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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조선은 은을 버렸고 일본은 은을 손에 쥐었다

Bawoo 2019. 10. 26. 21:15


세상을 바꾼 서기 1543년 ⑥이와미은광과 조선인 김감불

박종인의 땅의 歷史

첨단 은 제련법, '회취법'

서기 1503년 5월 18일 김감불(金甘佛)과 김검동(金儉同)이라는 사내가 경복궁에 입궐했다. 두 사람은 각각 양인(良人)과 노비다. 벼슬도 없는 사내들이 어전회의에까지 출석했다. 그때 왕은 재위 9년째인 연산군이었다. 보고 사항은 이러했다. "납 한 근을 이용하면 은 두 돈을 제련할 수 있는데, 납은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니 은을 넉넉히 쓸 수 있게 되었나이다."(1503년 5월 18일 '연산군일기') 감불과 검동이 발명한 제련법 이름은 '회취법(灰吹法)'이다.

잿더미 속에 은광석과 납석을 섞어 녹이면 납은 재에 흡수되고 은만 분리되는 제련법이다. 은광석을 깨부순 뒤 녹여 은을 골라내던 재래 방식에 비해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나는 첨단 기법이었다. 16세기 초 발명된 이 첨단 제련법은 세상을 바꾸었다. 세상을, 조선만 빼고 온 세상을 바꿔놓았다. 기회를 발로 차버렸던 조선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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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대항해의 시대' 세계무역 결제 수단은 은(銀)이었다. 일본 시마네현에 있는 이와미은광(石見銀山)은 바로 그 16세기에 생산량이 세계 1위였던 은광이다. 일본은 이를 통해 세계무역 네트워크에 동참했다. 일본 은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증대시킨 제련법 '회취법'은 조선에서 데려온 기술자 2명에 의해 전수됐다. 조선은 명·청의 조공 요구가 있을까 두려워 팔도 금·은광을 모조리 폐쇄해버렸다. 금·은광 폐쇄 정책은 고종 때까지 계속됐다. /박종인 기자

대항해시대와 이와미은광

16세기는 대항해의 시대였다. 유럽은 신항로를 따라 인도와 동남아시아와 명나라를 찾았다. 유럽과 아시아가 무역으로 연결되는 시대였다. 명나라는 은(銀)으로 조세를 통일한 일조편법을 운용 중이었다. 그때 세계 최대 은광은 볼리비아에 있는 포토시(Potosi)였다. 대항해를 선점했던 포르투갈은 포토시 은을 싣고 명나라로 와서 도자기와 비단을 빈 배에 실어갔다. 일본 또한 동남아시아 믈라카에서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일본 물품을 팔고 은을 수입했다. 무역은 이즈모(出雲) 지역(현 시마네현) 다이묘(大名·영주)인 오우치(大內) 가문이 독점했다. 이즈모 지역 옛 이름은 이와미노쿠니(石見國)이다. 요컨대, 은에 의해 유사(有史) 이래 처음으로 세계가 연결되고 있었다.

1526년 이즈모에서 은광이 발견됐다. 오우치 가문은 은광 옆에 산성을 쌓고 부(富)의 원천으로 삼았다. 주변 세력들 사이 몇 차례 공방 끝에 은광은 1562년 모리(毛利) 가문에게 넘어갔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통일했다. 모리 가문은 은광을 히데요시에게 헌납했다. 그때 이와미 은광 생산량은 세계 1위였다. 하지만 일본은 은 제련술에 관한 한 후진국이었다. 매장량에 비해 떨어지는 품질과 생산량은 일본 광업계의 난제였다.

이와미은광 세계문화유산센터 전시장 초입에 있는 안내문.
이와미은광 세계문화유산센터 전시장 초입에 있는 안내문. 1526년 은광 발견, 1533년 (조선의) 회취법 도입, 그리고 1543년 철포 전래. 모두 조선이 소유할 수 있었던 기회들이다.

