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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영남선비들의 아름다운 '낙향'

Bawoo 2020. 11. 21. 23:04

[이도국영남좌도 역사산책] 영남선비들의 아름다운 '낙향'

2020.11.20 | 영남일보

등이 도산서원 입구로 들어서고 있다. 〈영남일보 DB〉징비록을 짓고 풍전등화의 위란...정탁의 유장한 선비정신이 깃들어 있는 예천 읍호정.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사진 자료 보기]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영남선비들의 아름다운 '낙향'

2020-11-20

류성룡, 낙향해 징비록 쓰고…정탁은 이순신 구하고 예천으로

 
지난해 4월21일 퇴계선생 마지막 귀향길 450주년 걷기행사에 참석한 이철우경북도지사와 권영세 안동시장 등이 도산서원 입구로 들어서고 있다. 〈영남일보 DB〉

수도에서 관리 생활을 마치고 혹은 물러설 때를 알아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을 '낙향'이라 한다. 오천년 역사에 낙향한 선비가 어디 한둘이겠느냐만 선비의 삶에 진퇴를 알아 낙향길이 아름다운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중에서도 류성룡, 정탁, 이황의 낙향은 의미가 각별하다. 이들의 벼슬살이는 진중했고 낙향은 장려했다. 후세인의 사표가 된 이들의 낙향길을 따라가 보자.

◆류성룡의 낙향은 귀거래사를 떠올리게 하고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국란 극복에 책임을 다한 명재상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북인으로부터 일본과 화해를 주도했다고 탄핵받아 파직되자 33년 벼슬살이를 미련없이 던져버리고 58세에 고향 하회로 내려갔다. 문경새재(조령) 세 관문을 지나 예천을 거쳐 서안동으로 오는 낙향길은 멀고도 험했다.

새재를 넘으면 서울의 경사스러운 소식을 처음 듣는 고을, 한자어 들을 '문(聞)'에 경사 '경(慶)'의 문경이었다. 과거 급제 소식이, 조정에서 다시 부르는 어명이 가장 먼저 들리는 고을이라 했고 문경을 지나면 예천이다. 물맛이 감주처럼 달다고 옛 지명을 '감천'이라 불렀다. 예천을 지나면 서안동은 지척이다.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가장 아름다운 부분의 시구가 저절로 떠오른다.


탄핵 당해 돌아온 류성룡
도화촌에 머물며 제자 받아
퇴계 문집 만들고 서간 정리
징비록 완성 뒤 관직 복관



'마침내 저 멀리 고향 집 처마가 보이자 기쁜 마음으로 급히 뛰어갔다. 머슴아이는 길에 나와 나를 반기고 어린 것이 문에서 손 흔들며 나를 맞는다. 동구밖 세 갈래 길에 잡초가 무성하지만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도 꿋꿋하다.'

갑작스러운 낙향으로 거처가 변변치 않았지만 류성룡은 도화촌에 머물며 스승 퇴계의 문집을 만들기 위해 서간을 정리하고 제자를 받아들였다. 이때 가르친 제자로 뛰어난 인물이 풍산김씨 8형제다. 산음현감을 지낸 김대현의 자제로 여덟형제가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중 다섯형제가 대과에 급제하여 '팔연오계(八蓮五桂)'라 했다. 초시 합격자에게 백패를 주니 흰 연꽃이라 했고 대과 합격자는 홍패를 받고 복두(급제자모자)에 두 줄기 계화(桂花) 꽂음을 상징했다.

다섯 아들이 대과에 급제하자 인조는 크게 칭찬하고 향리 이름을 '오미(五美)'로 하사했다. 지금의 풍산읍 오미리다. 큰아들 김봉조는 대과급 제후 종가를 지켰고 둘째 김영조는 이조참판까지 올랐고 여섯째 김응조는 다섯고을에 선정비가 세워졌다. 모두 류성룡의 뛰어난 제자로 서애 사후 안동유림을 이끌었다.

 
징비록을 짓고 풍전등화의 위란에서 나라를 구할 이순신 장군을 천거한 서애 류성룡을 기리는 병산서원의 관망 포인트 만대루.

