 〈밀회〉

뉴욕 프릭 컬렉션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프라고나르의 이런 작품들은 지식인을 비롯한 비평가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는 그림 속에 실크나 레이스만 걸치거나 혹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여자들을 등장시켜 명성을 얻은 저질 화가로 매도당했고, 특히 초기에 역사화로 살롱전에 입선하면서 받은 기대 때문에 더욱 거센 비난을 받았다.

결국 이런 비난과 뒤 바리 부인의 거부로 실망한 프라고나르는 1773년 파리를 떠나 로마로 향한다. 이탈리아 곳곳을 여행하면서 그는 이탈리아의 풍경을 소묘로 담았으며, 빈과 프라하를 거쳐 파리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자신이 그리는 풍속화의 배경에 자주 이탈리아의 풍경을 그려 넣곤 했다.

파리로 돌아온 후 그는 〈생 클로의 축제〉, 〈목동들의 경배〉와 같이 신고전주의풍 작품들을 그리려고 시도했으며, 〈빗장〉, 〈사랑의 샘〉, 〈사랑의 서약〉 등 기존의 가볍고 경쾌하기만 한 화풍에서 벗어나 보다 감상적이고 애수에 젖은 분위기를 연출하게 되었다. 이런 변모는 로코코 양식이 그 그림의 속성만큼이나 지나치게 빨리 유행에서 사라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면서 그의 후원자들이었던 부유한 귀족 계층이 사라졌고, 여기에다 로코코 양식의 경박하고 쾌락주의적인 속성이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순식간에 화가로서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 결국 프라고나르는 파산한 채 궁핍한 생활을 영위하다가 붓을 완전히 놓았다. 말년에 그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작품 보존가로 일하다 완전히 잊힌 채 1806년 8월 22일 쓸쓸하게 사망했다 


  

글- 김영은  출처 미술사를 움직인 100인  미술사를 움직인 100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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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Honoré Fragonard
Jean-Honoré Fragonard 023.jpg
From a self-portrait, at the Musée Fragonard, Grasse
Born
Jean-Honoré Nicolas Fragonard[1]

(1732-04-04)4 April 1732
Grasse, France
Died22 August 1806(1806-08-22) (aged 74)
Paris, France
NationalityFrench
EducationChardin, Boucher,
French Academy in Rome,
Charles-André van Loo
Known forPainting, drawing, etching
Notable work
The Swing, A Young Girl Reading, The Bolt
MovementRococo
AwardsPrix de Rome


Jean-Honoré Fragonard (French: [ʒã onoʀe fʀaɡonɑʀ]; 4 April 1732[2][3] – 22 August 1806) was a French painter and printmaker whose late Rococo manner was distinguished by remarkable facility, exuberance, and hedonism. one of the most prolific artists active in the last decades of the Ancien Régime, Fragonard produced more than 550 paintings (not counting drawings and etchings), of which only five are dated. Among his most popular works are genre paintings conveying an atmosphere of intimacy and veiled eroticism     


     

Biography[edit]

Statue of Fragonard in Grasse, his birthplace
Jean-Honoré Fragonard, Blind Man's Bluff, 1775–1780, Timken Museum of Art, San Diego
Landscape with Shepherds and Flock of Sheep, c. 1763–65, National Museum of Western Art, Tokyo

Jean-Honoré Fragonard was born at Grasse, Alpes-Maritimes, the son of François Fragonard, a glover, and Françoise Petit.[1] Fragonard was articled to a Paris notary when his father's circumstances became strained through unsuccessful speculations, but showed such talent and inclination for art that he was taken at the age of eighteen to François Boucher. Boucher recognized the youth's rare gifts but, disinclined to waste his time with one so inexperienced, sent him to Chardin's atelier. Fragonard studied for six months under the great luminist, then returned more fully equipped to Boucher, whose style he soon acquired so completely that the master entrusted him with the execution of replicas of his paintings.

Though not yet a pupil of the Academy, Fragonard gained the Prix de Rome in 1752 with a painting of Jeroboam Sacrificing to the Golden Calf, but before proceeding to Rome he continued to study for three years under Charles-André van Loo. In the year preceding his departure he painted the Christ washing the Feet of the Apostles now at Grasse Cathedral. on 17 September 1756, he took up his abode at the French Academy in Rome, then presided over by Charles-Joseph Natoire.

