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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족에게 3개 군단을 잃은 장군]바루스[ Publius Quintilius Varus]

Bawoo 2021. 3. 27. 22:41

바루스 [Publius Quintilius Varus] 

(기원전 46년 ~ 기원후 9년, near Kalkriese, Germany)

Varus receiving German leaders

 

로마의 장군. 토이토부르거발트 전투에서 게르만 부족들에게 패해 3레기온(군단)을 잃음으로써 로마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으며 로마는 라인 강 너머 영토확장에 실패했다.[Roman general and politician under the first Roman emperor Augustus. Varus is generally remembered for having lost three Roman legions when ambushed by Germanic tribes led by Arminius in the Battle of the Teutoburg Forest, whereupon he took his own life.]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섹스투스 퀸틸리우스 바루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BC 42년 필리피 전투 이후 자살했다. 그러나 바루스 자신은 결혼을 통해 아우구스투스와 인척관계를 맺고 정치적 영향력을 얻어 BC 13년에 콘술(집정관)이 되었으며, 아프리카 프로콘술(속주 총독:BC 7경~6)과 시리아 레가투스(속주 부총독)를 지내면서 막대한 부를 쌓았다. BC 4년 헤로데 1세 대왕이 죽은 후 유대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군대를 이끌고 가 반란세력을 분쇄하고 로마의 직접통치를 재건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를 라인 강 동쪽의 로마 변경으로 파견했는데, 그는 당시 새로 정복한 지방에 로마식 사법제도를 도입할 목적으로 민간관리와 군대지휘관을 겸해 활동했다. 그러나 게르만계 케루스키 부족의 뛰어난 지도자였던 군주 아르미니우스는 로마 통치에서 벗어날 계획을 세우고 이내 세력있는 게르만 부족장들과 은밀한 결의를 모았다. 

AD 9년 9월 먼 곳에 있던 부족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거짓 정보에 속은 바루스는 봉기진압을 위해 군단을 이끌고 토이토부르거발트로 들어갔다. 게르만족은 이곳에 숨어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모든 상황이 그들에게 유리했다. 좁은 숲길은 로마군의 대오를 흐트러지게 했으며 심한 비로 땅이 질척거렸다. 전투는 3일간 계속되어 로마 군대가 전멸했고[Due to the shame and the ill luck thought created by the Roman defeat, the XVII, XVIII and XIX legions never again appeared in the Roman Army's order of battle.] 바루스는 자기 칼 위에 엎어져 자살했다.

Lithography showing Varus committing suicide during Teutoburg battle

전하는 말에 따르면 나이든 아우구스투스는 이 비보를 듣고 슬피 울면서 "바루스야, 바루스야, 내 군대를 돌려다오"!"(Quintili Vare, legiones redde!)라고 울부짖었다는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이 남아있다. 이 전투 결과 로마는 라인 강 동부의 영토를 모두 잃게 되었다. <브리타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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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이토부르크 전투 - 나무위키

2021.03.21.

유구르타 전쟁 누미디아 미트리다테스 전쟁 폰토스 왕국 갈리아 전쟁 갈리아 카르헤 전투 파르티아 로마 제국 토이토부르크 전투 게르만 족 다키아 전쟁 다키아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고트족 카탈라우눔 전투...

namu.wiki/w/토이토부르크 전투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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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 over the  Teutoburg Forest

토이토부르크 전투

로마 제국게르만족이 벌인 전투. 토이토부르크 숲의 전투라고 한다.

