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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백 번 무릎을 꿇었다, 나라를 지켰다

Bawoo 2019. 10. 17. 21:51


고려 대몽항쟁과 세조구제(世祖舊制)

박종인의 땅의 歷史

1270년 2월 연도(燕都·북경)

몽골 황제 쿠빌라이 세조는 참으로 난감하였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쉰다섯 먹은 무장이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입만 열면 이런저런 요구를 쏟아붓는 변방 나라 고려 왕 원종이, 대몽골 황제와 사돈을 맺자는 것이다. 자기 정적(政敵)을 치겠다고 군사를 빌려 달래서 승낙했더니 감사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이번엔 딸을 달라고? 무시할 수 없는 요구이긴 했다. 자기를 황제로 만들어준 사람이 바로 이 네 살 아래 원종이었으니까. "내 자식들이 다 결혼을 해서…"라고 얼버무린 황제는 결국 4년 뒤 숨겨둔 딸을 그 아들에게 내주었다.(고려사 1270년 원종 11년 2월 4일·1274년 원종 15년 5월 11일) 자, 748년 전 대몽골 제국 황제 쿠빌라이를 쩔쩔매게 만든 건방진 나라, 고려 이야기.

강화도에 있는 고려 왕릉

1232년부터 1270년까지 인천 강화도는 고려왕조 전시(戰時) 수도였다. 당시 권력을 쥔 무신정권은 세계 최강 몽골에 수도를 옮기며 항전했다. 1206년 건국 이후 불과 50년 만에 모스크바를 넘어 폴란드와 헝가리까지 집어삼킨 몽골이었다. 그런데 이 작은 나라를 정복하지 못했다. 국토를 초토화하고 백성을 짓이겨도 지도층은 항복을 거부했다. 몽골에는 불가사의한 나라였다. 그런데 수도가 개경이고 주 무대가 북한 지역인지라 휴전선 남쪽에는 남아 있는 흔적이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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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는 고려 대몽 항쟁기 전시 수도였다. 강화도에는 고려 왕 2명과 고려 왕비 2명의 능이 남아 있다. 13세기 초강대국 몽골 앞에서 고려가 나라 이름도, 국가 체제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외교에 있었다. 명분과 자존심 대신 국가 존속을 택한 지도자들 덕분이었다. 사진은 원종 왕비 순경태후의 가릉 옆 석실분. 이 무덤이 진짜 순경태후 능일 확률이 높다. /박종인 기자

강화도에는 있다. 고려 23대 왕 고종이 강화도에 묻혀 있다. 홍릉이라고 한다(조선 고종 능도 홍릉이다). 강화도로 천도한 왕이다. 최씨 무신정권 타도를 시도하다가 왕위에서 쫓겨나 강화에 유배돼 죽은 희종도 묻혀 있다. 석릉이라 한다. 고종의 어머니 원덕태후 능(곤릉)과 고종 며느리 순경태후 능(가릉)도 강화도에 있다. 바로 이 고종과 순경태후 남편 원종이 이번 이야기 주인공이다. 한 나라 군주로서 고종이 어떤 굴욕을 감수하고 나라를 보전했는지 한번 본다.

1232년 6월 권력자 최우 자택

몽골 침입이 극에 달했던 1232년 6월, 당시 무신정권 지도자 최우 집에서 회의가 열렸다. 국왕이 있었지만 허수아비였다. 중요 결정은 주로 비공식 회합에서 이뤄졌다. 안건은 천도(遷都)였다.

