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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궤테의 연인(?)]베티나 폰 아르님[Bettina von Arnim]

Bawoo 2020. 3. 29. 21:47
Bettina von Arnim
Bettina von Arnim as drawn by Ludwig Emil Grimm during the first decade of the 19th century
Bettina von Arnim as drawn by Ludwig Emil Grimm during the first decade of the 19th century
BornElisabeth Catharina Ludovica Magdalena Brentano
(1785-04-04)4 April 1785
Frankfurt am Main
Died20 January 1859(1859-01-20) (aged 73)
Berlin
Resting placeWiepersdorf
Pen nameBeans Beor
OccupationWriter, publisher, composer, singer, visual artist
LanguageGerman
Literary movementRomanticism
SpouseLudwig Achim von Arnim
RelativesSophie von La Roche (grandmother)
Clemens Brentano (brother)
Gisela von Arnim (daughter)

Bettina von Arnim (the Countess of Arnim) (4 April 1785 – 20 January 1859),[1] born Elisabeth Catharina Ludovica Magdalena Brentano, was a German writer and novelist.

Bettina (as well: Bettine) Brentano was a writer, publisher, composer, singer, visual artist, an illustrator, patron of young talent, and a social activist. She was the archetype of the Romantic era's zeitgeist and the crux of many creative relationships of canonical artistic figures. Best known for the company she kept, she numbered among her closest friends Goethe, Beethoven, and Pückler and tried to foster artistic agreement among them. Many leading composers of the time, including Robert Schumann, Franz Liszt, Johanna Kinkel, and Johannes Brahms, admired her spirit and talents. As a composer, von Arnim's style was unconventional, molding and melding favorite folk melodies and historical themes with innovative harmonies, phrase lengths, and improvisations that became synonymous with the music of the era. She was closely related to the German writers Clemens Brentano and Achim von Arnim: the first was her brother, the second her husband. Her daughter Gisela von Arnim became a prominent writer as well. Her nephews, via her brother Christian, were Franz and Lujo Brent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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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티나 폰 아르님(독일어: Bettina von Arnim, 본명: 엘리자베트 카타리나 루도비카 마그달레나 브렌타노(Elisabeth Catharina Ludovica Magdalena Brentano), 1785년 4월 4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 ~ 1859년 1월 20일 베를린)은 독일의 작가이다. 그의 남편은 독일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가인 루트비히 아힘 폰 아르님이며, 그의 오빠인 클레멘스 브렌타노 또한 독일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생애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출신이며 1794년부터 1797년까지 프리츨라어(Fritzlar) 우르술라회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1803년부터 1806년까지는 오펜바흐암마인에서 자신의 할머니인 조피 폰 라 로셰(Sophie von La Roche)와 함께 살았다. 1811년 루트비히 아힘 폰 아르님과 결혼한 이후에는 남편의 문학 작품, 자신의 문학 작품을 함께 편찬했다. 1831년 아힘 폰 아르님이 사망할 때까지 슬하에 7명의 자녀들을 두었다.

베티나 폰 아르님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카롤리네 폰 귄데로데(Karoline von Günderrode), 클레멘스 브렌타노와 편지 교환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편지 교환 행적을 기록한 작품으로는 《괴테가 한 아이와 나눈 편지들》(Goethes Briefwechsel mit einem Kinde, 1835년), 《귄데로데》(Die Günderode, 1840년), 《클레멘스 브렌타노가 받은 봄의 화환》(Clemens Brentanos Frühlingskranz, 1844년)이 있다.

베티나 폰 아르님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에 동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다. 1843년에는 프로이센 왕국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국왕에게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전달한 작품인 《이 책은 왕의 것》(Dies Buch gehört dem König, 1843년)을 출간했다. 자신이 적극 지지했던 1848년 독일 혁명이 실패한 이후에는 한동안 고향에서 은신했고 1852년에는 《악마와의 대화》(Gespräche mit Dämonen)를 출간했다. 1859년 1월 20일 베를린에서 사망할 때까지 문학 작품 창작 활동을 전개했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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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티나 폰 아르님[Bettina von Arnim]



괴테의 연인이면서 동시에 베토벤의 연인이었다.(영어 위키에는 "she numbered among her closest friends Goethe, Beethoven으로 나온다. 이걸 연인이라고  번역?) 그리고 독일 낭만주의를 꽃 피운 작가 아힘 폰 아르님의 아내였다. 문학과 음악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두 거인이 동시에 사랑한 여성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놀라운 존재다. 그러나 그것만이 그녀의 전부일까?


괴테와 베토벤, 그 사이의 베티나

음악사에 아주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대문호 괴테와 악성 베토벤에 관한 이야기,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권력에 굴종하는 괴테와 권력 앞에 당당했던 베토벤의 이야기다.

1812년 8월, 보헤미아의 유명한 휴양지 테플리츠에서 괴테와 베토벤이 만났다. 이 만남을 주선한 사람은 베티나 폰 아르님이었다. 괴테와 베토벤이 공원을 산책하고 있을 때 마침 왕실의 행렬이 다가왔다. 괴테는 재빨리 길가로 비켜서서 모자를 벗어 들고 예의를 갖추었다. 그러나 베토벤은 고개를 빳빳하게 든 채 가던 길을 계속 갔다. 마침내 황후가 먼저 베토벤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고, 그 다음에 베토벤이 루돌프 대공을 향해 모자를 벗어 인사했다. 행렬이 괴테 앞을 지날 때 베토벤은 괴테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서 지켜보았다. 괴테는 여전히 모자를 벗어 든 채 황송한 듯 몸을 굽히고 있었다. 베토벤은 자신이 그토록 존경하던 괴테를 조금은 경멸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 에피소드는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많은 학자들이 그런 견해를 보이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이 이야기의 출처가 베토벤이 베티나에게 보낸 편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베토벤이 거짓말을 했다는 뜻일까? 학자들은 베토벤이 아니라 베티나를 의심한다. 왜냐하면 베티나는 위대한 인물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마음대로 개작하는 일에 능숙했기 때문이다. 베티나는 베토벤에게서 모두 세 통의 편지를 받았다고 주장했는데, 그 중의 한 통만이 훼손되지 않은 원본 그대로이고, 나머지 두 통은 가짜이거나 개작된 혐의가 있다고 밝혀졌다. 가짜로 의심받는 두 통의 편지, 그 중 하나에 ‘괴테와 베토벤의 테플리츠 만남’ 이야기가 들어 있다.

베티나 폰 아르님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베티나는 괴테의 연인이면서 동시에 베토벤의 연인이었다. 그리고 독일 낭만주의를 꽃 피운 작가 아힘 폰 아르님의 아내였고, 클레멘스 브렌타노의 여동생이다. 문학과 음악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두 거인이 동시에 사랑한 여성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놀라운 존재다. 괴테의 연인이면서 동시에 베토벤의 연인이라고? 후세 사람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는 장면, 베티나가 가장 원한 것은 바로 이런 장면이 아니었을까?

