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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세상이 좁으니 소리 내 울 곳이 없구나"

Bawoo 2019. 10. 9. 19:37


事大를 비판한 林悌와 만주에서 울어버린 朴趾源

박종인의 땅의 歷史

오래 기침병을 앓다가 그가 죽으니 나이 서른여덟 살이었다. 벼슬살이는 크게 하지 못하였으나,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사내였다. 평안도 도사로 취임하러 갈 때 죽은 기생에게 술잔을 올리는 객기, 단종 복위를 꿈꾸다 죽은 사육신 혼령을 빌려 정치판을 힐난하는 호기를 지닌 사내였다. 죽음 직전에 그가 이렇게 이른다. "나를 위해 곡하지 말라(勿哭)." 울지 말라는 이유가 웅대하다. 문중 족보 '나주임씨세승(羅州林氏世乘)'에 이리 기록돼 있다('성호사설'에는 일부 자구(字句)가 다르다).


뭇 오랑캐가 황제라 칭했는데

조선만 홀로 중국을 섬기니

살아서 무얼 하며

죽어서 뭐가 한이 되리

울지 말라

四夷八蠻 皆爲稱帝

獨朝鮮入主中國

我生何爲 我死何恨

勿哭


유언은 역모 사건의 빌미가 되고, 300년 세월 회자돼 실학(實學)의 씨앗이 되고, 식민 망국 지식인에게 위로가 되었다. 통 큰 사람 백호(白湖) 임제(林悌·1549~ 1587) 이야기다.

자유인, 청년 임제

조선이 개국한 지 157년 만에 전남 나주에서 임제가 태어났다. 외손자 허목에 따르면, 임제는 '뜻이 너무 커서 세상과 맞지 않아(不適於世) 벼슬이 현달하지 못하고 예조정랑에 그쳤다.'(허목, '기언', '자서·自序') 삶은 모범적이지 않았다.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기생과 술을 끼고 살았다. 그러나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 하루에 수천 자를 외웠고 문장이 호탕했다. 세상을 돌아다니다 1570년 속리산 기슭 보은 북실마을에서 스승을 만났다. 스승 이름은 성운이다. 성운은 형이 사화에 연루돼 죽자 은거한 선비다. 그가 임제에게 이런 시를 써준다. '젊은이는 뉘 집 자제인고 / 시가 이장군 같구나 / 언제 다시 만나랴 / 헛되이 북녘 구름만 보네(少年誰氏子 詩似李將軍 何日重相見 徒勞望北雲)'(성운, '대곡집', '술 취해 임씨 수재에게 주다·醉贈林秀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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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많은 대한민국에서 전북 김제 광활면은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다. 16세기 문인 임제는 좁은 땅만큼이나 편협한 눈을 가진 정치인을 조롱하며 살았다. 200년 뒤 후학 연암 박지원은 광대무변한 만주 벌판을 목격하고 크게 눈을 떴다. /박종인 기자

거친 제자에게 스승은 '중용(中庸)'을 읽으라 했다. 800번 읽었다. 6년 동안 중용을 깨치고 그가 결론을 내렸다.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건만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지만 속세가 산을 떠나네(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離山).'(이수광, '지봉유설' 14, '시예·詩藝') 그리고 속세로 돌아와 과거에 급제했다. 1576년이다. 벼슬길이 열렸다. 이듬해 대과에 합격해 제주목사인 아버지에게 어사화와 거문고와 칼 한 자루를 들고 가서 자랑까지 했다. 그런데 벼슬하기에는 좋지 않은 세상이었다.

16세기 조선, 동서 분당

1575년 을해년, 조선 정치판에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 동인과 서인이 갈라지는 을해분당(乙亥分黨) 사건이다. 이후 300년 넘도록 조선 정치는 치열한 정쟁 터가 되었다. 사람이 도를 떠나는(人遠道) 세상이 된 것이다. 임제는 '굽혀서 남을 섬기기를 좋아하지 않은 탓에 벼슬이 현달하지 못했다.'(허목, '임정랑묘갈문') 대신 '기방, 주사에서 자유분방하게 노니는가 하면 가끔 슬픈 노래로 강개한 기분에 잠기기도 하니 사람들은 영문조차 헤아릴 수 없었고,' '굳이 먹을 잡아 입을 검게 만드는 짓을 달갑게 여기지 아니하였다.'(백사 이항복, '백호집' 서·序)

글로 권력을 조롱하다

전남 나주 백호문학관 옆에 있는‘물곡(勿哭)’비.
전남 나주 백호문학관 옆에 있는‘물곡(勿哭)’비. 임제의 유언을 새겼다.

임제는 보검을 차고 준마를 타고 하루 수백 리를 달리며 세상을 주유했다.(이식, '택당집', '오평사영·五評事詠') 사육신의 혼령을 불러내 당대 간신들을 비판한 소설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간신 무리에 혹했다가 망해간 왕조들을 꽃들로 비유한 소설 '화사(花史)', 충신과 간신 사이 갈등을 풀어낸 '수성지(愁城誌)'가 그가 쓴 작품들이다.

