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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황제 은총에 조선이 살아 있으니!"

Bawoo 2019. 10. 12. 21:35


망해버린 명나라에 200년 제사 지낸 창덕궁 대보단(大報壇)

박종인의 땅의 歷史

어느 제삿날

어느 제삿날에 서른넷 먹은 젊은 관료 정약용이 시를 쓴다. 청나라 천주교 신부 주문모 밀입국 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좌천됐다가 용양위 부사직이라는 한직으로 복직한 지 석 달 만이다. 내용은 이렇다.

'이 나라에만 은나라 해와 달이 떠 있고 / 중원 땅에는 한나라 의관 지킨 사람 하나 없다네(下國獨懸殷日月 中原誰保漢衣冠)'('다산시문집' 2권, '임금이 대보단 제사 때 지은 시에 차운하다·奉和聖製親享大報壇韻') 바로 이날 조선 22대 임금 정조가 시를 썼는데, 정약용 시는 이 어제시에 대한 답시다. 정조가 쓴 시는 이렇다.

'산하의 북쪽 끝까지 제후국 모두 망했어도 / 우리 동방만 제물과 제주를 올리는구나(山河極北淪諸夏 牲醴吾東享肆陳)' 마지막 연은 이렇다. '만절필동(萬折必東) 그 정성 힘써 좇아나가리(萬折餘誠志事遵)'('홍재전서 7권', '황단 제삿날 숙종·영조 두 임금 시에 차운하다·皇壇親享日敬次兩朝御製韻')

'만절필동'은 황하가 1만 번 휘어도 동쪽으로 흐르듯,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원해준 명나라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정약용 시는 '대륙은 오랑캐 땅이 됐어도 조선만은 옛 왕조를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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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에게 비공개 지역인 창덕궁 후원 최북단에는 명나라 황제 제단인‘대보단(大報壇)’이 숨어 있었다. 1704년 숙종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200년 동안 역대 조선 왕은 문무백관을 이끌고 이곳에서 명나라를 향해 제사를 지냈다. 1910년 총독부에 의해 대보단이 철거되고 식민 시대가 문을 열었다. 지금 대보단 터에는 거대한 다래나무가 자란다. 그래서 이곳 명칭도‘천연기념물 다래나무 서식지’로 돼 있다. 옛 흔적은 부서진 채 뒹굴고 있다. /박종인 기자

1796년 음력 3월 3일, 임진왜란이 끝나고 198년, 명나라가 망하고 152년이 지난 봄날에 실용주의 관료 정약용과 개혁군주라 소문난 정조가 주고받은 자랑과 다짐이 그러했다. 그날 조선 왕국은 창덕궁 북쪽 깊숙한 산기슭에서 명나라 초대 황제 홍무제와 임진왜란 때 만력제와 마지막 숭정제에게 은밀하게 제사를 올렸다. 제단 이름은 대보단(大報壇)이다.

'명나라는 갔으니 조선이 중화(中華)'

임진왜란 이후 병자호란이 벌어지고 조선은 오랑캐 청에 망했다. 대륙은 오랑캐 말발굽에 짓밟혔다. 명줄을 잡고 있던 명이 1644년 망했다. 망할 줄 알았던 청나라는 욱일승천했다. 북벌(北伐)을 추진했던 효종은 요절했다. 북벌은 효종 혼자서 추진했을 뿐, 여당 세력인 노론은 '마음 수양 먼저 하시라'며 현실적인 정책 제시를 거부했다.(송시열, '기해독대') 효종이 죽고 현종이 죽고 숙종이 등극했다. 전흔(戰痕)이 아물고 태평성대가 왔다. '오랑캐 타도'를 떠들던 노론 엘리트들이 입을 닫았다. 대신 정신 승리를 들고나왔다. '오랑캐에 짓밟힌 중화(中華)가 조선으로 건너왔다'는 조선(朝鮮) 중화(中華)다. 조선이 중화이니 굳이 청나라를 타도할 이유가 없었다. 이게 당시 정치 엘리트가 가진 정서였다. 현실은 그대로인데 정신적으로는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 상징이 대보단(大報壇)이다.

