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歷史) 마당 ♣/- 인물, 단체

[조선 후기- 29년 긴 유배생활보다 순애보로 더 유명한 인물]조정철 (趙貞喆)

Bawoo 2020. 8. 3. 22:35

 

조정철(趙貞喆)1751년(영조 27) ~ 1831년(순조 31)  

조선 후기 충청감사를 역임한 문신. | [가계]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성경(成卿)·태성(台城), 호는 정헌(靜軒)·대릉(大陵). 증조할아버지는 우의정을 지낸 조태채(趙泰采), 할아버지는 조겸빈(趙謙彬), 아버지는 이조참판 조영순(趙榮順)이며, 어머니는 김시눌(金時訥)의 딸이다. 부인은 홍지해(洪趾海)의 딸이다.

[활동사항]
1775년(영조 51) 별시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별검(別檢)이 되었다. 1777년(정조 1) 강용휘(姜龍輝) 등이 정조를 시해하고 그의 이복동생을 옹립하려는 음모에 연루되어 죄가 참형에 해당되었으나 우의정 조태채의 증손임이 참작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1781년(정조 5) 할아버지 때부터 원수지간이던 소론의 김시구(金蓍耉)가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 김시구는 조정철을 죽일 수 있는 새로운 죄목을 캐기 위해 염탐하던 중, 귀양지에 홍윤애(洪允愛)가 출입하는 것을 알고 그녀를 잡아다가 음모 여부를 문초하였다. 그러나 홍윤애는 모든 사실을 부인하였고 끝내 죽음으로 조정철을 변호하였다.


김시구는 죄상을 밝힐 증거도 없이 사람을 죽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제주도 유배인이 역모를 꾸민다는 허위 보고를 올렸다. 이에 조정은 제주목사 및 대정현감, 정의현감을 새로 임명하고, 어사를 파견하여 조사하였다.

조정철은 혹독한 심문 끝에 결국 무혐의가 밝혀졌고, 1782년(정조 6)에 정의현 김윤재, 김응귀의 집으로 귀양지를 옮겼으며 1788년(정조 12) 나주로 유배지를 옮겼다. 1790년(정조 14) 9월 추자도로 이배되어 13년을 보냈으며 1805년(순조 5) 유배가 풀렸다.

1809년(순조 9) 관직에 다시 기용되어 정언·동래부사 등을 거쳐 충청도관찰사·형조판서·좌참찬·대사헌·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1811년(순조 11) 제주목사에 부임하자, 자신을 위해 죽은 홍윤애를 기리고 홍윤애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을 만났다.

제주목사 재임 중 정의현에 사는 김창언(金昌彦)의 처 오씨 가문에 정표하였으며, 제주성의 동성(東城)과 서성의 외곽을 정비, 개건하고 12과원(果園)을 설치하여 각각 과원에 관리를 두어 과수나무를 관리, 재배하도록 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술에는 유배 생활 동안에 시가와 제주의 풍속, 기후, 산물 등을 기록한 『정헌영해처감록(靜軒瀛海處坎錄)』이 있다.

 

[참고문헌]김찬흡, 『제주사인명사전』(제주문화원, 2002)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관련 인물]

 

홍윤애(洪允愛)

 

조선 후기 제주로 유배된 조정철을 변호하다 죽은 여인.


[가계]
본관은 남양. 일명 홍랑(洪娘)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향리를 지낸 홍처훈(洪處勳)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이다.


[활동사항]
1777년(정조 1) 9월 11일 노론 벽파에 속하였던 조정철(趙貞喆)이 제주로 유배되어 제주성 안에 있던 신호(申好)의 집에 귀양지를 마련하였다. 홍윤애는 조정철의 귀양지를 드나들며 시중을 들었고, 1781년(정조 5) 2월 30일에는 조정철의 딸을 낳았다.

1781년 3월 소론의 김시구(金蓍耉)가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 노론의 조정철 집안과는 할아버지 때부터 대립하였던 김시구는 제주에 도착하자 조정철을 죽일 뜻을 갖고 죄상을 캐기 시작하였다.

김시구는 홍윤애를 참혹하게 고문하여 조정철의 죄상을 캐고자 하였지만, 홍윤애는 모든 사실을 부인하였고 끝내 자신의 죽음으로 조정철을 변호하였다. 김시구는 죄상을 밝힐 증거도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을 죽인 것을 은폐하기 위하여 제주도에서 유배인이 정조 시해 음모를 꾸민다는 장계를 올렸다.