휴정과 유정 같은 선승과 교류하고 열두 살 연상 친구 옥봉 백광훈과 함께 풍류를 즐기고 다녔다. 백광훈은 마음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이런 일도 있었다. 임제와 백광훈이 개경에 놀러 가 부잣집에 하루를 묵었다. 임제가 주인에게 수작을 걸었다. "내 하인 놈이 글을 잘하니 시나 한 수 들으려오?" 임제가 백광훈에게 "京(경) 자로 읊으라"고 명했다. 이에 백광훈이 붓을 날리는데 일필휘지였다. 집주인이 이리 말한다. "전라도에서는 백옥봉과 임백호가 글이 제일이라던데, 글 잘하는 하인은 처음 보았소."

1582년 해남 현감 시절 백광훈이 죽었다. 임제는 '옥나무가 흙이 되니 청산에는 흰 구름만 남았다'고 슬퍼했다. 이듬해 평안도 도사로 임명돼 임지로 갈 때, 임제는 개경 황진이 무덤에서 조시(弔詩)를 썼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로 시작하는 시조다. 성리학을 배운 사대부가 기생을 추모하자 조정에서는 난리가 났다. 임제는 이듬해 병을 얻고 임기를 마쳤다.

중들과 친하고 죽은 기생을 애도하고 '오색 신기루가 바다 위에 떠오르게 하는'(이항복, '백호집' 서) 글재주로 세상을 조롱하던 선비 임제는 1587년 음력 8월 11일 폐병으로 죽었다. 죽기 전 자기 추모시를 썼다. '먼지 많은 세상 학을 타고 벗어난다(如今鶴駕超塵網)'고 했다.(임제, '자만·自輓')

그리고 남긴 유언이 '울지 말라'였다. 세상은 광대무변하고 가슴속은 터질 것 같은데 정치하는 자들은 그저 중국만 바라보며 쌈박질만 하고 있으니, 이 세상 떠나도 슬플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학을 타고 하늘로 갔다.

기축사화와 임제

그가 죽고 2년 뒤 피바람이 불었다. 야당이던 서인이 동인을 박멸시키고 정권을 잡은 기축사화다. 마이산이 있는 전북 진안에서 동인 정여립이 반란을 꾀했다는 것이다. 서인 당수 송강 정철이 주도해 1000명이 넘는 동인을 처형했다. 반군 토벌대장 민인백이 토벌 작전 직전 정여립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생전에 임제가 '세상 모두 천자(天子)라 칭했는데 우리나라만 그렇지 못하다. 언젠가는 반드시 천자라 해야 하리라'고 하더라." 그러자 정여립이 말했다.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따로 있겠는가(王侯將相 寧有種乎)." 이를 듣고 임금이 말했다. "천하를 삼킬 도적임을 알겠다."(민인백, '태천집(苔泉集)' 2, '토역일기·討逆日記') 아들 임지 또한 '협기를 부리고 멋대로 행동하여' 함께 유배형을 받았다.(1590년 4월 1일 '선조수정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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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나주 다시면 회진리에 있는 영모정. 백호 임제가 어릴 적 공부하던 문중 정자다.

"가히 울 만하구나"

1780년 정조 4년, 청나라 사신으로 가는 형님을 따라 마흔셋 먹은 선비 박지원이 북경으로 떠났다. 압록강 건너 열나흘 걸려 7월 8일 요녕성 요양시 외곽에 이르렀을 때, 문득 천지사방이 확 트이는 것이다. 박지원이 내뱉었다. "참 좋은 울음 터로다. 가히 한 번 울 만하구나(好哭場 可以哭矣). 내 처음으로 인생이란 아무 의탁한 곳 없이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돌아다니는 존재임을 알았다.(중략) 아이가 태중(胎中)에서 갑자기 넓고 훤한 곳에 터져 나와 손발을 펴니 어찌 제멋대로 외치지 않으리오!"(박지원, '열하일기', '도강록·渡江錄') 그 광대무변한 신천지에서 돌아와 박지원은 무역과 상공업을 외치는 실학 북학파 선구가 되었다. 임제가 꿈꾸던 그 세상을 본 것이다.

또 세월이 흐르매

1902년 매천 황현(1855~1910)이 임제 고향 나주를 찾았다. 스러져가는 나라 선비가 무덤 앞에서 이리 읊는다. '영웅이여 구천에서 한스러워 마소 오늘날 조정에는 황제의 의자 높나니(九原莫抱英雄恨 今日朝廷帝座高)'(황현, '매천집', '회진촌 임제 옛 거처에서 읊다·會津村林白湖故居感賦') 나라가 망하기 8년 전이니 어좌에 앉은 대한제국 황제는 고종이다. 그 황제도 세상도 거침없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훗날 사학자요 독립운동가 문일평(1888~1939)이 이렇게 쓴다. '임제가 남긴 이행(異行) 중 가장 로맨틱한 것은 유언이다. 중국 주위 이민방(異民邦)이 다 한 번씩 제왕이 되어 천하를 호령했다. 몽고인은 네 번, 만주인은 두 번이나 제국을 세웠다. 조선인은 한 번도 세우지 못했다. 임제가 죽을 때는 청 제국은 아직 싹도 트기 전이다. 그로 하여금 청 제국을 보게 했다면 더 개탄했을지 모른다.'(문일평, '호암사론사화선집', '소하만필·銷夏漫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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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화문을 떠나 임제가 나고 죽은 전남 나주로 가는 길이었다. 김제에서 일망무제(一望無際)한 땅을 만났다. 이름도 넓은 광활면 한가운데에 석양이 내렸다. 가히 울 만했다. 내가 사는 대한민국은 얼마나 울 만한 땅인가.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0/10/201810100007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