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 감상실 ♣/[1800년 ~1819년]

[러시아]미하일 글린카[Mikhail Ivanovich Glinka]

Bawoo 2019. 12. 1. 20:15



Glinka drawn in the 1840s, portrait by Yanenko.
Glinka in 1856


Mikhail Ivanovich Glinka (Russian: 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Глинка[note 1], tr. Mikhaíl Ivánovich Glínka; 1 June [O.S. 20 May] 1804 – 15 February  [O.S. 3 February] 1857) was the first Russian composer to gain wide recognition within his own country, and is often regarded as the fountainhead of Russian classical music.[1] Glinka's compositions were an important influence on future Russian composers, notably the members of The Five, who took Glinka's lead and produced a distinctive Russian style of music.


러시아 근대음악의 기초를 쌓은 러시아 국민음악의 아버지이다.


미하일 글린카는 1804년 러시아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할머니의 과보호 속에서 자랐다. 그의 할머니는 어린 그에게 털옷을 입히고, 섭씨 25도를 유지하는 자신의 방에 가두어 키웠다. 할머니의 방에 갇혀서 그는 멀리서 울리는 교회 종소리와 집 앞을 지나는 농부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교회 종소리나 농부들의 노랫소리는 화음이 잘 맞지 않았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불협화음을 들으며 자랐기 때문에 그는 서유럽 음악의 협화음이라는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글린카는 삼촌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그의 삼촌은 대단한 음악 애호가로 집에 러시아 대부호만이 가질 수 있는 오케스트라가 있었다. 그 덕분에 글린카는 어려서부터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같은 서유럽 작곡가들의 음악을 마음껏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나이 10살 무렵이었던 어느 날, 그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핀란드 작곡가 크루셀의 클라리넷 5중주를 연주하는 것을 들었다. 그 순간 그는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 글린카는 그때의 감동을 "그때부터 음악은 나의 영혼이 되었다."라고 회고했다. 이 무렵 그는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지리와 같은 기본 과목과 더불어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다.

13살 때, 글린카는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귀족학교에 들어갔다. 학교에서 라틴어와 영어, 수학, 동물학 등의 과목을 배우면서 개인적으로 음악을 공부했다. 당시 야상곡을 창시한 것으로 알려진 영국 작곡가 존 필드가 러시아에 와 있었는데, 바로 그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그리고 그가 귀국한 후에는 찰스 마이어에게 피아노를 배웠는데, 작곡을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학교를 졸업한 후, 글린카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외무성 관리가 되었다. 관리일은 그다지 과중한 업무가 아니었고, 따라서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 시간에 그는 작곡을 했다. 이렇게 본래 직업은 따로 있으면서 취미로 작곡을 하는 '딜레탕트 음악가'는 비단 글린카뿐만 아니라 대부분 귀족 출신인 러시아 국민음악파의 공통된 특징이기도 하다. 당시 러시아에서 작곡가는 그다지 높은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그는 상당히 많은 곡을 썼는데, 대부분 부유한 아마추어 음악가들이 좋아하는 멜랑콜리한 로망스 같은 것이었다.

침대에 누워 오페라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작곡 중인 글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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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년, 글린카는 의사의 권유에 따라 이탈리아로 여행을 갔다. 여행에는 테너 니콜라이 이바노프가 동행했다. 가는 길에 독일과 스위스에 들러 그곳 음악원 교수인 바실리에게 작곡 레슨을 받았다. 이때 그는 지루하고 어려운 대위법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해 애를 먹었다.

글린카는 이탈리아에 3년 동안 머물렀다. 이 기간에 그는 많은 것을 경험했다. 여기서 도니제티, 벨리니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오페라의 최신 경향을 두루 살펴본 그는 러시아 국민 오페라를 구상하며 귀국길에 올랐다. 그리고 1836년 러시아 최초의 국민 오페라 〈이반 수사닌(Ivan Susanin)〉을 발표했다. 초연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17세기에 황제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반 수사닌이라는 농부의 일대기를 그린 이 오페라는 황제의 명령에 의해 제목이 '차르에게 바친 목숨'으로 바뀌었다. 오페라에 크게 감동한 황제는 그에게 4천 루블짜리 반지를 하사했다. 이듬해 글린카는 궁정 악장에 취임했다. 궁정에 기거하며 2만 5천 루블의 연봉을 받는 조건이었다.

1842년, 그는 푸시킨의 운문시를 바탕으로 한 두 번째 오페라 〈루슬란과 류드밀라(Ruslan i Lyudmila)〉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첫 오페라인 〈차르에게 바친 목숨〉보다 음악적으로 훨씬 성숙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청중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루슬란과 류드밀라〉의 실패 이후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글린카는 기분 전환을 위해 프랑스와 스페인으로 여행을 갔다. 특히 파리에서 베를리오즈를 만났는데, 그는 글린카의 오페라 중 몇 곡을 발췌해서 연주했으며, 그의 음악을 칭찬하는 글을 써서 잡지에 싣기도 했다.

