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 등극 40주년 기념식
황태자, 생일잔치를 청하다
1901년 12월 11일 대한제국 황태자 이척(李坧)이 황제 고종에게 상소를 했다.
'부황(父皇) 폐하의 높고 훌륭한 공덕은 선열보다 빛나고, 크고 깊은 혜택은 후세에 전할 것입니다. 하늘은 이 때문에 말없이 돕고 보답하려고 큰 위업을 맡기고 장수하게 하였으며 한없는 복을 주었나이다. 내년은 부황 폐하가 51세가 되고 왕위에 오른 지 40년이 되는 경사스러운 해옵니다. 소자가 동짓날에 모든 관리를 거느리고 축하를 올리도록 허락함으로써 하찮은 성의나마 조금이라도 펼 수 있게 하여 주시기 바라나이다.'
파티까지는 아니더라도 송덕문(致詞·치사) 정도는 받아주시라는 것이다. 이에 고종은 "크게 벌이자는 말이 아니니 특별히 허락한다"고 겸손하게 상소를 받아들였다.(1901년 12월 11일 '고종실록')
황태자는 이후 두 주일 동안 "이 김에 잔치도 벌이자"고 문무백관과 함께 네 번씩이나 거듭 청했다. 마침내 고종이 대답했다. "지금 백성이 처한 처지에서 헤아리면 짐의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그뿐만 아니라 내년 가을에 해도 결코 늦지 않다(以今民事 其能安於朕心乎 且待明秋 亦固未晩)."(1902년 12월 25일 '고종실록')
12월 26일 황태자는 경운궁(덕수궁) 중화전에서 황제에게 송덕문을 올렸다. 음력 정월 초하루인 1902년 2월 8일 고종은 중화전에서 축하를 받고 사면령을 반포했다. 허세(虛勢) 가득한 날들이 시작됐다.
황제, 즉위 기념식을 명하다
2월 18일 고종은 황태자로부터 새로운 존호(尊號)를 받았다. 새 존호는 '乾行坤定 英毅弘休(건행곤정 영의홍휴)'. 이로써 고종 황제 존호는 '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가 되었다. 50자다. 순조(77자), 영조(70자)에 이어 셋째로 긴 존호다. 고종 사후에 열두 글자가 추가됐다.
3월 5일 존호를 받은 기념으로 황제는 또 사면령을 반포했다. 이날 고종이 내린 조칙에는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백성이 굶주리고 나라 저축이 거덜 나서(不獲已勉從 朕實愧焉), 근심 걱정으로 비단옷에 쌀밥이 편안치 않지만 억지로 따랐으니 짐이 실로 부끄럽게 여겼다(不獲已勉從 朕實愧焉).'(1902년 3월 5일 '고종실록') 그런데, 의심스럽다.
2주일이 지난 3월 19일 고종은 이렇게 조령을 내렸다. '올가을에 등극 40년 경축 예식을 거행하려고 한다(玆於本年秋間 將行御極四十年稱慶禮式矣).' 세부 절차를 의정부와 궁내부, 예식원, 장례원에서 마련하라는 명도 함께 내렸다. 존호 진상 이후 40주년 기념식 이야기는 기록에 없다. 황제 본인이 내린 결정이었다.
잔치를 벌이다
3월 29일 왕족인 완평군 이승은이 황제에게 기로소(耆老所)에 들라고 상소했다. 나이 칠십을 기(耆)라 하고 여든을 로(老)라 한다. 기로소는 관료들 가운데 기로(耆老)한 자들을 예우하는 기관이다. 지금 서울 세종로사거리 교보빌딩 부근에 있었다. 왕은 달라서, 태조는 예순에 숙종은 쉰아홉, 영조는 쉰하나에 기로소에 들었다. 그 예를 따라 고종도 들라는 청이었다. 나흘 뒤 황태자가 기로소 입소와 함께 입소 잔치를 상소했다. 입소 잔치 이름은 양로연(養老宴)이다. 황제는 입소 요청은 받아들이고 잔치는 거절했다. 4월 13일 황태자 이척이 "떳떳한 규례이니 빠뜨릴 수 없는 일(彝典之不可缺者)"이라며 다시 잔치를 청했다. 고종은 '간약하게(簡約)' 치르라며 받아들였다.(1902년 4월 13일 '고종실록') 결정은 곧 이행되었다.
5월 4일 오후 1시 고종이 지붕이 누런 황제 가마(黃屋寶輦·황옥보연)을 타고 경운궁 대안문(大安門·현 대한문)을 나왔다. 황토현(현 동화면세점 일대) 신작로에는 군병이 완전군장으로 도열했다. 군악대가 나발과 북을 연주했다. 기로소 행사를 마친 황제는 오후 4시 환궁했다.(1902년 5월 5일 '황성신문') 다음 날 황제는 세 번째 사면령을 반포했다.
그달 30일 아침 경운궁 함녕전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다음 날 아침 또 잔치가, 밤에 또 잔치가, 6월 1일 아침과 밤 또 잔치가 열렸다. 잔치는 6일, 18일에 또 열렸다. 19일 밤에는 제국 영빈관인 대관정(大觀亭·현 프라자호텔 뒤편)에서 '각 공사, 영사와 신사를 청하여 기악(妓樂)으로 잔치를 벌였다.'(1902년 6월 21일 '황성신문') 잔치에는 평양, 선천, 진주 기생 30명과 서울 기생 50명이 동원됐다. 매천 황현에 따르면 정부는 잔치를 위해 프랑스제 촛대와 밥그릇을 구입했다. 잔치 시리즈에 투입된 예산은 6만9246원8전4리였다.
