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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유관순의 魂은 어디에 쉬고 있을까

Bawoo 2019. 10. 6. 23:45


망우리 집단 무연고 분묘와 유관순

1920년 9월 28일 아우내 3·1운동 주도한 유관순, 옥중에서 사망… 이태원공동묘지에 묻혀
1937년 경성 인구과밀화, 이태원묘지 망우리로 이전… 주택단지 건설

박종인의 땅의 歷史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일본 식민지 조선 경기도 경성부 서대문감옥 여자 8호 감방에서 한 소녀가 죽었다. 나이는 열여덟이고 죄명은 소요 및 보안법 위반이다. 14일 뒤 소녀가 다니던 이화학당으로 시신이 운구됐다. 이틀 뒤 시신은 정동교회에서 인수해 이태원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이후 소녀 영혼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름은 유관순, 그 소녀 영혼 이야기다.

망우리 무연고 분묘 합장비

서울 중랑구 망우리에 있는 묘지공원 이름은 망우리공원이다. 근심을 잊는 공원이라는 뜻이다. 흔히들 망우리공동묘지라 부른다. 83만2800㎡. 평수로는 25만 평이 넘는다.

입구를 지나 왼쪽 김해 김씨 묘 뒤편 오솔길을 가면 숲속에 큰 비석이 나온다. 이렇게 적혀 있다.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비'. 비석 세운 날짜는 소화 11년 12월이다. 1936년 겨울이다.

1936년 10월 10일 자 총독부 기관지'매일신보'는 이날 오전 11시 경성부윤과 경성부 직원들이 '장엄한' 위령제를 진행한다고 보도했다. 이태원에 있던 공동묘지에서 '형적이 없고 연고자가 전혀 없어 보이는 무덤을 옮겨 합장했다'는 것이다. 매일신보에 따르면 이태원공동묘지에 있던 무덤은 모두 4만2000기가 넘고 연고없는 무덤은 3만기가 넘었다.

1936년 12월에 세운 이 비석에는‘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비’라고 새겨져 있다.
서울 중랑구 망우리공원 입구 왼편 숲속에는 비석이 서 있다. 1936년 12월에 세운 이 비석에는‘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비’라고 새겨져 있다. 문득 이태원에 묻혔다가 사라진 유관순 뒷모습이 겹친다. /박종인 기자

이듬해 4월 8일 이장 작업이 완료됐다. 두 달 뒤 6월 9일 동아일보는 이태원에 있는 분묘는 모두 3만3116기고, 유연고 무덤은 4778기에 불과하다고 보도했다. 나머지 2만8338기(본문에는 2838이라 돼 있으나, 이는 오기다)는 무연고라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들 무연고 분묘는 화장해서 합장했다. 신문은 그날 오후 2시 경성부 위생과 직원들 참석하에 위령제가 열린다고 보도했다.

용산 일본군 기지와 이태원묘지

'한양' '서울'이라 부르곤 하던 조선 수도 한성은 한성 성곽 안쪽 공간을 지칭했다. 그 바깥 공간은 '성저십리(城底十里)'라 했다. 서울 강북·동대문·마포·서대문·성동·성북·용산·은평·여의도 일대다. 성저십리 지역은 개발이 금지됐다. 도성 바깥 4개 산 안쪽은 원칙적으로 묘를 쓸 수도 없었다. 나무를 벨 수도 없었다. 이를 '사산금표(四山禁標)'라고 한다(아래 기사 참조).

조선 개국 이후 한성 인구가 증가하면서 지세가 평탄한 성곽 남쪽 성저십리에 촌락이 들어섰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세상이 안정되면서 용산과 마포, 서빙고 포구를 중심으로 마을이 생겨났다. 그 가운데 용산 이태원이 있었다.

있는 집이야 땅을 골라 조상 묘를 쓰지만 서민은 그러지 못했다. 이태원 언덕은 자연스럽게 마을 묘지가 됐다. 사산금표 정책도 공공연히 무시됐다. 이태원에는 조선 중기부터 공동묘지가 형성됐다. 성저십리에서 삶과 죽음은 공존했다.

조선이 망하고 대한제국이 망하고 식민지가 들어선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1922년 경성부 공동묘지 총면적은 51만1830평이었고 그 가운데 이태원 공동묘지는 11만9328평으로 가장 넓었다.(성북문화원, 성북구 역사문화산책, 2014) 1905년 8월 12일 자 '황성신문'에 따르면 '일본군 주둔이 예정된 용산 군용지에 무덤이 111만7308기가 있었다.'(김천수, '용산기지 내 사라진 둔지미 옛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 2017, 재인용)

1904년부터 5년 동안 일본은 현 미군기지 공간에 있던 둔지미 마을을 강제 철거하고 조선주차군 사령부를 건설했다. 둔지미는 한강변 지금 용산가족공원 지역으로 쫓겨났다. 그리고 1916년 기지 확장 계획을 실행하면서 둔지미 주민들은 또다시 강제 이주됐다. 이들이 이주한 곳이 바로 이태원공동묘지 아래 신보광리였다.

유관순과 이태원묘지

1910년 나라가 일본에 넘어갔다. 대한제국 한성은 경기도 경성부로 변했다. 제국 수도에서 경기도청 소재지로 격하됐다. 9년 뒤 3월 1일 전(全) 조선인이 궐기했다. 서울 종로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했던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은 고향 천안으로 내려가 만세운동을 기획했다. 한 달 뒤인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천안 주민들이 궐기했다. 유관순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죽었다. 유관순은 체포돼 재판을 받았다. 조선인 헌병보조원 정춘영이 유관순을 직접 체포하고 고문했다.(동방신문 1949년 8월 9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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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이 순국한 서울 서대문감옥. 지금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됐다.

