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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 주군 오다노부나가를 배신해 죽게한 "아케치 미쓰히데"의 딸]호소카와 가라샤

Bawoo 2021. 3. 1. 22:19

호소카와 가라샤
細川ガラシャ
(1563년 ~ 1600년 8월 25일, 음력 7월 17일)

1. 개요

져야 할 때를 알아야 비로소 세상의 꽃도 꽃이 되고 사람도 사람이 된다.
(散りぬべき 時知りてこそ 世の中の 花も花なれ 人も人なれ) - 가라샤의 사세구


일본 전국시대 인물

아케치 미츠히데의 셋째 딸로 원래 이름은 타마코(玉子). 후에 가톨릭에 귀의해 가라샤(ガラシャ[1])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당시 일본에서는 현재와 달리 혼인 후에도 부인은 원래 성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크리스천 중에서는 서양식으로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경우가 있어 가라샤도 남편의 성을 따랐다. 그래서 아케치 타마코, 호소카와 가라샤로 구별 지어 부르기도 한다.

전국시대의 소문난 미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뭔가 범접할 수 없는 기품까지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가라샤가 어린 시절, 미츠히데와 친한 호소카와 후지타카가 가라샤를 보고 너무 귀여워서 "아저씨한테 한 번 안길래?" 했더니 고개를 젓길래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안아주실 거면 손을 옷자락으로 덮고서 안아주세요"라고 대답했다 한다. 이 때 미츠히데가 구두로 약속했던 허혼이 진짜가 되어 후지타카의 아들 호소카와 타다오키에게 시집가게 된다.

혼노지의 변 후에 미츠히데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패해 죽자, 가라샤는 주군을 배신한 반역자의 딸이 된다.[2]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에 심취하기로도 유명했기 때문에 가문의 존속을 위해서는 가라샤와 연을 끊고 추방해야 된다는 의견이 가문 내에서 나왔다. 그러나 타다오키는 가라샤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그러지 않고 가라샤를 유폐하는 정도에 그쳤다.[3] 전국 시대에 금슬이 좋은 부부의 대표적인 예로 꼽히는 것이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경우인데, 타다오키와 가라샤도 그에 뒤치지 않을 만큼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사이 타다오키는 애첩을 두고 있었고, 돌아와 이를 접한 가랴샤는 남편과의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더불어 유폐되어 있던 동안 불안하고 힘들던 가라샤는 시녀들의 영향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곧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에 온 포르투갈 상인들이 인신매매를 하거나 선교사들의 꾀임에 넘어간 다이묘들이 사찰을 멋대로 부수고 승려들을 내쫓는 등의 물의를 빚게 되었다. 이로 인해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결국 가톨릭이 금지되고 선교사들과 상인들은 추방된다. 타다오키도 신자들을 박대하기 시작했는데, 가라샤는 신자 중에서도 특히 규범이 될 만큼 가톨릭에 빠져 있었다. 때문에 타다오키는 가라샤의 시녀들의 코를 자르거나 유곽에 팔아치우기도 했다고 한다.

가라샤에 대한 타다오키의 집착을 보여주는 일화가 여럿 전해진다. 가라샤가 정원에 나와 대야에 손을 씻고 있는데 정원사와 잠시 눈이 마주쳤다. 이를 본 타다오키는 매우 분노하며 뛰어가서 당장 정원사를 베어 죽였다. 가라샤는 타다오키의 집착에 이미 진절머리가 난 상태여서 대야에 피가 튀어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타다오키가 급흥분하며 " 같은 여자다"라고 하자, "악마의 마누라로는 뱀이 제격이겠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잘못을 저지른 가신을 가라샤가 감싸자, 타다오키가 더 화를 내며 아예 그 가신을 죽여버린 일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타다오키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닌 모양. 그리고 가라샤는 이렇게 죽은 이들의 머리를 모아 장식하였다고 한다. 결국 타다오키와 시아버지인 호소카와 후지타카까지 사과해서 이 머리들을 간신히 치웠다고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타다오키가 동군에 가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시다 미츠나리는 병사를 보내 가라샤를 인질로 잡았다. 가라샤는 남편에게 해가 되는 것을 우려해서 자살을 하려 했는데, 자살을 금지하는 가톨릭 교리 때문에 자살을 할 수는 없었으므로 가신인 오가사와라 히데키요에게 자신을 죽이고 주거에 불을 붙이라고 명했다. 시신은 이탈리아인 선교사가 수습해 염을 했다고 전해진다. 타다오키는 이 사건으로 격분했는데, 가라샤가 죽었음에도 아들인 타다타카의 정실은 살아서 도망치자 아들에게 이혼을 명했고 아들이 그것을 거부하자 아들을 폐적했다.[4] 이 사건으로 이시다 미츠나리가 놀라서 인질 정책을 관뒀다. 또한 이것이 원인이 되어서 타다오키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자 누구보다도 먼저 동군에 가담했다.

가라샤의 시녀가 후에 증언한 바에 의하면, 가라샤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군대를 보내 잡으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피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시녀가 다시 그녀에게 와보니 이미 그녀는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타다타카의 정실과 가라샤의 딸, 타다오키의 여동생 등은 도망치는데 성공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만 남편에게 해가 되는 것을 우려해서 도망치지 않고 자살한다는 건 이해하기 힘들다는 지적도 있다. 재미있게도 가라샤를 죽인 오가사와라 히데키요의 두 자녀도 키리시탄이었고 예수회 선교사들과 긴밀한 관계였다는 점에서 히데키요가 예수회 선교사들의 지시로 도피하려는 그녀를 살해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온다. 하지만 아래 항목에서 알 수 있듯이 가라샤의 오페라가 나온 것은 20세기가 되어서이다.[5] 또한 상술했듯이 부부 생활이 하도 피폐했기에 그냥 인질극을 계기로 평생 쌓인 스트레스가 폭발해 자살한 것 아니냐는 추측도 존재한다.

참고로 가라샤의 다른 아들들 중 타다토시는 오사카 전투 당시 아버지를 따라 막부군에 참가하고 오키아키는 도요토미 군에 참가한다.

2. 작품 속 가라샤

2.1. 문학

2.2. 오페라

  • 수도자 출신[6] 작곡가 빈첸조 치마티(Vincenzo Cimatti : 1879년 ~ 1965년)가 가라샤를 주제로 하여 오페라를 작곡했다. 제목은 문자 그대로 호소카와 가라샤(Hosokawa Grazia).

[출처]가라샤 - 나무위키2021.02.28.
호소카와 가라샤 細川ガラシャ (1563년 ~ 1600년 8월 25일, 음력 7월 17일) 1. 개요2. 작품 속 가라샤 2.1. 문학2.2. 오페라2.3. 드라마2.4. 영화3. 서브컬쳐 속 가라샤 3.1. 전국무쌍 시리즈3.2. 전국란스의...
namu.wiki/w/가라샤 나무위키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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