1812년 여름은 괴테와 베티나의 사이가 멀어졌던 때였다. 1년 전 베티나와 괴테의 아내 크리스티아네는 프랑크푸르트 귀족들 사이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싸운 뒤였고, 괴테가 아내 편을 들면서 베티나는 괴테의 집에 발길을 끊었다. 하지만 베토벤은 베티나와의 행복했던 시간을 추억하며 ‘사랑하는 당신, 지난 번 당신의 편지는 밤새 내 가슴 위에서 나를 위로해 주었소’ 라는 편지를 쓰던 시기였다.

물론 이 편지도 베토벤의 것인지 베티나의 각색인지 알 수 없다. 소설가이자 전기작가 로맹 롤랑은 《괴테와 베토벤》이라는 책을 쓸 때 테플리츠 에피소드의 출처가 의심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베티나를 믿었다. 하지만 베토벤 연구가들은 그녀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팩션을 문학적 개성으로 활용한 베티나이니 그녀가 소장한 베토벤의 편지는 조작의 가능성을 떨칠 수 없다고 보았다. 작가 밀란 쿤데라도 〈불멸〉이라는 작품에서, 베티나가 품은 ‘불멸을 향한 야망’을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다루고 있다. 테플리츠 에피소드가 정말로 조작된 것이라면, 베티나는 자신을 피했던 괴테를 향해 역사에 길이 남을 복수의 한 방을 날린 셈이다.

베티나는 위대한 예술가의 연인이 됨으로써 자신도 불멸의 전당에 입성하려고 했다. 그런 혐의를 받을 만한 흔적이 베티나의 생애 여기저기에서 드러난다. 괴테의 연인이 되기 위해서 그녀는 몇 년 간 치밀하게 준비했다. 또한 괴테로부터 받은 편지는 괴테가 세상을 떠난 뒤 거침없이 개작되어 《괴테가 한 아이와 주고받은 편지》라는 책으로 만들어졌다. 괴테의 편지는 베티나가 원하는 방향으로 개작되었다. 환갑을 바라보는 괴테가 젊은 베티나에게 매혹되어 헤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훗날 괴테와 베티나가 주고받은 편지의 원본이 발견되었을 때 사람들은 베티나의 개작 능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매력적인 트러블 메이커

베티나는 1785년 4월 4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능한 상인 피터 안톤 브렌타노와 막시밀리아네 브렌타노의 딸로 태어났다. 베티나는 재능 많고 총명한 딸이었지만 어린아이처럼 철없고 제멋대로여서 브렌타노 가문을 자주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바로 그 철없음이 베티나의 개성이었고, 그녀의 예술적 재능을 키우는 힘이었고, 훗날 정치적 투사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가 되었다.

낭만주의 시대에 등장한 두 가지 중요한 키워드가 있다. 하나는 ‘천재’의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우정’이다. 베티나는 천재는 아니었지만 천재들의 삶에 동참했고, 예술가나 학자 들과 나눈 우정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헌신했다. 낭만주의 시대의 많은 예술가가 베티나와 교류했다. 대개는 그녀를 찬양했지만, 그녀를 불편하게 여긴 사람들도 많았다. 특히 슈만의 아내 클라라는 베티나를 아주 싫어했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베티나가 뛰어난 지성을 가진 여성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베토벤의 편지에 의하면, 베토벤은 베티나가 자신을 인정해 주는 것을 큰 기쁨으로 생각했다. 베티나는 작가로, 조각가로, 작곡가로, 성악가로, 출판가로, 훗날에는 사회개혁가로 눈부시게 활약했다. 가족들마저 고개 저을 정도로 튀는 존재였지만, 결국 브렌타노 가문의 이름을 훗날까지 기억하게 한 인물은 트러블 메이커 ‘베티나 브렌타노’였다.

베티나가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열두 살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베티나는 외할머니 품에서 10대 시절을 보냈다. 그녀의 외할머니 조피 폰 라로슈는 〈슈테른하임 아가씨 이야기〉라는 소설로 유명한 작가였다. 독일 최초의 여성 전업작가로 알려진 라로슈는 ‘종이로 만든 딸’을 탄생시키는 마음으로 ‘슈테른하임’이라는 새로운 여성상을 선보였다. 자녀를 직접 양육하지 않고 유모나 기숙학교에 맡기던 시대적 흐름에 반기를 든 작가의 깊은 생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괴테가 생각하는 여성상에도 영향을 주었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도 반영되었다.

조피 폰 라로슈는 학자와 예술가가 모이는 라로슈 살롱을 주관했다. 그 집에는 많은 책이 소장된 도서실이 있었다. 베티나는 그곳에서 마음껏 책을 읽고, 지식인의 사교 모임에 참여하면서 예술적 소양을 쌓았다. 제멋대로인 성격과 총명함을 동시에 지닌 그녀는, 검증되지 않은 실험을 하는 학자처럼 낭만주의 시대의 새로운 여성상을 스스로 만들어 갔다. 여성을 그저 감성적인 존재로만 여기던 시대에서 한 걸음 나아가, 자유롭고 평등한 삶을 꿈꾸었다. ‘누구나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며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 베티나의 인생관이었다.

베티나가 많은 예술가와 교류할 수 있었던 것은 오빠 클레멘스 브렌타노 덕분이었다. 감수성 예민한 시절을 오펜바흐의 외할머니 댁에서 보내고 있는 여동생을 위해 클레멘스는 편지를 자주 보냈다. 1801년에서 1803년 사이에 남매가 주고받은 편지들은 1844년, 《클레멘스 브렌타노의 봄의 화환》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오빠와 주고받은 편지들은 그녀가 경험한 최초의 문학수업이었다.

클레멘스 브렌타노는 독일 전기 낭만주의와 후기 낭만주의를 이어주는 중요한 인물이다. 예나 대학 시절에 참여한 문학 서클에서는 슐레겔 형제 등 낭만주의자들과 교류하며 예술가로서의 기초를 다졌다. 낭만주의자는 학업보다는 방랑과 직접 체험을 더 가치 있게 여겼는데, 그 역시 학업을 중단하고 독일 전역을 여행하며 삶과 예술을 배웠다.

1804년, 하이델베르크에 머물던 클레멘스는 그의 인생에 가장 의미 있는 시기를 맞이한다. 학자와 예술가 들이 몰려들어 ‘하이델베르크 낭만파’를 형성하던 그 무렵, 북유럽과 프랑스, 영국 등지를 3년 간 여행하고 돌아온 아힘 폰 아르님도 하이델베르크에 와 있었다.


