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덕헌 [羅德憲] 1573(선조 6) ~1640(인조 18)
1636년 춘신사(春信使)로 심양에 갔을 때, 후금의 태종이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황제를 칭하며 즉위식을 거행했다. 이때 조선 사신일행에게도 황제를 배알케 했으나, 그는 하례를 완강히 거부하다가 갖은 모욕과 구타를 당했다. 청 태종은 집요한 회유와 협박도 소용없음을 알고, 볼모를 요구하는 국서를 주어 돌려보냈다. 국서를 마지못해 받아가지고 압송되어 오던 중, 청나라 호위병의 경계가 허술한 틈을 타서 통원보(通院堡)의 호인(胡人)에게 국서를 맡기고 돌아왔다.
당시 조정의 거센 척화론 속에서 청 태종의 즉위식에 참가하고 황제참칭(皇帝僭稱)의 국서를 받았다고 하여 삼사와 조복양(趙復陽)을 중심으로 한 성균관 유생들에게 탄핵을 받았다. 이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의 변호로 죽음은 면하고 백마산성에 유배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후 과거 춘신사로 심양에 가서 하례를 거부, 항거한 사실이 밝혀져 유배에서 풀려나 삼도통어사로 특진되었으며, 1639년 벼슬에서 물러났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다음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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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확[李廓]1590(선조 23)~1665현종6년)
조선시대 부총관, 충청도병마절도사, 삼도수군통제사 등을 역임한 무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량(汝量). 태종의 아들 경녕군 이비(李礻+非)의 6대손으로, 아버지는 이유인(李?仁)이다. 신장이 8척이나 되고 음성이 큰 종소리 같았으며, 힘이 장사였다.
이항복(李恒福)의 추천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한때 궁중 금원(禁苑: 출입이 금지된 대궐안의 후원) 안에 들어온 범을 잡은 일이 있었다. 이이첨(李爾瞻)이 문무백관을 위협하여 폐모하기를 청할 때에 참여하지 않았다.
인조반정 때 돈화문 밖에서 수비하다가 밤에 반정군이 이르자 문을 열어 들어가게 하였다. 반정 후 그를 죽이려 하자, 이귀(李貴)가 길을 비켜준 그의 공을 역설하여 화를 면하게 하였다.
그 뒤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도원수 장만(張晩)의 군에 들어가 선봉이 되어 적을 격파하는 데 공을 세우고, 자산부사를 거쳐 부총관이 되었다.
1636년(인조 14)에 회답사(回答使)가 되어 청나라 심양(瀋陽)에 갔을 때, 심양에서는 국호를 청(淸)이라 고치고 왕을 황제로, 연호를 숭덕(崇德)이라 하여 교외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려고 할 때 그의 일행을 조선 사신으로 참여시키려고 하였으나, 결사적으로 항거하여 그 의식에 불참하고 돌아왔다.
우리 조정에서는 그 사실을 잘못 전하여 듣고, 한때 선천에 유배시켰다가 뒤에 충절을 알고 석방하였다. 이 해 호적(胡賊)이 침입하자 남한산성을 수비하는 데 활약하였고, 난이 끝난 뒤 충청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641년 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강(忠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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