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한음 이덕형과 노계 박인로[12시간전 | 영남일보]
해남의 거부였고 노계는 빈한한 집안의 영남선비였다. 어려움 속에서 주옥같은 글을...그를 기리고 있다. 여행작가·역사연구가경북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 낮은 산자락에...[사진자료를 보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조선 최고 엘리트와 영천 초급관리의 우정…주옥같은 詩를 낳았다
경북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 낮은 산자락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작은 서원이 하나 있다.이곳은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한국가사문학의 3대 시성으로 불리는 노계 박인로 선생의 학문과 충효를 기리기 위해 지역 유림이 세운 도계서원이다. |
옛사람들은 선비의 아름다운 만남을 '담수지교(淡水之交)'라 불렀다. 깨끗하고 담백한 선비의 교유를 '맑은 물의 사귐'이라 하며 고귀하게 여겼다. 조선 중기의 두 인물, 한음 이덕형은 당대 최고의 정승이었고 노계 박인로는 경상도 초급관리였지만 벼슬을 뛰어넘은 두 사람의 우정은 담수지교처럼 맑았고 주옥같은 가사문학을 남겼다. 이들의 아름다운 길을 따라가 본다.
三族 영의정 집안 한음 이덕형
임란 복구 위해 영천 찾았다가
노계와 계급장 떼고 친교 맺어
한음의 홍시 받고 쓴 '조홍시가'
천리길 친구 찾은 후 쓴 '사제곡'
농촌의 빈한한 삶 녹인 '누항사'
담수지교, 아름다운 가사 남겨
정철·윤선도와 '3대 시인' 반열
한음 증손자, 훗날 영천군수 돼
노계가사 목판본 만들어 전해와
영천 서원·문학관서 업적 기려
◆인재 중의 인재 한음
'오성과 한음'으로 널리 알려진 한음 이덕형은 5대조 좌의정 이극균이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멸문의 화를 당하자 대대로 경기도 시골에 묻혀 살았다. 어릴 적에는 포천 외가에서 명필로 유명한 양사언에게 글을 배웠는데 이때 한음의 천재성에 관한 일화가 전해온다.
토정비결의 이지함이 한음의 자질을 알아보고 훗날 북인의 영수가 된 조카 이산해의 사위로 삼는다. 약관의 나이로 과거 급제한 한음을 율곡 이이가 발탁하여 요직을 거치면서 31세 대제학, 임진란 때는 병조판서, 뛰어난 외교활동 덕분에 42세엔 영의정, 선조·광해군 연간에 국정의 중심에 서서 '삼불후(三不朽)'를 실천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삼불후란 영원히 썩지 않는 세 가지, '덕(德)·공(功)·문(文)'을 말한다. 덕으로 백성을 교화하고 나라에 공을 세우고 글을 후세에 남기는 것인데 최고·최상의 관리라 할 수 있다. 한음은 한 시대를 풍미한 인재 중의 인재였다. 외삼촌 류전(문화류씨), 장인 이산해(한산이씨), 본가(광주이씨)가 모두 영의정에 올라 삼족 영의정 집안이 된다.
노계 박인로(1561~1642) 가사비. |
조홍시가(1601)
반중 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 아니라도
품은 즉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을 새
글로 설워하노라
누항사(1611)
나의 가난 싫다고 여겨
손짓한다고 물러가랴
남의 부귀 부러워한들
손을 친다고 나아오랴
인간 세상 어느 일이
운명 밖에 생겼겠느냐
가난 속에 원망 않는 것이
어렵다고 하지마는
내 생활 이러하니
서러운 뜻 없도다
◆조홍시가
한음은 1601년 4도체찰사(경상·전라·충청·강원도 임시 군무총사령관)로 경상도에 내려온다. 전란 피해를 복구하고 왜적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대구를 거쳐 영천에 들러 의병장 정세아, 조호익, 권응수 등과 함께 역참시설 정비와 전란복구 대책을 세우는데 이때 노계 박인로를 만난다.
노계는 2년 전 1599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때 과거 총책임자가 좌의정 한음이었다. 임란 후 과거라 무과 위주였고 자기를 뽑아준 감사함과 영천 출신 급제자로서 한음의 순방길 자리에 함께했다. 노계는 영천 북안 출신이다.
