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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반일종족주의"를 논박한 책]신 친일파- 호소카와 유지

Bawoo 2020. 6. 28. 21:17




신친일파

호사카 유지 지음 | 봄이아트북스 | 2020.4.3.

 

[소감] 나는 이 책을 쓴 호소카 교수를 볼 때마다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년) 시기 일본군으로 참전했다가 우리나라에 항복한 일본 장수 김충선(沙也可, 사야카)을 떠올리게 된다. 두 분 다 일본인으로 태어났으되 우리나라를 위해서 애썼고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저자가 이 책에서 논하고 있는 낙성대 연구소[namu.wiki/w/낙성대경제연구소 나무위키]의 이영훈. 이우연, 김낙년 같은 인물들은 한국인이면서 일본을 이롭게 하는 글을 쓴다. 이 책의 저자 말대로 신친일파인 셈인데 이런 인간들이 백주 대낮에 버젓이 활보하면서 일본을 이롭게하는 주장을 펼수 있는 현실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 설사 이들의 주장에 옳은 부분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러면 안 되는 것인데 말이다. 생각해보라. 우리나라가 일본인들에게 입은 피해가 얼마나 큰가. 임진왜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인명 피해만도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이 면서 일본을 옹호하는 글을 쓰다니. 반대로 일본인 중에 일본인이 한반도를 식민 통치했을 때 저지른 잘못을 반성하는 글을 쓴 게 있는가. 자신의 체험담으로 반성하는 내용을 쓴 소수는 있을지 몰라도 거의 다 식민통치의 정당화, 기여를 주장하는 내용이 대부분일 것이다. 혐한, 반한을 조장하는 내용. 그 맨 앞에 일본회의[namu.wiki/w/일본회의 나무위키 ]를 정점으로 제국일본을 이끌면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을 초토화시켰던 인물들의 후손이 극우파로 자리잡고 있고 우리나라가 발전하는 걸 계획적으로 방해하고 있는 게 지금 일본의 현실이지 않은가.

그런데 이런 일본의 편을 드는 내용을 버젓이 내다니.

 

호소카와 교수는 이 책에서 신친일파 이영훈. 이우연, 김낙년이 쓴 "반일종족주의" 내용 중 징용, 위안부. 독도 문제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내용을 써서 진정한 한국인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 가를 보여준다. 해방 후 친일 청산이 되기는 커녕 친일파들에 의해 통치되어 온 한반도 남쪽이기에 어쩔 수 없는 면이 있겠으나 신친일파들은 부끄러워 얼굴을 못 들고 다니는 세상이 하루 빨리 왔으면 좋겠다.

 

책소개 -인터넷 교보문고

반한·혐한을 주도하고 있는 일본 극우파의 주장 대부분을 고스란히 차용하고 있는 한국 내 ‘신친일파’ 정면 비판! 2차 아베 정권이 들어선 2012년 이후, 일본 정계에서는 일본군 ‘위안부’와 독도 및 강제징용 문제 등과 관련된 망언이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다. 그리고 2019년 8월에는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하면서 무역 갈등을 일으켜 ‘NO 재팬’으로 대변되는 반일 정서가 대한민국 전체를 휩쓸게 했다. 그 결과 일본 국민들에게 ‘아베 정권이 반한 감정을 건드려 자신들의 정치적 위기를 넘기려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거듭된 정책 실패와 스캔들로 인한 불만의 목소리를 외부로 돌리기 위해 한일 관계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는 아베 정권은 자민당 내 강성 우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강성 우파는 일본 내 반한·혐한 분위기 조성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일본의 극우세력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극우세력이란 1997년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에 이어 극우 단체 ‘일본회의(특별고문 - 아베 총리, 아소 다로 부총리)’를 결성해 일본 내에서 역사 왜곡을 심화시키는 데 주체적인 역할을 한 세력과 그 추종자들을 일컫는다.

그런데 일본 극우 세력에 동조하는 집단이 일본 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 일본과 갈등을 겪고 있는 한국에도 그와 같은 부류가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2019년 7월 《반일 종족주의》를 출간한 저자들이다. 《신친일파》의 저자 호사카 유지(세종대학교 교수)는 그들을 ‘신친일파’라고 규정한다. 일본 내에서 반한·혐한을 외치고 있는 일본 극우 세력의 주장 대부분을 고스란히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대표 저자인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사장 이영훈은 과거에 일본 극우 성향의 도요타 재단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식민지 연구를 수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기적에 가까운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 바탕은 일제 강점기의 기반에서 비롯되었다는 황당한 주장인 ‘식민지 근대화론’도 그때를 전후해서 구체화되었다. 따라서 왜곡과 오류가 섞인 그들의 주장이 오직 학문적 소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저자