While at Rome, Fragonard contracted a friendship with a fellow painter, Hubert Robert. In 1760, they toured Italy together, executing numerous sketches of local scenery. It was in these romantic gardens, with their fountains, grottos, temples and terraces, that Fragonard conceived the dreams which he was subsequently to render in his art. He also learned to admire the masters of the Dutch and Flemish schools (Rubens, Hals, Rembrandt, Ruisdael), imitating their loose and vigorous brushstrokes. Added to this influence was the deep impression made upon his mind by the florid sumptuousness of Giovanni Battista Tiepolo, whose works he had an opportunity to study in Venice before he returned to Paris in 1761.

In 1765 his Coresus et Callirhoe secured his admission to the Academy. It was made the subject of a pompous (though not wholly serious) eulogy by Diderot, and was bought by the king, who had it reproduced at the Gobelins factory. Hitherto Fragonard had hesitated between religious, classic and other subjects; but now the demand of the wealthy art patrons of Louis XV's pleasure-loving and licentious court turned him definitely towards those scenes of love and voluptuousness with which his name will ever be associated, and which are only made acceptable by the tender beauty of his color and the virtuosity of his facile brushwork; such works include the Blind Man's Bluff (Le collin maillard),[4] Serment d'amour (Love Vow), Le Verrou (The Bolt), La Culbute (The Tumble), La Chemise enlevée (The Shirt Removed), and L'escarpolette (The Swing, Wallace Collection), and his decorations for the apartments of Mme du Barry and the dancer Madeleine Guimard. The portrait of Denis Diderot (1769) has recently had its attribution to Fragonard called into question.

A lukewarm response to these series of ambitious works induced Fragonard to abandon Rococo and to experiment with Neoclassicism. He married Marie-Anne Gérard, herself a painter of miniatures,[5] (1745–1823) on 17 June 1769 and had a daughter, Rosalie Fragonard (1769–1788), who became one of his favourite models. In October 1773, he again went to Italy with Pierre-Jacques onézyme Bergeret de Grancourt and his son, Pierre-Jacques Bergeret de Grancourt. In September 1774, he returned through Vienna, Prague, Dresden, Frankfurt and Strasbourg.

Back in Paris Marguerite Gérard, his wife's 14-year-old sister, became his pupil and assistant in 1778. In 1780, he had a son, Alexandre-Évariste Fragonard (1780–1850), who eventually became a talented painter and sculptor. The French Revolution deprived Fragonard of his private patrons: they were either guillotined or exiled. The neglected painter deemed it prudent to leave Paris in 1790 and found shelter in the house of his cousin Alexandre Maubert at Grasse, which he decorated with the series of decorative panels known as the Les progrès de l'amour dans le cœur d'une jeune fille,[6] originally painted for Château du Barry.[7]

Fragonard returned to Paris early in the nineteenth century, where he died in 1806, almost completely forgotten.

Reputation[edit]

The Swing (French: L'escarpolette), 1767, Wallace Collection, London.

For half a century or more he was so completely ignored that Wilhelm Lübke's 1873 art history volume omits the very mention of his name.[8] Subsequent reevaluation has confirmed his position among the all-time masters of French painting. The influence of Fragonard's handling of local colour and expressive, confident brushstroke on the Impressionists (particularly his grand niece, Berthe Morisot, and Renoir) cannot be overestimated. Fragonard's paintings, alongside those of François Boucher, seem to sum up an era.[9]

One of Fragonard's most renowned paintings is The Swing, also known as The Happy Accidents of the Swing (its original title), an oil painting in the Wallace Collection in London. It is considered to be one of the masterpieces of the rococo era, and is Fragonard's best known work.[10] The painting portrays a young gentleman concealed in the bushes, observing a lady on swing being pushed by her spouse, who is standing in the background, hidden in the shadows, as he is unaware of the affair. As the lady swings forward, the young man gets a glimpse under her dress. According to Charles Collé's memoirs[11] a young nobleman[12] had requested this portrait of his mistress seated on a swing. He asked first Gabriel François Doyen to make this painting of him and his mistress. Not comfortable with this frivolous work, Doyen refused and passed on the commission to Fragonard.[11]

Value of works[edit]

On December 5, 2013, in Bonhams New Bond Street, London, Salerooms the Fragonard portrait of François-Henri duc d'Harcourt sold for £17,106,500 Sterling – US $28,058,081 – setting a world record price for the artist at auction. The previous record was £5,300,000 for a painting sold in London in 1999. The sum paid is also the highest price for an Old Master Painting sold at auction anywhere in the world in 2013. Bonhams' sale of paintings and sculpture from the renowned collection of the German philanthropist, the late Dr Gustav Rau, raised more than £19 million, with the proceeds benefiting the Foundation of the German Committee for UNICEF – for the children of the world. [13][14]

Works[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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