본 명칭은 Teutoburg, 즉 테우토부르그. 라틴어로는 Teutoburgiensis saltus(테우토부르그 숲)이라 하며, 로마 역사가들은 이 전투를 '바루스의 재앙(Clades Variana)이라고 불렀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이 참패하면서 게르만족은 로마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된다.
현대 독일어로는 'Varusschlacht'(바루스 전투)라는 의외로 중립적인 명칭을 쓴다. 물론 'Schlacht im Teutoburger Wald'도 통용되고 과거에는 'Hermannsschlacht'라는 명칭도 썼지만  현재 독일은 주변국 문제에 꽤 민감하기 때문에(...) 고대사에 대해서조차 조심스럽게 다가서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1. 전투 배경
원래 로마군은 게르만족 정복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게르마니아의 지나칠 정도로 울창한 숲과 게르만족의 호전성 때문에 큰 피해가 날 것을 우려해 게르마니아 침공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아마저도 로마 제국의 일부로 만들려 했으며 기원전 9년 로마의 2대 황제가 될 그의 양자들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게르마니쿠스의 아버지)를 보내 게르마니아를 정벌하라고 명령한다.

도중에 드루수스가 죽어 10년간 전쟁은 잠시 중단되었고 이후 티베리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의 활약으로 서기 5년 즈음에는 게르마니아의 대부분은 로마군의 영향 하에 들어가게 되지만 여전히 게르마니아는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아가 안정되었다고 판단, 행정관료인 푸블리우스 퀸틸리우스 바루스를 총독으로 임명하는 실책을 저지른다.[1] 이때 아르미니우스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아르미니우스는 로마에서 오랫동안 볼모생활을 하면서 기사 계급까지 오를 정도로 잘 적응했고, 로마군에 오랫동안 종군한 경력 덕분에 누가 봐도 친로마 게르만 귀족이었다. 바루스는 아르미니우스에 대한 신임이 대단하였는데, 아르미니우스의 능력, 로마에 대한 충성도, 그리고 그가 바루스가 맡은 지역을 훤히 알고 있는 지역 부족의 유력 귀족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겉보기와 달리 아르미니우스는 로마에 대해 저항의지로 가득했고, 바루스 몰래 반로마 조직을 구성하려 애썼다.

일설에는 바루스 휘하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던 아르미니우스였지만 바루스는 그를 지휘관 같은 중책보다 도시 치안관 정도로 생각해 한편에서는 홀대하여 아르미니우스가 소외감을 느껴왔던 것도 부분적 원인이라는 말도 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아르미니우스를 확실히 신임하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실권을 다 주기에는 약간 경계해야 할 필요도 있지 않나 하는 식으로 약간 견제차원에서 중책을 안 맡긴 것 아닌가 했다는 말이다(현대에도 재능이 뛰어나고 확실히 검증도 되었는데 선배니 파벌이니 승진순서니 해서 제대로 대우 안해주는 부당한 인사조치가 많다는걸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를 까맣게 모르고 있던 바루스는 어느날 로마에 복속된 한 작은 마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아르미니우스는 바루스에게 이런 것을 가만히 둬선 안된다며 바루스가 직접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르미니우스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던 바루스는 친히 휘하의 모든 군단병력을 이끌고 출진하기로 결정한다. 작은 마을의 반란을 진압하겠다고 자기 휘하의 모든 병력을 동원하는 희한한 결정을 왜 내렸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바루스는 이들을 데리고 출동했다. 이날밤 사촌인 투스넬다와의 결혼 문제로 사이가 나빠졌던 장인 세게스테스가 아르미니우스의 함정이며, 그가 사실 반로마 게르만 연합의 수괴라는 사실까지 폭로하며 말린다. 그러나 바루스는 아르미니우스를 크게 신뢰하고 있어서 이를 모함이라고 생각하며 듣지 않았다.
 
2. 함정이다
주변 지리에 어두운 바루스는 아르미니우스에게 길 안내를 맡겼고, 아르미니우스는 로마군을 게르만족이 잔뜩 매복하고 있던 토이토부르크 숲 속으로 안내한다.

