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감] 중국 현대사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필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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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에서는 마오쩌둥의 자리를 위협할 정도로 권력의 핵으로 떠오르다 살해당한 린뱌오, 마오쩌둥의 여인으로 문화대혁명의 한가운데 있다가 내쳐진 장칭, 중국 국가인 「의용군행진곡」의 주인공 동북의용군, 6·25전쟁에서 드러난 북한과 중국의 미묘한 관계, 신중국 건국 이전에 활약한 외교관 구웨이쥔을 다룬다. 저자의 풍부한 지식과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한 단순명료한 문체의 글은 여러 인물의 생각과 감정을 깔끔하면서도 세밀하게 서술한다. 자연스레 독자는 신중국의 한복판으로 뛰어들게 된다.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총 5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마오쩌둥의 자리를 위협할 정도로 권력의 핵으로 떠오르다 살해당한 린뱌오(林彪), 마오쩌둥의 여인으로 문화대혁명의 한가운데 있다가 내쳐진 장칭(江靑), 중국 국가인 「의용군행진곡」의 주인공 동북의용군, 6·25전쟁에서 드러난 북한과 중국의 미묘한 관계, 신중국 건국 이전에 활약한 외교관 구웨이쥔(顧維鈞)을 다룬다.
저자의 풍부한 지식과 방대한 자료 덕분에 이야기의 깊이감은 상당하다. 단순명료한 문체의 글은 여러 인물의 생각과 감정을 깔끔하면서도 세밀하게 서술한다. 자연스레 독자는 신중국의 한복판으로 뛰어들게 된다.
10권으로 기획된 『중국인 이야기』는 앞으로도 한 인물의 일대기나 역사적 사건 이면의 일화를 여러 진귀한 사진과 단순명료한 문체로 다룰 것이다.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진다.
전쟁귀신의 비극, 린뱌오
“린뱌오의 전용기는 몽골 국경 상공에서 자취를 감췄다. 새벽 2시 30분, 고비 사막의 분지에서 거대한 폭음이 울렸다.”_13쪽
1972년, 중국공산당은 주석 마오쩌둥을 암살하려던 부주석 린뱌오가 그 계획이 실패하자 공군기로 도망치다가 몽골에서 추락사했다고 발표한다. ‘린뱌오집단 반역행위’라 불리는 이 사건은 2인자로서 성공했고 2인자였기에 추락한 ‘전쟁귀신 린뱌오’에 대한 것이다.
린뱌오는 신중국 초기 당·정·군을 장악하며 권력의 핵으로 떠올랐고, 마오쩌둥이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권력에서 축출하면서 포스트 마오로 급부상한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여인이자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4인방 가운데 한 명인 장칭을 비판하다가 마오쩌둥에게 버림받고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껴 공군기로 도망치다가 몽골의 고비 사막 상공에서 격추당한다.
“조용한 시골에 내려가 현장(縣長)이나 하고 싶다”고 할 정도로 권력욕이 없던 린뱌오가 어떻게 인구 10억의 대국 중국에서 권력의 2인자가 되었는지 그 과정을 이야기한다. 당시 신중국의 복잡한 정치관계와 그 한가운데 있던 린뱌오에 대해 밀도 있으면서도 섬세한 문체로 풀어낸다. 이야기는 빠르게 흐르면서 린뱌오의 추락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혁명과 여인, 장칭
“노먼 베쑨은 한 여학생에 대한 찬사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이듬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 여학생이 중국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여인이 되는 것도 보지 못했다.”_112쪽
1976년,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4인방이 체포되었다. 이 중에는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도 있었다. 남편이 사망한 지 20여 일 후였다.
장칭은 란핑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한 연극배우였다. 그녀는 연극을 관람하던 마오쩌둥의 눈에 띄어 그와 결혼하면서 권력의 핵심으로 진출했고 이후 문화대혁명을 주도한다. 책은 혁명의 시대를 살았던 장칭의 일대기를 다룬다.
연극배우 시절 라이벌이었던 왕잉, 저우언라이의 수양딸이자 린뱌오의 아내로서 중앙희극원 원장이었던 쑨웨이스와의 암투는 혁명 만화가 딩충, 여류화가 위펑, 『대지』의 작가 펄 벅뿐만 아니라 군 간부, 비서, 하다못해 청소부에 이르는 여러 인물의 구술기록과 함께 서술되며 그녀의 삶을 충실히 재구성한다.
