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歷史) 마당 ♣/- 프랑스

[이슬람 군대의 알프스 북쪽 지역 진출을 최종적으로 저지한 인물]카를 마르텔(Charles Martel)

Bawoo 2021. 4. 30. 22:19

Charles Martel

카롤루스 마르텔루스(라틴어: Carolus Martellus, 독일어: Karl Martell 카를 마르텔[*], 프랑스어: Charles Martel 샤를 마르텔[*], 영어: Charles Martel 찰스 마텔[*], 스페인어: Carlos Martel 카를로스 마리텔[*], 680년[1] 8월 23일 – 741년 10월 22일)은 카롤링거 왕조 출신 프랑크 왕국의 군주이자 정치, 군사 지도자로, 718년 이후 프랑크 왕국의 동쪽 지방인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로 사실상 아우스트라시아네우스트리아부르군트 3개로 나뉜 프랑크 왕국 전체를 지배했으며 프랑크 공작이자 프린스의 호칭을 획득하였다. 사라센의 침략을 격퇴하여 신망을 얻었으며, 로마 교회는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는 데 공이 컸던 카를루스 마르텔의 아들인 피핀의 왕위를 승인하게 된다. 그의 게르만족 정벌은 프랑크 제국의 영역을 확장시켰고, 나중에 카롤링거 왕조의 왕 카를 대제의 영토 확장의 기초가 되었다. 그의 별칭 마리텔은 "망치"라는 뜻이다.

714년 아버지 피핀 2세가 죽은 뒤, 궁재직 계승권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뒤 717년 아우스트라시아 분국의 궁재직을 차지하였다. 프랑크 왕국의 궁재직을 석권한 뒤 갈리아의 패권을 장악하였으며, 외부 원정으로는 바이에른과 알레마니아를 공략하여 프랑크 왕국의 영향권 하에 두었고, 아키텐을 속국화하였으며, 프리지아로까지 진출했다. 작센 족과의 전투에서는 패배하였지만 732년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사라센 제국의 이슬람 군대와 베르베르인 군대를 크게 격퇴하였다. 737년부터는 공석이던 프랑크 왕국의 국왕을 대신하여 왕국을 통치하기도 했다. 자신을 도운 이복 형제 힐데브란트를 비롯한 부하 관료들에게 공작백작기사 등의 칭호를 부여해주었는데 일각에서는 이를 봉건 제도의 시발점으로 보기도 한다. 그의 사후 프랑크 왕국의 궁재직은 카를로만 1세와 피핀 3세가 나누어 차지하였다.

그는 메로빙거 왕조의 왕들을 축출하지 않고 프랑크의 왕자이자 공작(Duke and Prince of the Franks)이라는 직함으로 활동했다. 737년부터는 궐석인 국왕의 직무를 대신하였다.

732년~737년의 이슬람 군대와의 전쟁에서 투르-푸아티에에서 이슬람 군대를 최종 격퇴하여, 이슬람 군사를 알프스 산맥과 피레네를 넘지 못하게 했다. 종교적으로는 성 보니파시오의 보호자이자 후견자였으며, 교황청은 한때 그에게 왕관을 제의하였지만 거절하였다. 732년 이슬람 교도와 치른 투르 전투 때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교회의 땅을 징발하여 나누어줌으로서 교회와 서로 틈이 생겼다.[2] 그는 군사물자 및 식량 조달과 가신들에게 봉토 제공 등 목적으로 교회, 수도원, 수녀원의 토지와 재산을 수시로 압수하여 군비와 봉토로 조달하였다.

목차

------------------------------------------------------------------------------------------------

 

The Saracen Army outside Paris, 730–32, in an early-nineteenth-century depiction by Julius Schnorr von Carolsfeld.

 

프랑크 왕국의 전체 영토를 재통일해 다스렸으며, 732년 푸아티에에서 사라센의 침입을 격퇴했다. 그의 별칭인 마르텔은 '망치'라는 뜻을 갖고 있다. 결단력에 야망과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던 그는 자신의 세력을 다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인물이었다. 639년 다고베르트 1세가 죽은 뒤로 프랑크 왕국에는 능력 있는 왕이 없었다. 이후의 메로빙거 왕조의 왕들은 하나같이 게으르고 나태하며 안락과 사치만을 좋아했다. 프랑크 왕국의 서부지역 네우스트리아와 동부지역 아우스트라시아에서의 실질적인 통치권은 궁재에게 있었다. 궁재들은 왕궁 내의 살림을 맡을 뿐만 아니라 프랑크 왕국의 정치·사회·경제 문제를 담당했다. 카를은 719년까지 궁재로서 프랑크 왕국을 단독 통치했다. 아우스트라시아와 네우스트리아에 평화가 깃들고 질서가 잡혔다. 그는 당시까지도 메로빙거 왕조가 명목상으로 통치하던 왕국을 둘로 나누어 자신의 적자인 피핀과 카를만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는 명목상이었을 망정 메로빙거 왕조의 통치를 유지시켰으며 왕위를 차지해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일은 하지 않았다.

 

개요

프랑크 왕국의 전체 영토를 재통일해 다스렸으며, 732년 푸아티에에서 사라센의 침입을 격퇴했다.

그의 별칭인 마르텔은 '망치'라는 뜻을 갖고 있다. 결단력에 야망과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던 그는 자신의 세력을 다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인물이었다.

 

배경

639년 다고베르트 1세가 죽은 뒤로 프랑크 왕국에는 능력 있는 왕이 없었다.