베티나의 남편, 아힘 폰 아르님

18세기 이후로 독일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상류층은 자녀에게 여행을 통해 견문을 넓히고 예술과 시대를 이해하는 공부를 시켰다. 일명 ‘그랜드 투어’라고 불리는 이 여행은 짧게는 몇 달, 길게는 3년까지도 이어졌다. 그랜드 투어의 종착역은 이탈리아, 그 중에서도 피렌체나 로마였다. 예술 분야의 뛰어난 과외선생님까지 대동하고 떠난 그랜드 투어는 요즘 유행하는 테마 여행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그 후로는 낭만주의자의 방랑이 유행하면서 문화와 예술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바깥세상을 경험한 낭만주의자들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의 가치를 깨달았다. 그 중의 하나가 클레멘스 브렌타노와 아힘 폰 아르님 그리고 그림 형제가 발견한 ‘구전 문학의 힘’이었다.

아힘 폰 아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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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4년 하이델베르크에서 클레멘스 브렌타노와 아힘 폰 아르님이 만났다. 아르님은 자연과학과 법률, 경제에 통달한 진보적 학자이자 작가였고, 비퍼스도르프에 영지를 가진 귀족이었다. 그는 직접 변화하는 시대를 목격했고, 그 변화를 예술적으로 수용하려 했다. 그 결실이 바로 브렌타노와 더불어 펴낸 〈소년의 이상한 뿔피리〉였다. 아르님이 남긴 작품으로는 1809년에 완성한 〈겨울 정원〉, 1810년 〈돌로레스 백작부인〉 그리고 베티나와 결혼한 뒤에 발표한 〈왕관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베티나와 아르님은 1802년에 처음 만났다. 아르님은 여행길에 클레멘스 브렌타노를 찾아와 잠시 머물렀다. 1805년 아르님이 〈소년의 이상한 뿔피리〉 인쇄 작업을 지켜보러 프랑크푸르트에 들렀을 때 그들의 관계는 조금 진전되었다. 그 후 베티나가 괴테를 찾아갔다는 소문을 들은 아르님은 베티나에게 편지를 보내 철부지 같은 행동을 그만 두라고 조언했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베티나가 언니 가족을 따라 베를린으로 이주했을 때였다. 1811년 아르님은 베티나에게 자신의 작품 〈겨울 정원〉을 헌정하며 청혼했다. 당시 브렌타노 가문은 괴테 주변을 서성이며 불미스런 소문을 만드는 베티나를 빨리 결혼시키려 하던 참이었다. 베티나도 괴테가 자신을 성가시게 여기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집안의 요구와 아르님이 등장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결국 베티나도 아르님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서로 기질적인 차이는 있었지만 예술적 성향과 정치적 성향은 비교적 잘 맞던 커플이었다.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익숙함도 결혼을 결정하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아르님은 낭만적인 연인이었다. 그는 이렇게 청혼했다. ‘당신에게 피아노가 있고 내게 책상이 있는 한 가구들은 별로 필요 없어요.’

1811년 봄, 그들의 결혼식은 신부 베티나도 모르게 준비되었다. 아르님은 베티나가 성가 연습을 도와주고 있던 교회에 나타나 비밀결혼식을 올렸다. 아르님은 그림 형제 중의 동생 빌헬름 그림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처음으로 맹렬한 감동이 심장을 가로질러 가더군. 결혼식이 끝나고 나는 급히 베티나를 집으로 데려다주고 유쾌한 고독 속에서 식사를 했어. 저녁때가 되어서야 나는 보통 때처럼 자비니의 집으로 갔지.’

베티나는 영리했다. 아르님과 결혼한 뒤 남편의 영지 비퍼스도르프에서 착실한 결혼생활을 누렸다. 함께 책을 읽고, 전 유럽과 독일에 관한 정치적 관심을 나누고, 남편의 영지에 속한 사람들이 좀 더 나은 삶을 살도록 하는 일에 앞장섰다. 괴테에게는 ‘낙원에서 살고 있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렇게 아내로서 성실한 날을 보내는 한편 불쑥 괴테의 집에 나타나 괴테 부부를 심란하게 만들기도 했다. 괴테의 아내 크리스티아네와 베티나가 어느 미술관에서 안경이 깨지도록 싸웠던 것은 베티나가 결혼한 후의 일이었다. 지혜로운 아내이면서도 동시에 괴테를 향한 집착을 멈추지 못하는 여성, 베티나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1814년 베티나는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베를린으로 이사했다. 아르님은 비퍼스도르프에 남아 조용히 지낸 반면 베티나는 베를린에서 분주하게 살고 있었다. 개성 강한 일곱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베티나는 불평하지 않았다. 그녀는 불평하는 대신 행동했다. 그녀의 집에서 예술가의 모임을 자주 열었고, 이웃한 멘델스존의 집에서 열리는 음악회에도 자주 참석했다.

낭만주의 시대 이전의 결혼은 가문의 필요에 의해 맺어지는 정략결혼이 대부분이었다. 아르님과 베티나의 결혼은 그렇지 않았다. 베티나에 관한 무성한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서두른 것이긴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 부부가 당시로서는 쉽지 않은 평등한 관계를 누렸다는 것이다. 아르님은 자신의 아내가 누구와도 정치적 토론을 할 수 있을 만큼 총명하고, 가두어 놓기에는 너무 뜨거운 여인이며, 불멸을 향한 야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를 가두지 않았고, 다소 불편한 그녀의 야망도 존중했다.

불멸을 추구한 베티나였지만 세상을 떠난 뒤에는 잊혀지고 말았다. 그러나 베티나는 1962년에 부활했다. 괴테 때문도 아니고 베토벤 때문도 아니었다. 그녀가 남편과 나눈 편지 덕분이었다. 베티나와 아르님이 주고받은 편지는 서로를 존중하는 사랑의 편지였으며, 시대를 고민하고 정의와 자유를 추구한 편지였다. 이 부부는 1960년대 여성운동가들이 꿈꾼 평등하고 아름다운 부부의 최초 사례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 덕분에 베티나는 1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등장할 수 있었다. 역시 인생은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그림 형제에게 영향을 주다

클레멘스 브렌타노와 아힘 폰 아르님이 출간한 〈소년의 이상한 뿔피리〉를 탄생시키는 데 큰 도움을 준 사람은 그림 형제였다. 야코프 루트비히 카를 그림과 빌헬름 카를 그림 형제는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언어학과 문헌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마르부르크 대학에는 존경받는 법학교수 프리드리히 카를 폰 자비니가 재직하고 있었는데, 그는 베티나의 형부였다. 클레멘스와 아르님은 자비니 교수를 통해 그림 형제를 알게 되었다.