아르미니우스는 토이토부르크 숲에 로마군을 안내한 후 자신의 부하들을 데리고 지원을 오겠다며 로마군을 이탈했고 잠시 후 자신의 부하들로 로마군을 공격했다. 20km에 달하는 긴 행군대열을 이루고 있던 로마군은 갑작스러운 게르만족의 기습에 노출되었다. 게르만족은 우선 투창을 계속 던져 로마군에 피해를 주고 충분히 약해졌다고 생각하자 곧 내려와 로마군과 전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무장과 훈련이 잘 된 로마군은 기습을 당한 상황에서도 게르만족의 공격을 물리친다. 그 뒤 숙영지를 짓고 그날 밤을 보낸다. 그러나 로마군은 이미 적진의 한복판에 들어온 상태였고 앞으로 틀림없이 게르만족이 숨어 우글거리고 있을 빽빽한 숲을 계속해서 뚫고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만일 로마군의 지휘관이 뛰어난 장군이거나 혹은 지역 지리를 잘 알고 있었다면 이런 난관을 타개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바루스는 쭉 행정관료로만 일했고, 지리에도 밝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로마군이 주둔지로 돌아가기 위해 출발하자 또다시 게르만족이 공격을 시작했다. 로마군은 다시 이 공격을 물리쳤으나 울창한 숲이 로마군이 효과적인 전술을 펼칠 수 없게 만들어 오직 병사 개개인의 전투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전투를 거듭할 때마다 로마군의 사상자는 점점 늘어갔다. 이 전투에서도 로마군이 입은 피해가 꽤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군은 오직 주둔지로 돌아갈 생각밖에 없어 조급해 했다. 이러한 조급함에 로마군은 아르미니우스가 예상한 길로만 행군했고, 덕분에 아르미니우스는 지속적으로 로마군을 괴롭힐 수 있었다. 숲을 빠져나와 탁 트인 언덕으로 오른 로마군이 다시 다른 숲으로 진입할 때를 즈음하여 비가 내렸다. 습기에 취약한 활과 화살이 무력화되었고, 갑옷도 무거워져 병사들의 전투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다시 밤이 찾아왔지만 바루스는 이번에는 숙영지를 마련하는 대신 야간행군을 강행해 빠르게 숲을 돌파하기로 계획한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가 이미 숲에서 빠져나갈 언덕 사이의 외길을 커다란 담벼락을 쌓아 봉쇄하고 양쪽 언덕에 병력을 숨겨두고 있었다. 조급함에 사로잡힌 바루스는 그대로 아르미니우스의 함정에 병력을 밀어넣었고, 그 순간 후방에서 나타난 게르만족 병력이 로마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언덕 사이에 갇힌 로마군을 향해 돌무더기를 쏟아부었다. 잠도 자지 못한 채 피로에 절은 로마군은 처절하게 저항하며 담벼락을 뚫어보려 애를 썼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혼란에 빠진 로마군 장교들은 혼란을 수습하긴 커녕 자신들도 공포에 사로잡혔다. 부사령관인 기병대장 누모니우스 발라는 기병대를 이끌고 도주하다 붙잡혀 살해당했고, 바루스의 부관들도 땅바닥에 칼을 꽂고 그 위에 엎어지며 자결한다. 지휘부가 붕괴되자 남은 로마군도 모조리 죽거나 생포당했다. 이 전투 끝에 17, 18, 19 세개 군단 병력이 전멸해 버린다.

로마군 주력이 모조리 사라지자 게르만족은 무주공산이 된 로마군 주둔지를 급습하기 시작했다. 주둔지에 남은 로마군은 급히 집결해 2개 군단 정도의 병력을 편성해 몇주에 걸쳐 방어전을 벌였으나 결국 주둔지를 버리고 라인강 근처로 달아나 간신히 한숨을 돌리게 된다.

 

3. 참패의 결말

이 전투는 로마군 최악의 패전이라 부를 만했다. 총사령관 바루스가 전사(자살)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3개 군단, 2만의 로마군이 말 그대로 지상에서 사라져 버렸고,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병력공백으로 인해 20년에 걸쳐서 점령하고 다스리던 라인강 동쪽의 영토를 모두 잃는다.