그런데 이와미은광이 발견되고 20년이 못 돼 상황이 급변했다. 해마다 조선에 후추, 소가죽 따위를 팔러 왔던 일본 사절단이 양질의 은(銀)을 가져와 면포와 교환을 요청한 것이다. 시전(市廛)은 왜은(倭銀)이 가득 채웠고(1540년 7월 25일 '중종실록'), 정기 무역단이 자그마치 8만냥(3.2톤)이나 되는 은을 가져와 면포와 바꿔달라고 요청하는 일까지 벌어졌다.(1542년 4월 24일 '중종실록') 면포 2필에 은 3냥이니(같은 해 6월 10일 '중종실록'), 자그마치 12만 필 규모였다. 결국 조선 정부는 1만5000냥어치만 매입하고 무역단을 돌려보냈다.(같은 해 7월 17일 '중종실록') 농구로 치면 버저비터요, 축구로는 극장 골이다. 일등공신은, 헛발질한 조선 왕실이었다.

조선인 기술자 종단과 계수

'천문 2년(1533년) 8월 5일 하카다(博多)의 상인 가미야 주테이(神谷壽禎)가 종단(宗丹), 계수(桂壽)와 함께 은광에 와서 회취법(吹鎔鍵製)을 시작했다(伴同國博多 宗丹及桂壽者 而來于銀山 始吹鎔鍵製白銀).'(에도 시대 이와미은광 기록을 모은 '긴잔규키·銀山舊記') 이와미 은광 발견 7년 뒤였다. 조선과 달리 여전히 재래식 제련법으로 은을 만들던 이와미였다. 그런데 어느 날 조선의 첨단 제련법인 '회취법'을, 초빙된 기술자, 그것도 두 명씩이나 와서 가르쳤다는 것이다. 이후 이와미은광은 볼리비아 포토시를 제치고 생산량이 세계 1위 은광이 되었다. 회취법은 다른 광산에 전파돼 일본에 실버 러시(Silver Rush)가 일어났다. 17세기 에도시대 초에는 연간 생산량 150톤으로 전 세계 생산량의 3분의 1에 달했다.(릿쇼대(立正大) 무라이 쇼스케·村井章介, '이와미은산과 세계사의 성립', 2007)

1595년 포르투갈 테이세라의 일본도.
1595년 포르투갈 테이세라의 일본도. 시마네현 붉은 동그라미 속에 '이와미은광(Argenti fodincae Hivami)'이라고 표기돼 있다(위쪽 작은 사진). /시마네현 고대이즈모역사박물관

이들은 누구인가. 6년 뒤 조선 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나온다. '유서종이 왜노(倭奴)와 사사로이 통해서 연철(鉛鐵)을 많이 사다가 자기 집에서 불려 은(銀)으로 만드는가 하면 왜노에게 그 방법을 전습하였으니 그 죄가 막중하나이다.'(1539년 8월 10일 '중종실록') 유서종은 전주 판관인데, 이미 공직을 남용해 이익을 챙긴 죄가 많았다. 그런데 일본의 은광석을 밀수입해 제련하고, 일본인에게 그 제련법까지 가르쳐줬다는 것이다. 중종은 "저놈이 죽어도 좋으니 실정을 얻을 때까지 형신하라"고 명했다. '빽'이 좋았는지 유서종은 전옥서 주부(교도소 책임자)로 강등됐다가 4년 뒤 파직 조치로 없던 일이 됐다.

한국과 일본 사료를 종합하면, 이와미 은광에 회취법을 전수한 기술자는 바로 조선인이라는 말이다. 중국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한·일 학계에서는 새로운 사료(史料)가 나오지 않는 한 종단과 계수가 조선에서 유출된 첨단 기술자라고 판단하고 있다. 자, 도대체 왜? 왜 조선의 기술자들은 일본으로 갔는가.

세종의 은광 폐쇄령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제작한 '문록석주정은(文祿石州丁銀)'.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제작한 '문록석주정은(文祿石州丁銀)'. 이와미은광을 장악한 후 임진왜란(문록의 역) 철포와 배 같은 무기 구입을 위해 이와미 은으로 만든 은화다.