만동묘와 대보단

1689년 사약을 받은 노론 지도자 송시열이 유언을 남겼다. '내가 살던 화양동에 명 황제 모실 만동묘(萬東廟)를 만들라.' 명나라가 망하고 1주갑(60년)이 지난 1704년 제자 권상하는 스승 뜻을 실현했다. 원군을 보내 나라를 살려준 명나라 신종 만력제와 마지막 의종 숭정제를 기리는 묘였다. 그해 정월 7일 권상하가 만동묘를 세우고 150여 유생들과 첫 제사를 올렸다.('송자대전' 부록 제12권 연보)

그런데 사흘 뒤인 1월 10일 숙종이 느닷없이 어전회의에서 이리 한탄하는 것이었다. "명나라가 망한 지 올해 3월로 60년이다. 숭정 황제가 나라를 잃으니 울음이 솟구친다. 백성들이 그 은혜를 잊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뜨끔한 노론 대신 이여가 "사실은" 하고 만동묘 설립을 자백했다. 숙종이 말했다. "내 미처 몰랐다(予不及知也)."(1704년 숙종 30년 1월 10일 '숙종실록') 황제에 대한 제사는 오로지 왕만 치를 수 있는 행사였다. 숙종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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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궐도’세부. 가파른 계단 아홉 개 위에 명나라 황제 3명을 모시는 대보단 제단이 있다. 위 사진은 네모난 제단 오른쪽 집이 있던 자리다.

그해 3월 19일 밤 12시 30분 숙종은 창덕궁 후원에 임시 제단을 만들고 숭정제 제사를 전격 거행했다. 숭정제 의종이 자살한 바로 그날이다. 제물은 검은 소(黑牛) 한 마리였다. 제문(祭文)은 이렇게 시작했다. '조선국왕(朝鮮國王) 신(臣) 이돈(李焞)'.(같은 해 3월 19일 '숙종실록') '이돈(李焞)'. 현직 왕 이름이 조선왕조실록에 그대로 등장하는 드문 장면이다. 명나라와 조선의 군신(君臣) 관계를 특별하게 부각하기 위한 조치(계승범, '정지된 시간-조선의 대보단과 근대의 문턱')였다. 그리고 그해 11월 숙종은 후원 깊숙한 곳에 제단을 만들고 이름을 대보단(大報壇)이라고 정했다. 이듬해 3월 9일 숙종은 대보단에서 임진왜란에 원군을 보낸 만력제 제사를 지냈다.

비겁한 대보단

만동묘 같은 사당이 아니라 제단을 지은 이유가 있었다. 숙종 몰래 화양동에 만동묘를 설치했던 노론은 만동묘를 국가 제사 장소로 공인받으려 했다. '사민(士民)이 이미 두 황제를 향사하는데 조정에서도 한다면 곤란한 일.'(권상하, '한수재집(寒水齋集)' 4권, '이치보에게 답함·答李治甫', 계승범, '정지된 시간' 각주 인용) 상설 사당을 반대한 노론 관료와 왕이 타협한 대안이 바로 제단(祭壇)이었다. 제단은 제향 때만 혼령이 강림하는 장소다.(정우진, '창덕궁 대보단의 공간구성과 단제 특성에 관한 고찰')

그해 12월 21일 북한산 줄기가 창덕궁 안쪽으로 내려온 궁궐 북쪽 깊숙한 기슭에 제단이 설치됐다. 혼령이 잠시 머물다 가는 은밀한 공간이었다. 제단은 사방으로 계단 아홉 개를 냈다. 비밀리에 준공된 대보단은 사직단보다 한 척이 높았고 네 면 길이가 37척(약 11m)이었으며 바깥에 담을 쌓아 행인이 내려다보지 못하게 하였다.(같은 해 12월 21일 '숙종실록', 정우진, '창덕궁 대보단' 재인용)

조선 정부는 현재 관보(官報)에 해당하는 신문 '조보(朝報)'에도 이 사실을 싣지 않았다. 담당 관청도 설치하지 않았다. 청나라로부터 숨기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하여 오랑캐 청나라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고 왕 책봉을 받고 오랑캐 역법(定朔)을 받들면서 국내에서는 그 현실을 부정하는 기이한 정치 체제가 완성됐다.(계승범, '정지된 시간')

확장된 대보단, 확장된 사대(事大)

1749년 영조 25년 만력제 신종을 모시던 대보단에 명 마지막 왕 의종 숭정제가 추가됐다. 이보다 10년 전 완성된 '명사(明史)'가 국내에 수입되면서 병자호란 때 의종이 원군을 보내려 한 사실이 밝혀졌다. 의종 또한 조선을 구하려 한 천자(天子)라는 것이다. 영조는 "의종과 신종이 진실로 차이가 없으니(毅宗與神宗 固無異同) 의종을 황단(皇壇·대보단)에 나란히 제사한다면 천하에 다행스러운 일이 될 것"이라는 상소를 받아들였다.(1749년 3월 1일 '승정원일기', 이욱, '조선 후기 전쟁의 기억과 대보단 제향' 재인용) 그뿐만이 아니었다.