한음 이덕형(1561~1613) 초상화.한음은 1601년 4도체찰사(경상·전라·충청·강원도 임시 군무총사령관)로 경상도에 내려온다. 대구를 거쳐 영천에 들러 의병장들과 함께 역참시설 정비와 전란 복구 대책을 세우는데, 이때 노계 박인로를 만난다. |
두 사람은 동갑내기다. 직급은 천양지차지만 한음은 글 잘 짓는 노계와 계급장 떼고 친교를 맺었다. 경상도 순방길을 수행하면서 둘은 가까워졌고 남도 특산품 감이야기, 전란 중 타계한 모친과 아내, 홀아버지에 대한 사친의 정을 이야기했다.
한음이 보낸 홍시를 받고 중국 오나라 육적의 회귤 고사를 떠올리며 지은 시조가 조홍시가 4수다. '일찍 익어 맛있는 홍시를 가슴에 품고 가도 반길 부모가 계시지 않음을 서러워한다'는 효친 시조로 노계가 지은 60여수 시조 중 으뜸으로 꼽는다. '반중 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 아니라도 품은 즉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을 새 글로 설워하노라'
한음은 부산포에 들러 눈물짓는다. 1590년 일본 승려사신 겐소를 배웅할 때 왔었던, 흥청거리고 풍성했던 항구가 전란 7년을 거치면서 인적 끊어져 유령마을로 변해버린 걸 보고 국정 책임자로서의 울분을 그의 서계에 적었다. 10개월 동안 삼남(충청·전라·경상도)에 머물면서 영남 좌·우도를 합쳐 감영을 대구에 설치하고 관찰사를 이제현 후손 경주부윤 이시발로 교체하여 전란 피해 복구에 만전을 다하도록 조처하고 올라가 영의정이 된다.
◆사제곡
노계는 거제 일운면의 조라포 만호(수군관리)로 근무하던 중 순회어사 최현에게 군장비 관리소홀로 문책을 받아 10년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최현은 구미 선산 출신으로 학봉 김성일의 조카사위이며 한글가사 용사음과 명월음을 지은 인물이다. 고향에 돌아온 노계는 10여년 전부터 친교를 맺어 온 한음을 찾아 천리길을 떠난다. 한음은 북인세력과 갈등으로 정계에 물러나 경기도 양평 본가에 머물고 있었다.
영천에서 한강 두물머리까지는 열흘 이상 걸리는 거리로 당시 교통사정으로 보아 대단한 시도다. 그의 빈객이 되어 수개월간 용진에 머물면서 사제의 아름다운 풍경을, 한음을 화자로 하여 노래한 가사가 '사제곡(莎堤曲)'이다.
'늙고 병든 몸, 쉬도록 허락해 주시어/ 한강 동쪽 땅 경관을 찾아 물따라 산따라/ 용진강 거슬러 올라 사제마을에 들어서니/ 천하제일 강산이 임자 없이 버려져 있구나/ 내 평생 꿈을 꾸어 오라고 해서 그랬는지/ 이곳 물빛 산색들이 낯설지 않구나/ 무정한 산수도 유정천리로구나'
용진강은 북한강을 일컫고 긴 제방이 있어 사제라 했다. 아름답기로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오백년 한음 종가가 양평 양서에 있고 다산 정약용의 본가와 삼십리 이웃으로 다산 가문과 한음 가문은 친교가 깊다.
한음 7세손 이기양과 정약용은 친밀한 사이로 당색도 같은 남인이고 신유박해에 함께 연루되어 다산은 강진으로 이배되고, 이기양은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되어 배소에서 세상을 떠나자 정약용은 비문을 짓는데 이 비문이 명문장이다. 천주교 성인으로 서품된 이총억이 이기양의 장남이다.
◆누항사
한음은 노계에게 농촌의 삶이 어떠한지 물어보았다. 당대의 최고 경세가로 임란 후 농촌생활을 진솔하게 듣고 싶었던 것이다. 노계는 자신의 빈한한 삶을 가사 '누항사(陋巷詞)'로 화답했다. 향촌에 묻혀 사는 궁핍한 생활을 소박한 마음으로 노래하면서 안빈낙도의 뜻을 밝혔다. 오랫동안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었던 작품으로 수많은 청춘이 누항사를 암송하며 우리글의 아름다움을 익혔고 노계가사를 대표하고 있다.