"우리나라는 땅이 좁고 척박해 금과 은이 생산되지 않음은 온 천하가 다 아나이다." 1429년 8월 18일 세종이 명나라 황제에게 '금과 은을 조공 물품에서 제외해달라'고 편지를 올렸다. 편지를 들고 북경으로 갔던 사신들이 희소식을 가져왔다. 금과 은은 안 바쳐도 된다는 것이다. 그해 12월 6일 명나라 측 협상 파트너 윤봉의 동생 윤중부가 조선 정부로부터 토지 80결을 선물로 받았다.(1429년 12월 6일 '세종실록') 윤봉은 조선인 출신 명나라 환관이다. 윤봉은 이후 매, 개 따위를 황명(皇命)이라며 빼앗다가 의전 담당인 함길도 무장 이징옥에게 혼쭐이 났다. 금은 조공 면제가 얼마나 큰 공이었는지, 세종은 윤봉은 못 건드리고 이징옥을 처벌했다.(1432년 11월 18일 '세종실록') 그 정도로 명나라의 '처녀'와 '금은' 조공 요구는 가혹했다. 그런데 세종이 대처한 방식은 조선 스스로에게 가혹했다. 세종이 내놓은 정책은 화근(禍根) 제거, 바로 은광 '폐쇄'였다. 아예 금·은을 캐지 말자는 것이다. '경국대전'은 '금은을 북경에 몰래 가져다 파는 자는 교수형'이라고 규정했다.('형전' '금제') 금·은광 폐쇄 정책은 조선 말기까지 일관되게 시행됐다.

잡아보지도 못한 기회들

1600년 선조는 당시 최대 은광인 단천 은광을 채굴한 자는 전 가족을 국경으로 추방하고 감사는 파직하라고 명했다.(1600년 4월 24일 '선조실록') 1706년 숙종 때 만든 '전록통고'는 금과 은을 미리 국경도시 의주에 숨겨둔 자를 신고하면 면포 50필 혹은 면천(免賤) 포상을 규정했다. 18세기 영조는 새 은광이 발견됐다는 보고에 개발을 금했고(1740년 11월 20일 '영조실록'), 19세기 헌종은 "금은 채굴 금지는 농사철에 방해가 되고 백성이 이익을 다투게 되니 행한 조치"라는 보고에 채굴 금지 정책을 이어갔다.(1836년 5월 25일 '헌종실록')

명이 됐든 오랑캐 청이 됐든 대외적으로는 중국에 들키면 아니 되었다. 내부적으로는 백성이 본업인 농사 대신 이득에 눈이 멀게 되니 아니 되었다. 사대주의와 성리학적 도덕론에 의해 조선의 은(銀)은 햇빛을 영영 보지 못했다. 1582년 율곡 이이는 상소 '진시폐소(陳時弊疏)'에서 그 나라를 이렇게 묘사했다. '國非其國(국비기국)'. 나라 꼬라지가 나라가 아니라는 뜻이다.

에피소드가 누적되면 역사가 된다.

결국 19세기 말 조선 방방곡곡에 있는 광산은 '제국주의 양허업자의 행복한 사냥터(Happy hunting ground of the concessionists)'로 전락했다.(H. 위햄, '만추리아와 조선', 1904·F 해링턴, '신, 재물신과 일본', 1941 재인용)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와미 은광 유네스코센터 전시장 초입에는 철포와 은과 회취법 전래 내력을 한 줄로 요약한 안내문이 걸려 있다〈위에서 두번째 사진〉. 철포, 은, 회취법. 안개처럼 조선의 손에 들어왔다 빠져나간 기회들이다. 분하다.

은의 역습과 일본

일본은 믈라카에 집단 거주지까지 만들어 포르투갈 상인과 무역을 했다. 1543년 9월 포르투갈 상인을 태운 중국 상선이 일본 가고시마 다네가시마(種子島)에 도착했다. 도주(島主) 다네가시마 도키타카(種子島時堯)가 이들로부터 철포(鐵砲) 2정을 구입했다. 1549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철포 제작 노하우를 전수받은 쿠니토모(國友)에서 철포 500정을 구입했다. 철포로 무장한 노부나가에 이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을 완성했다. 히데요시는 이와미 은으로 은화 '문록석주정은(文祿石州丁銀)'을 만들었다. 히데요시는 이 은화로 철포와 군선(軍船)을 구입했다. 1592년 음력 4월 13일 새벽 철포부대를 포함한 1만8000여 일본군이 700척이 넘는 배를 타고 대마도 오우라(大浦) 항구를 빠져나갔다. 임진왜란, 조선이 무시한 철포와 조선이 부도덕하다고 몰아붙였던 은의 역습(逆襲)이었다. 〈⑦'전국시대의 통일과 임진왜란'에서 계속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2/20/201902200004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