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지니어 장영실의 미스터리한 실종
어느 날 세종이 영의정 황희와 좌의정 맹사성에게 한 기술직 관리 승진 여부를 의논한다. 서기 1433년 음력 9월 16일이다. "장영실이 자격궁루(自擊宮漏)를 만들었는데 그 공이 작지 아니하므로 호군(護軍)의 관직을 더해 주고자 한다."
자격궁루는 물시계다. 기존에 쓰던 물시계가 오차가 많아 세종 명으로 새로 만든 시계다. 조선의 국가표준시(國家標準時)를 규정하는 어마어마한 시계다. 이 시계가 어찌나 마음에 들었던지 세종은 자기 자랑도 빼놓지 않았다. "비록 나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였지만, 이 사람이 아니라면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까지 장영실 보직은 정5품 사직이었다. 사직은 특별한 보직 없이 월급을 지급하는 무임소직이다. 그 이전 보직은 상의원 별좌였다. 상의원은 왕실 의복을 다루는 부서다. 별좌는 정5품인데, 무급(無給)이다. 이제 세종이 월급을 받는 정4품 호군으로 승진시키겠다는 것이다. 왕이 스스로 말하기도 했지만, 장영실은 그런 품계에 오를 수 없는 '기생의 아들', 천민이었다. 하지만 왕명이 추상같고 그 업무 성과에 왕의 가르침이 개입돼 있으니 두 정승은 꼼짝없이 받아들였다.(1433년 세종 15년 9월 16일 실록) 5년 뒤 장영실은 종3품 대호군까지 승진했다.
그런데 1442년 음력 3월 16일 장영실은 곤장 80대를 얻어맞고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렸다. 임금이 탈 가마를 부실하게 만들었다는 죄였다.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죽었는지 흔적이 없다. 자, 해시계와 물시계, 천체 관측은 물론 금속활자 제작술과 채굴 기술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 초기 과학기술을 장악했던 이 기술자는 도대체 왜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가.
세종대왕 천문 프로젝트
때는 농사가 주요 산업이던 시대였다. 날씨와 절기는 산업 발전과 사회 안정에 필수적인 변수였다. 명나라 역법은 조선과 맞지 않았다. 고려 이후 사용하던 수동식 물시계는 오류가 잦았다. 시간을 재는 기준은 하늘이었다. 세종은 천문(天文)을 최우선 국책사업으로 선정했다.
즉위 후 3년인 1421년 세종은 천문과 역법에 관해 토론회를 열고 윤사웅, 최천구, 장영실을 명나라로 유학 보냈다. 윤사웅과 최천구는 양반이었고 장영실은 노비였다. 이듬해 세종은 '양각혼의성상도감(兩閣渾儀成象都監)'이라는 천문연구소를 설치하고 이들에게 업무를 맡겼다. 명나라와 아랍 이론을 바탕으로 이들이 제작한 기계가 바로 물시계요 해시계를 위시한 천문 관측 기구들이다.(연려실기술 별집 15권 첨성(瞻星))
'내시 대신 옆에 둘 정도로' 장영실을 아낀 세종은 그를 면천시키고 상의원 별좌에 임명했다. 이조판서 허조가 반대했지만 세종은 강행했다. 천민을 중용할 정도로 과학은 세종에게 중요한 사업이었다. 왕립 천문연구소 설립으로 시작된 프로젝트는 1438년 흠경각(欽敬閣) 준공으로 완성됐다. 흠경각은 새로운 물시계인 자격루를 설치한 건물이다. '흠경(欽敬)'은 '공경함을 하늘과 같이 하여 백성에게 절기를 알려준다(欽若昊天 敬授人時)'는 뜻이다.
흠경각 준공과 장영실
1438년 정월 7일 흠경각 준공 보고식이 경복궁에서 열렸다. 위치는 경회루 북쪽, 세종 침전 옆이며 천추전 서쪽이었다. 우승지 김돈은 이 기계를 이렇게 묘사했다. '사람 힘을 빌리지 않고 저절로 운행하는 것이 마치 귀신이 시키는 듯하고 털끝만큼 어긋남이 없으니 계교가 참으로 기묘하다.'(세종 20년 1월 7일 실록) 그러니까 자동 시계라는 뜻이다.
흠경각 제작자는 5년 전 이 물시계를 만든 장영실이다. 장영실이 명나라로 유학을 다녀온 지 17년, 물시계를 만든 지 5년 만에 최첨단 물시계 건물을 준공하면서 세종 프로젝트가 끝을 맺었다. 장영실은 이 공로로 대호군으로 승진했다.
세종이 중용한 과학기술자는 여럿이었다. 장영실은 특출했다. 1433년 유학파 기술자들이 만든 물시계를 훑어보고 세종은 이리 말했다. "훌륭한 장영실이 중한 보배를 성취하였으니 그 공이 둘도 없다."(연려실기술)
훌륭한 장영실이 성취한 보배는 혼의(渾儀)·혼상(渾象)·규표(圭表)·간의(簡儀)와 자격루(自擊漏)·소간의(小簡儀)·앙부(仰釜)·천평(天平)·현주(懸珠)·일구(日晷) 등이다.(1437년 세종 19년 4월 15일 실록) 천체관측기, 천구의, 절기 측정기, 천문관측기, 물시계, 해시계 등등이다. 1437년 4월 15일 제작 보고된 별시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는 '밤에도 시간을 알 수 있는' 시대를 열었다. 이 관측기구들은 경회루 옆 왕립 천문대인 간의대에 설치하고 운영했다. 간의대 또한 장영실이 만들었다.