유관순이 체포되던 그날, 용산에서는 조선군 20사단 사령부가 문을 열었다. 이태원묘지 아래로 쫓겨간 둔지미 사람들은 땅에서 나오는 유골들을 골라가며 집을 지었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과 부인 이방자 결혼을 축하하는 사면령이 떨어졌다.(조선총독부 관보) 3년형이 확정된 유관순은 1922년 3월 말에서 1920년 9월 말 출소로 감형됐다. 친구들은 십시일반 추렴해 옷을 맞추고 머리핀과 구두를 사서 환영식을 준비했다. 방광이 파열되고 곳곳이 골절된 유관순은 출소 이틀을 남기고, 죽었다. 친구들은 "냄새가 진동하는 시체 앞에서 통곡했다."(2004년 유관순 기숙사 동기 故 보각 스님 회고) 그 유관순이 묻힌 곳이 바로 둔지미 사람들 머리 위로 해가 뜨던 이태원공동묘지다. 2018년 현재 옛 이태원 공동묘지 부지 꼭대기에는 이슬람교 서울 중앙 성원이 서 있다.

경성 대개발과 백골 협잡

경성 인구는 급증했다. 성저십리 혹은 사산금표 따위 정책과 구분은 실종됐다. 무질서한 개발이 진행됐다. 총독부는 경성 확장을 가로막는 성곽을 철거하고 동서남북으로 경성을 확대했다. 홍제내리, 수철리, 신사리, 미아리, 이태원에 있는 공동묘지도 개발 대상이 됐다. 1933년 9월 총독부는 뚝섬 면목리와 양주군 망우리, 동구릉면 교문리 공동묘지 부지를 고시했다. 모두 51만9000평이다.(조선일보 1933년 9월 8일 자)

이 가운데 이태원공동묘지가 문제였다. 5개 공동묘지 가운데 가장 크고, 옆에는 군사령부가 있는 요지였다. 1914년 정식 공동묘지가 됐던 이태원 야산에는 더 이상 묘를 쓸 자리가 없었다. 1931년 3월 이후 경성부는 더 이상의 매장을 금지했다.(조선일보 1931년 3월 24일 자) 기존 묘들도 모두 망우리로 이장하기로 했다.

이 죽은 자들을 대상으로 온갖 협잡이 난무했다. '백골 협잡'이라 불리는 사기극이 대표적이고 절대다수였다. 무연고 분묘를 자기 조상 묘라고 신고하고 이장 비용을 받아먹는 사기꾼들이다. '북망산 해골을 협잡해 먹은 부(府) 직원'(조선일보 1936년 6월 12일 자). 1936년 내내 협잡꾼 준동 기사가 신문을 채웠다.

경성부와 총독부가 신문에 올린 분묘 개장 공고와 유족에게 보낸 통지서는 무시되거나 대부분 반송됐다. 조선 중기 이래 형성된 공동묘지였다. 4만 여 묘지 가운데 연고를 신고한 무덤은 1만 기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죽은, 천안 소녀 유관순 가족에게도 통지서는 전달되지 않았다.

망우리와 유관순

결국 1937년 이태원공동묘지는 망우리로 이전이 완료됐다. 무연고 분묘는 모두 화장돼 망우리로 합장됐다. 이태원 언덕은 택지로 개발됐다. 땅을 파면 끝없이 해골이 나왔다. 해방이 되고 전쟁이 터지고 전쟁이 끝나고 이태원에 사람들이 다시 정착했을 때도 해골은 끝이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1993년 망우리 사람들은 공동묘지 초입 숲속에 쓸쓸히 서 있는 비석과 봉분을 정비했다.

여기까지가 이태원에서 망우리까지 100년 못 되는 지난 세월 벌어진 생(生)과 사(死) 이야기다. 현충일을 맞은 오늘, 우리 모두의 누나 유관순의 영혼은 어디에 쉬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고향 천안에는 그녀를 부르는 초혼묘(招魂墓)가 있다. 그녀 혼백은 고향으로 갔을까. 한 줌, 아니 티끌 하나라도 흔적이 남았다면, 그곳은 어디일까.


[사산금표(四山禁標)]

사산금표

조선왕조는 한양을 에워싼 용마산, 덕양산, 관악산, 북한산(외사산·外四山)과 한양 내에 있는 낙산, 인왕산, 남산, 북악산(내사산·內四山)에 벌채와 매장을 금했다. 숲을 보호하려는 정책이다. 기둥과 표석도 세워 공포했다. 이를 '사산금표(四山禁標)'라 한다. 1765년에는 아예 지도〈사진〉를 만들어 민간에 보급했다. 조선판 그린벨트다. 이를 어기면 왕에게까지 보고됐다.

순조 32년인 1832년 음력 11월 23일, 장제급이라는 장교가 어머니 묘를 외남산 금표 안에 썼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에 왕이 이렇게 대답했다. "어찌 이 같은 변괴가! 일 푼의 이성이 있다면 어찌 이러한 짓을 했겠느냐!" 묘는 파헤쳐졌고 묘를 쓴 장제급은 엄히 형을 받았다. 상관인 금위대장도 강등 처분을 받았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6/05/201806050339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