영조는 12일 뒤 명 태조 홍무제 또한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무제 주원장은 맹자와 주자를 천시하고 왕권을 강화한 군주였다. 조선 성리학자들이 폭군으로 일컫는 대표적인 왕이다.

신하들이 벌떼처럼 반대하자 영조가 단호하게 말했다. "황조에 향화가 끊어졌기 때문에 세 황제를 우리가 모시려는 것이다(皇朝香火已絶 故壇祀三皇)." 중원 문화가 오랑캐에 의해 파괴됐으니 이를 조선이 계승한다는 선언이었고(이욱, '조선 후기 전쟁 기억'), 동시에 기어오르는 노론 관료들을 기선 제압하겠다는 협박이었다. 이날로 조선은 명나라 계승국으로 지위가 격상됐다.

1800년대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동궐도(東闕圖)’.
1800년대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동궐도(東闕圖)’. 왼쪽 위에 대보단이 그려져 있다. 고려대박물관 소장.

3년 뒤 영조는 임금 존호(尊號)를 하나 더 만들자는 관료들 상소를 거부했다. 거듭된 상소에 영조는 새벽 1시 갑자기 "세 황제께서 내 마음을 아시리"하며 (대보단 아래) 판석에 엎드려 일어나지 않았다.(1752년 2월 27일 '영조실록') 새벽 4시까지 이어진 노천 시위는 대비마마가 두 번씩이나 만류해 겨우 끝났다. 기우제를 지내고 비가 내리자 이를 "홍무제가 내리는 비"라고 찬양하고(1753년 5월 11일 '영조실록') 새벽 5시에 예정에도 없이 대보단을 향해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1756년 12월 25일 '영조실록')

'개혁군주' 정조, 그리고 대보단

중화를 계승한 영조가 죽었다. 손자 정조가 즉위했다. 정조 즉위 후 일곱 달이 지난 1776년 10월 27일 청나라로 떠났던 사신이 칙서를 들고 돌아왔다. "특별히 주청(奏請)을 허락하여 조선 국왕을 이어받게 한다(特兪奏請 襲封爲朝鮮國王)."(1776년 10월 27일 '정조실록') 오랑캐 황제 건륭제 칙서를 받고서야 정조는 정식 조선 왕이 되었다.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정조는 '명나라 은총으로 명장(名將)이 된' 이순신에게 영의정을 추증하고(1793년 7월 21일 '정조실록') 대보단 제사에 참석하지 않은 충신과 관리들을 모두 잡아다 처치하라(竝拿處)고 명했다.(1794년 3월 19일 '정조실록')

그리고 1796년 3월 3일 대보단 정례 춘계 제사 때 정약용과 주고받은 시가 맨 앞에 나온 '우리 동방만 희생과 술의 제향을 드리는구나'였다. 조선 정치 엘리트 집단을 집단 감염시켰던 사대(事大)는 정조를 넘어 실용주의자 정약용, 그 이후까지 오래도록 퇴치되지 않았다.

대보단 철거와 2018년

1876년 개항,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에 이어 1894년은 동학혁명, 청일전쟁이 터진 대혼란의 시대였다. 바로 그해 5월 홍무제 제삿날을 마지막으로 대보단 제사는 끝났다. 3년 뒤 조선은 환구단(圜丘壇)을 세우고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대한제국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1910년 식민의 시대가 왔다. 대보단은 '어떠한 설명도 없이, 기록도 없이 부지불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총독부가 작성한 창덕궁 지도로 추정하면 1911년부터 1921년 사이 알 수 없는 시기에 대보단은 철거됐다.'(정우진, '창덕궁 대보단')

대신 그 자리에 언젠가부터 다래나무가 자란다. 옛 담장 석물 사이에 뿌리내린 다래나무는 한 그루가 숲처럼 자라 나 지금 천연기념물 251호가 되었다.

한때 창덕궁 후원이 완전히 개방됐을 때 만든 안내판에는 '천연기념물 다래나무 서식지'라고 소개돼 있다. 지금 그 서식지에는 대보단 옛 흔적이 산산이 흩어져 있다. 옛 석물은 계단으로 솟아 있다. 있어야 할 석물은 간 곳 없다. 대보단 터는 비공개 지역이다. 흔적이 사라지고 기억이 사라진다. 그렇다고 역사가 사라지겠는가.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0/31/201810310005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