◆징비록을 저술하여 후세를 대비하고

류성룡은 고향에 머물면서 1604년까지 5년에 걸쳐 '징비록'을 저술했다. 징비록은 임진왜란의 참상을 겪으면서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대비하고 경계하고자 쓴 회고록이며 기록문학으로 국보 132호로 지정되었다.

'징비(懲毖)'란 어려운 이름은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날의 근심거리를 그치게 한다'는 시경의 구절에서 따왔다. 조선 오백년 역사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인 영의정에 오른 이는 176명이지만 탁월한 인재발탁과 후세를 염려하여 일생의 경험을 기록하고 대비책을 남긴 인물은 류성룡이 유일하다. 그러기에 그를 조선 최고의 경세가이자 명재상으로 꼽는다.

징비록을 완성하고 3년 뒤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그동안 삭탈되었던 관직이 복관되고 청백리에 녹선되는 등 명예를 회복하게 된다. 선조의 여러 차례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학가산 기슭에 초막을 지어 머물면서 사람들이 이익과 욕심에 빠져 염치를 잃어버리는 것은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이라고 청렴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그의 청빈한 삶은 진중했고 노년은 장려했다.

 
정탁의 유장한 선비정신이 깃들어 있는 예천 읍호정.

◆ 청사에 빛나는 상소문

류성룡과 비슷한 시기에 영남으로 낙향한 인물로 약포 정탁이 있다. 청주정씨로 예천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퇴계에게 학문을 배우고 33세에 대과급제하여 출사하였다. 동문사형제인 정탁과 류성룡, 류성룡이 발탁한 이순신, 이순신을 구한 정탁, 이들의 관계가 임진란 승리의 포인트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정은 이순신에게 일선 전황을 고려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부산포 바다로 출전하여 왜군과 싸우라고 독려했지만 명령에 따르지 않자 어명을 거역했다고 이순신을 소환하여 하옥시키고 4가지 억지 죄명(조정을 기만하고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토벌하지 않고 나라를 저버린 죄, 다른 사람의 공을 빼앗고 모함한 죄, 방자하여 꺼려함이 없는 죄)을 붙여 국문할 때, 우의정을 역임하고 지중추부사(무임소정승)로 물러나 있던 72세 노대신 정탁은 노구를 일으켜 청사에 빛나는 상소문 '논구이순신차(論救李舜臣箚)'를 올려 이순신을 구한다.


임란의 숨은 공신 정탁
우의정 자리서 물러나있다
72세때 이순신 구명 상소문
고향에서 산천과 여생 보내



'순신은 참으로 장수의 자질을 가졌고 바다와 육지에서 많은 적들을 물리쳤습니다. 이러한 인물은 쉽게 얻지 못할 뿐더러 백성들이 의지하는 바가 크고 적이 무서워하는 사람이옵니다. 만일 죄명이 엄중하다고 해서 조금도 용서할 이유가 없다고 하여, 공과 허물을 서로 비견해 보지도 아니하고 앞으로 더 큰 공을 세울 능력이 있고 없음을 생각하지도 않고 또 그간 사정을 천천히 살펴볼 여유도 없이 적들이 두려워하는 장수에게 끝내 큰 벌을 내리면 공이 있는 자와 능력이 있는 자들은 앞으로 스스로 나라를 위해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이순신을 역경에서 구하여 나라에 바치고 정탁은 1599년 고향 예천 고평리로 낙향한다. 금모래 고운 내성천 동호언덕에 읍호정을 세우고 여생을 고향 산천과 함께 보낸다. 읍호정 벽에는 퇴계의 차운시, 정온의 읍호정기, 윤두수의 송별시가 걸려 있다. 산촌벽지에서 몸을 일으켜 평생을 진충보국에 힘쓴 늙은 신하는 심정을 이렇게 노래했다.