호사카 유지 대학교수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도쿄대학을 졸업했다. 렌즈 공장을 경영하던 아버지가 심포지엄에서 한국인 교수를 가끔 만나곤 했는데, 그 교수에 대해 "일본인 중에는 찾아볼 수 없는 훌륭한 인격자"라고 칭찬했다. 그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한국인이 고매한 인격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스포츠계와 연예계에서 활약하는 재일 한국인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알게 되면서 한일관계를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깊이 있는 연구를 위해 서울로 거처를 옮긴 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국의 정신세계를 동경하던 그는 2003년 한국에 체류한 지 15년 만에 한국인으로 귀화했다. 현재 세종대학교 인문대학에서 교양학부 교수(일본학 전공)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지은 책으로『일본 고지도에도 독도 없다』『일본역사를 움직인 여인들』『일본에게 절대 당하지 마라』『일본제국주의의 민족동화정책 분석』 등이 있으며 『독도는 우리땅』『한국전쟁』을 일본어로 옮겨 일본에서 출간했다. 한일관계사, 독도 문제, 역사교과서 문제, 야스쿠니 신사 문제, 한류, 일본의 우익사상 등에 관한 논문을 여러 편 저술했다.

 

목차

머리말
프롤로그

제1부 강제징용 문제에 있어 악마는 어디에 있는가
제1장 조선인들이 강제연행된 일본 탄광의 실상
죄수를 광부로 사용한 일본 탄광
일본 탄광에서의 노무관리 실태
미이케탄광 폭동 사건과 다수의 도주자
미이케탄광으로 연행된 조선인 노동자
제2장 강제징용의 진실은 무엇인가
조선인 강제연행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계보
강제연행을 자발적인 선택으로 왜곡하는 이우연
‘관 알선’이라는 강제연행
조선인들의 도주는 노무 동원이 자발적이었다는 증거?
『특고월보』가 증명한 조선인 노무자 혹사와 학대
조선인들이 저금을 돌려받지 못하게 한 차별 구조
탄광에서의 작업상 민족차별을 부정할 수 있는가
임금 차별은 없었는가
가족 송금과 조선인 탄광부의 임금 수준
애당초 청구할 게 별로 없었다?
일본 정부는 개인 청구권을 인정했다

제2부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최전선 성노예 제도
제1장 위안부 관련 문서의 중요 부분을 은폐하는 사람들
미군의 ‘위안부’ 심문 보고서 원문의 중요 부분을 은폐해도 되는가
동남아 위안소와 조선인 위안부들
제2장 그릇된 ‘위안부’ 논리를 해부하다
조선의 기생제와 공창제로부터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생겼는가
일본군 ‘위안부’의 본격적 동원의 계기
조선총독부가 만든 조선 공창제와 ‘위안부’
일본군 ‘위안부’ 동원 시스템
감금 상태에 놓인 일본군 ‘위안부’
공녀와 공창제 그리고 ‘위안부’
호주제 가족 윤리와 성문화가 위안부 제도로 연결되었는가
원래 매춘부였던 여성들을 전쟁터로 보냈는가
해방 후 한국의 위안부
기지촌 여성과 일본군 ‘위안부’
제3장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옥주가 알려주는 ‘성노예’의 실태
방패사단 ‘위안부’였던 문옥주에 대한 왜곡
위험 지역에서 탈출한 문옥주
군속으로 근무한다는 감언에 속아 버마로
최전선 아카브에서의 ‘위안부’ 생활
조선으로의 귀국을 중지한 문옥주
랑군회관으로 돌아간 문옥주
군법회의
해방 후의 문옥주
이영훈이 왜곡·은폐하는 문옥주의 진심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일본의 전쟁범죄
제4장 『반일 종족주의』의 ‘위안부’ 관련 주장 비판
위안부 인원수에 문제 있음
일본군 ‘위안부’의 총수 문제
요시다 세이지에 대해
과연 성노예였던가?
해방 후 위안부 문제는 40여 년 동안 없었는가
정대협을 공격하는 주익종

제3부 ‘반일 종족주의 상징물’에 대한 거짓말
제1장 독도에 대한 거짓 주장들
독도에 대한 무지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오는 우산도는 독도
조선고지도와 안용복 사건
...경준과 조선의 독도 인식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 관한 황당무계한 거짓말
석도가 독도다
일본의 독도 편입과 울도군수 보고서
독도가 한국의 고유영토인 증거
러스크 서한과 독도
이승만 라인과 현재의 독도
이영훈의 독도 인식의 잘못
제2장 상징물 등에 대한 기타 이야기에 대해
문재인 정부는 위안부 합의를 파기하지 않았다
먼저 위안부 합의를 깬 자는 일본이다
『반일 종족주의』의 상징물들과 일제강점기에 대한 필자의 입장

맺음말
주석

 

출판사서평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 문제, 독도 문제 등 구체적인 근거 제시와 함께 《반일 종족주의》의 왜곡과 오류 지적!