그림 형제는 클레멘스와 아르님이 구전되는 이야기 중에 문학적 가치가 있는 작품들을 수집하고 있다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여러 편의 민요와 민담을 수집해주었다. 그 과정에서 그림 형제 역시 민요와 민담이 시대를 초월한 진정한 의미의 문학이자 예술이라는 것을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그림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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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형제도 각 지역의 민담을 발굴하고, 광범위한 옛 이야기를 모아 첫 번째 작품집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옛날이야기》를 발표했다. 이 책에는 프랑스의 작가 샤를 페로의 작품으로 짐작되는 이야기도 수록되어 있다. 우리가 ‘그림동화’라고 부르는 이 작품집은 1812년에 1권이 발표되었고, 베티나에게 헌정되었다. 그림 형제는 옛 사람의 단어와 이야기 방식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것에 의미를 두었다. 민담의 제한 없는 소재를 그대로 반영한 그림 형제의 동화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주로 헤센 주에서 수집된 이야기였지만 프로이센 전역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준 뜻 깊은 작업이었다.

《그림동화》 1권을 베티나에게 헌정했던 그림 형제는 훗날 베티나의 신세를 지게 된다. 1837년, 하노버 왕국의 왕 아우구스투스 1세가 자유 헌법을 철폐하려고 하자 그림 형제를 포함한 괴팅겐 대학 교수 일곱 명은 반대의사를 담은 청원서를 왕에게 제출했다. 이 사건으로 ‘괴팅겐의 7인’은 파면되었고, 추방당했다. 베티나는 그림 형제에게 보낸 편지에 ‘열렬히 시대의 가시 속으로 손을 집어넣겠다’며 그들을 위로했다. 모두가 두려움 속에 입을 다물고 있던 이 시기에 베티나는 형부 자비니 교수의 도움을 받아 왕에게 ‘괴팅겐의 7인’을 사면해 달라고 청원했다. 1830년대에 베티나는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운동가로 프로이센 전역에 인식되었다.


괴테를 만나다

베티나가 괴테의 연인이었다는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베티나의 어머니 막시밀리아네 폰 라로슈가 괴테의 연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막시밀리아네는 저명한 예술가와 학자 들을 배출한 라로슈 가문의 딸이었다. 1772년 9월, 샤를로테 부프와 헤어진 괴테는 예전부터 친분이 있던 조피 폰 라로슈의 집을 찾아왔다. 조피 폰 라로슈는 막시밀리아네의 어머니이자 탁월한 소설가였다.

괴테는 막시밀리아네를 사랑했다. 그녀를 ‘언제나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 같았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막시밀리아네는 프랑크푸르트의 상인 브렌타노 즉 베티나의 아버지와 결혼했다. 상심한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쓰기 시작했다. 유럽의 청춘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샤를로테 부프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담은 소설이지만, 괴테가 그 소설을 쓰게 된 또 하나의 결정적인 계기는 막시밀리아네의 결혼 때문이었다. 막시밀리아네가 결혼한 뒤에도 괴테는 브렌타노 집안을 드나들며 미련을 놓지 못했다. 막시밀리아네가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리지 못한 것은 괴테 탓인지도 모르겠다.

외가에서 십대 시절을 보내면서 베티나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었다. 그리고 외가의 서재에서 괴테가 어머니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들을 발견했다. 외할머니로부터 괴테와 어머니의 사랑 이야기를 전해들은 베티나는 괴테가 생각보다 자신과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베티나는 괴테를 만나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했다. 프랑크푸르트에 살고 있는 괴테의 어머니를 찾아가 괴테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 상세하게 기록해 두었다. 이 치밀한 준비는 훗날 괴테에게 도움이 되긴 했다. 괴테는 자서전을 쓸 때 자신이 기억하지 못한 대목들을 기록해 둔 베티나의 자료를 활용했다.

1807년, 베티나는 괴테를 찾아갔다. 괴테의 연인이 되겠다는 당돌한 꿈을 안고. 베티나라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순간에는 정숙한 명문가의 딸로, 어느 순간에는 종잡을 수 없는 철부지 아이로, 또 어느 순간에는 놀라운 통찰력과 집념을 보이는 예술가로 변신하는 능력을 가졌으므로.

처음 만났을 때 베티나의 나이는 스물두 살, 괴테는 쉰여덟 살이었다. 괴테는 옛 연인 막시밀리아네의 추억을 안고 찾아온 그녀를 환영했다. 베티나는 괴테 앞에서 아이가 되기를 자처했다. 괴테와 베티나가 나눈 편지가 훗날 《괴테가 한 아이와 주고받은 편지》라는 제목을 갖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성숙한 여인과 아이 같은 천진함을 넘나들며 괴테를 유혹하는 그녀에게 괴테도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괴테는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의 삶에 끼어드는 베티나에게 지쳤다. 괴테의 아내도 수시로 자신의 집을 드나드는 그녀에게 경고를 보냈다. 그런데도 베티나는 괴테의 집에 불쑥 나타났고, 있고 싶은 만큼 머무르다 떠났다. 결국 괴테의 아내는 결혼한 뒤에도 괴테를 찾아온 베티나와 크게 싸우게 되었고, 괴테는 아내의 편을 들었다. 매력 있으나 정신적인 피로감 또한 느끼게 하는 그녀를 괴테가 점점 멀리 했기 때문에 ‘테플리츠에서의 만남’은 베티나가 조작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적지 않은 사람들이 품고 있는 의혹의 전말이다.

베티나는 결국 괴테의 삶에서 조금씩 격리되었다. 하지만 끝까지 괴테와 연결된 끈을 놓지 않았다. 1821년, 괴테의 동상을 건립하는 계획이 추진되었다. 문학만이 아니라 음악과 조각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던 베티나는 정성껏 동상의 초안을 만들어 괴테를 방문했다. 괴테는 베티나의 초안을 흡족하게 생각했지만 동상 건립은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베티나는 자신의 구상대로 만들어진 괴테의 동상을 베를린의 자기 집에 소장했다.

동상 건립을 구상하며 괴테와의 관계를 개선했다고 생각한 베티나는 다시 괴테의 집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방해꾼이던 괴테의 아내 크리스티아네도 세상을 떠나고 없었으니 거칠 것이 없었다. 여전히 어린 소녀 흉내를 내는 베티나를 견디다 못한 괴테는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 고통스런 방해자’라고 그녀를 표현하기에 이른다.


팩션 ‘괴테가 한 아이와 주고받은 편지’

괴테가 세상을 떠난 뒤인 1835년, 베티나는 괴테와 주고받은 40여 통의 편지를 상상력을 더해 책으로 펴냈다. 《괴테가 한 아이와 주고받은 편지(Goethes Briefwechsel mit einem Kinde)》, 이 책은 무려 5000부가 팔리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당시의 출판 상황을 고려하면 엄청난 판매량이다. 베티나는 드디어 괴테를 통해 성공했다.