'많은 책을 읽고 세상을 구제하리라 애를 썼건만 풍진 속에서 돌아다닌 세월이 몇 해이던가. 칠년 대란을 만나 한 가지 계책도 내지 못하고 백발이 된 몸으로 고향을 찾으니 부끄러움만 남네'

◆퇴계의 귀향길은 450년만에 재현되고

벼슬살이보다 자신을 위한 공부에 더 관심이 많았던 퇴계는 그의 호가 그러하듯이 여러 번 왕에게 물러나기를 청했다. 1534년 34세에 문과 급제해 1569년 69세로 마지막 낙향할 때까지 모두 여섯 차례나 출향과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다섯 가지 자문(自問)이 담긴 마지막 상소를 올리고 만류하는 선조의 허락을 겨우 받아 마침내 귀향길에 올랐다. 서울에서 안동 예안까지 600리 길은 칠십 줄의 노학자에게 힘들고 긴 여정이었다.

고향에 돌아 온 퇴계는 도산서당에서 제자를 가르치다가 이듬해 12월 매화나무에 물을 주라고 당부하고 70세 나이로 고요히 세상을 하직하였다. 퇴계는 일찍이 자신의 생애에 대해 스스로 기록하고자 뜻한 바를 지어놓았는데 이것이 '퇴계선생 자명(自銘)'이다. 4언 24구로 되어 있으며 참으로 소박하게 자신의 일생을 정리했다. 앞 구절이다.



태어나서는 어리석었고 자라서는 병도 많았네

중년에는 어찌 학문을 좋아했으며 만년에는 어찌 벼슬을 탐하였는가

학문은 구할수록 멀기만 하고 벼슬은 사양해도 더 내리시네

나아가면 쓰러지고 물러나서는 올곧았으니

나라은혜 망극하고 성현 말씀 두렵다



퇴계가 세상을 떠난 후 이백여년이 지난 정조 말엽에 퇴계 영령이 한양 나들이를 했다. 도산서원에서 영남별시가 열리고 4년이 지난 1796년 정조 20년에 퇴계종손 이지순이 음직으로 평양 서북에 있는 영유현령으로 부임하게 되자 종택 사당에 모셔져 있던 퇴계위패가 봉사손을 따라 한양을 지나게 되었다.


만류 끝에 출향한 퇴계
칠십줄 노학자엔 힘든 낙향길
영면 후 200년 뒤 한양나들이
작년 귀향 450주년 재현행사



정조는 이 사실을 알고 퇴계위패를 성균관에 일시 봉안하고 치제(致祭)를 지내도록 어명을 내렸고 직접 제문을 지었다. 수백명의 성균관 유생들은 한강나루에 도열하여 큰 스승의 한양나들이를 맞이하였으며 당시 안동에서 한양으로 오는 교통은 조령을 넘어 충주 목계나루에서 배를 타고 마포나루로 오는 길이 가장 쉬웠다. 퇴계 영령의 한양 나들이도 이 뱃길로 이동했다.

정조 20년 9월8일 성균관에 마련된 임시 제실에서 예문관 직제학을 겸하고 있던 도승지 주관으로 치제를 지냈는데 당색을 불문하고 정승이하 만조백관과 성균관 유생 775명이 참석하여 226년만에 상경한 겨레의 스승에게 감격과 존경의 뜻을 올렸다. 오곡이 결실을 맺는 절기에 정조 치하 조정이 드리는 '흠송(欽頌)'이었고 조선왕조실록에 '승지를 보내 문순공 이황에게 제사를 지내주다'라고 기록으로 남겼다.

 
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2019년 3월,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는 퇴계의 마지막 귀향길 450주년을 맞아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주관으로 재현행사가 열렸다. 퇴계의 삶과 정신적 가치를 공유하고 '길 위의 길(The way on the road)'을 찾기 위함이다. 남한강 물길따라 조령을 넘어 도산서원으로 향하는 귀향길 굽이마다 퇴계와 벗들이 나눈 시를 낭송하고 인간심성과 만물의 이치를 이야기하며 대학자의 삶과 귀향의 뜻은 오백년 시공을 타고 넘실거렸다.

여행작가·역사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