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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멸망의 단초가 된 전투]아드리아노플 전투[Battle of Adrianople]

Bawoo 2021. 3. 20. 22:44

아드리아노플 전투[Battle of Adrianople]

 

378년에 트라키아 아드리아노플에서 서고트 족과 동로마 제국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 376년에 서고트 족 대부분은 동로마 황제 발렌스와 맹약을 맺고 로마의 영토 안으로 이주하였으나, 로마 관리의 압정으로 반란을 일으켜 트라키아를 침략하였다. 이 전투에서 발렌스 황제가 전사하였고, 뒤를 이은 테오도시우스 일세는 친(親)고트 정책을 취하여 서고트 인의 트라키아 정주를 인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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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유럽 터키에 있는 에디르네에서 벌어진 전투(378. 8. 9).Adrianople은 Hadrianopolis라고도 씀.

동고트족 등의 도움을 받은 프리티게른의 서고트족은 이 전투에서 발렌스 황제가 이끄는 로마군을 패배시켰다. 이 전투는 이민족의 기병들이 로마의 보병을 이겼다는 점에 의의가 있으며 게르만족의 로마 침략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 전투에서 고트족은 로마군을 전멸시켰는데 어떤 통계에 따르면 로마군 4만 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발렌스 황제는 조카이자 공동황제인 그라티아누스의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전사했다. 382년 발렌스의 후계자인 동로마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고트족과 화해를 하고 그들에게 식량을 보조해주는 대신 제국 방어에 힘을 빌리기로 했다. 이후 이민족의 로마 침입은 거의 이와 같은 형태로 이루어졌다.[다음백과]

 

The Battle of Adrianople (9 August 378), sometimes known as the Battle of Hadrianopolis, was fought between an Eastern Roman army led by the Eastern Roman Emperor Valens and Gothic rebels (largely Thervings as well as Greutungs, non-Gothic Alans, and various local rebels) led by Fritigern. The battle took place in the vicinity of Adrianople, in the Roman province of Thracia (modern Edirne in European Turkey). It ended with an overwhelming victory for the Goths and the death of Emperor Valens.[8]

Part of the Gothic War (376–382), the battle is often considered the start of the process which led to the fall of the Western Roman Empire in the 5th century.

A detailed contemporary account of the lead-up to the battle from the Roman perspective was written by Ammianus Marcellinus and forms the culminating point at the end of his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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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 속 급속 행군으로 지친 군대가 있다. 지휘관은 무능할 뿐 아니라 자만에 빠졌다. 제 아무리 장비와 보급이 적보다 우위라도 이런 군대가 전투에서 이길 수 있을까. 백전백패하기 십상이다. 1,638년 전인 378년8월9일 아드리아노플 전투가 딱 이랬다. ‘무적 로마군’의 신화도 이 전투로 깨졌다. 이전까지 로마군은 한번 지더라도 끝내는 승리를 쟁취하는 상승의 군대였으나 이 전투 이후 게르만족을 비롯한 온갖 부족이 덤벼들었다.

‘로마 멸망의 서곡’이라는 아드리아노플 전투. 동로마지역을 통치하는 공동 황제 발렌스는 지원군을 기다리자는 조언을 묵살하고 성급하게 나섰다.* 2만 5,000 여 병력이** 동틀 무렵 전장을 향해 떠났다. 보병 3분의 2, 나머지는 기병으로 편성된 로마군은 7시간을 급속행군해 아드리아노플에 도착한 시각이 오후 두 시 무렵. 로마군은 쉴 틈도 없이 전투를 벌였다. 조금이라도 쉬고 싶었으나 서고트족의 기만 전술과 유인술에 말려들었던 탓이다.

높은 지형에 마차를 원형으로 둘러싼 서고트 지역을 향해 로마군을 기병대를 좌우 양쪽으로 출격시켰다. 중앙은 중장보병대가 맡아 진군하던 순간, 보급품을 구하러 진지를 비웠던 서고트 기병대가 나타났다. 높은 지형에서 달려나가는 서고트 기병의 가속도를 로마 기병들은 당할 수 없었다.*** 기병들이 흩어진 뒤부터 전투의 양상이 학살로 변했다. 중앙에 고립된 로마군 보병대는 서고트족 기병대에 양쪽으로 포위당하고 원형 진지에서 고트족 보병이 쏟아져 나왔다.