조정에서는 제주순무안사시재어사(濟州巡撫按査試才御使) 박천형(朴天衡)을 제주도로 파견하여 조사하였지만 아무런 죄상이 드러나지 않았다. 조정철은 무혐의로 풀려나 1782년(정조 6) 1월 정의현으로 이배되어 그곳에서 9년의 세월을 보내고 다시 1790년(정조 14) 9월 추자도로 이배되어 13년의 세월을 보냈다. 1805년(순조 5) 귀양에서 풀려나고 관직도 복귀되었다.

조정철은 다시 기용된 지 7년 만인 1811년(순조 11) 제주목사 겸 전라방어사가 되어 제주에 부임하게 되었다. 자신을 위해 죽은 홍윤애의 무덤을 찾았고 자신의 명의로 묘비를 세웠으며 딸도 만났다.


[묘소]
묘소는 원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1동 전농로 불교회관이 있는 자리에 있었는데, 1936년 이곳에 제주공립농업학교가 들어서면서 제주시 애월읍 금덕리로 이장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홍윤애를 죽게 한 인물]김시구(金蓍耉)-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몽휴(夢休). 아버지는 사헌부장령을 지낸 김광운(金光運)이다.


[활동사항]
사마시에 합격하고 진사가 된 뒤 1754년(영조 30) 문과 증광시에서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1754년 강원도 원주의 보안찰방으로 밀려났다가 곧 복귀하여 사헌부지평이 되었으나 임금의 부름에 응하지 않아 1758년 전라남도 광주의 경양찰방으로 좌천되었다.

1762년(영조 38) 사헌부장령이 되었고, 1767년(영조 43) 전사관(典祀官)으로 함경도에 파견되었다. 1772(영조 48)년 승정원승지에 올랐고, 이후 동지돈녕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이르렀다.

1781년(정조 5) 3월 김영수(金永綏) 후임으로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유배인의 죄상을 심문하였는데, 유배인 중에는 그의 정치적 반대파인 조정철(趙貞喆)[1751~1831]이 있었다. 조정철의 애첩 홍윤애(洪允愛)[?~1781]에게 조정철의 비행을 말하라고 모진 고문을 가하였으나, 홍윤애는 끝까지 거부하고 사망하였다. 김시구는 1781년 7월 유배인을 잘 단속하지 못한 일로 체포되었으며, 제주판관 황인채(黃麟采)[1716~?]는 파직되었다. 한편 조정철은 순조가 즉위하여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자 풀려났으며, 1811년(순조 11) 제주목사에 부임하여 홍윤애의 묘소를 찾아가 넋을 위로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깊은 읽을 거리 있는 곳]

내가 죽는 것이 그대가 사는 길입니다 - 죽음과 맞바꾼 사랑[2010.04.10]

초에 가 오게 되자 폭풍우가 열흘넘게 몰아쳐서 흉년이 들게 되었는데 민간에서는...네번째는 인정을 하였지만, 나머지는 인정하지 않았다. 여기서 조정철이 홍윤애...

blog.daum.net/orangeville/17448539 잘리의 제주도 트멍 이야기


[드라마화 된 영상]

-------

[해설에서 조정철이 딸이 이미 죽어 못 만났다고 나온다. 딸을 만나 돌봤다는 다른 내용과는 다르다.] 

 

조정철·홍윤애 '딸 무덤' 찾았다 조정철·홍윤애 '딸 무덤' 찾았다 2013.06.20.

조정철과 홍윤애의 딸과 사위의 무덤이 발견돼 '유배문학의 꽃'으로 평가받는 이들의 이야기에 소재를 더해주고 있다. 딸 양주조씨와 사위 박수영의 묘와 딸의 비석. 사위와 함께 묻혀… '유배문학' 이야기...

www.ihalla.com/read.php3?no=434361&read_temp=20130620§ion=1.. 한라일보

 

[관련 이야기가 들어있는 책]

1.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 중 여인의 항기를 묻은 섬 - 제주도와 조정철 

2. 탐라 의녀 홍윤애와 유배 선비 조정철(사랑의 영웅들) 한철용 지음 | 팔복원 | 2020.3.12.

정조암살미수사건에 뜻하지 않게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 온 조정철과 사랑하는 조정철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 탐라 토박이 비바리 홍윤애의 소설같은 이야기가 진짜 소설로 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