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츠 하버(독일어: Fritz Haber, 1868년 12월 9일 ~ 1934년 1월 29일)는 비료와 폭발물의 주원료인 암모니아의 합성법을 개발하여 191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독일의 화학자이다. 그는 또한 제1차 세계대전 중 클로린(chlorine)을 비롯한 여러 독가스를 개발 및 합성했던 일로 인해 "화학 무기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하버가 화학 무기 개발에 앞장선 것이 그의 부인을 자살하게 만든 이유였다고 알려져 있다).
하버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공헌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1934년 나치당에 의해 독일에서 추방당한다. 그리고 그 이후 미국 시민권을 따지만, 바로 독일로 후송된다. 또한 그의 친척 중 여러 사람이 나치의 집단수용소에서 죽음을 당했는데, 이 때 하버가 만든 독가스인 치클론 B(Zyklon B)가 사용되었다. 하버는 스위스로 이민을 갔으며, 바젤에서 죽었다. [위키백과]
개요
19세기 독일의 화학자. 프리츠 하버는 카를 보슈와 함께 질소비료에 사용하기 위한 암모니아의 대량 생산법을 고안했고, 1918년 합성 암모니아법을 개발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초기생애
부유한 화학약품상의 아들로 태어나 김나지움의 고전적인 교육을 받고 베를린·하이델베르크·취리히에서 공부한 후 아버지 사업체에 들어갔지만, 끈기 부족으로 곧 그만두었다.
프리츠 하버는 처음에는 예나대학교에서 유기화학을 연구하기 시작했지만, 전통적인 방법은 그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다. 25세 때 우연히 카를스루에 고등기술학교에서 저학년을 가르치는 일을 얻었는데, 거기에서 하버는 대단한 열의를 가지고 물리화학(본래 그가 독학으로 배운 과목)을 가르쳤으며 연구에 전념했다. 전기화학과 열역학 분야를 집약적으로 연구해 1898년에 물리화학 교수가 되었다.
프리츠 하버의 명성은 때맞춰 나온 그의 저서 〈공업적인 전기화학의 이론적 기초 Grundriss der technischen Elektrochemie auf theoretischer Grundlage〉(1898)와, 특히 학생을 가르치는 일과 연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선구적 저서인 〈공업적 기체반응의 열역학 Thermodynamik technischer Gasreaktionen〉(1905)에 의해 더욱 높아졌다. 1900~10년에 급속하게 증가한 질소비료의 수요는 공급을 크게 앞질렀으나, 질소비료의 공급원은 여전히 칠레초석이었다.
이로 인해 질소공급원으로 공기 중의 질소를 이용하는 문제가 전세계의 관심사가 되었다. 프리츠 하버는 질소와 수소로부터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방법을 개발했으며, 1909년까지 암모니아를 대규모로 합성하기 위한 조건을 확립했다. 이 제법은 공업적으로 개발하기 위해 바덴아닐린-소다회사의 카를 보슈에게 넘겨져 하버-보슈 암모니아법으로 발전했다. 이 공로로 하버는 1918년에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하버-보슈법).
제1차 세계대전
42세 때인 1911년에 프리츠 하버는 베를린에 있는 카이저 빌헬름 물리화학연구소 소장이 되었는데, 이 새로운 연구기관은 그가 카를스루에에 세웠던 학교보다 더 유명해졌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즉시 자신의 연구실을 정부시설로 전환시켜 정부에 협조했다. 프리츠 하버의 첫 관심사는 필요한 군수물자에 대한 공급을 조직화하는 것이었다. 참호전이 전개된 후 하버는 화학전 부대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그의 연구소는 주요 군사기관이 되었다. 하버는 독가스를 무기로 개발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프리츠 하버에게 있어 전쟁기간은 그의 강한 애국심에 의해 유발된 힘찬 노력의 시기였다. 독일이 막대한 보상비를 내야 했을 때 하버는 해수에서 금을 추출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시도했다. 오랫동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26년에 해수의 금 함량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적다는 결론으로 끝나 하버에게는 쓰라린 실망을 주었으나, 많은 과학적 가치를 지닌 긍정적인 결과도 낳았다.
전후 활동
전쟁 후 하버 연구소는 세계 물리화학 분야를 선도하는 연구 센터가 되었는데, 여러 나라에서 온 수많은 뛰어난 연구원들이 그곳에서 연구했다.
프리츠 하버는 일생 동안 과학과 산업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옹호했으며, 이 분야에서 인정받는 권위자가 되었다. 하버는 국가 연구조직을 발전시키고 외국 과학자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증진시키는 데 적극적이었다. 하버는 일본에 많은 호감을 갖고 있었으며, 1930년에 상호 이해와 문화교류를 증진하기 위해 베를린과 도쿄[東京]에 본부를 둔 일본연구소를 설립했다. 하버는 추밀원 고문관이라는 높은 직위에 있었으며, 주요 화학회의 명예회원이었다.
1933년에 히틀러 정권의 부상과 프리츠 하버의 반(反)유대인 정책으로 인해 이 위대한 독일 화학자가 '유대인 하버'가 되면서 하버 연구소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하버는 1933년에 사임했고,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초청을 수락했다. 4개월 후 하버는 이탈리아에서 겨울을 지내기 위해 떠났는데, 도중에 바젤에서 심장마비가 일어났으며 1934년 1월 그곳에서 죽었다. 하버의 생애와 연구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의 다재다능함이었다.
프리츠 하버와 그가 지휘했던 연구소들은 물리화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 많은 기여를 했다. 사실 하버의 과학적 생애는 40여 년에 걸친 물리화학의 주된 발전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하버는 과학의 기본목적이 인류의 복지증진이라는 확신에 강하게 젖어 있었다.[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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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있는 해설 자료 있는 곳]
질소를 질소비료로 변환시키는 하버-보슈 공정 덕분에 세계는 기아의 공포에서 해방되었다. 미국의 옥수수 생산량은 이 공정의 개발 이전인 1800년과 비교하면 단위면적당 여섯 배가 증가되었는데, 이처럼 대단한 곡물 증산에 놀란 사람들은 '공기에서 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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