노란색 부분이 토이토부르크 전투로 상실한 영역

게르마니아 원정의 최종목표지였던 엘베강까지 1/2 정도 이른 영토가 한순간에 다 날아간 것이었다. 게르만 영토를 상실하며 갈리아 지방은 물론 로마까지도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자 아우구스투스는 급히 티베리우스를 보내 게르만족을 막게 했다.

그리고 6년 후, 아우구스투스가 죽고 티베리우스가 황제가 오른 해에 게르마니쿠스의 로마군이 군사행동을 개시한다. 로마군은 수많은 전공을 세우나 이미 로마와 게르만족이 공존했던 과거로 돌아가긴 힘들었다. 로마는 게르만족이 3개 군단을 비참하게 전멸시킨 것에 대한 복수심이 있었고 게르만족은 그들대로 게르마니쿠스가 마르시족이 축제를 하며 잠이 든 틈을 타서 그들을 모두 죽이고 수많은 게르만족의 마을을 파괴한 것에 대한 적개심이 있었다.

게르마니쿠스는 그 뒤 이다스타비소 전투에서 아르미니우스의 게르만 군대를 격파해 어느정도 설욕하였다.[2]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영토확장은 이미 불가능하여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로마군을 라인강 서쪽으로 모두 철수시킨 뒤 게르마니쿠스를 로마로 소환함으로써 군사활동을 완전히 중지한다. 이렇게 티베리우스 이후 로마가 멸망할 때까지 로마와 게르만의 북방 국경은 라인 강이 되었다.

4. 뒷이야기

당시 이미 노년이었던 아우구스투스는 이 전투로 큰 충격을 받아 "바루스, 내 군단을 돌려다오!!!"라고 절규하면서 벽에 스스로의 머리를 찧으며 자해를 할 정도로 자책했고 죽을 때도 그거 내 잘못 아니지??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According to the biographer Suetonius, upon hearing the news, Augustus tore his clothes, refused to cut his hair for months and, for years afterwards, was heard, upon occasion, to moan, "Quinctilius Varus, give me back my Legions!" (Quintili Vare, legiones redde!).[24] Roman historians referred to the battle as the clades Variana ("Varian disaster").]
 
그리고 아르미니우스는 후에 게르만족간 권력다툼으로 암살당했다(…). 히스토리 채널에서는 아르미니우스가 숲길을 가다 숨어있던 반대파 자객의 단검에 찔려 죽는 장면이 나온다.

게르마니쿠스는 군사활동 중 토이토부르크 숲에 가서 로마군의 유해를 수습하였다. 이때 로마 역사가인 타키투스도 그들과 동행하였는데, 타키투스는 로마군의 해골이 나무에 수도없이 박혀있었는데 이는 사로잡은 로마군을 산채로 나무에 꽂아 죽인 것으로 보인다고 서술했다. 그리고 수많은 제단도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는 게르만족이 로마군들을 제물로 제사의식을 치르기 위해 설치한 것이었다. 여기서 제물로 쓰인 로마군은 로마군에서도 특히 지위가 높은 장교나 혹은 1대대 출신 병사들뿐이었는데, 이는 아르미니우스가 로마군 병사들이 누군지까지 훤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때 게르마니쿠스는 이 토이토부르크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을 대동하고 있었는데(이들은 게르만족이 몸값을 받고 풀어준 아주 극소수의 행운아들이었다) 이들은 이 지역을 안내하면서 어디서 바루스와 장교들이 자살했는지, 어디서 그들의 군단기가 쓰러졌는지, 아르미니우스가 어떻게 군단기를 모욕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장교들을 짐승처럼 제물로 바쳤는지를 상세히 묘사했다고 하였다. <엔하위키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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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minius

아르미니우스[Arminius]

(18/17 BC – 21 AD)

 

Hermannsdenkmal memorial

 

No known portrait image of Arminius exists from his life. This likeness was created by artist and historian George S. Stuart from physical descriptions mentioned in historical records.

