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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송시열이 北伐을 추진했다고?

Bawoo 2019. 10. 15. 19:32



북벌을 거부한 송시열과 화양동 만동묘

박종인의 땅의 歷史

충청북도 괴산 화양동계곡 초입에 복원이 덜 된 유적이 있다. 문 너머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 문이 또 나오고 그 뒤쪽 건물에 현판이 걸려 있다. 만동묘(萬東廟). 명나라 황제 신종과 의종을 모신 사당이다. 사당에서 계곡을 더 들어가면 등산로 옆 첨성대 절벽에 이렇게 새겨져 있다. '萬折必東(만절필동)'. 황하가 1만 번 꺾여도 동쪽으로 흐른다는 뜻이다. 소경대왕 글씨다. 소경대왕은 선조다. (망한)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은 어떤 역경에도 한결같다는 말이다. 사당 이름은 이 넉 자에서 따왔다. 1704년 사당을 지은 이는 권상하다. 사약 먹고 죽은 스승 유지(遺志)로 지었다. 스승 이름은, 송시열(宋時烈)이다. 북벌론(北伐論)을 주도했다는 그 인물이다.

효종, "나는 北伐을 원한다"

대낮에 금성이 빛나던 봄날이었다. 영의정 심지원이 사표를 제출했다. 효종은 승지를 시켜 마음을 돌리게 하라 일렀다. 그리고 이조판서를 불렀다. 판서 이름은 송시열이다. 왕이 "봄비가 그치지 않아 걱정"이라고 하자 송시열이 답했다. "주상께서 백성을 애써 구제하시는 정성이 지극하지만 하늘의 뜻이 편안치 않아 재앙이 거듭 생기고 백성이 원망하고 있습니다." 정치 똑바로 하라는 소리였다.

대화가 잠시 이어진 뒤 송시열이 입을 열었다. "송나라 효종이 유학자 장남헌을 만날 때는 좌우를 물리고 만나 큰일을 도모했나이다." 그러자 효종이 승지와 사관과 내시를 모두 물러가라 명했다. 바깥에 있는 관리들은 송시열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外廷之臣 不知所達何事). 주위를 물리친 뒤 효종이 송시열에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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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괴산 화양동계곡 초입에는 만동묘 유적이 있다. 중화주의자요 존명주의자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세운 명나라 황제 사당이다. 명을 이었다는 명분으로 북벌론은 완전히 퇴출됐다. /박종인 기자

"나는 포병(砲兵) 10만을 길러(…) 청나라 산해관(山海關)으로 쳐들어갈 계획이다(養精砲十萬(…)直抵關外)." 즉위 10년 만에 왕이 밝힌 북벌 계획이었다.(1659년 효종실록 10년 3월 11일·송자대전 '악대설화(幄對說話)') 1659년 기해년 봄날 효종과 송시열이 독대한 이 대화를 기해독대(己亥獨對)라고 한다.

그런데 한 달 뒤 효종이 죽었다. 송시열은 15년 뒤 비밀 대화 내용을 전격 공개했다. 이유는 뒤에 나온다.

효종의 숭무정책과 산림(山林)

효종은 정통성이 약했다. 형 소현세자가 아버지 인조에 의해 쫓겨나고 왕이 된 사람이었다. 원칙적으로는 아직 살아 있는 소현세자 막내아들 석견이 차기 왕이었다. 그러니 적장자 상속 원칙에 어긋났다. 이에 효종은 인조 때 원로들을 대거 숙청하고 산림(山林)을 등용했다. 산림은 관직을 거부한 초야 사대부다. 도학과 의리를 중시하는 재야 정치가다. 이 가운데 거물은 요집조권(遙執朝權), '멀리서 조정의 권세를 좌지우지할' 정도였다. 이 가운데 송준길과 송시열이 있었다. 세간에서는 두 송(宋)이 "산림을 중히 등용하자(崇用山林)"고 밀약했다고 했다.(이건창, '당의통략(黨議通略)')

병자호란 직후라 나라도 불안했다. 집권 이듬해인 1650년 숙청 위기에 몰린 인조 공신 김자점이 "효종이 무슨 일을 꾸미는지 알 수 없다"고 청나라에 밀고했다.('당의통략') 청나라 사신 6명이 실상 조사를 나왔다. 조선 정부는 사신에게 뇌물까지 줘가며 겨우 무마했다.(1650년 효종실록 1년 3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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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무덤. 괴산에 있다.