장영실은 평북 벽동군에 파견돼 청옥(靑玉)을 채굴하고(1432년 세종 14년 1월), 금속활자 주조에 참여하고(1434년 세종 16년 7월), 경상도 지역 구리광산 감독관으로도 일했다.(1438년 세종 20년 9월) 악성(樂聖) 박연과 함께 악기도 제작했다.(1519년 중종 14년 2월 2일 실록) 과연 세종이 보배라 할 만한 사람이었다. 경회루 주변과 세종 침소 정원에는 찬란한 과학 동산이 건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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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匠人)의 임무는 비록 천하지만 성품이 공교한 사람이 일을 해야 하는 까닭에 적임자가 드물다.(성현, '용재총화', 1525년)
느닷없는 파직과 처벌
세종이 진행했던 천문 프로젝트가 끝나고 4년 뒤 실록은 이렇게 기록한다. '대호군 장영실이 임금이 타는 가마 제작을 감독했는데, 견실하지 못해 부러졌으므로 의금부에서 국문했다.'(1442년 세종 24년 3월 16일 실록) 한 달 열흘 뒤 사헌부에서 '불경(不敬)보다 더 큰 죄는 없다'며 처벌을 요청했다. 세종은 조사가 끝나고 보자고 답했다. 이틀 뒤인 4월 27일 의금부에서 구형을 했다. '곤장 100대.' 세종은 20대를 감형하고 그대로 처벌을 승인했다. 장영실에게 "부서질 리 없다"며 제작을 강행한 대호군 조순생은 처벌하지 않았다.(4월 27일 실록) 엿새 뒤 장영실에게 곤장형이 집행되고 장영실은 파직됐다. 파직 처분은 의금부 구형량에 없던 처분이었다.(5월 3일 실록) '둘도 없는 공을 세운' 장영실은 그렇게 안전사고 발생 두 달이 못 돼 역사에서 사라졌다. 불쾌하고 기이하지 않은가.
예견된 몰락
아산 장씨 족보에 따르면 장영실은 고려 때 송나라에서 망명한 중국인 집안이다. 세종은 "아비가 본래 원나라 소주·항주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 족보에 따르면 장영실 아버지 장성휘는 고려 말 서운관 판서를 지냈다. 서운관은 천문 담당 관청이다. 족보에 어머니는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실록에는 '기생'이라고 돼 있고 따라서 모계 상속에 따라 장영실은 동래 관노(官奴)가 되었다. 그 노비를 세종이 파격적으로 기용해 노골적으로 편애를 했다. '박힌 돌'에게는 뽑아버려야 할 굴러온 돌이었다.
실록에는 이 굴러온 돌에 대한 질투가 은근히 엿보인다. 1437년 완성된 일성정시의 기사에는 제작자 장영실에 대한 언급이 없다. 1434년 자격루를 완성했을 때 장영실 직급은 호군이었다. 이미 오래전 면천을 한 상황이었으나 실록 사관은 그 기사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장영실은 동래현 관노다."
장영실을 처벌한 뒤 세종이 벌인 일은 더 기이하다. '간의대 동쪽에 집터를 보게 하고 마침내 간의대를 그 북쪽으로 옮기게 했다.'(1442년 세종 24년 12월 26일 실록) 별궁을 짓기 위해 경회루 옆에 있던 천문대를 후궁 안으로 이전하겠다는 것이다. 이유는 이랬다. '중국 사신으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것이 불가하다.' 그러니까, 명나라와 다른 역법을 사용하는 사실을 명나라 사신들로부터 은폐하려 한 것이다. 두껍고 무거운 신분제 무게가 조직 내 이방인을 망가뜨렸고, 명에 사대(事大)하는 뿌리 깊은 조선 왕실 사고방식이 과학에 보이지 않는 벽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래서 이후 이렇게 되었다.
"아무도 사용법을 모르니…"
1505년 11월 24일 폭군 연산군은 물시계를 창덕궁으로 옮기고 간의대를 뜯어버렸다.(연산 11년 11월 24일 실록) 세월이 근 300년 흘러 숙종 대가 되었다. 두 차례 전쟁도 지나고 태평성대가 도래했다. 1713년 숙종 39년 윤5월 15일 '승정원일기'를 본다. '역법은 나라가 중히 여기는 바요 조종이 큰일로 여긴 바라, 지금 텅 빈 궁궐 안에는 간의대와 관상감과 옛 기기들이 있었으나 모두 폐기돼 쓸 수가 없다. 어디에 쓴 건지도 알 수가 없다. 중국에서 배운 기술이라고도 하고 세종대왕이 지혜롭게 창조한 기술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오늘날 그 용법을 아무도 모르니 심히 애석하다(曆象之法 有國所重 祖宗朝則視爲大事 空闕內有簡儀臺 觀象監 亦有古圓器 廢而不用 未知用於某處 而似是或學於中國 或世宗大王 以睿智創造矣. 今則有器而不知所用 甚可惜也).'
그리 되었다. 문(文)은 승하여 성리학은 원조 중국보다 더 찬란하게 발전했다. 과학은 날로 퇴보하였고 장영실은 완전히 사라져 그 종적
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1872년 아산 장씨 족보가 세 번째 만들어졌을 때, 이 노비 출신 할아버지가 족보에 등재됐다. 아산 장씨 후손들은 왜 당시 비루한 신분 조상을 족보에 올렸는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1984년 아산 장씨 문중은 시조 묘가 있는 아산 인주면 문방리에 장영실 추모비와 제단을 세웠다. 지금 제단은 가묘(假墓)로 변해 그 혼백을 부른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6/27/201806270040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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