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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가뭄 구제보다 중한 것이 교화로다!"

Bawoo 2019. 10. 24. 19:36

세상을 바꾼 서기 1543년 ④1543년 조선, 서원을 열었다


박종인 여행문화전문기자


서기 1543년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를 돌리고(3월 21일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출판), 6개월 뒤 그 지구를 반 바퀴 돌아 포르투갈 철포(鐵砲)가 일본에 상륙했다(9월 23일). 유럽은 중세 암흑기를 탈출해 세계사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가고시마 남단 다네가시마(種子島) 지도자가 받아들인 신무기는 100년이 못 돼 동아시아 역사를 바꿔버렸다. 바로 그해 조선은 서원(書院)을 설립했다. 설립자는 풍기군수 주세붕이다. 서원은 성리학 교육기관이다. 날짜는 미상이다.

가뭄이 극심하던 어느 날

1542년 풍기에 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부임 사흘째 되던 날 죽계(竹溪) 계곡으로 나들이를 했다. 숙수사(宿水寺)라는 절이 있던 곳이다. 때는 가뭄이 연거푸 들어 계곡물은 말랐으나, 신임 군수 눈에는 이리 보였다. '안향 선생이 노래했네,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산봉우리에 앉아 있고 시냇가에는 백 척 누각 우뚝하다고. 실로 산수가 중국 여산(廬山)에 못하지 않아, 골짜기에 흰 구름이 가득하구나.'(주세붕, '죽계지(竹溪志)' '목사 안위에게 보내는 편지') 그래서 주세붕은 이 골짜기를 백운동(白雲洞)이라 이름 짓고 안향을 기리는 사당을 지었다.

안향은 1289년 고려 때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들여온 학자 겸 관료였다. 충주목사 안위는 안향의 11세손이었다. 죽계계곡이 있는 순흥은 안향 고향이었다. 중국 여산은 송나라 유학자 주희가 중국 첫 서원인 백록동 서원을 만든 곳이다. 그래서―.

해가 지나고 서기 1543년 주세붕은 '백운동'에 조선 첫 서원을 세웠다. 산수(山水)는 여산과 같고 이름은 백록동을 좇았으며 고려 성리학 원조 안향의 고향이었으니 딱이었다. 서원 이름은 '백운동서원'이라 지었다. 사당을 세울 때 신임 군수는 토지신에게 제사를 올렸는데, 하늘이 도왔는지 땅을 파자 한 자(尺)도 못 돼 놋쇠 120근이 나왔다. 이듬해 이를 팔아 '사서삼경'과 '주자대전', '통감강목' 따위 서적을 사고 민간이 불법으로 쓰고 있는 국유지를 회수해 서원 경비를 조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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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543년 경상도 풍기군수 주세붕은 자기 임지이자 고려 때 성리학을 도입한 학자 안향의 고향 풍기에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7년 뒤 명종이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으로 사액하면서 본격적인 성리학 정치, 교육 시스템이 가동됐다. 타락한 정치와 교육이 낳은 서원은 이후 조선 정치를 분열시키는 후방 기지 역할을 했다. 사진 가운데 있는 현판 ‘紹修書院’은 명종이 쓴 친필이다. /박종인 기자


'겨울에 천둥이 치고 여름에 서리가 내리며 지진이 일어나고 가뭄이 심하니 재변이 이처럼 심한 적이 없던'(1542년 '중종실록' 5월 15일) 때였다. 1541년부터 1543년까지 3년 동안 '중종실록'에는 '가뭄'에 관한 기록이 51번 나온다. "신임 군수가 세상 물정에 어둡다"는 주위 힐난에 주세붕은 이렇게 답했다. "실로 교육은 난리를 막고 기근을 구제하는 것보다 급한 것이다(誠以敎急於已亂救飢也)." 힐난이 거듭되자 주세붕은 격하게 대답했다. "아, 회옹(晦翁)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嗚呼 晦翁豈欺我哉)!"('죽계지' 서문) '회옹'은 송나라 서원 창시자 주희다. 송나라가 망하고 피비린내 나던 금나라 피지배 시절에 주희가 서원을 지었으니, 흉년에 서원을 만들어도 틀림이 없다는 뜻이었다. 자, 왜 하필 사립 교육기관인 '서원'이었는가. 왜 하필 '서기 1543년'이었는가.