게르만의 영웅으로, 독일에서는 게르만의 해방자라고 하며 그를 존경한다. 아르미니우스(Arminius)는 로마식으로 표기된 이름이며, 언어에 따라 아르민(Armin)또는 헤르만(Hermann)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This Roman sculpture of a young man is sometimes identified as Arminius

 
게르만족의 한 부류인 체루스키족의 족장인 세기메루스의 아들로 어렸을 때 로마군에 입대하여 로마 시민권을 얻어 하급귀족으로 기사계급인 에퀴타스에 올랐으며 그 때에 들어서 로마군의 전술을 터득하고 또한 로마군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했으며 이후 게르마니아로 돌아오게 된다. 그 자신은 게르만족의 왕국을 세워 왕이 될 야심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그가 게르만족의 왕이 될것을 두려워한 친척들과 대립하였다.
 

로마가 게르마니아에 지배권을 행사하여 라인강을 넘어 엘베강 연안까지 속주화하려고 하였고 아우구스투스푸블리우스 퀸틸리우스 바루스를 총독으로 파견하여 바루스가 게르마니아의 형편을 모르고 자신이 먼저 부임했던 속주에서 했던것처럼 금의 생산량이 크게 부족한 게르만 부족에게서 세금을 금으로만 거두고 로마의 자민족 우월주의 등을 내세워 게르만인의 감정과 성격을 무시하고 게르마니아를 무리하게 로마식으로 성급하게 속주화를 하려고 하고 아르미니우스 자신은 바루스에게 군사적 능력을 포함한 전체적인 능력을 인정받고 많이 신임받기는 했으나 바루스가 아르미니우스를 도시의 치안관 정도로만 생각하고 지휘관 같은 중책은 주지않는 등 한편으로 아르미니우스를 홀대하여 바루스에게 소외감을 느끼자, 당초의 로마와 협력하여 그 힘을 빌려 자신이 게르만족의 왕이 될 계획을 수정하여 기원전 9년에 자신을 따르는 게르만족의 연합을 구성하여 봉기하여 바루스를 속여서 전장으로 불러내어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게르마니아로 원정을 온 로마군을 격파하였다.

Varusschlacht, Otto Albert Koch (1909)


14년에는 티베리우스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의 대규모 공격을 받아 타격을 입었다. 참고로 이 전투는 옆에 숲이 있기는 했으나 개활지에서 벌어졌다.

16년에는 3차례 로마군을 상대하였으나 양편 모두 큰 손실을 입었기 때문에 결국 로마군은 게르마니아에서 철수하게 된다. 로마군이 철수한 이후 마르코마니족의 왕인 마로코두스와 내전을 벌여 그를 퇴각시키지만 보헤미아를 탈취하는 데에는 실패하게 된다.

그 자신은 21년에 그가 게르만족의 왕이 될것을 두려워 한 자신의 친척들에 의해 죽었는데 독살이라는 설과 자객의 칼에 찔려죽었다는 설이 있다.

Arminius says goodbye to Thusnelda, Johannes Gehrts (1884)

아내 투스넬다는 이후 로마에 포로로 잡혔고 로마에서 그의 아들 투멜리쿠스를 낳았다. <엔하위키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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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스넬다(Thusnelda)

(c. 10 BC – unknown)

Thusnelda statue in Loggia dei Lanzi, Florence.


게르만족의 해방자라 불리는 아르미니우스의 아내이자 그의 숙부인 세게스테스의 딸로 아르미니우스가

 그녀와 결혼할 것을 청했다.[Germanic Cheruscan noblewoman who was captured by the Roman general Germanicus during his invasion of Germania. She was the wife of Arminius. Tacitus and Strabo cite her capture as evidence of both the firmness and restraint of Roman arms.]

그러나 투스넬다의 아버지가 친로마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반대를 했었고 이 때문에 아르미니우스에게 납치당하여 결혼을 하였다고 한다.

