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Alexander von Falkenhausen | |
1940년 제복 차림의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 |
출생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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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독일 제국 슐레지엔 지방 크프야트쿠프 |
사망일 | 1966년 7월 31일 (87세) |
사망지 | 서독 라인란트팔츠 주 나사우 |
복무 | 독일 제국 (1918년까지) |
복무 기간 | 1897년-1930년 1934년-1944년 |
최종 계급 | 보병장교 |
근무 | 독일 제국 육군 |
주요 참전 | 의화단 운동 |
서훈 내역 | 프로이센 왕관장 |
기타 이력 | 중화민국 군사고문관 및 장제스 개인고문관 |
에른스트 알렉산더 알프레드 헤르만 프라이허 폰 팔켄하우젠(독일어: Ernst Alexander Alfred Herrmann Freiherr von Falkenhausen, 1878년 10월 29일 ~ 1966년 7월 31일)은 장제스의 군사고문관이었던 독일인 군 장교였다.[1][2][3] 팔켄하우젠은 중독합작 당시 중국군을 개혁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미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1938년 독일이 일본의 압박 하에 중국에게 지원을 중단하였고, 팔켄하우젠은 중국에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4]
유럽으로 돌아온 뒤 팔켄하우젠은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벨기에의 군정청 총독이었다. 팔켄하우젠은 파울라 폰 베데코프와 처음 결혼을 했고, 이후 세실 벤트와 재혼했다. 팔켄하우젠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벨기에의 총독이었던 루트비히 폰 팔켄하우젠의 조카였으며, 카를 빌헬름 프리드리히의 직계 자손이기도 했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 ↑ “The Road to Paris”. 《Time》 (영어). 1950년 12월 11일. ISSN 0040-781X. 2018년 1월 27일에 확인함.
- ↑ “General Alexander von Falkenhausen - Oxford Reference” (영어). 2018년 1월 27일에 확인함.
- ↑ Yu, Maochun (2013년 7월 31일). 《The Dragon's War: Allied Operations and the Fate of China, 1937-1947》 (영어). Naval Institute Press. ISBN 9781612514376.
- ↑ “Foreign News: Recalled”. 《Time》 (영어). 1938년 7월 18일. ISSN 0040-781X. 2018년 1월 27일에 확인함. [위키백과]
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2.1. 1차대전~전간기[편집]
2.2.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 단장 시절[편집]
1935년 건강상의 이유로 퇴임한 전대 재중 독일 군사고문단장 한스 폰젝트의 후임으로 중화민국에 파견되어 1935년부터 1938년까지 3년간 4대 주중독일 군사고문단장을 지냈다. 이후 그는 국민혁명군을 독일식으로 훈련시키고 독일제 대포(88 mm 등), 소총(중정中正 소총 등)을 전달하였다. 그는 상하이에서부터 난징까지의 길목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도록 중국군을 지도하며 우쑹 전투 등을 참관, 일선에 나가 진두지휘했다. 이로 인해 제2차 상하이 사변에서 중국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전에 없는 뛰어난 전과를 올렸지만 결국 국민당 장교진과 장제스의 역량 및 경험 부족으로 상하이를 내주어야 했고 상하이를 점령하는데 개고생을 했던 일본군이 빡치면서 일어난 결과가...
1937년부터 중화민국과 일본 제국을 중재하려던 독일의 트라우트만 공작이 실패로 돌아가고 일본 제국이 독일 측에 팔켄하우젠을 비롯한 독일 고문들을 중국에서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자 송환이 결정되었다. 팔켄하우젠은 중국에 남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으나 오지 않으면 가족들에게 불이익을 주겠다는 위협에 어쩔 수 없이 장제스가 베푸는 고별 만찬에 참여한 다음에 주중 독일 대사인 오스카 트라우트만과 함께 1938년 6월 고국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중국이 결국 승리를 거둘 것이라 확신한다. 일본은 전쟁과 평화, 모두 짊어지게 될 것이다." 라는 말[1]을 남겼다.
1937년부터 중화민국과 일본 제국을 중재하려던 독일의 트라우트만 공작이 실패로 돌아가고 일본 제국이 독일 측에 팔켄하우젠을 비롯한 독일 고문들을 중국에서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자 송환이 결정되었다. 팔켄하우젠은 중국에 남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으나 오지 않으면 가족들에게 불이익을 주겠다는 위협에 어쩔 수 없이 장제스가 베푸는 고별 만찬에 참여한 다음에 주중 독일 대사인 오스카 트라우트만과 함께 1938년 6월 고국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중국이 결국 승리를 거둘 것이라 확신한다. 일본은 전쟁과 평화, 모두 짊어지게 될 것이다." 라는 말[1]을 남겼다.
2.3. 2차대전과 말년[편집]
1938년 팔켄하우젠은 재복무하여 1940년 벨기에 군정사령관이 될 때까지 서부국경에서 복무하였으며 보병대장까지 진급한다. 1940년에서 1944년까지 벨기에 군정사령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유대인에 대한 법령을 시행하여, 유태인 28900명을 추방했다. 또한 반유대정책으로 일자리를 잃은 유태인 2250여 명이 지크프리트 선 건설에 투입했다. 또한 점령기간 동안 레지스탕스 수백 명이 독일군에게 총살당했고, 벨기에 사람 약 4만 3천 명 역시 수용소로 추방되어 1만 3천 명이 죽었다.
[참고: 책 중일전쟁(양장본 HardCover)에는 유태인 학살에는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직후 에르빈 폰비츨레벤과의 친분 때문에 티롤의 수용소에 투옥되었고, 이후 다하우로 이송되었다.
1951년 브뤼셀에서 열린 재판에서 첸쉬링[2]의 증언 등이 있었으나, 유대인 2만 5천 명을 추방하고 레지스탕스에 대한 보복으로 인질을 처형한 것이 유죄로 인정되어 중노동형 12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콘라트 아데나워에게 도움받아 3주 후 석방된다. 1950년, 팔켄하우젠의 72번째 생일에 장제스가 '중국의 친구'라는 이름으로 1만 2천 달러를 보냈으며 1958년 11월 28일, 중화민국 정부는 팔켄하우젠에게 훈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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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직후 에르빈 폰비츨레벤과의 친분 때문에 티롤의 수용소에 투옥되었고, 이후 다하우로 이송되었다.
1951년 브뤼셀에서 열린 재판에서 첸쉬링[2]의 증언 등이 있었으나, 유대인 2만 5천 명을 추방하고 레지스탕스에 대한 보복으로 인질을 처형한 것이 유죄로 인정되어 중노동형 12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콘라트 아데나워에게 도움받아 3주 후 석방된다. 1950년, 팔켄하우젠의 72번째 생일에 장제스가 '중국의 친구'라는 이름으로 1만 2천 달러를 보냈으며 1958년 11월 28일, 중화민국 정부는 팔켄하우젠에게 훈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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