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자와 세이시사이(會澤正志齊)(1782~1863)
아이자와 세이시사이[會澤正志齊]라고도 한다. 그의 저작들은 1868년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를 무너뜨리고 덴노 권력을 회복시킨 운동에 사상적인 영향을 미쳤다.
미토 한[藩]은 도쿠가와 가문의 한 분파로서 당시 유학과 존왕(尊王) 운동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서양과의 접촉이 점차 확대되면서 유교적 전통이 위협을 받게 되자 미토 한은 이를 민감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서양의 선박들이 일본 해안에 나타나기 시작한 19세기초 아이자와는 저술 활동을 통해 새롭게 등장한 '야만인들'을 단호하게 대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이 서양의 군사기술을 받아들여 군비와 방위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서양과의 무역이 일본을 잠식하게 될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서양인들과의 접촉을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일본에 가해지는 진정한 위협은 다름 아닌 허약하고 무기력한 국민들이라고 인식한 그는 실질적인 통치권자로서 덴노에게 충성을 바치는 등의 국수주의적인 정신을 신장시키는 것만이 국력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자와에 따르면 일본의 천부적인 우월함과 세계의 중심이라는 고유한 위치는 일본의 덴노 계보가 태양의 여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로부터 직접 이어진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의 근본윤리는 덴노에 대한 충성인데 이 윤리가 불교의 그릇된 교리의 도입으로 혼돈에 빠졌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덴노 숭배는 뒤에 일본 국수주의 발흥의 토대가 되었다.
일본의 민족적 우월성을 강조한 그의 저서 〈신론 新論〉은 20세기에 들어와서도 국수주의의 교과서로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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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왕양이 운동의 이론적 기반을 마련한 사상가>
1782년, 미토번 하급 무사의 장남으로 태어남.
- 아이자와 가문은 대대로 이 지역에서 농사. 미토번이 설립된 후 번에 들어가 매를 관리하는 일을 함.
- 세이시사이의 아버지 대에 이르러 비로소 하급 무사가 되었다.
1791년, 후지타 유코쿠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는 당시 미토번 최고의 학자로 후기 미토학을 세운 인물이다.
1799년, 미토번의 역사편찬소인 쇼코칸에 들어가『대일본사』편찬사업에 주력.
- 여기서 두각을 나타낸 그는 세자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교육을 담당하게 된다.
1829년, 미토번 후계자 문제가 일어나자 나리아키를 지지,
- 이후 그의 정치적 동반자가 되어 미토번의 개혁을 주도했다.
- 이후 나리아키가 실각하자, 세이시사이도 근신처분을 받았다. 근신기간중 많은 저작을 집필.
1849년, 근신처분이 풀렸고,
1853년, 심혈을 기울여왔던 미토 번의 번교인 홍도관으로 돌아갔고,
1855년, 학장에 해당하는 총교로 복귀했다.
1858년, 미토번과 막부의 관계가 악화되자, 세이시사이는 번 내의 개혁파를 진압할 것을 주장하며 개국론을 펼쳤고,
- 이런 전향은 이전 개혁파 동지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1863년, 자택에서 사망.
* 미토학과 아이자와 세이시사이
- 미토 3대 번주 도쿠가와 미쓰쿠니는 주자학적 대의명분론에 입각, 일본의 역사를 서술한 "대일본사" 편찬사업을 시작.
- 이를 통해 성립된 미토번의 학문을 전기 미토학이라 함
- 막부 말 서양 열강의 접근이라는 대외적 위기를 맞아 미토 번에서 태동한 학문을 후기 미토학.
- 후기 미토학은 아이자와 세이시사이의 스승이었던 후지타 유코쿠에 의해 성립.
- 세이시사이에 의해 완성.
- 유학적 명분론의 관점에서 일본의 역사를 살펴보면, 결과적으로 일본의 명분=존왕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 서양의 접근과 사회적 불안이라는 내우외환의 시대에
- 세이시사이는 역사적 실체로서 천황을 중심에 놓고 일본이란 나라의 본체, 즉 국체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생각.
- 이런 사상이 집약되어 있는 것이『신론(新論)』이다.
- 막부와 번의 정치적 상황을 강하게 비판,
- 시대적 위기 상황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국체를 명확히 하는 것이라 주장.
- 이런 주장은 자신들의 번을 중심으로 사고해온 무사들의 인식을 일본이라는 국가적, 민족점 범위로 전환시켰다.
* 대표 저작 『신론』
- 신론은 막부 말 지사들의 필독서로서, 그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 1824년, 미토번 영지에 외국인 12명이 상륙했던 사건이 신론을 집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 필담 역을 맡아서 그들과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한 뒤, 서양의 침략에 대한 위기감을 강하게 가지게 되었다.
- 이듬해 신론이 완성되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 44세.
[출처] 아이자와 세이시사이 (會澤正志齋, 1782~1863)|작성자 마침 다시스로
[정보]책-왜 일본은 한국을 정복하고 싶어 하는가(메디치 WEA 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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