괴테가 한 아이와 주고받은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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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책 속의 괴테는 대문호 괴테가 아니라 ‘베티나가 재창조한 괴테’다. 천진하게 무릎에 앉아 재잘대는 어린아이같은 베티나, 동시에 무척 관능적이기도 한 그녀에게 흔들리는 괴테, 베티나 생각에 마음이 십대 소년처럼 초조하고 복잡한 괴테, 언제든 베티나를 찬양할 준비가 되어 있는 괴테로 그려져 있다. 이 책을 발표하던 해에 베티나는 쉰 살이었지만 책 속의 베티나는 십대 소녀 혹은 스무살을 갓 넘긴 젊은 베티나로 그려져 있다.

베티나가 이렇게 겁 없이 괴테와의 관계를 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책의 편집자 헤르만 퓌클러 무스카우 때문이었다. 베티나의 삶에 등장한 수상한 남자 퓌클러 무스카우는 괴테가 세상을 떠난 뒤에 쏟아진 수많은 책들과 베티나의 책이 차별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괴테의 편지를 각색하는 것을 선택했다. 적극적으로 동조한 베티나는 특히 괴테의 아내 크리스티아네가 언급되는 부분은 거의 대부분 삭제해 버렸다. 마치 괴테에게 아내의 존재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듯 괴테와 소녀 베티나의 연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베티나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는 크리스티아네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것으로 ‘1811년 가을의 미술관 결투’를 응징했다.

하긴 남편 아르님도 세상을 떠난 뒤였고, 괴테도 세상을 떠난 뒤였으니 베티나의 개작은 거칠 것이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편집자가 그렇게 부추기기까지 했으니 베티나는 총력을 쏟아 괴테의 편지를 로맨스 소설로 만들어 놓았다.

베티나는 오빠 클레멘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 세기에도, 과거에도 비슷한 것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작품이며 오빠도 보면 아마 기절할 것’이라고 썼다. 출간된 책을 본 클레멘스는 당대의 우상 괴테를 제멋대로 그려놓은 여동생에게 격렬하게 분노했다고 전해진다.

책을 펴낸 당시에도 베티나가 편지를 심하게 개작했다는 혐의를 품은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는 상태였다. 훗날 괴테가 보낸 편지의 원본이 우여곡절 끝에 발견되지 않았다면 베티나가 팩션의 달인이라는 사실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베티나는 그녀가 원하는 방식으로 ‘괴테의 연인’이라는 ‘불멸의 마일리지’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하긴 그런 사실이 드러났어도 베티나는 여전히 ‘괴테의 연인’ 리스트에 어머니와 나란히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당연히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 목록에서도 베티나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낭만주의 문학에서는 사실에 상상력을 더해 흥미진진한 작품으로 만드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또한 베티나가 이토록 괴테에게 집착했던 것은 마땅한 여성 롤 모델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위대한 사람, 위대한 사랑에 목숨을 거는 여성들이 예나 지금이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베티나의 경우는 그 야망이 정말 집요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녀가, 자신이 사랑한 불멸의 존재들에게 걸맞은, 훌륭한 생의 후반부를 보여주었다는 점이 아닐까?

베티나를 처음 만났을 때 괴테는 자신이 끼던 반지를 선물했다. 그가 애틋하게 사랑했던 막시밀리아네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베티나는 그 반지를 괴테가 준 사랑의 정표로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이 책을 만들면서 베티나는 괴테의 반지를 퓌클러 무스카우에게 주었다. 학자들은 그것을 베티나의 정신적 성장과 연결 짓는다. 이전의 베티나가 괴테를 통해서 세상에 알려지려 했다면 책을 펴낼 당시의 베티나는 이미 괴테의 명성이 필요하지 않은 베티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책 속의 괴테는 불멸의 괴테라기보다는 그저 편지의 수신인으로 설정된 한 남자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설명한다. 베티나가 괴테와의 편지를 책으로 낸 것, 그리고 괴테로부터 받은 반지를 퓌클러 무스카우에게 준 것은 괴테와의 인연에 마침표를 찍는다는 뜻이었을까?

《괴테가 한 아이와 주고받은 편지》에는 괴테가 베티나에게 주는 인상적인 조언이 있다.

“네게 바랄 것이 있다면, 현자들이 불멸의 가장 본질적인 조건으로 요구하는 것 즉 전 인간은 그 자신으로부터 세상의 빛 속으로 나와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네가 이 좋은 충고를 가능한 한 따를 것을 간절하게 권하는 바이다.”

괴테는 위대한 타인을 통해 불멸을 추구하는 베티나를 꿰뚫고 있었다. 괴테의 진심어린 충고를 성실하게 책에 담은 것은 베티나의 실수일까? 아니면 의도적인 노출일까?

러시아어로 번역된 《괴테가 한 아이와 주고받은 편지》

괴테는 전 유럽이 존경하는 작가였다. 괴테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모든 작품이 주목받을 정도로. 쉰 살 베티나의 데뷔작인 《괴테가 한 아이와 주고받은 편지》는 러시아 작가 미하일 바쿠닌에 의해서 러시아어로 번역되었다. 바쿠닌은 베를린에 온 카를 마르크스와 함께 베티나를 방문하기도 했고, 베티나와 적지 않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했다. 당시 바쿠닌과 함께 베를린에 머물던 투르게네프는 러시아에 유럽 문학을 소개하고, 유럽에 러시아 문학을 소개한 작가로 명성을 쌓아갔다. 훗날 조르주 상드가 머무르던 노앙에서도 투르게네프와 바쿠닌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베토벤, 불멸의 연인

베티나는 1810년에 베토벤을 찾아갔다. 첫 만남에서부터 그녀는 ‘당신을 만났다는 것을 괴테에게 보내는 편지에 쓰겠다’며 괴테와의 친분을 과시했다. 실제로 그녀는 베토벤과 만난 이야기를 괴테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다. ‘그를 만난 순간 내게서 전 세계가 사라져 버렸다’고 썼다. 또한 ‘베토벤이 세계를 잊어버리게 하고 당신(괴테)까지도 잊게 했다’고 썼으며 베토벤은 현대 문명보다 훨씬 앞선 예술가라는 찬사도 잊지 않았다. 베티나는 진심으로 베토벤의 예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물론 괴테도 베토벤의 음악에 관심을 보였고, 베토벤 역시 괴테를 존경하며 그의 작품에서 예술적 영감을 받고 있었으니 그런 편지를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베토벤은 베티나와 자신의 관계를 ‘옴팔레 여왕 앞의 헤라클레스’ 같다고 표현했다. 적극적이며 총명한 베티나와의 결혼을 꿈꾸었다고 짐작할 만한 정황도 있다. 그러나 ‘베티나에게 엄청나게 몰입해 있는 베토벤’을 볼 수 있는 1810년 8월 11일의 편지 역시 진위 여부가 확실치 않다. 그러므로 베토벤이 그녀와 결혼을 꿈꿀 정도로 뜨거운 연정을 품고 있었으리라 단정하기는 어렵다. 밀란 쿤데라처럼 베티나를 의혹에 가득 찬 시선으로 보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베토벤을 끌어들여 괴테에게 질투라는 불화살을 날린 것이라고 볼 여지도 충분하다.