소 잡기를 일삼다(殺牛爲事)

조선왕조실록에는 '殺牛爲事(살우위사·소 잡기를 일삼다)'라는 문장이 두 번 나온다. 한 번은 성종 때 '소 잡기를 업으로 하는 백정(白丁)'을 설명할 때(1489년 '성종실록' 11월 14일), 한 번은 중종 때다. 이렇다. '사학(四學) 관원들이 교회(敎誨)하는 데 뜻이 없어 유생이 모이지 않아 학사가 늘 비기 때문에, 노비들이 소 잡기를 일삼아(殺牛爲事) 뼈가 구릉처럼 쌓였나이다(積骨成丘).'(1542년 '중종실록' 1월 4일·1월 19일 ) '사학(四學)'은 조선 건국 후 한성에 만든 4개 중등학교다. 상급 교육기관은 성균관이다. 지방에는 향교(鄕校)가 있었다. 그런데 선생들은 가르칠 뜻이 없고 학생이 없다 보니 학교에서 소를 잡아먹어 소뼈가 언덕처럼 쌓였다는 충격적인 보고였다. 교실이 도살장으로 변한 어이없는 실태가 이듬해 주세붕이 사립대학인 서원을 만든 첫째 동기였다. 근본 원인은 정치였다.

'빽'이 난무한 공무원 조직

학문과 덕치의 상징, 성군 세종이 등극한 지 10년째, 대사헌 조계생이 상소를 했다. '서로 청하고 부탁해 벼슬에 제수되면 부임하자마자 여러 핑계로 사표를 내고는 또 권세가에 부탁해 승진하기를 거듭한다. 아무도 공부하려 하지 않는다.'(1428년 '세종실록' 8월 21일) 학교 선생 또한 '교양(敎養)할 것은 생각지도 않고 함부로 빨리 벼슬에 나아가고자 하여' 국학(國學)이 점점 쇠잔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계생이 건의했다. "과거 응시자는 반드시 성균관 출석부를 제출하게 하사이다." 세종이 이를 안건으로 올리니 빠진 사람 없이 죄다('僉') 말하기를 "옳지 않습니다" 하였다(與政府諸曹同議 僉曰不可).('세종실록' 같은 날) 공생관계에 있는 장관들이 죄다 출석부 체크를 거부했다는 기록이다. 또 있었다.

충북 화양동계곡에 있는 만동묘. 노론계 서원인 화양동서원과 만동묘는 당쟁의 상징이었다.
충북 화양동계곡에 있는 만동묘. 노론계 서원인 화양동서원과 만동묘는 당쟁의 상징이었다.


1445년 7월 18일 세종은 '충순위(忠順衛)' 부대를 창설했다. 3품 이상 고위직 자제가 입대해 복무가 끝나면 타 부서로 전직할 수 있는 부대였다. 군역을 가장한 특권이었다. 석 달 만에 '학생들이 활 쏘고 말 타는 것을 익히는 자가 몇천인지 알지 못하고, 성균관에 머물러 있는 자는 수십인밖에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1445년 '세종실록' 10월 6일) 지방도 마찬가지였다. '향교(鄕校) 훈도(訓導)들은 용렬하여 가르칠 줄을 모르며 학생들은 군역을 피하려는 무뢰한들이라 학교는 헛된 기구가 되었다.'(1548년 '명종실록' 9월 11일)

정치 투쟁과 연산군의 폭정

1456년 6월 2일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세조에게 집현전 학자들이 반역을 꾸미다 적발됐다. 사육신 사건이다. 나흘 뒤 세조는 집현전을 전격 폐지했다. 세조는 반역자들 재산을 몰수해 동지들에게 나눠줬다. 세조 정권은 불법성을 부국강병책으로 덮었고, 세조 본인은 불교에 심취했다.