무신정권은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몽골에 항전하자고 했다. 그때 개경 인구는 10만에 이르렀고 호화 저택이 서로 바라보며 서 있었다. 평온했다. 민심은 천도 거부였다. 평소 과묵하던(고려사 유승단 열전) 종2품 문신 참지정사 유승단이 입을 열었다. "섬에 숨어 구차하게 세월을 연장하면서 백성과 장정을 칼과 화살에 죽게 만들고 노인과 아이들을 노예와 포로가 되게 하는 것은 나라를 위한 장계(長計)가 아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날 밤 김세충(金世沖)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군사와 양식이 풍족하니 천도는 불가하다." 김세충은 군인이었다. 특수부대인 별초(別抄) 지유(指諭·부대장)였다. 최우는 김세충 목을 베고 그날로 천도를 결정했다. 백성들에게는 섬과 산성으로 숨으라고 방을 붙이게 했다. 험난한 항쟁이 시작됐다. 항쟁을 결정한 권력자 최우는 공무원 월급 운반 수레인 녹전거(祿轉車) 100대를 징발해 자기 재물을 싣고 섬으로 떠났다.(고려사절요 1232년 고종 19년 6월)

지옥 그리고 항복

항전은 오래갔다. 몽골은 고려 왕실에 공물과 인질은 물론 입조(入朝)를 요구했다. 왕이 공식적으로 항복하고 속국이 되라는 것이다. 섬으로 숨은 지 21년이 흐른 1253년, 강화(講和)를 주장하는 관료들이 고종 둘째 아들 왕창(王)을 보내자고 결정했다. 고종이 머뭇댔다. 참지정사 최린이 말했다. "아들이 중요한가. 지금 백성 중 살아남은 자가 열에 두셋이다. 강화 한 곳을 지킨들 어찌 나라가 되겠는가."(고려사절요 1253년 고종 40년 12월) 고종은 아들을 몽골로 보냈다. 몽골 요구는 더 집요하고 더 거칠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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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묻힌 홍릉(왼쪽)과 원종의 아내 순경태후의 가릉.

섬 바깥세상은 유승단 예언대로였다. 1254년 한 해 남녀 20만6800명이 끌려갔다. 살육당한 자는 헤아릴 수 없었다. 몽골군이 지나간 마을은 잿더미로 변했다.(고려사절요 1254년 고종 41년 12월) 개경에서 죽은 아버지 시신을 찾던 문신 박항은 아비를 찾지 못해 산을 이룬 시체 더미를 뒤져 비슷하게 생긴 사람 300여 명을 묻어주었다.(고려사절요 박항 열전) 나라 꼴이 나라가 아니었다. 여론은 화친(和親), 다시 말해 항복이었다.

9년 뒤 고종은 맏아들인 세자 왕식에게 화친 요청 문서를 들려 보냈다. 돈이 없어서 문무 관료들이 은 1근과 옷감을 추렴했다. 짐 실을 말이 없어서 행인(行人)들 말을 강제로 샀다. 문서에는 이렇게 적었다. "병이 들어 태자를 대신 보내니 모든 말을 받아주셔서 제후로서 충성스러운 직책을 다할 수 있게 하여 주시라."(고려사 1259년 고종 46년 4월) 세자가 국경을 넘고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 항복을 받아야 할 황제 헌종이 죽어버린 것이다.

쿠빌라이와 세자의 만남

헌종의 동생들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당시 왕도였던 서쪽 카라코룸에서 막내동생 아릭부카가 합법적으로 칸(汗)에 등극했다. 넷째 동생 쿠빌라이는 동쪽에서 남송을 정벌하고 있었다. 국경을 넘은 세자 일행은 아릭부카 대신 남송 양양(襄陽)에 있는 쿠빌라이를 택했다.

'태자가 폐물을 받들어 길가에서 배알하니 황제의 아우가 놀라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고려는 만리(萬里)의 나라이다. 당 태종이 몸소 정벌했으나 복속시킬 수 없었는데 지금 세자가 스스로 오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라고 하였다.'(고려사절요 1260년 원종 1년 3월 17일) 힘을 얻은 쿠빌라이는 스스로 몽골제국 5대 황제에 올랐다. 그가 세조다. 고려 세자가 왜 쿠빌라이를 택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실세(實勢)라고 판단했는지,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아무 생각이 없었는지 정말 아무도 모른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不改土風 - '고려는 그대로 둔다'

고종 능인 홍릉을 지키는 문인석.
고종 능인 홍릉을 지키는 문인석.