그 해 굶주린 경기도민들이 인조릉 장릉 송림을 침범하여 나무껍질을 모두 벗겼다. 능병들은 이를 막지 못했다. 송림 밑에서 쭈그리고 앉아 죽은 사람이 줄을 잇고 있었다.(황현, '매천야록' 3권, '경기도의 기근') 황실이 양로연을 치르면서 연일 북을 치고 풍악을 즐기자 사람들은 궁중으로 기와조각을 던졌다. 고종은 그때까지 투석(投石)의 변이 있었던 것도 몰랐다.('매천야록' 3권, '耆老社, 養老宴會의 投石')
평양행궁과 기념비각
"동서양 나라들 중에 수도를 두 개 두지 않는 나라가 없나이다. 황제 폐하께서 세우신 터전은 크고 원대하여 옛날보다 뛰어나건만 유독 이 제도만은 아직 시행하지 못하였나이다." 기로소 입소 사흘 전 특진관 김규홍이 상소했다. 고종은 "별도로 편의 여부를 물어서 처분을 내리겠다"고 답했다.(1902년 5월 1일 '고종실록') 닷새 뒤 고종이 말했다. "짐이 이에 대해 생각해 온 지가 오래되었다. 평양은 기자(箕子)가 정한 옛 도읍으로 예법과 문명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더구나 그곳 백성이 모두 바라고 기꺼이 호응하는 데에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고종이 행궁 건설 비용으로 내려보낸 돈은 내탕전 50만 냥이었다.(5월 14일 '고종실록') 양로 잔치가 한창이던 6월 3일 평양 행궁이 착공됐다. 궁궐 이름은 풍경궁(豐慶宮)으로 정했다. 360칸 규모였다.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비 설립도 이어졌다. 1902년 9월 설립된 조야송축소라는 관변 조직이 주도한 이 이벤트는 이듬해 2월까지 공무원 1770명으로부터 3만원을 모금했다.(1903년 2월 27일 '황성신문') 1903년 9월 2일 기로소 앞에 기념비각이 설치됐다. 이게 서울 세종로 사거리에 서 있는 '기념비전(紀念碑殿)'이다. '군수가 부호를 택하여 강제로 모금하기도 했고 군수가 착복하기도 했다.'('매천야록' 3권) 고종 탄생일인 양력 8월 28일은 만수성절이라는 이름으로 또 잔치가 벌어졌다.
칭경 40주년 기념식
즉위 40주년 기념식 공식 명칭은 '어극40년칭경예식(御極四十年稱慶禮式)'이다. 1902년은 1863년 열한 살에 왕위에 올라 황제로 40년을 맞은 해였다.
고종은 이해 10월로 예정된 축하연을 각국 사절이 참석한 국제 행사로 치르려고 했다. 메인 행사인 칭경 40주년 기념식은 10월 18일, 외부 인사 초청 행사인 외진연은 10월 19일, 궁중 내부 행사인 내진연은 10월 22일로 예정됐다.
몇 차례 연기됐던 내외 잔치는 12월 3일 경운궁 중화전에서 외진연을 시작으로 성대하게 거행됐다. 관청들은 문을 닫았고 상점들은 태극기를 게양했다. 7일에는 경운궁 관명전에서 내진연이 거행됐다. 잔치는 14일까지 관례에 따라 낮밤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정작 메인 행사인 기념식은 열리지 않았다. 이유가 있다.
창궐한 콜레라, 나랏돈 100만원
'태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거의 잊어버릴 지경이다. 콜레라는 원산의 말할 수 없는 오물, 이름 없는 악취와 지독한 날씨 때문에 노동 현장을 강타한 것 같다.'(1902년 9월 7일 '윤치호 일기') 콜레라가 대한제국을 덮친 것이다. 이로 인해 9월로 예정됐던 잔치는 거듭 연기됐다.
1903년 4월 30일로 연기됐던 즉위 기념식 또한 또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해 4월 10일 일곱째 아들 이은(李垠)이 천연두에 걸린 것이다. 결국 대한제국 정부는 칭경 기념식 행사를 취소하고 각국 정부에 이를 통고했다. 행사를 위해 지방에서 불렀던 임시혼성여단 부대도 해산하고 원대 복귀했다. 1904년 2월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터졌다. 나라는 남의 전쟁터로 변했다. 칭경 기념식은 완전히 무산됐다. 평양 행궁도 미완으로 끝났다.
1902년 8월 10일 칭경예식사무소가 의정부에 보낸 공문에는 칭경 행사 비용이 100만원으로 나와 있다. 명목은 칭경시각항목(稱慶時各項費)이다.(각사등록 근대편, '예식 때 각종 비용에 대한 예산외 지출 청의서') 1902년 대한제국 총예산은 758만5877원(세출 기준)이었다.(1902년 2월 7일 '황성신문') 나랏돈 13.2%가 사라졌다. 평양 행궁은 1913년 병원으로 변했다.
황제국이 되려면
위엄은 보였는가. 황제국은 되었는가. 위엄을 보이면 황제국이 되는가. 1450년 세종 32년 집현전 부교리 양성지가 상소를 올렸다. '모름지기 (적에
게) 한번 대승(大勝)하여야 옳을 것이옵니다(須一大勝 而後可也). 저들이 우리 병력이 서로 대적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연후에야 감히 가볍게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여 봉강(封疆)을 가히 지킬 수 있습니다.'(1450년 1월 15일 '세종실록') 나랏돈을 13% 쓰면서 잔치를 벌인다고 부강해지지 않는다는 충언이었다. 참된 위엄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경고였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1/14/201811140043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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