적의 포화에 맞서 전진 또 전진, 동북의용군
“우리는 의용군이다. 항일을 하려면 우리와 함께 가자.”_194쪽
1931년, 일본이 중국의 동북지방을 침략하면서 중일전쟁이 시작됐다. 동북지방에서는 농민, 동북군, 토비, 노동자, 학생 등이 모여 항일운동을 한다. 바로 ‘동북의용군’이다.
동북의용군은 정규군이 아니었다. 명칭도 구국군, 의용군, 자위군, 홍창회, 대도회 등 제각각이었다. 이를 통틀어 동북의용군이라고 하는데 전쟁 발발 1년 후 체제가 갖춰지면서 동북지방 항일운동의 중심이 된다.
책에서는 1931년부터 1939년까지 동북의용군을 이끌었던 덩톄메이, 마오커슈, 자오퉁의 이야기를 다룬다. 경찰이었다가 동북의용군 사령관이 된 덩톄메이와 동북대학 우등생으로 졸업 후 의용군에 가담하여 크게 활약한 마오커슈, 그리고 동북의용군을 국민항일군으로 재출범시키지만 중국공산당에 의해 죽은 자오퉁의 이야기가 쉼 없이 이어진다. 자오퉁 사망 후 동북의용군은 중국공산당 주도의 동북항일연군으로 대체되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현재 중국 국가인 「의용군행진곡」으로 노래되고 있다.
우리는 머리가 검다, 북한과 중국
“우정이 첫 번째고 오해는 그다음이다.”_261쪽
2016년 6월 23일 경주에서 열린 ‘묻혀진 6·25전쟁’ 국제학술세미나에서 첸 지안 미국 코넬대학 교수는 “김정은 정권은 중국과 신뢰가 거의 없다”고 했다. 6·25전쟁에 참전한 중국은 북한과 혈맹이라는 두터운 신뢰를 유지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속내는 다르다.
공산주의 독자 노선을 추구한 중국은 소련과 미묘한 관계에 있었다. 김일성은 양자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고, 결과적으로 6·25전쟁에 중국이 참전하면서 중국과의 혈맹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종전 후 중국이 북한에 지원군을 2년간 주둔시키면서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극적으로 화해하긴 했지만 이후 김일성과 중국은 특정 사안에 따라 좋고 나쁘기를 반복했다.
책에서는 김일성과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한 중국공산당 주요 간부들의 반복되는 갈등과 화해를, 주요 사건과 이들이 주고받은 말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그동안 한국에는 피상적으로만 알려진 이들의 관계는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흥미진진하다.
외교 달인, 구웨이쥔
“50여 년간 공직에 있으면서 일관된 원칙을 견지했다. 상부의 지시를 받거나 건의를 할 때마다 국가에 무슨 이익이 있을지를 스스로 고민했다.”_359쪽
1911년, 청나라가 망했다. 중국 여기저기에서 군벌이 난립했고, 중국대륙을 장악하기 위한 정치인들의 투쟁은 치열했다. 극도로 혼란스러운 시대, 어떤 정권이 들어서건 외교만큼은 확실하게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구웨이쥔이다.
27세에 미국대사로 벼락출세한 구웨이쥔은 외교 분야에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프랑스대사, 영국대사, 미국대사, 외교총장, 국무총리, 파리강화회의 중국대표, 국제사법재판소 판사 등 중요한 자리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책에서는 이 드라마틱한 인물의 일대기를 그를 정계로 이끈 첫째 아내의 장인 탕샤오이, 대부호의 딸이자 둘째 아내인 황후이란, 중국 최초의 현대식 기업인 옌신허우의 손녀이자 넷째 아내인 옌유윈과 함께 다룬다. 워낙 드라마틱한 인물이다 보니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청나라 말기 중화민국 초기(청말민초)라는 이 격동의 시대가 온몸으로 느껴질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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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권에서는 중국 ‘대국굴기’의 핵심인 군사력의 원천이 담겨 있다. 총 5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제1장은 중일전쟁 당시 임시수도였던 충칭의 풍경, 제2장은 타이완과 중국의 갈등, 제3장은 중국 4대가족이라 불리는 천씨 가문의 천궈푸, 천리푸 형제 이야기, 제4장은 중국 건국 세대의 스승이라 불리는 5대원로(五大元老) 그리고 마지막 제5장은 중국의 철도, 자동차, 항공모함, 로켓, 핵 기술 개발 과정이 담겨 있다. 이 다섯 개의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공통분모는 ‘인재’다.