운신할 공간도 없이 포위 당한 로마군은 일방적으로 당했다. 황제 발렌스도 여기서 죽었다. 살아남은 로마군은 날이 어두워지고야 전장을 겨우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로마군 사상 최대의 참패였다. 적어도 3분의 2가 속절없이 당했다. 퇴각한 일부가 진지로 후퇴해 농성작전으로 서고트족의 추가 진격을 막아냈으나 로마 전역은 충격에 빠졌다. 더욱 큰 문제는 한 번 지면 두 번 이겨 상대를 굴복시켰던 이전의 로마군과 달리 응징할 힘이 없었다는 점. 로마는 이때부터 쇠락의 길을 걸었다.

로마 제국에게 건국 이래 최악의 패배를 안긴 아드리아노플 전투의 근인(近因)은 세금과 차별. 원래 고틀란트(오늘날 스웨덴) 지역에 살다가 중부 유럽에 내려왔던 고트족은 훈족의 침입으로 근거지를 잃자 로마에 애걸복걸해 삶의 터전을 얻었다. 로마 황제 발렌스는 서고트족의 무장을 해제하는 조건으로 트라기야 지방 정착을 허용했으나 고트족은 무장을 결코 풀지 않았다. 부패한 로마 관리들을 매수해 무장을 유지했다.

유목민에게는 생명과 같았던 무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서고트족은 아내와 딸을 로마의 관리들에게 바쳤다. 러시아 태생의 비잔티움 전문 역사학자인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1902~1986)의 비잔틴 제국사의 한 대목. ‘고트족에게 매수 당한 로마 관리 중에는 야만족 미녀에 빠진 자도 있었고 값진 의상이나 장식이 있는 담요 같은 선물에 매수 당한 자도 있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저택을 노예로 채우거나 농장을 가축으로 가득 채우는 일에만 관심을 뒀다.(258쪽)’

뇌물보다 더한 착취도 일어났다. 트라기야 지방의 로마 최고위직 관리들은 서고트족이 농사에 서툴다는 점을 악용했다. 경작지는 내주되 경작 방법은 전혀 알려주지 않아 아사 위기에 직면한 서고트족에게 비싸게 곡물을 팔아 거액을 챙겼다. 돈으로 바꿀 수 있는 패물과 직물, 가구를 처분한 서고트족은 선정(善政)을 갈구했으나 부패한 로마 관리들은 오히려 세금을 올렸다. 결국 악정과 지방관리들의 부패는 봉기를 불렀다. 아드리아노플 전투의 패배 이후 끊임없이 ‘야만족의 침입’에 시달리던 서로마는 476년 멸망하고 말았다.

물론 서고트족에게 참패를 당하기 전부터 전조는 있었다. ‘법의 정신’의 저자로 유명한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몽테스키외의 1734년 저술 ‘로마의 성공, 로마제국의 실패’에 따르면 로마는 강력한 적수인 페르시아를 감당하기도 버거운 판에 ‘파국적인 이중(二重) 전선’의 형성을 방치해 몰락을 자초했다. 북쪽 국경이 흔들린 것이다. 색슨족과 에이레인들의 로마령 브리타니아(영국) 침공, 라인 강변과 네케르 강변에서의 알레라미족(게르만의 일족)과 격렬한 전투, 도나우 강 유역에서 사르마트족·콰디족과 격전들이 로마제국을 괴롭혔다. 몽테스키외는 북쪽 국경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 같은 충돌이 대위기의 전조 증세로 봤다.

아드리아노플의 전투 결과는 서고트족에 자치권을 안긴 데 그치지 않고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낳았다. 마침 훈족의 습격에 한파까지 겹친 상황. 로마군이 예전의 로마군이 아니라고 생각한 게르만족은 떼지어 얼어붙은 라인강을 건넜다. 게르만으로 득실거리게 된 서로마제국은 결국 멸망했다. 전투 하나가 고대를 무너뜨리고 중세의 문을 연 셈이다. 종교도 영향을 받았다. 공동황제 발렌스가 다스리던 동로마지역에서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아리우스파*****의 입지가 더욱 좁아졌다. 발렌스는 아리우스파를 지지한 마지막 로마 황제였기 때문이다.

아드리아노플 전투를 통해 확인된 로마의 쇠약은 정치와 경제 질서의 변화를 낳았다. 고트족은 이 전투 이후에도 수차례 로마와 충돌한 끝에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로마제국은 ‘야만족’들과 협정을 맺어 제국 내에서의 자치권을 내줬다. 세금도 면제하고 높은 급료를 주고 로마제국의 동맹자로 끌어들었다. 게르만족의 병력을 끌어들인 로마제국의 군사력은 겉으로는 강해지는 것처럼 보였으나 속으로는 곪았다.[출처 : https://www.sedaily.com/NewsView/1L02OPDLEW]

 

[정보]책-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 고대 ~ 근대 시리즈

저자 빌 포셋 | 역자 김정혜 | 다산초당 | 202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