1852년에 글린카는 다시 파리를 찾았다. 그는 파리에서 2년 동안 살았는데, 그때는 조용히 식물원이나 동물원을 찾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 후 베를린으로 가서 과거의 은사 덴을 찾아가 고대 선법에 대해 공부했다. 이후 그는 다시 러시아로 돌아오지 못했다. 할머니의 과보호 속에 자라 늘 병약했던 그는 독일 베를린에서 독감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때가 1857년으로, 그의 나이 53살 때였다.

글린카는 러시아 국민음악파의 선구자이다. 국민음악파는 그동안 서양 음악의 종주국으로 인식되던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그 밖의 나라들과 단절된 사이에 일어났다. 이들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서유럽 음악에 반기를 들고, 자기 민족의 고유한 전통과 정서를 바탕으로 한 음악을 작곡하려고 노력했다. 이 운동은 러시아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으며, 그 후 발트 해 연안 국가들과 스칸디나비아 제국, 스페인, 헝가리, 체코, 영국, 미국 등으로 퍼져 나갔다. 발라키레프, 큐이, 무소르그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보로딘으로 구성된 '러시아 5인조'가 국민음악파였는데, 글린카는 이들에게 러시아 민족음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선구자로 꼽힌다.

1880년대 류드밀라를 연기한 소프라노 알렉산드라 크루티코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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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린카는 서유럽 전통에 따라 음악을 쓰는 그동안의 경향에서 탈피해 러시아 민족 고유의 음악어법을 바탕으로 자기 민족의 정신을 담아낸 음악을 쓰려고 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새로운 시도로 음악 분야에서는 글린카가 처음이었다.

글린카는 오페라뿐 아니라 관현악의 발달에도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작곡가다. 1844년 파리에서 베를리오즈의 관현악이 주는 색채적 효과에 크게 감동한 그는 귀국 후 그것을 창조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관현악에 끌어들였다. 글린카에 의해 시작된 국민음악은 후에 러시아 5인조로 불리는 후배 작곡가들에게 계승되었다.

글린카의 대표작 〈루슬란과 류드밀라〉는 1837년에서 1842년 사이에 작곡되었다. 이 작품은 러시아 민담과 전설을 바탕으로 쓴 푸시킨의 풍자시를 오페라로 만든 것이다. 키예프 대공의 딸 류드밀라에게는 루슬란과 라트미르, 파를라프, 이렇게 세 명의 구혼자가 있는데, 류드밀라는 그중 루슬란과 결혼식을 올린다. 그런데 바로 결혼식장에 난쟁이 제르노모르가 나타나 류드밀라를 납치해 간다. 키예프 대공은 류드밀라를 구해 오는 사람에게 딸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구혼자 중 한 사람인 루슬란 왕자가 같은 구혼자인 라트미르와 파를라프, 요녀 나이나의 방해를 물리치고 루드밀라를 구하는 데 성공한다. 〈루슬란과 류드밀라〉는 시종일관 신비롭고 화려한 장면으로 가득 차 있는 오페라이다. 막이 오르기 전에 연주하는 〈서곡〉이 유명한데, 굉장히 빠른 속도로 쏜살같이 달려가는 경쾌한 멜로디 때문에 연주회에서 독립된 곡으로 자주 연주된다. 그 밖에 결혼 때문에 아버지와 헤어지는 것을 슬퍼하는 류드밀라의 카바티나 〈아버지, 저는 슬퍼요(Grustno mne, roditel' dorogoi)〉가 유명하다.

〈루슬란과 류드밀라〉의 실패 후 글린카는 기분 전환을 위해 프랑스와 스페인을 여행했다. 1848년 작인 〈스페인 서곡〉은 스페인 여행에서 받은 인상을 음악으로 옮긴 것으로 스페인 민속춤곡을 연곡 형식으로 펼쳐 놓았다. 제1번 〈호타 아라고네사에 의한 화려한 카프리치오〉, 제2번 〈마드리드 여름밤의 추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스페인 카스티야 지방의 민속선율인 호타, 세기딜랴 등 스페인 민요풍의 선율을 중심으로 밝고 관능적인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트라이앵글, 캐스터네츠, 탬버린, 팀파니 같은 타악기들의 활약이 눈부신 작품이다.

그 외의 작품으로는 〈두 개의 러시아 주제에 의한 교향곡〉, 환상곡 〈베네치아의 밤〉, 〈카마린스카야〉, 가곡집 〈페테르부르크와의 이별〉, 실내악 〈도니제티의 안나 볼레나 주제에 의한 세레나데〉, 〈벨리니의 몽유병의 여인 주제에 의한 화려한 디베르티멘토〉, 부수음악 〈홀름스키 공〉 등이 있다.


[글-진회숙 / 출처음악사를 움직인 100인  음악사를 움직인 100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