중국은 오랫동안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 속에서 살아왔다.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자했다. 인재를 키우고 핵무기를 개발한 것이다. 최근 북한의 핵문제를 이해하려면 중국의 핵무기 개발사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중국은 핵무기를 개발해 미국과의 데탕트 분위기를 이끌어냈으며 미국의 영향력을 축소시켜 아시아의 맹호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많은 전문가가 50여 년 전 중국과 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열을 올린다고 진단한다. 우리가 북한의 핵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중국의 핵무기 개발사를 알아야만 하는 이유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출판사서평
“고개를 들어라.
내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면 그때는 고개를 숙여라.”
마오쩌둥이 극비리에 중앙서기처 확대회의를 소집했다.
펑더화이와 함께 첸싼창과 과학원 부원장 리쓰광(李四光)을
대동하고 나타나 입을 열었다. “원자탄이 과연 필요한지를
토의하자. 나는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먼저 남을 공격할 일은 없다. 우리를 무시하고
공격하면 우리는 방어하고 반격해야 한다.
그것도 소극적이 아닌 적극적 방어라야 한다.
그러려면 어제보다 더 강해져야 한다. 비행기와 대포도
많아야 하지만 원자탄이 있어야 한다.
원자탄 끼고 있는 것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원자탄인지 뭔지 하는 괴물을 보유해야 한다.
이견이 있으면 말해라.” 다들 마오의 기세에 눌렸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_363~364쪽
동아시아가 뜨겁다. 후진타오(胡錦濤) 시대 대국굴기(大國?起)를 표방하며 군 현대화 작업에 박차를 가한 중국이 어느덧 항공모함을 두 척이나 보유하게 되었다. 미국은 급격한 중국의 군사적 팽창에 맞대응해 항모전단을 아시아로 전개시켰고, 이에 맞서 중국은 항모 킬러라 불리는 둥펑-21D 미사일을 열병식에서 공개했다. 21세기 이전만 해도 중국군의 이미지는 ‘인해전술’이었다. ‘질’보다는 ‘양’이었다. 그런 중국이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미국과 경쟁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인 이야기』 제6권에서는 중국 ‘대국굴기’의 핵심인 군사력의 원천이 담겨 있다. 총 5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제1장은 중일전쟁 당시 임시수도였던 충칭의 풍경, 제2장은 타이완과 중국의 갈등, 제3장은 중국 4대가족이라 불리는 천씨 가문의 천궈푸, 천리푸 형제 이야기, 제4장은 중국 건국 세대의 스승이라 불리는 5대원로(五大元老) 그리고 마지막 제5장은 중국의 철도, 자동차, 항공모함, 로켓, 핵 기술 개발 과정이 담겨 있다. 이 다섯 개의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공통분모는 ‘인재’다.
중국은 오랫동안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 속에서 살아왔다.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자했다. 인재를 키우고 핵무기를 개발한 것이다. 최근 북한의 핵문제를 이해하려면 중국의 핵무기 개발사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중국은 핵무기를 개발해 미국과의 데탕트 분위기를 이끌어냈으며 미국의 영향력을 축소시켜 아시아의 맹호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많은 전문가가 50여 년 전 중국과 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열을 올린다고 진단한다. 우리가 북한의 핵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중국의 핵무기 개발사를 알아야만 하는 이유다.