세자가 고려로 돌아가고 두 달 뒤 세조가 이렇게 명했다. "의관은 본국 풍속을 따르고 위아래로 모두 고치거나 바꾸지 말라(衣冠從本國之俗 上下皆不更易). 의심하면서 두려워하지 말라(毋自疑懼)."(원고려기사 1260년 세조황제 원년 6월) 사신도 몽골 중앙에서만 파견하고, 개경 복귀도 서두르지 말 것이며 몽골군도 곧 철수하겠다고도 했다. 파격이었다. 고려는 다른 피정복 국가와 달리 국가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도록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고려 국가 체제를 그대로 유지시킨다는 '불개토풍(不改土風)' 정책은 몽골이 멸망할 때까지 유지됐다.

단순히 권력 쟁취를 도왔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무신정권이 무리하게 이어간 대몽 항쟁에서 고려 군사력이 높게 평가된 덕도 있었다. 또 있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 고려의 적극적인 외교 공세 덕이다.

고려가 요구한 결혼 동맹

10년 뒤 왕이 된 세자 원종이 새 수도 연도로 가서 결혼 동맹을 요청했다. 무신정권이 속썩이는 국내 정치를 권위로 누르고, 황제 사위국으로 고려를 격상시키겠다는 전략이었다. 1270년 2월 4일 벌어진 일이다. 황당한 요청에 세조는 관료들과 논의 끝에 "서두르지 말고 찬찬히 생각하자"며 미뤘다. 딸들이 다 결혼했다는 핑계도 붙였다.(고려사 1270년 원종 11년 2월 4일) 사실은 그에게 후궁 아속진(阿速眞) 사이에 쿠툴룩켈미시(忽都魯揭里迷失)라는 열한 살짜리 딸이 있었다. 이듬해 10월 세조는 전략적 고민 끝에 혼인을 허락했다. 1274년 5월 11일 원종의 맏아들 왕거(王昛)와 세조 딸 쿠툴룩켈미시가 혼인을 했다.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다. 아버지 원종은 한 달 뒤 죽었다.

모든 것이 바뀌었다. 충렬왕이 몽골에 머물다 고려로 돌아오던 날, 몽골의 고려 파견 관리인 다루가치가 왕에게 절을 하지 않자 몽골 사신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돌아가 황제께 (네 무례함을) 보고하면 죄가 없을 것 같은가?"(고려사 1274년 충렬왕 즉위년 8월 25일) 다루가치는 충렬왕 때 폐지됐다. 이후 몽골에서 무리한 공물 요구와 제도 변경 간섭이 있으면 고려는 '세조가 선언한 법'이라며 이를 거부했다. 이를 세조가 만든 옛 제도, '세조구제(世祖舊制)'라고 한다. "몽골 수탈은 지독했다. 하지만 동시대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미미했다. 철저한 외교적 성과였다."(서울시립대 역사학과 교수 이익주)

강화도에서

고려 전시 수도 강화도에는 나라를 보전한 군주 고종이 잠들어 있다. 그 아들 원종은 개경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 원종의 아내 무덤 가릉은 강화에 있다. 가릉 옆에는 정 체 모를 석실무덤이 있는데, 규모나 위치로 볼 때 이 무덤이 실제 가릉일 확률이 높다.(이상준, '강화 고려왕릉의 피장자 검토, 2017년) 몽골이 고려를 멸망시킨 것이 아니었다. 국가를 보전하고 왕권을 확립한 이후 나태하고 부패해진 탓이었다. 그 부패한 왕조는 신흥 권력 집단인 신진 사대부가 무너뜨렸다. 여기까지 무릎 꿇고 나라를 지킨 사람들 이야기였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9/05/201809050005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