베티나가 베토벤한테 받은 편지는 세 통이다. 그 세 통의 편지 중에 베티나의 결혼에 축복을 보내는 1811년 2월 10일 자 편지 한 통만이 진본으로 확인되었다. 베티나는 왜 베토벤의 편지를 개작했을까? 몇 개월에 불과한 로맨스를 과장해서 후세까지도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으로 기억되기를 원했기 때문일까?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이 누구인지를 연구한 학자들은 아주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지금도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불멸의 연인’ 명단에 베티나와 그녀의 이복오빠 프란츠 브렌타노의 아내 안토니에가 나란히 올라 있기 때문이다.

1827년 3월 26일, 베토벤은 세상을 떠났다. 그의 비밀서랍에서는 줄리에타 귀차르디의 초상화와 훗날 안토니에 브렌타노로 밝혀진 초상화 그리고 세 통의 편지가 발견되었다. 겉봉에 ‘불멸의 연인에게’ 라고만 적혀 있는 세 통의 편지는 베토벤의 음악만큼이나 베토벤의 삶을 더욱 더 드라마틱하게 만들었다.

시대마다 다른 ‘불멸의 연인’ 후보가 등장했다. 처음에는 베토벤이 끝까지 초상화를 간직한 줄리에타 귀차르디가 가장 강력한 후보로 등장했다. 〈월광 소타나〉를 헌정받았고, 베토벤 스스로 ‘그녀의 남편보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썼던 여성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 뒤로는 테레제 폰 브룬스비크와 요제피네 폰 브룬스비크 자매가 불멸의 연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늘어났다. 한때는 베티나도 강력한 후보였다.

온갖 연구가 진행될수록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히는 인물은 아이러니하게도 베티나의 올케 안토니에 브렌타노다. 베토벤 연구가 메이너드 솔로몬은 베토벤의 비밀서랍에서 나온 두 개의 초상화 중의 하나가 안토니에의 초상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또한 ‘불멸의 연인에게’ 쓴 편지에 남겨진 ‘7월 6일 월요일’을 단서로 베토벤의 일생을 다시 추적한 결과 1795년부터 1818년 사이에 7월 6일이 월요일이었던 해는 다섯 번이 있으며 그중에 가장 확률이 높은 시기는 1812년 7월 6일이라고 밝혔다. 그 시기는 안토니에가 친정인 빈에 머물던 무렵이었다. 솔로몬은 불멸의 연인이 안토니에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주장했다.

안토니에는 빈 귀족 딸로 태어나 브렌타노 가문으로 시집 왔다. 기록에 의하면 안토니에의 결혼생활은 불행했고, 그녀는 늘 몸이 아팠다. 1809년부터 12년까지 안토니에는 남편과 아이들과 더불어 빈에 머물렀는데 그때 베티나를 통해 베토벤과 교류를 시작했다. 안토니에와 베토벤 사이에는 안타까운 사랑의 감정이 오갔다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다만 남편 프란츠도 워낙 베토벤과 가까웠기에 두 사람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마음속에만 간직한 듯하다. 베티나가 간절히 원하던 ‘불멸의 연인’ 타이틀이 자신이 아니라 오빠의 아내로 압축되어 가고 있는 이 아이러니를 베티나는 어떻게 생각할까?


불멸의 연인에서 불멸의 인간으로

베티나는 과연 걸출한 예술가들의 연인이 되어 불멸의 마일리지를 부당하게 쌓으려는 야심으로만 가득한 여인일까? 괴테가 자신을 성가시게 여긴 것에 복수하기 위해 괴테를 속물로 만들어버린 파렴치한 인물일까? 그렇게 단순하게 재단하기에는 베티나의 인생 역정이 만만치 않다.

베티나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대로 행동한 여성 지식인이었다. 젊은 베티나는 제멋대로인 모습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대보다 한 걸음 앞서 있던 베티나는 주위의 비난에 별로 흔들리지 않았다. 언제나 새로운 흐름에 눈과 귀를 열어두었고, 호기심이 많은 만큼 총명했다. 그런가 하면 생애 후반부는 약자를 옹호하고, 정의를 위해 싸운 투사로 기억된다. 빈곤층을 위해 팔 걷고 나섰고, 유대인에 대한 차별에 맞섰으며, 양심수의 권익을 보호하는 일에 앞장섰다. 베티나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낭만주의 작가 카롤리네 슐레겔-셰링은 베티나를 가장 정확하게 파악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베티나를 이렇게 표현했다. ‘베티나의 지적인 내면과 거침없는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바로 그 괴팍함이 베티나를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고 있다.’

결국 베티나 주변의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말릴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 듯하다. 괴테도, 베티나의 형부이자 저명한 학자 자비니도, 그녀의 오빠를 비롯한 가족도, 그녀의 아들딸들도, 또 베를린 당국과 왕도 베티나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19세기의 귀족 여성은 대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했다. 하지만 베티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상의 것을 실천한 사회운동가였다. 그림 형제와의 관계에서 거론한 것처럼, 왕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하고 그들을 복권시켜 줄 것을 탄원하는 용기를 발휘했다.

베티나는 특히 산업화가 몰고 온 도시 빈민 문제에 관심이 깊었다. 1831년, 베를린에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에는 사재를 털어 약과 담요를 준비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후 베티나는 자원해서 빈민청에서 일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더 많이 지원할 수 있도록 수많은 청원서를 썼다. 불멸의 예술가와의 관계를 피력하는 데 발휘되던 필력이 이제는 빈민의 권익을 위해 쓰이기 시작했다.

베티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왕도 베를린 당국도 빈민의 아픔을 절실하게 보살펴주지는 못했다. 베티나는 1844년에 《이 책은 왕의 것이다(Dies Buch gehort dem Konige)》를 빌헬름 4세에게 헌정했다. 괴테의 어머니와 왕의 어머니가 가상 대화를 나누며 이상적인 국가를 그려내는 이 작품에는 ‘자유와 인류애에 바탕을 둔 국가’를 그리는 베티나의 정치 신념이 담겨 있다. 책의 말미에 학생들이 적은 빈민의 실태보고서를 첨부한 이 책은 출판 금지되었고, 베를린 시는 베티나를 고소했다.