《신친일파》를 저술한 호사카 유지는 일본계 한국인이다. 더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호사카 유지는 일본의 심장인 도쿄에서 나고 자라 도쿄대학을 졸업했다. 하지만 서른이 넘은 나이에 한국으로 건너와 한일 관계 연구를 시작했고, 한국 생활 15년이 지난 2003년에 귀화해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이처럼 독특한 이력을 가진 호사카 유지가 《신친일파》를 저술한 까닭은 매우 명확하다. 한일 관계 연구를 30년 넘게 지속해온 학자로서 호사카 유지는 ‘가해자인 일본이 역사 앞에 진실해지지 않는 한, 한국과 일본의 화해나 공동 번영은 불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영훈 등이 공동 집필한 책 《반일 종족주의》에는 너무나 많은 왜곡과 오류가 드러나 있었다. 더구나 《반일 종족주의》 속에는 역사적 진실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본 극우파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부분이 매우 많았다. 이에 호사카 유지는 《신친일파》를 통해 《반일 종족주의》의 왜곡과 오류를 바로잡으며, 정치적 논리를 떠나 역사적 진실을 부각하는 데 주력했다. 따라서 《신친일파》는 강제징용 문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 독도 문제 등이 중심을 이룬다.

그 일부를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다.

1. 강제징용 관련
여기에서 이영훈은 ‘미불금이나 미수금의 문제가 재판의 본질’이라는 큰 거짓말을 했다. 원고가 받지 못했다고 하는 통장이나 미불금, 미수금이 이번 재판의 쟁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영훈은 그것을 알면서 쟁점을 흐리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강제 징용자 판결에 관해 잘 모르는 상태에서 적당하게 자기주장을 쓴 셈이다. 이영훈의 말대로 한국에 거짓말 문화가 있다면, 이영훈 자신도 그 문화에 오염된 사람이라는 사실이 이 부분에서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우선 이번 재판은 임금을 받지 못했다는 소위 미불금, 미수금의 문제가 아니다. 미불금, 미수금의 지급 문제는 1965년 청구권 협정에서 모두 끝난 문제이므로, 2018년 10월 이후 한국 대법원은 미수금이나 미불금을 문제 삼지 않았다. 원고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영훈의 판결에 대한 이해는 처음부터 잘못되어 있다.
(‘판결이 거짓이라고 우기는 이영훈’ 중에서)

 

2. 일본군 ‘위안부’ 관련
조선의 기생제와 공창제가 일본군 ‘위안부’ 제도로 발전되었다는 논리는 하타 이쿠히코秦郁彦가 제공했고, 조선 여성들이 가부장적인 아버지에 의해 기생집으로 팔려 ‘위안부’가 되었다는 것은 일본의 대표적인 우파 논객인 니시오카 스토무西岡力의 주장이다.
그리고 강제연행이나 취업 사기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책임은 모집업자들에게 있다는 논리는 일본의 우파 논객들이 거의 다 사용한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우파 논객들이 즐겨 사용하는 논리가 새삼스럽게 한국에서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 속에 다시 ...등장한 셈이다.
(‘조선의 기생제와 공창제로부터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생겼는가’ 중에서)

3. 독도 관련
이영훈은 칙령 제41호에 나온 석도는 독도가 아니라 오늘날의 관음도라고 우긴다. 일본의 주장과 똑같다. 이영훈은 그 이유로 울릉도에 속하는 “사람이 사는 섬”이 관음도와 죽도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주장은 큰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관음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 최근에는 울릉도 본도와 관음도에 다리가 만들어져서 관리하는 사람이 사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2010년까지 관음도에는 역사적으로 사람이 살지 않았다.
그리고 1900년 칙령 제41호가 반포되었을 때만 해도 관음도에는 ‘도항’이라는 제 이름이 있었다. 그런데 왜 칙령 제41호에 도항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석도’라는 명칭을 썼을까. 그 이유는 석도가 관음도 즉, 도항이 아니기 때문이다. 1882년에 이름을 상실하고 이후 울릉도 사람들이 돌섬이라고 부른 독도를 석도石島라는 한자로 부른 것이다.
(‘석도가 독도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