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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기 내각총리대신(44대)]시데하라 기주로(幣原 喜重郎)

Bawoo 2021. 9. 17. 22:05

시데하라 기주로(일본어: 幣原 喜重郎, 1872년 8월 11일 ~ 1951년 3월 10일)는 일본의 외교관이자 정치가로, 1945년 10월 9일부터 1946년 5월 22일까지 제44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그 이전에는 외무 차관, 주미 대사, 가토 내각· 하마구치 내각의 외무 대신을 지냈다.

그는 외무 대신 시절, 일본 군부에 저항해 미국과 영국에 대한 협조, 중국에 대한 내정 불간섭 등의 외교 방침을 지향하였고, 전 후에는 쇼와 천황에게 조각 명령을 받아 미군의 점령 하에 시데하라 내각을 조직하였다. 부인 마사코(雅子)와는 런던 총영사관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혼인하였다. 장인은 미쓰비시 재벌의 창립자 이와사키 야타로이다.(In 1903 he married Masako Iwasaki, who came from the family that founded the Mitsubishi zaibatsu or group of companies)[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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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회의(1921) 이후 만주사변(1931) 초기까지 2차례 외무상이 되어 영국·미국과의 협조를 기조로 한 외교정책을 전개했다. 종전 후 미군점령하에서 총리(1945~46)를 역임했다.

1895년에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했으며 이듬해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여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1915년에 외무차관, 1919년에 주미대사가 되었고 워싱턴 회의에서는 전권대사로 활약했다. 1924년 6월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 내각의 외무상이 된 이래 제1차 와카쓰키[若槻] 내각에 유임해 1927년 4월까지 외교의 중책을 맡았다. 그 사이 소련과의 국교회복(1925), 미국과의 배일이민 문제 조정에 노력했는데, 가장 힘을 기울인 것은 대혁명기에 있던 중국과의 국교였다.

시데하라는 일본의 수출시장으로 중국을 확보한다는 목적 아래 중국 시장의 안정과 통일을 해치는 군사공작과 내정간섭을 피하고자 했다. 또 미국·영국 등 열강과 제휴를 강화하여 중국의 반제국주의 운동에 공동대처했다. 시데하라의 기본방침은 중국 공산당의 운동은 탄압하고 장제스[蔣介石]를 중심으로 하는 국민당우파의 중국 통일을 원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민당이 바라는 불평등조약의 철폐(치외법권 폐지와 관세자주권의 획득)에 대하여 일본은 구미제국만큼 관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중국의 배일운동은 더욱 격렬해졌다.

대중국 강경외교를 주장하는 육군, 입헌정우회, 여론의 압력으로 와카쓰키 내각은 4월에 퇴진하고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내각으로 교체되었다. 시데하라는 1929년 7월 하마구치[濱口] 내각의 출범과 동시에 다시 외무상으로 취임했으며 이듬해 4월 군령부의 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런던 해군군축조약을 성립시켜 '연약외교'라는 비난을 받았다. 한편 시데하라의 소극적인 대몽골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관동군은 1931년 9월에 류탸오거우 사건[柳條溝事件]을 일으켜 만주의 군사점령을 개시했다. 시데하라의 불확대방침에도 불구하고 관동군이 사건을 점차 확대시키자 그는 이에 책임을 지고 12월 사퇴했다.

그는 귀족원 의원으로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일본의 대외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다가 패전 직후 미군의 점령하에서 덴노로부터 조각 명령을 받아 1945년 10월 시데하라 내각을 탄생시켰다. 1946년 1월 덴노의 '인간선언'과 3월의 주권재민·전쟁포기라는 획기적인 헌법개정요강의 작성 등 일련의 조치는 형식적이기는 하나 덴노제의 존속을 강력하게 희망한 시데하라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4월 내각 총사퇴 후 일본진보당 총재가 되고 제1차 요시다 내각[吉田內閣]의 국무대신으로 입각했다. 이후 민주자유당의 최고고문이 되었고, 1949년 중의원 의장에 취임했다.

1951년 3월 10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조인을 앞두고 사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합리적·경제적 진출을 기조로 한 그의 외교정책은 군사침략적 색채가 강한 일본의 전통적 외교정책 속에서 독자적인 면모를 보인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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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n Kijūrō Shidehara (幣原 喜重郎, Shidehara Kijūrō, 13 September 1872 – 10 March 1951) was a prominent pre–World War II Japanese diplomat and Prime Minister of Japan from 1945 to 1946. He was a leading proponent of pacifism in Japan before and after World War II, and was also the last Japanese Prime Minister who was a member of the kazoku. His wife, Masako, was the fourth daughter of Iwasaki Yatarō, founder ofthe Mitsubishi zaib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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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책-중국과 일본:저자 에즈라 보걸 | 역자 김규태 | 까치 | 2021.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