방직기계가 도입되면서 빈민의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그전까지는 그래도 일을 하면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었지만 방직기계가 도입된 이후에는 빈민의 생존 자체가 어려워졌다. 1844년에 독일 최초의 노동자 봉기가 일어났다. 군대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된 이 사태에 항의하기 위해 베티나는 왕을 만나려 했지만 실패했다. 노동자와 농민의 편에 선 베티나는 집요하게 항의했다. 베를린 당국은 베티나가 이 봉기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판단했고, 국가모독죄로 2개월의 금고형을 선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베티나는 굴하지 않았다. 역사적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앞장섰고, 왕을 직접 만나 설득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뜻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1852년, 베티나는 빈민층의 현실을 담은 일종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악령과의 대화(Gesprache mit Damonen)〉라는 이 글은 베티나의 인생 후반기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증거다. 또한 독일 낭만주의가 낭만주의를 넘어서 민주주의와 접목하는 역사적 대목을 입증하는 글이기도 하다.

이 시기 이후로 베티나는 직접 정치에 개입하는 행동은 줄이고 망명 작가와 소외된 사람을 도우며 살았다. 베를린의 운터 덴 린덴 가에 있던 베티나의 집은 세상의 핍박을 피해온 사람들을 보호해 주는 공동주거지가 되었다. 불멸을 꿈꾸던 그녀의 의지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쪽으로 진화했다. 공동의 선을 꿈꾸는 쪽으로, ‘나’보다 ‘우리’를 통해 구현되는 방향으로. 괴테가 당부했던 ‘그 자신으로부터 세상의 빛 속으로 나오는 불멸’ 쪽으로 한 걸음 더.

제멋대로 행동하며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던 소녀는 어느 새 자유와 평등의 투사가 되어 있었다. 혁명투사의 편에 선 베티나의 용기에 감동해서 베를린의 청년들은 베티나를 위해 횃불 행진을 펼치며 경의를 표했다. 젊은 날의 베티나는 불멸에 대한 무모한 꿈을 꾸었을지 모르겠으나 인생 후반부의 베티나는 점점 시대에 녹아들어 베티나 자신이 되었다. 괴테와 베토벤과는 다른, 자신만의 삶을 비로소 살게 되었다. ‘불멸의 연인’은 되지 못했지만 ‘불멸의 인간’과는 조금 가까워진 삶을.


클라라 슈만과 베티나

베티나와 슈만은 낭만주의 정신을 잘 보여주는 예술가다. 음악과 문학의 경계를 넘어서 다른 장르의 예술을 적극적으로 흡수하고, 다른 예술가와 교류하면서 쉼 없이 열정을 가꾸어간 사람이다. 무엇보다 베티나와 슈만은 민중의 힘을 깨달은 사람이다. 낭만주의의 가장 아름다운 정신, 사람이 사람과 만나 서로를 더 나은 세계로 이끌어주는 네트워크의 힘을 베티나와 슈만이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다.

슈만이 베티나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과는 달리 그의 아내 클라라는 베티나를 싫어했다. 이해할 수 있다. 베티나는 편안하고 다정한 존재는 아니었으니까. 요조숙녀들이 보기에는 불편하고 위험한 존재였고, 모험을 즐기는 낭만주의자의 시선에는 무척 매력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베티나는 ‘내가 예전에 해봐서 아는데’, 라고 말하는 타입이었던 것 같다. 브람스나 리스트에게도 자신의 음악적 견해를 한 수 가르치려는 태도를 보였는데, 특히 리스트의 음악에 베티나는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클라라는 베티나가 위대한 음악가들의 작품에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베티나는 음악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만을 갖고 있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카트린느 레프롱이 쓴 클라라 슈만의 전기 《네 손의 인생》에는 베티나에 관해 이런 표현이 등장한다. ‘반은 마녀이고 반은 천사이며, 반은 여사제이고 반은 무희이며, 반은 예언자이며 반은 거짓말쟁이인 베티나’라고. 베티나에 관한 거의 모든 정보를 담은 표현이다.

베티나에 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같은 인물에 관한 기록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다양한 시선이 등장한다. 그녀를 영웅적으로 숭배하는 시선도 있고, 그녀의 다재다능함에 주목한 기록도 있고, 거짓말에 능한 그녀를 주목한 것도 많다. 이 모든 모습이 다 베티나다. 누구나의 내면에는 선한 나와 때때로 교만하거나 위선적인 나, 우유부단한 나와 담대한 나, 그리고 비겁한 나와 용감한 내가 공존하겠지만 베티나의 경우는 그 함량이 보통 사람들과는 좀 달랐던 것이리라.

제멋대로며 총명하고, 아이처럼 천진하면서도 성숙한 매력을 지닌 베티나 폰 아르님. 그녀는 50대에 이르러 새로운 문학 양식을 도입한 작가로, 사회운동가로 진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베티나는 여전히 베티나였다. 여전히 타인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변함없는 베티나’였다.


서간 문학의 개척자, 베티나

베티나는 서간 문학의 개척자다. 그녀가 ‘편지’라는 장르를 택한 이유는 뭘까? 당시만 해도 여성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 어려웠다. 유일한 교육은 책을 읽고 편지를 쓰는 일이었다. 베티나는 그 시대적 트렌드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인물이었다. 외가의 서재와 소설가인 외할머니 그리고 그녀를 매혹시켰던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베티나에게 가장 훌륭한 학교였다.

남편 아힘 폰 아르님이 세상을 떠난 뒤, 쉰 살이 되었을 때부터 베티나는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괴테가 한 아이와 주고받은 편지》 이후로 베티나는 여러 편의 정치참여 글을 썼다. 그후 베티나는 다시 한 번 편지로 작가적 명성을 얻는다. 1800년에 만나 우정을 쌓은 귄더로데에 관한 것이었다.

귄더로데는 그 시대 사람들이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범주에 들지 않는 독특한 인물이었다. 예술과 삶과 사랑을 일치시키려는 열망에 사로잡힌, 그리고 대단히 뛰어난 지성을 지닌 여성이었다. 죽음에 대한 생각과 우울함에 사로잡혀 있었던 시간이 많았지만, 그녀의 연구는 골상학, 논리학, 운율학 그리고 노발리스와 피히테 연구까지 광범위했다. 특히 철학자 피히테로부터는 ‘나 자신’의 의미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배웠고, 그 공부는 귄더로데의 자의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귄더로데는 1780년 독일 칼스루에의 몰락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열일곱 살 때 프랑크푸르트의 크론슈테텐 기숙학교에 들어간 귄더로데는 갑갑한 수도원 같은 그곳에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채울 독서에 몰입했다.

귄더로데의 첫사랑은 프리드리히 카를 폰 자비니, 어딘가 익숙한 이름이지 않은가? 맞다. 바로 베티나의 형부 자비니가 귄더로데의 첫사랑이었다. 귄더로데는 뛰어난 지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상적인 것에 대한 집착 또한 무척 강한 성격이었다. 합리적인 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던 자비니도 귄더로데의 이런 성격에 지쳤다고 말할 정도였다. 결국 자비니는 감당하기 힘든 귄더로데 대신 베티나의 언니 군다를 택한다. 군다는 베티나처럼 종잡을 수 없는 성격도 아니고, 귄더로데처럼 우월한 정신에 사로잡혀 좀처럼 타협이 불가능한 성격도 아니었다.