이어 닥친 연산군시대는 깜깜한 암흑기였다. 1498년부터 무오·갑자·기묘사화에 성리학을 주장했던 사림세력이 집단으로 처형되거나 숙청됐다. '왕이 문신을 베어 죽이고 내쫓아 거의 다한 뒤에 독서와 교류를 법으로 금하니 사대부 집에서는 그 자손들에게 배우지 못하도록 경계하게 되었고'(1504년 '연산군일기' 5월 18일) '성균관은 활쏘기 경연장과 기생파티장이 되었다.'(같은 해 8월 17일)

1506년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옹립한 공신들이 내놓은 학문 진흥책은 먹히지 않았다. 결국 19년 뒤 선생 없이 학생만 달랑 4명 있는 향교가 나오더니(1525년 '중종실록' 1월 23일), 성균관이 도살장으로 변하는(1542년) 참담한 교육 현실이 닥치고야 말았다. 요즘 말하는 인문학을 경시한 출세지향적 교육과 부패한 정치가 어깨동무하고 만든 아수라장이었다. 하여 이후 왕들은 다 허물어져간 관학(官學) 대신 새로이 일어나는 사림의 학교, 서원(書院)을 적극 후원하게 되었다.(최완기, '조선 서원 일고', '역사교육' 1975년)

백운동서원, 소수서원이 되다

경북 안동에 있는 도산서원. 이 또한 선조가 사액한 서원이었다.
경북 안동에 있는 도산서원. 이 또한 선조가 사액한 서원이었다.


그때 등장한 집단이 사림(士林)이었다. 여말선초 왕조 교체를 반대한 유학자 후손들이다. 백운동서원 설립 6년 뒤인 1549년 후임 풍기군수 이황이 경상관찰사 심통원에게 편지를 썼다. 때는 1545년 을사사화로 사림 출신 정치가들이 집단으로 숙청된 이후였다. "(서원) 이름이 역사에 수록되지 않는다면 오래도록 전해지지 못하게 될까 걱정스럽다."(근재집(謹齋集), 이황, '방백 심통원에 올리는 편지(與沈方伯通源 書)') 백운동서원을 국가가 공인해달라는 편지였다. 이듬해 어전회의에서 좌의정 심연원이 백운동서원 이야기를 꺼냈다. 막강 실세 심연원은 경상관찰사 심통원의 친형이다. "백운동에 땅과 노비는 있으니 이름과 책을 하사하시라."(1550년 '명종실록' 2월 11일) 두 달 뒤 명종이 '紹修(소수)'라는 이름과 책을 백운동에 내리니, 이게 영주에 있는 조선 최초의 사액(賜額·왕이 현판을 내린) 서원, 소수서원이다. 국가가 사설 교육기관 서원을 공인한 것이다. 이후 사액서원 토지에는 세금이 면제되고 서적과 노비가 하사되는 관행이 법제화됐다.

서원, 정치를 개판으로 만들다

서원은 사림 정치 본거지로 변했다. 사액서원은 물론 일반 서원도 지역민으로부터 원납(願納·자발적인 기부)한 경제적 특권을 누렸다. 이를 토대로, 지식 권력 집단인 사림이 정치투쟁을 벌였다. 서원이 당쟁(黨爭) 소굴로 변했다는 뜻이다. 당쟁에서 패한 사림은 서원으로 돌아와 회합을 하며 정권 참여 기회를 노렸다.(최완기, '조선조 서원 성립의 제문제', 한국사론 8집) 서원은 또 향리 자제들이 술과 고기를 다투어 빼앗는 장소로 변했다. 교화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정치에도 해가 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었다(有害於政 莫此爲甚).(남하정, '동소만록(桐巢漫錄)', 1740년)

화양동서원(1695년)은 노론 당수 송시열을 제사 지내는 서원이었다. 화양동서원이 발행한 문서(화양묵패·華陽墨牌)는 지방 수령도 거역 못하는 공인된 착취 도구였다. 화양동서원은 명나라 황제를 제사하는 만동묘(萬東廟)를 만들어 국가 권력에 도전하기도 했다. 결국 숙종은 1714년 비공인 서원에 대해 철폐령을 내렸다('갑오정식'). 1741년 영조는 갑오정식 이후 설립된 서원에 또 한 번 철폐령을 내렸다. 130년 뒤 고종 때 흥선대원군은 사액서원 47개를 제외한 모든 서원을 없애버렸다. 공식적으로 파악된 조선 서원 수는 모두 909개로, 한 읍(邑)당 3개꼴이었다.(정만조, '한국 서원의 역사', 2007년)

서기 1543년 타락한 정치와 교육 사이에 태어난 서원은 어미와 아비였던 조선 정치와 학문을 타락시키고 정체시켰다. 학문은 어떻게 타락했는가. 타락하기 전 찬란했던 조선의 학문을 본다. 〈⑤세종, 천재의 시대와 칠정산역법〉에서 계속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1/30/201901300039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