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歷史) 마당 ♣/- 인물, 단체

[청태종 즉위식에서 하례 거부로 병자호란의 한 동기를 제공한 인물]나덕헌/이확

Bawoo 2020. 3. 7. 21:29


나덕헌 [羅德憲] 1573(선조 6) ~1640(인조 18)


조선시대 창성부사, 의주부윤, 삼도통어사 등을 역임한 무신.
개설: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헌지(憲之), 호는 장암(壯巖). 아버지는 이성현감(尼城縣監) 나사침(羅士忱)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거쳐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도원수 장만(張晩)의 밑에서 종군했다. 안현전투(鞍峴戰鬪)에서 크게 이겨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올랐다. 그뒤 길주목사·창성부사·의주부윤 등을 두루 지냈다. 외교적 수완이 뛰어나 여러 차례 심양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1636년 춘신사(春信使)로 심양에 갔을 때, 후금의 태종이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황제를 칭하며 즉위식을 거행했다. 이때 조선 사신일행에게도 황제를 배알케 했으나, 그는 하례를 완강히 거부하다가 갖은 모욕과 구타를 당했다. 청 태종은 집요한 회유와 협박도 소용없음을 알고, 볼모를 요구하는 국서를 주어 돌려보냈다. 국서를 마지못해 받아가지고 압송되어 오던 중, 청나라 호위병의 경계가 허술한 틈을 타서 통원보(通院堡)의 호인(胡人)에게 국서를 맡기고 돌아왔다.

당시 조정의 거센 척화론 속에서 청 태종의 즉위식에 참가하고 황제참칭(皇帝僭稱)의 국서를 받았다고 하여 삼사와 조복양(趙復陽)을 중심으로 한 성균관 유생들에게 탄핵을 받았다. 이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의 변호로 죽음은 면하고 백마산성에 유배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후 과거 춘신사로 심양에 가서 하례를 거부, 항거한 사실이 밝혀져 유배에서 풀려나 삼도통어사로 특진되었으며, 1639년 벼슬에서 물러났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다음 백과]

===============================================

이확[李廓]1590(선조 23)~1665현종6년)

조선시대 부총관, 충청도병마절도사, 삼도수군통제사 등을 역임한 무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량(汝量). 태종의 아들 경녕군 이비(李礻+非)의 6대손으로, 아버지는 이유인(李?仁)이다. 신장이 8척이나 되고 음성이 큰 종소리 같았으며, 힘이 장사였다.


이항복(李恒福)의 추천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한때 궁중 금원(禁苑: 출입이 금지된 대궐안의 후원) 안에 들어온 범을 잡은 일이 있었다. 이이첨(李爾瞻)이 문무백관을 위협하여 폐모하기를 청할 때에 참여하지 않았다.

인조반정 때 돈화문 밖에서 수비하다가 밤에 반정군이 이르자 문을 열어 들어가게 하였다. 반정 후 그를 죽이려 하자, 이귀(李貴)가 길을 비켜준 그의 공을 역설하여 화를 면하게 하였다.

그 뒤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도원수 장만(張晩)의 군에 들어가 선봉이 되어 적을 격파하는 데 공을 세우고, 자산부사를 거쳐 부총관이 되었다.

1636년(인조 14)에 회답사(回答使)가 되어 청나라 심양(瀋陽)에 갔을 때, 심양에서는 국호를 청(淸)이라 고치고 왕을 황제로, 연호를 숭덕(崇德)이라 하여 교외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려고 할 때 그의 일행을 조선 사신으로 참여시키려고 하였으나, 결사적으로 항거하여 그 의식에 불참하고 돌아왔다.

우리 조정에서는 그 사실을 잘못 전하여 듣고, 한때 선천에 유배시켰다가 뒤에 충절을 알고 석방하였다. 이 해 호적(胡賊)이 침입하자 남한산성을 수비하는 데 활약하였고, 난이 끝난 뒤 충청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641년 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강(忠剛)이다.        


[참고 사항]허태구 저
병자호란과 , 그리고 중화 에 따르면 위 두 인물이 청태종 즉위식에서 하례를 완강히 거부하는 바람에 친정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두  인물은 그리하고도 유배를 당하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으나 종내는 복권되고 승승장구했다. 반면 인조는 청태종 앞에서 삼궤구고두배를 하는 치욕을 당한다. 위 두 신하가 즉위식에서 하례를 올리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치욕. 그러고서 계속 왕위를 유지했으니 결과는 왕이나 신하나 마찬가지지만 실리는 없이 명분만 찿은 지도층 인사들 때문에 전쟁의 참화를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었던 백성들의 고통은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이런 내용은 사전의 인물 소개란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실제론 이런 내용을 알게 해줘 반면교사로 삼게 해야  하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