집권 3년 이후 청나라 간섭이 뜸해졌다. 효종은 군비 확장에 돌입했다. 중앙군인 어영군을 4000명에서 6000명으로 증원하고 친위대인 금군을 600명에서 1000명으로 증원했다. 왕권 강화 목적도 있었다. 1650년 8월 효종은 특별 무과 시험인 관무재(觀武才)도 전격 부활시켰다. 2년 뒤에는 직접 노량진에서 열린 열병식에 참석했다.

문신들이 반발했다. '명목은 있으나 실속은 없을 듯하다'는 것이다.(1652년 효종실록 3년 7월 22일) "세상이 전하께서 오랫동안 바깥 고생에 익숙해 단정히 팔짱 끼고 있는 걸 못 견딘다고 한다"는 조롱도 나왔다.(1654년 효종실록 5년 2월 29일) 심지어 "자전(임금 어머니)이 목욕하는 날이니 실효 없는 행사 날짜를 바꾸라"고도 했다. 이에 효종은 "나를 주왕, 걸왕 같은 폭군에 비유해도 상관없지만 어찌 감히 자전을 들먹이는가"라고 대로했다.(1652년 효종실록 3년 7월 25일) 지방단체장인 문관이 겸임하던 지방군 사령관, 영장(營將)도 무관으로 부활시켰다.

그런데 왕 스스로 "과인이 임금인 이때만큼 재난이 많은 때가 있었나"라 탄식할 정도로(1659년 효종실록 10년 3월 26일) 유난히 가뭄·홍수·폭설도 많았다. 군비 강화는 백성에게 부담이 컸다. 산림에게는 왕권을 견제할 기회였다. 왕도 산림과 타협할 때였다.

송시열, "왕이 놀기를 일삼으니"

효종이 즉위하던 해 이미 송시열은 이런 상소를 올렸다. "전하께서는 오랑캐 속에 계실 때 날마다 술 마시고 놀기를 일삼고 학문에 종사하시지 않았다(殿下在虜中 日事杯酒戲豫 而未嘗從事於學問)."(송자대전, '기축봉사(己丑封事)', 1649년) 8년이 지난 1657년 송시열이 다시 상소를 올렸다. "지난 8년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고 신하와 백성 기대에 부응할 만한 조그마한 공효가 없이(了無尺寸之效) 오늘날에 이르렀다."(송자대전, '정유봉사(丁酉封事)') 이듬해 효종은 재야로 돌아갔던 산림의 거두 송시열을 이조판서로 등용했다. 산림 문신의 지원 없이 군비 증강은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한 해가 또 지난 1659년 3월 효종이 요집조권(遙執朝權)하는 거물 송시열과 독대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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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동 계곡 '첨성대' 절벽에 새겨진 '만절필동'. 선조 글씨다.

효종, "나와 뜻이 다르다"

효종이 이리 말했다. "예전의 칸(汗· 청 황제)은 인재가 많았는데 지금은 용렬하며, 점점 무사(武事)를 폐하고 중국의 일을 본받고 있다. 나는 그 땅에 오래 있었기에 형세 또한 잘 안다. 10만 포병을 기르면 중원의 영웅들이 호응할 것이다. 칸은 주색(酒色)에도 깊이 빠져 있지만 나는 주색을 끊고 경계하여 늘 정신이 맑고 몸도 건강해졌으니, 10년을 기다릴 수 있다." 구체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북벌 계획에 송시열이 이렇게 답했다.

"제왕은 반드시 자신을 수양하고 가정을 다스린 뒤에야 법도와 기강을 세워 두서가 있게 일을 했나이다(帝王 必先修己刑家 然後乃可以立經陳紀)." 한마디로 수양부터 하라는 말이었다. 거듭 구체적인 방안을 묻는 효종에게 송시열은 똑같이 거듭해서 이렇게 답했다. "격물치지와 성의를 하고 난 뒤에도 정심 공부를 해야 합니다. 성인이 쓸데없는 말로 후세 사람들을 속였을 리가 없습니다(聖人必不爲此無用之言)." 이른바 성리학에 나오는 자기 수양론을 송시열은 끝없이 나열했다. 결국 효종이 이렇게 말했다. "경의 뜻은 내 뜻과 다르오(卿意與予不同矣)."