'나의 가난 싫다고 여겨 손짓한다고 물러가랴/ 남의 부귀 부러워한들 손을 친다고 나아오랴/ 인간 세상 어느 일이 운명 밖에 생겼겠느냐/ 가난 속에 원망하지 않는 것이 어렵다고 하지마는/ 내 생활 이러하니 서러운 뜻 없도다'
묘한 어감을 지닌 누항이라는 단어, '누'는 누추하다는 의미이고 '항'은 사라진 글자로 오늘날 작은 거리나 골목이다. 중국에서 도로명으로 쓰고 있는데 후베이 우한의 먹자골목이 호부항이다. 누항사는 '누추한 시골마을에서 부르는 노래'라 하겠다. 용진에서 노계와 정을 나누고 얼마 뒤 한음은 병을 얻어 53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노계는 한음을 그리워하며 권주가·상사곡을 짓고 정구와 장현광 등과 교유하면서 82세까지 장수한다.
박인로가 76세 때 쓴 '노계가'. 노계집에 수록돼 있다. 노계는 정철·윤선도와 더불어 조선시대 3대 가사 시인으로 평가받지만 이들의 삶은 매우 달랐다. 정철은 서인의 거두로 고관대작을 지냈고 윤선도는 대대로 내려오는 세족으로 해남의 거부였고 노계는 빈한한 집안의 영남선비였다. 어려움 속에서 주옥같은 글을 남겨 가사문학을 빛냈고 거기에는 기호의 한음집안과 영남의 노계집안 간 아름다운 만남이 있었다. |
◆노계집 영양역증
다시 80년의 세월이 흘러 1690년에 한음 증손자 이윤문이 영천군수가 되어 영천고을로 내려온다. 셋째 아들의 손자인 이윤문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증조부 한음과 노계와의 전설 같은 친교 이야기를 떠올리며 노계 손자 박진선을 만난다. 아직 사라지지 않고 전승되어 온 사제곡을 비롯하여 한음과 관련된 노계가사를 듣고서 그해 3월 영천고을 주관으로 노계가사 목판본을 만들며 다음과 같이 경위를 밝히고 있다.
'후손이 용진의 산수 사이에서 선조의 발자취를 뵈오매 서글픈 마음이 넘치어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린지라, 세대가 이미 멀어져 이 노래가 후세로 전하지 못하고 없어질까 두려워 경오년에 사제곡을 편각하여 널리 전하기로 하였다.'
목판본을 만드는 일은 비용도 많이 들고 어려운 일이어서 당시 고을관청, 서원, 큰 사찰, 유력 문중만이 할 수 있었다. 사제곡을 편각하면서 한음과 관련된 시가인 누항사, 상사곡, 권주가 등 가사 4편과 조홍시가 등 시조 4장을 함께 만들었는데 이것이 노계가집 경오본으로 가장 오래된 고간본(古刊本)이다. 경오본이 만들어진 뒤 110년이 지난 1800년에 노계집 초간본이 간행되어 노계가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경오본은 '영양역증(永陽歷贈)'이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는데 영양은 영천의 옛 이름이다. 이윤문은 아들이 1728년 영조조 무신란에 연루되어 집안이 화를 당하게 된다. 그런 연유인지 모르겠지만 영양역증은 이윤문 집안이 아닌 구미 인동장씨 여헌 후손집안의 소장 고문서에서 최근에 발견되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영남 산림(山林)으로 남인을 이끌던 여헌이 인조의 삼전도 굴욕 소식을 듣고 절망하여 포항 죽장으로 은거해 버리자 노계는 1637년 76세의 노구를 이끌고 83세 여헌을 찾아가 친교를 다진다. 이때 지은 단가가 입암가 29수이다. 이런 인연으로 노계집 경오본을 여헌문중으로 선물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2005년 유형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에 위치한 노계문학관 전경. |
◆노계 문학관
노계가사에 한자 어투가 많다고 타박하는 이들이 더러 있는데 이는 서양 고전작품에 라틴어가 많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글은 역사 속에 살아있으므로 시대 언어로 읽어야 되고 어려우면 오늘날 글로 찰지도록 바꾸면 된다.
노계는 정철·윤선도와 더불어 조선시대 3대 가사 시인으로 평가받지만 이들의 삶은 매우 달랐다. 정철은 서인의 거두로 고관대작을 지냈고 윤선도는 대대로 내려오는 세족으로 해남의 거부였고 노계는 빈한한 집안의 영남선비였다. 어려움 속에서 주옥같은 글을 남겨 가사문학을 빛냈고 거기에는 기호의 한음집안과 영남의 노계집안 간 아름다운 만남이 있었다.
최근 영천시에서 고향인 북안 도천리에 노계문학관을 건립하여 한음과 관련된 이야기와 가사자료를 전시해 놓았으며 노계를 배향한 도계서원을 정비하여 그를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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