아르미니우스가 봉기하여 로마와의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 15년에 로마군의 공격으로 포로로 붙잡히면서 게르마니쿠스의 개선 행진에 따라 포로로 끌려가면서 전리품으로 전시되었다.

Thusnelda at the Triumph of Germanicus, by Karl von Piloty, 1873

그녀는 아버지가 로마에 충성했기 때문에 아버지를 따라서 로마로 망명하게 되고 포로 생활을 하면서 아들인 투멜리쿠스를 낳았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피렌체의 시뇨리야 광장의 로지아 데이 란찌에서 그녀를 소재로 후대에 만든 조각상이 있으며, 1873년에 칼 폰 필로티라는 사람이 그린 게르마니쿠스의 개선식에 끌려나온 투스넬다라는 작품이 있다.
 

Thusnelda at the Triumph of Germanicus, by Karl von Piloty, 1873

서기 17년 케루스키족과 그 동맹군들에게 승리를 거둔 게르마니쿠스는 로마에서 화려한 개선식을 하였다.이때 로마 군대가 사로잡은 아르미니우스의 아내 투스넬다가 다른 포로들과 함께 개선식에 끌려 나왔고 이 그림이 그 장면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에서 투스넬다는 마치 여왕처럼 당당하고 위엄있는 모습이며 로마인들은 황제조차도 우울해 보이며주변의 인물들은 음울하면서도 퇴폐적인 분위기로 그려 놓았다. 그림의 이러한 표현 방식은 독일이 프랑스와의 전쟁(1870)에서 승리한 후 국가적인 자긍심이 한껏 높아진 빌헬름 황제 시대를 반영한 듯 하다.

 

이 그림을 그린 Karl Thedor von Piloty는 독일 뮌헨에서 태어나 뮌헨에서 수학했으며 후에 뮌헨 아카데미 교수와 학장을 역임했고 역사화를 많이 그린 화가로 알려져 있다.

 

[Thusnelda was the daughter of the pro-Roman Cheruscan prince Segestes. In 9 AD, Arminius, Thusnelda's future husband, who had been given by his father to the Romans as a child and raised as a Roman military commander serving under Publius Quinctilius Varus, switched sides to the Germans, and led a coalition of Germanic tribes that defeated the legions of Varus at the Battle of the Teutoburg Forest. The conflict between the Roman Empire and the Germanic tribes continued after the Battle of the Teutoburg Forest, and Arminius abducted and impregnated Thusnelda circa 14 AD, likely as a result of a dispute with her pro-Roman father.[1]

In May 15 AD, Thusnelda was captured by Germanicus, who commanded the invasion of Germania. She was pregnant and staying with her father, who had seized her from Arminius at some point. It was Segestes who delivered her to Germanicus, after the latter saved the former by driving off Arminius' forces, who had besieged Segestes.[2] Arminius grieved his loss of Thusnelda deeply and did not marry again.[3] According to Tacitus, Arminius was "driven to frenzy" by the loss of his wife.[4][5]

During her captivity, Thusnelda gave birth to her and Arminius' only child, Thumelicus. At the Battle of the Weser River, Arminius engaged in a famous disputation with his brother Flavus, who was still serving in the Roman army. Flavus informed Arminius that Thusnelda was being well-treated — as, he claimed, was typical of Rome. On May 26, 17 AD, Thusnelda and her son Thumelicus were displayed as prized trophies of the triumph granted to Germanicus. During the triumphal parade, her father was forced to watch from the stands.[6] Contemporary historians evince discomfort with her display as evidence of Roman victory in Germania, as Arminius had resisted capture.[7]

Thusnelda's son, Thumelicus, was trained at the gladiator school in Ravenna and is believed to have died in a gladiator show at a young age. Tacitus wrote that he would report on Thumelicus' fate "at the proper time" — i.e., when he discussed the year in question in his chronicle.[8] The main gap in the text of the Annals is for 30 and 31 AD, so it could be that Thumelicus died then, aged 15 or 16.

Details of Thusnelda's life after the triumph of 17 AD and her date of death are unkno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