베티나는 외할머니 집에서 귄더로데를 처음 만났다. 그 이전부터 귄더로데는 브렌타노 가문의 형제들과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 군다도 귄더로데를 친구라 생각했고, 베티나도 다섯 살 위의 귄더로데에게서 새로운 인생관을 흡수했다. 자비니가 귄더로데 대신 군다와 결혼에 이르렀어도 그들의 우정은 변하지 않았다.

귄더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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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4년, 자비니와 군다가 결혼하던 그해 귄더로데는 운명적인 사랑에 빠졌다. 신화학자인 프리드리히 크로이처는 귄더로데에게 그리스 문명과 철학, 그리고 신화에 관한 모든 지식을 전해주었다. 귄더로데에게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는 격려도 아낌없이 보냈다. 귄더로데는 크로이처의 지성에 매혹되었다. 이미 아시아와 이집트의 신화에 관심이 많았던 귄더로데는 그리스의 모든 것을 알게 해준 크로이처를 열렬히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크로이처는 결혼한 사람이었다. 귄더로데는 출구 없는 고통에 내몰렸지만 크로이처는 냉정하게 아내 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1806년 6월, 귄더로데는 빙켈 마을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크로이처와의 사랑이 깨어진 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귄더로데는 세상과 우울하고 위태로운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끈을 크로이처라는 가위가 끊어준 셈이다.

귄더로데가 세상을 떠난 뒤에 베티나는 귄더로데와 주고받은 편지들을 돌려받았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서른 통 가량의 편지에 베티나의 상상력이 더해져서 1840년에 소설 《귄더로데(Die Gunderode)》가 탄생되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잊혀지던 귄더로데를 되살려 놓은 이 책으로 베티나는 다시 한 번 명성을 얻었다.

베티나는 귄더로데를 ‘또 다른 자아’로 여겼다. 귄더로데를 메아리로 표현하며, ‘귄더로데 덕분에 내 안에 살고 있는 영혼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귄더로데》를 발표하던 1840년에 그녀는 자유와 정의를 외치는 독일 청년의 ‘메아리’가 될 것을 자처한다. 《귄더로데》의 서문에 독일 청년에게 바치는 ‘헌사’가 등장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50대에 이른 베티나는 ‘열정적이지만 패배하기 쉬운 청년’들이 어디로 가야할지를 속삭이는 ‘메아리’가 되려고 했던 것이다.

귄더로데는 또 다시 잊혀졌다가 1979년 크리스타 볼프가 《어디에도 설 땅은 없다》라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부활했다. 이 작품에는 귄더로데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라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소설 속에는 1804년 프랑크푸르트 부호의 저택에서 열린 파티에서 두 시인이 만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두 주인공 외에 베티나와 클레멘스 브렌타노, 베티나의 언니 군다 그리고 군다의 남편이자 베티나의 형부 자비니 등이 모여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안타깝게도 베티나의 작품 《귄더로데》에도 원래의 귄더로데가 아니라 베티나에 의해서 ‘번안’된 귄더로데가 그려져 있다. 엄격하고 자제력 있으며 신비롭고 남성적인 필치를 가진 귄더로데의 실제 모습과는 좀 거리가 있는 귄더로데로 그린 것이다. ‘나는 젊음이 나를 떠나는 것을 경험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던 귄더로데의 내면, 그 우울과 치열한 성찰의 흔적은 빛바랬다. 베티나는 귄더로데가 왜 젊은 나이에 죽겠다고 하는지를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이 절친했던 베티나와 귄더로데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그녀는 불멸에, 귄더로데는 소멸에 관심이 있었으므로.

귄더로데는 베티나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네가 남자라면 영웅이 되겠지. 하지만 너는 여성이고, 그래서 나는 너의 모든 가능성을 미래를 위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어. 말하자면 너는, 활기차고 생동감 넘치는 시대에 태어나게 될 미래의 어떤 인물을 위한 일종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거야.”

귄더로데의 예언처럼 베티나라는 밀물을 딛고 태어난 미래의 작가가 어쩌면 조르주 상드는 아닐까? 베티나가 독일 최초의 여성 사회주의자였다면 조르주 상드는 프랑스 최초의 여성 사회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입증하듯 베티나는 1845년에 조르주 상드를 격려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5마르크 지폐 초상

유로화로 통합되기 전, 독일이 발행한 5마르크 지폐에는 베티나 폰 아르님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 앞면에는 당시의 보편적인 귀족 여성의 모습과는 다른 소박한 차림의 베티나가 새겨져 있다. 총명한 두 눈을 반짝이는 베티나의 왼쪽으로는 뿔피리가 그려져 있다. 그녀의 남편과 오빠가 참여했고, 그녀도 어느 만큼은 자취를 남긴 ‘소년의 이상한 뿔피리’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같은 화면에 남편 아힘 폰 아르님의 영지 비퍼스도르프의 저택과 농장도 새겨져 있다.

5마르크 지폐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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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마르크 지폐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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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폐의 뒷면에는 베를린의 상징이자 통일 독일의 상징이기도 한 브란덴부르크 문이 그려져 있다. 이 거대한 문이 상징하는 자유의 정신을 잘 실천한 예술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브란덴부르크 문이 그려진 오른쪽 아래에는 의미심장하게도 열려진 편지 봉투와 베티나의 서명이 담겨 있다. 그리고 괴테와 쉴러, 하이네의 서명도 같이 새겨져 있다.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5마르크 지폐 속에서 베티나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그 눈빛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당신은 이제 나에 대해서 조금 알 것 같은가요? 하지만 당신은 결코 나를 다 알 수는 없을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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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이덕희, 《음악가와 연인들》, 예하, 1988
  • ・ 쿤데라, 밀란, 김병욱, 《불멸》, 민음사, 2010
  • ・ 볼프, 크리스타, 염승섭, 《어디에도 설 땅은 없다》, 문예출판사, 1993
  • ・ 롤랑, 로맹, 박영구, 《괴테와 베토벤》, 웅진닷컴, 2000
  • ・ 롤랑, 로맹, 이휘영, 《베토벤의 생애》, 문예출판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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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사순옥, 〈베티나 폰 아르님의 서간소설과 생태학적 세계관〉, 《독일문학》 제92권, 한국독어독문학회, 2004

김미라 집필자 소개

‘세상의 모든 음악’을 집필하고 있는 대한민국 대표 라디오 방송작가. 지은 책으로는 《삶이 내게 무엇을 묻더라도》, 《오늘의 오프닝》, 《세상에 빛나지 않는 별은 없어》, 《위로》, 《나를 격려..펼쳐보기

출처

예술가의 지도
예술가의 지도 | 저자김미라 | cp명서해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