이후의 메로빙거 왕조의 왕들은 하나같이 게으르고 나태하며 안락과 사치만을 좋아했다. 프랑크 왕국의 서부지역 네우스트리아와 동부지역 아우스트라시아에서의 실질적인 통치권은 궁재에게 있었다. 궁재들은 왕궁 내의 살림을 맡을 뿐만 아니라 프랑크 왕국의 정치·사회·경제 문제를 담당했다. 카를 마르텔의 아버지로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였던 헤르스탈(에리스탈)의 피핀은 페론 근처의 테르트리(테스트리) 전투에서 687년 네우스트리아를 패배시키고 정복·병합했다.

피핀의 적자는 모두 일찍 죽었으므로 714년 피핀이 죽었을 때 그의 계승자가 된 사람들은 그의 세 손자들이었고 그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는 피핀의 아내 플레크트루데가 정권을 맡았다. 그러나 피핀의 서자로서 젊고 강력하며 결단력 있던 카를 마르텔은 아버지의 유언을 전적으로 무시했으며 플레크트루데와 권력 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피핀의 유언이 프랑크 왕국 전역에 알려지자 왕국 곳곳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네우스트리아의 궁재 라겐프리트에게 조종당하고 있던 왕 힐페리히 2세는 홀란트에 있는 프리지아인의 왕이자 프랑크의 적인 라트보트와 연합해 카를을 제거하려 했다. 플레크트루데는 카를을 투옥시켰으나 도망쳐나와 군사를 모아서 라겐프리트와 힐페리히 2세를 패배시키고 적대적이던 네우스트리아를 정복했다. 그의 성공으로 플레크트루데와 일부 아우스트라시아인들의 저항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으며 젊은 카를의 세력과 정신력에 두려움을 느낀 그들은 카를에게 항복했다.

카를은 719년까지 궁재로서 프랑크 왕국을 단독 통치했다. 아우스트라시아와 네우스트리아에 평화가 깃들고 질서가 잡혔다. 그러나 라인 강 및 도나우 강 지역과 작센 원정은 수차례 이루어졌다.

푸아티에 전투

그뒤 카를은 루아르 강을 건너서 외드(오도)가 공작으로 있던 아키텐으로 진군했다.

한때 카를의 동맹자였던 외드는 사라센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사라센인은 아프리카에서 스페인으로 건너온(711) 무어인으로 스페인을 정복하고 732년에는 갈리아 지방까지 위협하고 있었다. 외드의 요청을 받은 사라센인의 왕 아브드 알 라만은 군대를 이끌고 보르도로 진격해 교회를 불태우고 약탈했다. 그들은 보르도에서 아키텐을 가로질러 푸아티에로 왔으나 푸아티에 시 외곽에서 카를에게 격퇴당했다.

733년 카를은 부르고뉴에 항복을 강요했고 734년에는 프리지아인을 정복했다. 735년 외드가 죽었다는 소식를 듣자마자 군대를 이끌고 루아르 강을 건너가 보르도와 그 주변지역을 자신의 세력권 아래 두었다. 736년에는 부르고뉴 정복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싸웠으며 730년대에는 사라센인과 여러 차례 교전을 벌였다. 그의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카를 마르텔이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교회의 토지와 재산을 빼앗은 일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는 교회를 위해 열심히 일했으며 몇몇 대수도원, 특히 파리 외곽에 있는 생드니 대수도원에는 매우 가치 있는 선물을 하기도 했다. 그는 또 잉글랜드인 선교사들에게 보호와 원조를 베풀었다. 그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로는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에서 선교활동을 한 성 빌리브로르도와 독일 이교도들을 교화시킨 성 보니파시오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카를은 롬바르드족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던(739) 교황 그레고리오 3세의 군사원조 요청을 거절했다.

롬바르드족은 프랑크가 사라센인과 싸울 때 프랑크를 지지했으므로 카를이 그들을 적대시하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을 것이었다. 교황에게서 값진 선물들, 심지어 성 베드로 무덤의 열쇠까지 받았음에도 카를은 형식적인 답례만을 했을 뿐 원조를 약속해주지 않았다. 이때부터 카를의 건강은 나빠지기 시작했고 그는 741년 키에르지쉬루아즈에 있는 저택으로 물러나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죽기 전 그는 당시까지도 메로빙거 왕조가 명목상으로 통치하던 왕국을 둘로 나누어 자신의 적자인 피핀과 카를만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는 명목상이었을 망정 메로빙거 왕조의 통치를 유지시켰으며 왕위를 차지해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일은 하지 않았다. [다음백과]

-------------------------------------------------------------------

카롤루스 마르텔 - 나무위키2021.04.03.

궁재 718년 ~ 741년 아우스트리아 궁재 715년 ~ 741년 1. 개요2. 생애 1. 개요[편집] 카를 마르텔, 샤를 마르텔, 찰스 마르텔 등으로도 불린다. 생전에 실제 사용된 이름은 고프랑크어 Carl Martel이며, 라틴어...

namu.wiki/w/카롤루스 마르텔    나무위키

-----------------------------------------------------------------

Charles Martel

Charles Martel (c. 688, 680 – 22 October 741) was a Frankish statesman and military leader who, as Duke and Prince of the Franks and Mayor of the Palace, was de facto ruler of Francia from 718 until his death.Fouracre, Paul (2000) The A...[영어 위키백과]

 

 

[정보] 책:다가오는 유럽의 위기와 지정학

저자 조지 프리드먼 | 역자 홍지수 | 김앤김북스 | 2020.1.10.

『다가오는 유럽의 위기와 지정학』은 유럽이 앞으로 직면하게 될 분열과 위기에 관한 책이다. 그 위기가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어느 지점에서 위기가 폭발하게 될지를 예측하는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