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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선덕제의 후궁]공신부인 한씨(恭愼夫人 韓氏)

Bawoo 2020. 7. 23. 21:49

공신부인 한씨(恭愼夫人 韓氏, 1410년 음력 4월 9일 ~ 1483년 음력 5월 18일)는 조선 출신의 명나라 후궁이다. 조선에서 명나라에 바친 공녀로, 선덕제의 후궁이 되었다. 한확의 누이이며 소혜왕후(인수대비)의 고모이다. 이름은 계란(桂蘭)이다.

생애

1410년(태종 10년) 음력 4월 9일 청주 한씨 한영정(韓永矴)과 그 부인 김씨의 3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1] 공신부인의 어머니 김씨는 좌명공신(佐命功臣) 승녕부사(承寧府事)를 지내고 양소공(襄昭公)의 시호를 받은 의성 김씨 김영렬(金英烈)의 딸이다. 한편 한확은 공신부인의 오빠이며, 한확의 딸로 의경세자(덕종)의 부인이자 성종의 모후인 소혜왕후는 공신부인의 친조카이다. 또 공신부인의 친언니도 일찍이 명나라에 공녀로 바쳐져 영락제의 후궁이 되었는데, 흔히 여비 한씨(麗妃 韓氏)로 알려져 있다. 여비는 영락제의 황후인효문황후 서씨가 죽은 후 명나라 내명부를 총괄하기도 하였다[2].

공신부인은 1427년(조선 세종 9년, 명나라 선덕 2년) 세종에 의해 명나라에 바쳐질 공녀로 선발되어 명나라에 들어갔으며, 이때 명나라의 제5대 황제인 선덕제의 후궁이 되었다. 그녀의 언니인 여비 한씨는 1424년(조선 세종 6년, 명나라 영락 22년) 영락제 사후 곧바로 순장되었는데, 이 때문에 공신부인이 명나라로 떠날 때 이를 호종하던 한확과 그녀를 보고 당시 사람들은 "그 언니가 순장을 당한 것도 애석한데, 이제 또 떠나는구나."라며 이들을 "생송장(生送葬)"이라고 불렀다고 한다[3].

그러나 공신부인은 남편 선덕제 사후에도 정통제(영종), 경태제(대종), 성화제(헌종) 등 57년간 4대의 황제를 섬기다가, 1483년(조선 성종 14년, 명나라 성화 19년) 음력 5월 18일 병으로 인해 향년 7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1] 그녀가 죽자 성화제는 매우 슬퍼하여 태감 왕거(王琚)를 보내어 백금(白金)과 옷감 등을 하사하고, 시호를 공신(恭愼)이라고 하였다.[1] 이때 명나라 황태후를 비롯한 여러 황실에서 그녀에게 조의를 표하고, 이 해 음력 6월 21일 북경 서쪽 향산(香山)에 장사를 지냈다.[1]

가족 관계

출처

  1. 이동: 가 《조선왕조실록》 성종 162권, 15년(1484년) 1월 4일 5번째기사
  2. 《국조인물고》- 한확
  3. 네이버캐스트 - 순장

외부 링크

[논문] 조선 초 명 선덕제 후궁 공신부인 한씨가 조선에 끼친 영향

국문초록

본 논문은 조선 초기 명나라에 공녀로 뽑혀가 황제 선덕제의 후궁이 되었던 공신부인(恭愼夫人) 한씨가 공녀로 선발된 이유와 가세의 성장, 명황실 내에서의 위상, 그리고 그녀가 조선왕실에 끼친 긍정적, 부정적 영향력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한씨는 성종의 외할아버지인 한확의 여동생으로,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 대비의 고모이다. 한씨의 이름은 계란으로 태종 10년(1410)에 한영정과 의성김씨 사이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한씨는 공녀 출신이었던 언니 여비(麗妃)의 절개를 높이 평가한다는 점과 얼굴이 아름답다는 이유로 세종 9년(1427) 5월에 공녀로 뽑혔으나 병이 나 이듬해에 명나라로 갔다. 그녀는 7년 동안 선덕제의 후궁으로 산 기간을 합쳐 57년 동안 명황실의 여성으로 살았다. 그 사이 토목의 변(土木之變)으로 어려움에 처했던 어린 성화제를 돌보아준 `아보의 공`이 있어 성화제는 황제 즉위 후 한씨에게 지극한 총애와 효도를 바쳤다. 한씨는 명황실 내의 사정에 밝아 `모사(姆師)` `여사(女師)` `노노(老老)` 등으로 불렸다. 또한 한씨는 조선의 왕인 성종의 외척이었던 만큼 명황실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성종 14년 한씨가 죽자 성화제는 그녀를 `공신부인`으로 봉하였다. 한씨는 친정 가문의 성장과 조선왕실 내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첫째, 오빠 한확이 세종 및 수양대군(후의 세조)과 사돈을 맺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한씨는 청주한씨 한확 가문이 왕실의 외척이 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둘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가 명의 책봉을 받는 것과 조카사위인 의경세자의 책봉에 공을 세웠다. 셋째, 성종의 친부모인 의경세자와 조카 수빈 한씨를 왕과 대비로 추숭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넷째, 조선이 명에서 금지한 궁각(弓角)무역을 허락받는데 도움을 주었다. 다섯째, 명황제에게 성종의 부인 폐비 윤씨의 폐비 사실을 알리고, 또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책봉을 받아내는데 도움을 주었다. 여섯째,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되는 데에도 적극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런 도움의 대가로 한씨는 조선왕실에 많은 공물을 요구하였다. 한씨에게 바치는 별진헌은 조선인 화자 출신 명사(明使) 정동이 황제와 한씨를 등에 업고 한씨의 손발 역할을 하며 성종 8년 궁각무역문제에 개입하면서 더욱 부담이 커졌다. 성종 9년에 바치기 시작한 별진헌은 처음에는 한씨의 족친이 한씨에게 사사로이 바치는 것이지만 그 종류와 수량이 점점 늘어나고 점차 상공(常貢)이 되어 조정의 큰 골칫거리로 등장했다. 성종 14년에 한씨가 죽은 직후까지 바쳐졌던 별진헌은 조선에 큰 악영향을 주었다.[www.jisikworld.com/paper/5894431 지식월드 ]

 

[정보] 책 - 영남좌도 역사 산책(도서출판세종신서 2)

저자 이도국 | 도서출판세종 | 202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