이게 북벌 계책을 묻고 답하는 비밀 독대의 전부였다. 효종이 한마디 더 물었다. "경은 말끝마다 주자(朱子)를 칭하는데, 어찌 이처럼 잘 알고 있소?" 송시열이 답했다. "아직 읽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송시열이 속한 서인 반대파인 남인 남하정이 쓴 '동소만록(桐巢漫錄)'에는 이런 일화가 적혀 있다. "송시열이 정승 정태화에게 와서 북벌을 도모할 때라고 했다. 그러자 정태화가 당신이 천하에 대의를 펼치라고 답하고 말았다. 그가 가고 아들이 왜 그랬느냐고 물었다. 정태화는 '나한테 북벌은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자기는 빠져나가려고 왔던 것인데 내가 어찌 속아 넘어가겠는가'라고 답했다." 당대의 평도, 대화를 한 군주도 송시열 속뜻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북벌은 없었다. 오로지 명에 대한 사대밖에 없었다.

정치논리에 놀아난 북벌론

화양동계곡 절벽에 있는 '대명천지'와 '숭정일월'.
화양동계곡 절벽에 있는 '대명천지'와 '숭정일월'. 송시열 글씨다.

1662년(현종 3년) 남명(南明)이 멸망했다. 청나라가 대륙을 완전히 지배했다. 명분만 있던 북벌론이 퇴조하기 시작했다. 1673년 청나라에 삼번의 난이라는 반란이 벌어졌다. 효종이 언급한 '영웅이 호응할 시기'가 온 것이다. 그때 남인인 윤휴가 현종에게 형세상 복수할 때가 왔다고 주장했다. 현종도 뒤이은 숙종도 호응하지 않았다. 입으로 북벌을 외치던 서인 세력이 '군사를 모아 반역을 꾸몄다'며 윤휴 처형을 주장했다. 숙종은 이를 따랐다. 1680년 윤휴는 "왜 조정이 선비를 죽이는가(朝廷奈何殺儒者云)"라 일갈하고 처형됐다.('당의통략') 정권은 남인에서 서인으로 넘어갔다(경신환국).

그때 송시열은 6년째 유배 중이었다. 1674년 송시열은 현종 모(母)이자 효종 비인 인선왕후 장례 때 인선왕후는 (장남 소현세자 비 아래) '둘째 며느리'라고 주장했다. 효종 정통성을 부인하는 주장이었다. 이에 현종 뒤를 이은 숙종은 송시열에게 유배형을 내렸다. 아예 죽이라는 남인들 상소가 빗발쳤다. 이듬해 송시열은 효종과의 대화록을 전격 공개했다. 효종과의 특별관계를 부각시키려는 뜻이었다. 사형을 면한 송시열은 윤휴의 죽음과 함께 즉각 정계에 복귀했다.

만동묘, 북벌론의 종언

1689년 송시열이 죽었다. 정쟁에 패배해 제주도로 유배된 정치가였다. 그런데 그때 정권을 잡았던 남인은 죽음을 원했다. 나이 여든둘에 송시열은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가 제자 권상하에게 유언을 남겼다. 자기가 공부하던 화양동 계곡에 명나라 황제를 기리는 사당을 지으라고. 1704년 제자들이 화양동에 사당을 세웠다. 그게 지금 복원 중인 만동묘다. 그해 말 창덕궁에 또 다른 명 황제 사당인 대보단이 건설됐다. 조선이 공식적으로 명나라를 '제사' 지냈다.

명이 공식적으로 멸망하고 조선이 그 후계자가 됐다는 선언이었다. 정신적으로 중화 정통성을 이었다는 선언이었다. 명은 조선에 부활했다. 굳이 북벌을 할 이유가 없었다. 송시열이 꿈꾸던 세상이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9/19/201809190007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