전쟁통에도 수업은 계속된다
중일전쟁 임시수도 충칭의 풍경
“충칭의 중앙대학은 전시 중국의 최고 학부였다. 1948년, 미국의 프린스턴대학이 세계 우수 대학 순위를 발표했다. 중앙대학이 도쿄대학을 누르고 아시아 1위를 차지했다.”_33쪽
전시 수도 충칭 시절의 국립중앙대학 임시교사. 체육시간도 난징 시절과 별 차이가 없었다._29쪽
1931년 9월 18일 밤, 일본군이 중국 동북(東北) 지역을 침략하면서 중일전쟁이 시작됐다. 중국은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 수도를 난징(南京)에서 충칭(重慶)으로 옮기며 장기전을 준비한다. 일본군의 공격은 거셌다. 특히 일본 폭격기의 공습이 위협적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임시 수도 충칭에는 5년간 폭탄 2만 1,593발이 쏟아졌다. 충칭 대공습이라 불리는 일본군의 무차별적 폭격에서 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놀라운 점은 이렇게 격렬한 전쟁통에서도 교육은 계속 이어졌다는 점이다. 난징의 국립 중앙대학(中央大學)을 수도 이전과 함께 충칭으로 옮겼다. 총장 뤄자룬(羅家倫)은 “교육에 필요한 물건들이다. 학생들이 뜯어보고 조립할 항공기 3대와 해부용 시신 24구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충칭으로 옮겨야 한다”며 교육자재까지 충칭으로 옮겼다. 학생들은 일본군 공습이 벌어지는 밤이면 횃불을 들어 시민을 격려했고, 공습이 잠잠해지면 학업에 매진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 중앙대학은 전쟁이 끝난 후인 1948년, 도쿄대학을 누르고 아시아 최고 대학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인재가 없으면 혁명도 없다
타이완 2ㆍ28사건
“수재들의 반역은 성공한 적이 없다. 말이나 계획만 그럴듯할 뿐 결국엔 실패로 끝난다. 이유는 간단하다. 경험과 용기가 부족하고 무장세력의 지지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_97쪽
타이완에서 철수하는 국민당군. 1946년 2월, 지룽(基隆). 1년 후, 2·28사건이 발생했다._89쪽
일제 패망 후 타이완에 장제스의 중화민국 군대가 주둔한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 중화민국의 타이완 통치 방식은 일제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이에 분노한 타이완인들이 들고일어났다. 2ㆍ28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시작은 사소한 일에서 비롯되었다. 정부 독점품인 담배를 노점에서 팔았다는 이유로 한 여인이 단속반에게 구타를 당했다. 이 여인은 단속반에게 잘못을 빌었지만 단속반은 이 여인을 피범벅으로 만들었다. 중화민국 정부에게 불만이었던 타이완인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2월 28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중국 본토에서 군대가 파견된다. 진압은 신속하고 무자비했다. 저항은 무기력했다. 구심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타이완인들은 경험과 용기가 부족했다. 무엇보다 타이완인을 제대로 이끌 수 있는 ‘인재’가 없었다. 한 달 만에 사태는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버려진 인재, 국민당 천씨 형제
선생과 왕, 쓰촨 류씨 형제
“형님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훌륭한 교육자였다.”_171쪽
1928년 5월, 국민당 제1군이 베이징 인근 바오딩(保定)을 점령하자 북양정부는 경악했다. 천리푸(왼쪽 둘째)도 북벌군 총사령부 특별당부 상무위원 자격으로 참전했다. 1928년 5월 28일, 바오딩._148쪽
제3장은 장제스의 최측근으로서 국민당이 중국 대륙을 장악하는 데 일조한 천씨 형제와 장제스와 대립했던 쓰촨의 류씨 형제 이야기다.
국민당 천씨 형제는 장(蔣)씨(장제스), 쿵(孔)씨(쿵샹시), 쑹(宋)씨(쑹쯔원)와 함께 중국 4대 가족이라 불렸던 천(陳)씨로 천궈푸ㆍ천리푸를 말한다. 이들은 장제스 권력의 핵심 인사로 그에게 자금을 대주면서 장제스가 군권을 장악하는 데 물불 가리지 않고 큰 힘을 보탠다. 그러나 국ㆍ공내전에서 패배하자 장제스는 천씨 형제를 속죄양으로 삼는다. 인재는 때론 이렇게 한순간에 버려지기도 한다.
쓰촨 류씨 형제란 쓰촨의 왕이라 불렸던 류원차이와 그의 동생 류원후이를 일컫는다. 이들은 공산당이 대륙을 장악하면서 권력을 잃었고, 사후 문화대혁명 때 악덕지주계급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훗날 류씨 형제, 특히 류원차이가 재평가된다. 그가 ‘교육’에 힘썼기 때문이다. 책읽기를 좋아한 그는 원차이중학(文彩中學)을 설립했다. 교사의 봉급은 일반 학교의 두 배였지만 학생들의 학비는 받지 않았다. 학교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았지만, 학생이 지방 관리의 마름에게 조롱당했다는 말에 마름을 잡아다 두들겨 패고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교복을 입게 했다.
신중국의 어른들
적당히 황당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만든 새로운 역사
“나는 한 명의 전사(戰士)일 뿐, 쓸모 있는 노병(老兵)이 소원이다.”_247쪽
옌안 5로는 한자리에 모일 기회가 거의 없었다. 화가 우산밍(吳山明)이 이들을 한자리에 모았다._226쪽
제4장은 신중국 건국세대 런비스와 건국세대의 스승인 옌안 5로에 대한 이야기다. 런비스는 한국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마오쩌둥,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주더와 함께 중공 5대 영수다. 그는 모범적인 정치가의 전형이었다. 아랫사람 잘 챙기고 윗사람으로서의 모범을 보였다. 중국인들은 이런 그를 평생 무거운 짐을 진 채 어려운 길만 걸었다 하여 ‘중국인의 낙타’라고 했다.
옌안 5로는 중공 5대 영수를 비롯한 건국세대의 스승들이다. 쉬터리(徐特立), 셰줴짜이(謝覺哉), 둥비우(董必武), 린보취(林伯渠), 우위장(吳玉章)이 이들로, 마오쩌둥의 대장정이 끝난 후 공산당 중앙위원회 소재지가 옌안이었는데 이 시절에 활약한 인물들이라 옌안 5로라는 이름이 붙었다.
부국강병을 위하여
중국의 본격적인 핵무기 개발사
“우리를 무시하고 공격하면 우리는 방어하고 반격해야 한다. 그것도 소극적이 아닌 적극적 방어라야 한다. 그러려면 어제보다 더 강해져야 한다.”_363쪽
총리 저우언라이에게 제1차 핵실험 성공을 보고하는 장아이핑(오른쪽). 1964년 10월 16일 오후, 신장 위구르 자치구 뤄부보._368쪽
제5장은 중국이 육성한 인재와 그 인재들이 키우고 개발한 중국의 근대산업 및 핵무기에 관한 이야기다. 중국은 항일전쟁 시기에도 인재를 육성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특히 중공 근거지 옌안은 거대한 교육장으로 변했는데, 마오쩌둥은 이곳에 간부교육부를 신설하기도 했다. 그렇게 교육받은 이들은 1949년 신중국 건국 후 각 부문으로 흩어져 산업 발전에 공을 세웠다.
마오쩌둥은 총으로 정권을 잡았지만 총은 싫어했다. 평생 총을 가까이 두지 않았다. 하지만 절세의 군사가답게 무기를 매우 중요시했다. 무기 개발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정권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단정했을 정도로 중국 역사상 무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가장 먼저, 그것도 가장 심각하게 인식했다.
그런 마오쩌둥에게 미사일은 없어선 안 될 핵심 무기였다. 공산당과 국민당은 일찍이 국공내전 때부터 우수한 이공계 학생들을 선발해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신중국 건국 후 그들을 모두 불러들여 산업 발전과 무기 개발에 앞장섰다. 그중 칼텍에서 미사일을 연구하던 첸쉐썬(錢學森)의 활약이 컸다. 미사일 기밀을 알고 있는 그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미국과 그를 데려오려는 중국은 힘든 줄다리기를 해야 했다.
중국의 핵무기 개발은 10년이 걸렸다. 1964년 10월 16일 오후 3시, 첫 번째 핵실험 성공에 환호하는 과학자들._360쪽
핵무기 역시 마오쩌둥의 지시로 만들어졌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고 소련이 1차 핵실험에 성공하자 그는 저우언라이를 불러 핵개발을 재촉했다. 소련에서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해 완전히 독자적으로 개발할 수밖에 없었다. 책임을 맡은 국방과학위원회 부주임 장아이핑(張愛萍)이 “감자 키우는 일이라면 모를까, 원자탄에 관해 아는 게 없다”며 난색을 표했을 정도다. 하지만 그간 육성한 중국 과학자들의 실력을 확인한 후 곧 10년 이내에 핵실험이 가능하다는 자신감을 표했다. 그의 말대로 중국은 1964년 핵실험에 성공했다.
이에 마오쩌둥의 반응이 매우 흥미롭다. “어차피 써먹지 못할 물건이다. 미국이나 소련이 우리가 핵보유국이라는 것만 인정하면 된다.” 지금까지 핵무기 개발을 독촉해온 그가 한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지만, 핵개발에 집착하는 북한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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